몬테크리스토 백작 비룡소 클래식 47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귀스타브 스탈 외 그림, 윤진 옮김 / 비룡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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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어릴 적에 읽고 또 읽던 책목록이 있었으니,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주인공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어야 할 결혼식날에 감옥에 갇히게 되고, 이유도 모른채 14년동안이나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뒤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고서,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 '배신자'들을 향해 치밀한 '복수극'을 펼치는 이야기가 너무도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물론, 복수라는 것이 마뜩치는 않다. 더구나 '사적인 감정'이 가득 담긴 복수는 우리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어릴 적에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주인공의 복수가 너무나도 멋져 보이기만 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줄거리를 하나하나 꼬집으며 '책소개'를 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싶다. 놀랍게도 60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이 원작의 문장은 고스란히 남긴채 줄거리만 대폭 추려낸 '축약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대략 2000여 쪽이 훌쩍 넘는 '원작'을 리뷰하며 줄거리를 꼬집을 기회는 많을 것이기에 후일을 약속하는 바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적인 복수는 허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에드몽 당테스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다. 단지 '편지'만 전해주었을 뿐인데 '사상범'으로 내몰려 '종신형'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는 나폴레옹 황제가 실각을 하고 엘바섬에 귀양을 갔을 때이고, 당시 프랑스는 공화국을 거쳐 황제정에서 다시 '왕정복고'를 실현한 어지러운 정국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편지'라는 것이 나폴레옹이 섬을 탈출할테니 지지자들은 결집하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당시 집권자였던 '왕정복고자'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암튼, 그런 복잡한 역사는 쏙 빼고 읽어도 에드몽 당테스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 전날에 감옥에 갇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그 뒤에 다들 알다시피, '극적인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몬테크리스토(그리스도의 섬)라는 섬에서 엄청난 보물을 찾게 되고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게 된다. 에드몽 당테스는 엄청난 부를 갖게 된 뒤에 스스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 칭하며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배신자'들을 찾아 나섰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복수는 댕겅댕겅 '피의 복수'를 저지르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동안 배신자들은 대단한 출세를 해서 제각각 '엄청난 부'와 '명예'와 '지위'를 한껏 드높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몬테크리스토는 그들에게 '파멸'이라는 선물을 아주 신중하게 준비했다. 그들이 피할 수 없는 파국을 맞이했을 때,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어렵게 쌓아올렸을 명예와 지위도 스스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복수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에게 닥친 불행은 너무나도 슬프고 끔찍한 만큼 그가 펼치는 '복수의 칼날'은 화려하고, 그가 내세운 '도덕적 명분'은 맑고 깨끗하기에 독자들은 누구라도 몬테크리스토의 복수를 응원하고 지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나 이렇게 '사적인 복수'가 자행이 되고, 이를 허용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되고 말 것인가? 복수는 끝없이 되풀이 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복수'가 실현되면, '또 하나의 복수'가 시작될 것이고, '한 쪽의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다른 쪽의 복수'는 서막이 열리게 된다. 이래서는 '복수'가 복수를 낳는 되풀이만 반복할 뿐이다. 더구나 '공적인 복수'가 아닌 '사적인 복수'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니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사법 절차'를 밟아 정당하게 신원을 회복하고 억울함을 풀어나가야만 했을까? 아쉽게도 이런 방법으로는 속시원한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다. 일단 '권력'을 차지한 세력들끼리 '봐주기식의 처분'만이 남발할 것이 분명하고, '억울한 이의 하소연' 따위는 애초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직 '법치주의'만을 내세워 정당한 절차를 거쳤음을 애써 강조하며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는 없다'는 엉터리(?) 판결로 종지부를 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라 국정이 혼란한 시국에는 '뻔한 결말'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수많은 독자들이 바라는 명쾌한 결말은 '도덕의 승리'다. 부도덕한 짓을 일삼은 무리는 마땅한 벌을 받고, 억울한 누명으로 쓰고 불행에 빠진 이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도덕적인 명분'에서 벗어나면 안 될 것이며, 복수를 행하는 이에게도 '도덕적 흠결'이 발생해서는 절대 안 된다. 애초에 부도덕한 짓으로 부와 명예를 얻은 이들은 개망신을 당해도 싸니 처절하도록 낭패를 보면 볼수록 분이 풀리고 속이 시원할 것이 틀림없다. 현실적으로도 수많은 대중들이 바라는 '복수의 귀결'은 이렇듯 소박(!)하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해피엔딩'과 '권선징악'이라는 뻔한 주제가 환영받는 이유도 우리네 서민들이 순하고 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배신과 복수, 그리고 처절한 응징이 뒤따르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손에 땀을 쥐고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에드몽 당테스의 타락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이다. 다시 말해, 복수에도 '올바른 방도'가 있고, '응징의 수준'도 적절해야 한다는 말이다. 분명 에드몽 당테스는 억울한 옥살이로 삶의 비참함과 온갖 불행을 다 겪었고, 지난 14년간 죽을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극적인 탈출'과 동시에 '엄청난 부'를 거머쥐면서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보상'은 대부분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일 것이다. 다만, 그동안 아버지가 굶어죽고, 사랑하는 약혼녀를 빼앗기는 등 '복수할 꺼리'는 남아 있다. 그리고 자신이 불행했던 동안에 '행복'을 누리던 배신자들에게 응당 복수할 이유도 마땅하다. 그러니 배신자들의 행복을 앗아가는 '정도'의 복수는 허용된 셈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처절한 응징을 하게 된다면 몬테크리스토의 복수는 정당성을 잃게 되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짐과 동시에 외면과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일반 대중이 원하는 '통쾌한 복수'란 딱 '받은 만큼'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준하는 복수다.

 

  이에 따라 '사적인 복수'는 허용하되 '도덕적 결함'이 없는 순수한 복수만을 허용할 뿐이라는 '단서조항'을 달아야 할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허구적인 이야기'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결코 '사적 복수'를 허용해선 안 될 것이다. 왜냐면 '도덕적 기준'이라는 것이 사람들마다 들쭉날쭉 제각각이기 때문이고, 문서조항으로 '명문화'하기에 매우 까다롭고, 이를 '해석'하는 것도 애매하고 모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도덕이라는 것이 '착하고 바르게 살라'는 마음가짐을 다루는 것이기에, 이를 '규율'로 삼아 분명히 하고자 하려면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10배로 물어주거나, 징역 3개월형에 처한다'라고 정한들, 재벌집 도련님은 남의 물건 400만 원을 훔치고서도 4000만 원 물어주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20억 원짜리 남의 집을 빼앗고도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1년 판결을 받아 뻔뻔스레 부를 자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이란 것이 그렇다. 가난한 이의 근검절약은 지지리궁상인 것이오, 부유한 이의 돈지랄은 플렉스한 것이다.

 

  그렇기에 도덕의 화려한 변신이 필요하다. 일명 '가진 자에게 걸맞는 처절한 응징'이 필요한 법이다. 즉, '잃을 것'이 있는 이에게 도덕에 반하는 행동을 할 시에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제거'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명예를 가진 자는 명예를 빼앗고, 재물을 가진 자는 재물을 빼앗고, 잘생김을 가진 자는 못생김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빼앗길 것'이 두려워 처신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검사출신이라고 거들먹거린다면 '개검사' 딱지와 함께 전재산몰수 과태료를, 재벌이라고 돈 무서운줄 모른다면 '한량'이라는 딱지와 함께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금지시킴을, 잘생겼다고 사람을 우습게 깔보면 '국민밉상'이라는 딱지와 함께 평생 쪽팔림을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무죄로 밝혀지면 '원상복구'시켜주면 그뿐. 그러나 '도덕적 흠결'로 인해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할 것이다. 이 정도면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복수'답지 않은가.

 

  우리는 현실적으로 '사적 복수'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복수'의 짜릿함은 알게 모르게 허용하고 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속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우리네 서민들의 슬기로움이랄 수 있을 것이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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