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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7 - 흥선대원군과 병인양요 ㅣ 본격 한중일 세계사 7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평점 :
본격적인 '한국사'가 펼쳐진다. 5권까지 중국과 일본의 '근대의 여명'을 살펴보았고, 6권에서 총정리를 한 다음에, 드디어 '한국사의 근대'를 살펴보게 되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아름답지만은 않은 까닭에 우리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중국, 일본을 넘어 전세계적인 안목을 넓혀보아야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시도 '역사적 고찰'을 멈춰서는 안 된다. 누군가 그랬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 번은 '우연'으로, 다음에는 '필연'으로 말이다. 우리 역사에서 단점을 보았다면, 그 단점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우여곡절 끝에 고종이 등극하고, '대원군'이 권력을 잡았다. 조선왕조 사상 '대원군(임금자리에 오르지 못한 현 임금의 아버지)'이 살아 있는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것은 처음이며, 역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앞서 '세도정치 시대'가 매우 엉망이었던 관계로 새로운 실세인 '대원군의 등장'으로 개혁의 물꼬가 찬란하게 펼쳐질 것인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먼저, '토지개혁'이다. 삼정문란의 하나였던 '전정'을 대대적으로 손을 본 것인데, 전국토지조사를 실시하여 토지대장을 재작성하고, 은닉을 찾아내고 면세지를 대폭 축소하는 등 비효율적이던 제도를 깔끔하게 손 보았다. 다음은 '환곡 개편'이다. 환곡 업무를 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바꾸는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백성들이 직접 운영하게 하여 부담도 확 줄이는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군정 개혁'도 실시하여 양반들도 세금을 매기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양반들의 반발로 인해 실제 효과는 미미했지만,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효과는 만빵이었다. 여기에 '서원철폐'를 통해 세도가문 뿐만 아니라 지방유지들의 정치적, 경제적 향촌 기반을 위축시켜 '왕실과 왕권의 강화'를 꾀하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효과까지 노렸다.
하지만 이런 '대원군의 개혁'이 빛 좋은 개살구로 그친 까닭은 '경복궁 중건' 강행,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심화, 천주교 탄압으로 인한 서양세력의 침략 유발 등등 삽질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것들이 '나라안'에서만 일어나는 '근시안적인 조치'에 그쳐 나라밖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세계로 넓혀 볼 것도 없이 이웃나라인인 중국과 일본과도 사뭇 다르게 진행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동시대인 19세기에 청 왕조와 일본 막부는 서양의 침탈에 내리막길을 탔으며 서양과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뤘고, 그로 인해, 청 왕조는 '양무운동'을, 일본에서는 신정부가 등장해 '명치유신'을 일으키며 확실히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결과론적인 비판'일 수 있다. 대원군 시절에 조선이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뒤쳐진 까닭은 이웃인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양의 관심'이 덜 집중되었던 탓이 크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웃나라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때론 '충격요법'이 가장 확실한 효과를 낳기도 하는 법이다. 조선은 임진, 병자, 양란 이후에 또다시 200여 년의 평화시기를 거치면서 다시 병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오랜 병을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대원군의 개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하여서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안타까운 시간은 흘러흘러 '제너널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가 벌어진다. 조선에겐 아직 서양이 '낯선 조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두 사건 모두 조선이 '서양의 힘'을 직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조선은 그 소중한 기회를 그저 날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두 사건 모두 '조선의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이는 온전히 '조선의 힘'이 서양을 압도한 결과가 아니라 서양이 미처 조선을 제대로 탐색하지 못하고 섣불리 다가섰다가 낭패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비슷한 경험'을 한 중국과 일본도 제대로 본 바다. 비록 조선이 얼떨결에 승리하고, 서양의 힘이 의외로 깊숙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조만간 조선이 자신들처럼 '호된 신고식'을 당할 것이라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오직 '조선'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의 지배층'이었다.
실세에서 조금 벗어난 '식자층'에서는 서양의 힘이 중국과 일본을 어떻게 요리(!)했는지 여러 소식통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의 문물을 직간접적으로 맛보면서 '개항의 필요성'과 '상업의 발달'이 중요하다는 것도 일찌감치 알아채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정치권력'을 갖고 있는 세력들은 이를 애써 무시하면서 '당장 맛볼 수 있는 떡밥'에 안주하고, '어항속의 풍요'처럼 자신들만의 안락함에 빠져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권력층이 그리 폭망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대원군의 개혁'이 거기서 멈춘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는 것이다. 조금만 더 내다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안목이 없었음이 미치도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과거의 영광'에 취하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진실은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 매진해야 하는 학문인 것이다. 우리는 한 치 앞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지만, '과거'를 연구하는 것으로 '미래'를 점쳐볼 수는 있다. 왜냐면 '현재'는 과거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를 연구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다보면, 어느 정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가능한 범주안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는 반복한다'는 대전제를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비교적 정확한 예측이다.
물론, 역사에 '정답'은 없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정답 같고, 저렇게 보면 '저것'이 정답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예측한 것은 신뢰할 수 없지만, 수천, 수만 명의 연구자가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저것이 정답 같다'라고 예측한 결과보다 높은 결과치를 내놓았다면, 정답이 없는 역사에도 '신뢰성'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고 서로의 '정답'을 비교분석할 수 있는 깜냥을 갖춰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역사전문가'가 되어야만 할 것이고 말이다. 이제 역사교양이 더욱 널리 보급되어야 하는 첫 번째 까닭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