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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불복종 쫌 아는 10대 - 부당함에 맞서는 삐따기들의 행진 ㅣ 사회 쫌 아는 십대 7
하승우 지음, 방상호 그림 / 풀빛 / 2019년 11월
평점 :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하지 않은 말이 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반란을 꾀하고 아테네의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쳤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이 소크라테스의 구명운동을 펼쳤지만, 이미 썩어빠진 아네테 정치판에서 통할 리 없었다. 그런 까닭에 친구들이 그에게 탈옥을 권유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정한 편결'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을 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비웃을 거라면서, 자신은 부당한 판결에 맞서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이겠노라고 선언하고 독배를 들이켰다고 한다.
이를 두고, 소크라테스조차 '악법'도 준수하는 모범시민이라고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악법을 준수해서 좋아할 세력은 '부정하게 권력을 차지한 못된 놈들'뿐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선언은 '악법도 준수해야 마땅하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부당한 법 앞에 당당히 맞서 잘못 되었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려 잘못을 바로 잡는 계기로 삼으라'는 외침인 것이다. 그리고 교양시민이라면 그 외침에 분연히 일어나 '잘못 되었다'라고 같이 외치면서 끝내 바로 잡힐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민불복종의 핵심'이다.
우리는 '법치주의'를 대단히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갖고 있다. 물론 법이 공정하게 작동하는 사회라면 '법치주의'는 공정한 심판자로 공정사회를 이룩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허나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법대로 사는 것'이 그리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얼마 전 'n번방 사건'으로 평생을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된 조주빈의 배상금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그가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할 금액은 1억 원이 넘는 돈이 넘지만 지금까지 꼴랑 7만 원을 낸 것이 전부라고 한다. 그리고서 더는 낼 돈이 없다며 버티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공정하다고 느낄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예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노동자로 살면서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는 일'에 비해 턱없이 '적은 돈'을 벌면서도 사업주나 고용자를 향해 부당하다는 얘기 한 번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더더구나 '노동자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같은 노동자들이 먼저 '파업'하는 노동자를 욕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일쑤다. 특히, 대기업이나 외국기업의 하청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국가 경제를 말아먹는다'거나 '국제적 망신살이 뻗친다'면서 같은 노동자를 욕하기 일쑤다. 그 노동자들에겐 '가족의 생사'가 달린 급박한 일인데도 나몰라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사업주나 고용자의 편을 들어 준단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파업'에 나서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나 해대고 말이다. 하긴, 집 없는 서민들이 '대기업의 법인세 인하 정책'에 찬성하고, '상속세 폐지'에 고개를 끄덕이고, '종부세 감면'에 환호를 보내는 실정이니 말 다했다. 이들의 논리는 '먼훗날' 자신들도 대기업 사장이 되고, 재벌이 되며, 내집마련을 했을 때 '얻을 혜택'에 기꺼이 찬성하는 거라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그런 정책을 내세우는 정당이 정권을 잡아야 콩고물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있다(낙수효과)는 헛소리를 내뱉을 뿐이다. 이런 대한민국에 '시민불복종'이라니...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달랐다. '박근혜 퇴진' 팻말과 촛불을 들고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니라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학생들은 '단원고 학생들의 희생'이 남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월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학생들이 사고가 난 뒤에도 탈출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참변을 당했느냔 말이다. 그건 학생들에게 '자유'보다 '복종'을 가르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폭발한 사건이었으며, 무엇보다 앞서서 챙겼어야 할 '학생들의 생명과 안전'을 내팽개친 채, 자신들의 안위와 부정한 권력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무능한 정부의 탓'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무능한 정부'를 향해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어른들을 대신해서 학생들이 먼저 촛불을 드니, 그제서야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낀 '교양시민들'이 물밀듯이 쏟아져나와 학생들과 함께 춥고 긴 밤을 밝혔던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한 이명박 정권에 촛불을 들고, 명박산성과 물대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국민의 건강권을 외친 학생들이 있었으며, 미순효순 학생의 억울한 죽음 앞에 애도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부당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바꾸는 원동력도 학생들의 촛불시위가 시발점이었다. 3·1만세혁명, 4·19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등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대한민국 역사의 살아있는 주역이었고, 양심이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어른이 되면 비겁해지는 것일까? 세상물정 모르던 철부지였다면서 반성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시위에 나서기 전에 '유서'부터 적어놓고 나서던 학생들이었는데, 비겁해지거나 외면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는 '가족'을 챙겨야 할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부당한 권력' 앞에 당당히 나서서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 너무나 아프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것이다. 왜냐면 '시민불복종'은 부당함을 외치다가 막상 '현행법'을 어기면 당당히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도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니 '시민불복종'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고 비겁을 운운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죽음과 고통 앞에서 움츠러 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불복종은 '연대'가 중요하다.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교도소의 빈방보다 우리 흑인들의 수가 더 많으니 백인경찰에게 체포가 되더라도 더 많은 흑인이 연대하면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고 외쳤다. 그보다 앞서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의 소금법'의 부당함을 외치며 세금을 낼 바에야 직접 바다에 가서 소금을 만들겠다며 행진을 벌였고, 간디의 뒤를 따라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행진을 해서 끝내 소금법을 페지하게 만들었다. 그런 간디가 영감을 받은 책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다. 소로는 미국이 멕시코를 상대로 부당한 전쟁을 벌이고 있기에 '세금'을 낼 수 없다고 버티다 감옥에 수감된 사상가였다. 그는 정부의 부당함에 당당히 소신을 밝혔고, 그로 인해 감옥에 수감이 되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잘못'이라 주장했으니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된 것이다. '시민불복종의 힘'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불복종'은 늘 법을 어겨 감옥에 가야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거대한 상대에 당당히 맞서는 방법에는 '불매운동' 같은 일도 있다. 대리점주에게 강매를 하며 갑지를 일삼던 '남양기업'에게 소비자는 불매운동이라는 철퇴를 내렸다. 결국 남양은 사업주가 바뀌는 진통을 겪으며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서야 겨우 불매운동이 누그러지는 경험을 했다. 또한 '땅콩회항사건'으로 유명한 대한항공 한진일가도 검찰의 수사를 받는 등 국민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더는 '갑질'을 받고 당하기만 하는 '을'이 아니라는 것을 톡톡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물론, 불매운동이 매번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 나 홀로 '불매'를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소극적일 필요는 없다. 부당한 일에는 공사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부당함이 외면받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이 겪은 부당함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공감대를 갖추려 노력하는 '교양시민'이 많아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진다.
시민불복종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당연히 해야 마땅한 '권리'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공동체의 운명과 함께 하려는 노력만 있다면 시민불복종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고, 큰 힘을 발휘하는 만큼 우리 사회는 공정하고 건강하게 바뀌어 나갈 것이다. 그런 건강한 시민들이 많아진다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