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1 - 서남전쟁과 위구르 봉기 본격 한중일 세계사 11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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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간에 이어, 일본의 '명치유신'이다. 일왕 명치(메이지)가 신정부의 수장이라고는 하나, 직접 통치하는 권력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입헌군주국'이라고 하기에도 좀 뭣하지만, 암튼, 일왕은 '명예회장'쯤 되고, 수상은 '바지사장'쯤 되지만, 실권은 바지사장에게 있는...따지고 보면, 과거 막부시절에도 일왕과 쇼군의 관계와 비슷한..암튼, 그렇다.

 

  어쨌든, 명치유신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신정부'가 이끄는 신일본은 하루가 멀다하고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속출하고 들불처럼 저항이 일어났는데, 그 마지막 저항인 '서남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볼작시면, '불평사족(신정부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하급 사무라이들)' 때문이었다. 신정부가 일본의 전통적인 '신분제'를 파기했지만, 여전히 '사무라이 계급'에게는 봉작을 하사하는 등 '과거신분'에 따른 차별은 여전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놀고 먹기만 하는 '사무라이 계급'에게 지급한 봉작이 문제가 되었다.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개혁'을 실시하고 있는데, '들어갈 돈'이 얼마나 많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화족'이니 '공경귀족'이니 떠세를 부리면서 '정부의 세금'을 호로록 퍼드시고 계시니, 나라의 곳간이 텅텅 비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정부'는 사무라이에게 지급하던 '봉작'을 명예퇴직금 지급하듯이 '일정 금액'을 퉁쳐서 일시적으로 지급하고, 더는 주지 않겠다고 일방적인 선언을 해버리니 문제가 점점 커져버리게 된 셈이다. 그나마 높으신 사무라이들은 그 액수라도 많아서 몇 년간 버틸 여력이라도 있었겠지만, 애초에 '하급 사무라이들'에게는 지급조차 하지 않았으니, 사무라이 체면에 '농사'를 지을 수가 있나, '장사'를 할 수가 있나..그저 쫄쫄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만 가고 불평은 날로 늘어만 가니, 이것이 바로 '불평사족의 난'이다.

 

  이런 '불평사족들'의 근거지는 명치유신의 주역이었던 조슈와 사쓰마였다. 그밖에도 여러 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고위 유신지사들의 고향이기도 했던 '조슈'와 '사쓰마'가 반란을 일으키니 유신지사들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정부군은 저항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제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왜냐면 '반란군'의 주역들이 중앙정계에서 '권력다툼'을 벌어다 여의치 않자 '고향'으로 내려간 유명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명분은 '불평사족의 난'이었지만, 내부로는 신정부의 '유신지사들끼리의 권력다툼의 연장선'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렇게 조슈지사들이 쳐발리고, 이제 사쓰마지사들이 똘똘 뭉쳐 '서남전쟁'을 일으켰다.

 

  어차피 결과는 '신정부군의 압승'이다. 하지만 '서남전쟁'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까닭은 전쟁의 양상이 <라스트 사무라이>와 판박이처럼 똑같았기에 그렇다. 애초에 유신지사들은 '존왕양이'를 외치며 일왕에게 충성을 바치며 서양세력을 몰아내자는 명분을 내세워 '막부의 목숨줄'을 끊어놓았다. 막부의 정체가 바로 '사무라이 정신'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유신지사들이 스스로 '서양화'한 뒤에, 권력다툼을 벌였고, 권력에서 밀려난 이들은 낙향을 해서 '새로운 사무라이 정신'을 드높였던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래서 신정부군은 '서양의 신식무기와 전술'을 도입해 불평사족들을 발라버리고, 불평사족들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무기체제로 어쩔 수 없이 '발도(칼을 뽑아 듦)대 편제'를 구성해 전쟁을 치루니, 애초에 전쟁의 승패는 결정이 난 셈이었다.

 

  하지만 저항은 끝없이 이어지고 명치유신을 이끌던 유신지사들은 하나둘 죽거나 죽임을 당했고, 그 뒤에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였던 것이다. 천한 하급 사무라이 계급이었으나, '조슈 파이브'의 일원으로 일찍이 해외유학으로 외국인 친구도 많았고, 능수능란한 처세술과 달달한 달변으로 주위에 적보다는 친구가 더 많으며, 여자친구(?)는 더 많은 난봉꾼...쿨럭쿨럭...어쨌든, 이등박문의 등장으로 '개혁 드라이브'는 강경 이미지보다 부드러운 유화 제스처를 취하며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진행되어 간다.

 

  한편, 청나라의 서쪽 변방인 '신장 위그르 지역'은 좌종당의 평정으로 안정(?)을 얻었는데, 평화(?)를 되찾기까지 '중앙아시아'를 두고 펼쳐진 영국과 러시아 간의 '더 그레이트 게임'이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펼쳐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할 수 있다. 그레이트 게임이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영국의 방해작전'을 총괄해서 일컫는 말이다. 러시아는 팽창정책을 펼치며 동쪽으로 국경을 광활하게 넓혀가지만, 정작 '부동항'을 얻지 못해 강대국의 필수요건인 '해군력'을 보유할 수 없어 곤란을 겪기 일쑤였다. 그렇게해서 '2차 아편전쟁'의 틈을 타서 연해주 지역까지 꽁으로 먹게 되지만,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도 역시 일년의 3/4는 얼어붙어 있었기에, 러시아는 호시탐탐 '남하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러다 우연찮게 흑해연안의 '동그루지아 땅'을 차지하게 되면서 멀지 않은 곳에 '인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농담처럼 러시아가 인도를 차지하면 '부동항'을 어럽지 않게 얻을 수 있다는 꺼낸 말이 실제로 벌어지게 되면서 '더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전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로 새롭게 눈을 돌린다.

 

  또한, 당시 중앙아시아는 여러 민족이 섞여 살면서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정점으로 티벳고원과 파미르고원이 연이어 있고, 그 사이에 타클라마칸 사막이 펼쳐진 황량한 '중앙아시아'는 의외로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고, 고원지대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이 강을 이루고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조성되었기에 '유목민' 일찌감치 터를 잡고 살았으며, 소박하지만 농사를 지어 먹고 살만한 지역이었다. 이런 '중앙아시아'에 카자흐스탄과 우즈벡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탄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동 키르기스탄'이 오늘날의 '신장 위그르 지역'에 포함되어 있어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이 중요한 까닭은 '이슬람 종파의 종교분쟁'과 '중국의 민족차별과 인권 유린'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만, 오늘날에는 이 지역에 '전세계 면화 생산량 1위', '중국 전체의 석유, 가스 매장량의 1/3', '금을 비롯해 수많은 희토류가 매장된 곳', 그리고 인도와의 국경분쟁 등등 중국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보물지도'가 가득 쌓이고 묻힌 지역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중국의 미래를 보장할 천혜의 자원과 보물이 가득한 '중국의 목숨줄'이란 말이다. 그러니 중국이 순순히 이 지역을 내어줄 까닭은 절대로 없다. 이런 '중앙아시아'의 정황을 일찌감치 알았기에 중국이 탐을 낸 것은 아니고, 이 지역이 안정되어야 중국이 평안할 수 있었기에 얼마간 무리가 있었다고 해도 끝내 놓치지 않고 차지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중앙아시아 민족'은 왜 강대국들의 등살을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했던 것일까? 원래 이 지역은 '비단길(실크로드)'에서도 살짝 벗어난 곳이었고, 황량한 초원만 펼쳐져 있었기에 '유목민들의 터전'에 불과했다. 과거의 강대국들도 이 지역을 차지해봤자 별다른 소득이 없었기에 건드리지 않고 평화롭게 지냈었는데, 일찍이 '이슬람 문명'이 전파되면서 '계파간 종교갈등'이 심심찮게 일어나던 것이 '민족 갈등'으로 번지며, 화합보다는 분쟁이 더 일상이었던 지역이었다. 그렇게 '내부적 갈등'으로 여러 왕조가 일어서고 들어섰으며 망했다가 다시 뭉치는 등 복잡한 나날을 보냈다가 청왕조가 힘을 길러 이슬람 세력을 밀어내고 차지한 뒤로는 '청나라 땅'으로 오랫동안 자리잡혔다.

 

  그 사이에 '중국 한족'도 이슬람화하여 무슬림이 되는 등 지리적으로 꽤나 멀었던 곳이었으며, 시간적으로도 외딴 곳이 되었던 셈이다. 그러다 억세게 운이 좋은 '미소년 무용수' 출신의 야쿱 벡이 등장하면서 '신장 지역에 새로운 이슬람 왕조'를 만들었다. 마침맞게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펼쳐지면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벡키스탄, 키르기스탄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를 경계하던 영국이 개입하면서 '야쿱 벡 왕조'는 두 강대국의 완충지역으로 자리잡으며 안정을 누렸다. 여기에 쐐기를 박기 위해 '야쿱 벡'은 이슬람의 원조격인 '오스만제국'에게서도 인정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왕국을 이어가려 했지만, 청왕조가 태평천국의 난을 얼추 정리하고, 염군의 난과 둥간 혁명까지 진압하고 나자 서서히 '신장 위그르 지역'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있었다.

 

  청나라의 등장에 '더 그레이트 게임'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게 된다. 영국과 러시아는 굳이 분쟁을 일으켜 어느 한쪽으로 힘의 균형이 넘어가는 것을 꺼리며 '야쿱 벡 정권'을 인정하고 안정을 꾀하는 한편, 청나라 조정을 압박해서 군대의 진군을 막아보려 했으나, 청나라의 군대는 멈추지 않고 진격해나가기만 한다. 눈에 보이는 승리를 앞에 두고 멈추는 바보는 없을 것이라는 속셈이었던 것일까? 어쨌든, '야쿱 벡'은 청나라의 공격에도 별다른 반격을 하지 않으며 끝까지 '강대국들의 원조'를 기다리며, 청왕조에도 공격을 멈춰줄 것을 거듭 요청하지만, 이미 시작된 전쟁을 되돌리기엔 너무나도 빈약한 평화의 외침이었다. 끝내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눈앞에 두고서 '내분'에 빠진 야쿱 벡 정권은 그대로 청나라에 흡수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신장 위그르 지역'은 이렇게 중국영토가 되었다.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 '이 지역'에 과연 평화로운 독립의 기회가 다시 찾아올 것인가?

 

  일본도, 청나라도 모두 큰 혼란을 겪고 난 뒤에 '마침표'를 찍으려 하는데, 과연 잘 찍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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