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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불한 완역판, 개정판 ㅣ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1
생 텍쥐페리 지음, 김미성 옮김, 김민지 그림 / 인디고(글담) / 2015년 12월
평점 :
<어린 왕자>가 주는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등장인물이라고 해봐야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와 소행성에서 지구로 불시착해서 이곳저곳을 떠도는 어린 왕자가 고작이고, 이야기 전개방식도 앞뒤 순서도, 맥락도 없이 그저 비행사와 어린 왕자의 '경험담'을 읊조리는 것이 전부이기에 굳이 감동적인 '까닭'을 찾으려고 해도 딱히 '이것'이라고 하기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찾아보라고 하면, 여우와 어린 왕자가 '길들이기'라는 주제로 떠벌린 친구 사귀기에 필요한 조건을 따지는 장면이고, 비행사가 어릴 적에 그렸다는 몇 가지 그림 가운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닮은 모자 그림 때문에 가슴 아픈 상처를 받은 이야기가 인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의 진정한 주제는 어린 왕자와 그가 가꾸는 장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 이야기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야 어린 왕자가 여행을 떠난 진정한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린 왕자가 자신이 살던 행성을 떠나 지구로 오게 된 까닭도 표면적으론 '더 넓은 세상'을 알기 위해서였지만, 그 내면에는 '서로를 더 아끼고 서로 배려하는 참사랑'을 깨닫기 위한 위대한 여행이었다. 왕자가 굳이 어렸던 까닭도 그의 사랑이 풋내나는..아직 무르익지 못한 사랑꾼에 불과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그래서 왕자의 사랑법은 그저 '유리벽'을 뒤집어 씌워서 장미를 보호하는 것이 전부였던 셈이다. 장미 역시, 그런 보호가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 작고 여린 '존재'였을 뿐으로 왕자의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애송이'였던 것일테고 말이다. 그런 둘의 사랑, 다시 말해, 풋내기와 애송이의 사랑은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자는 떠났다. 풋내를 지우고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 여러 행성을 떠돌며 멋진 어른들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상은 참으로 요상하기 짝이 없었다. 각자 아주 중요하고 멋진 일을 하며 한 평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린 왕자의 눈으로 보아도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아 보이고, 멋져 보일리 만무한 일에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지막 종착지로 지구에 도착한다. 지구에 도착해서도 여러 곳을 떠돌지만 '멋진 어른'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아무런 목적도 없이 쳇바퀴만 돌리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사막 한복판에서 멋진 어른을 만났다. 그는 살기 위해서 고장난 비행기를 고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비행사였다. 그에게 다가간 어린 왕자는 여러 가지 부탁을 한다. 그러자 멋진 어른이었던 비행사는 어린 왕자의 맘에 쏙 드는 그림을 그려주며 멋진 어른임을 증명한다. 흡족한 어린 왕자는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떠들며 멋진 어른에게 '진짜 인생'을 배운다.
하지만 비행사는 '생존'이라는 일을 완수해야 했기에 바빴고, 어린 왕자는 비행사가 바쁨 틈을 타서 다른 친구를 만났다. 바로 여우와 뱀 말이다. 어린 왕자는 여우와 뱀을 통해서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짜 사랑'이 무언지 깨닫게 된다. 그렇게 어린 왕자는 삶의 목적을 깨닫고, 우정과 사랑이라는 가슴 찐한 감정을 제대로 배우고 나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대상이 소행성에 홀로 남겨둔 장미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왕자는 '선택'을 한다. 자신이 진심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으므로...
내가 십대에 읽은 <어린 왕자>는 그저 그랬다. 심지어 책을 읽기 전에 '영화'로 먼저 만났었다. 그때 남은 인상은 '엄청 빠른 장면전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두서 없이 전개되는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연출한 감독의 재능이었을테지만, 십대의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지럽고 산만한 전개에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가장 인상적인 내용이자 기억에 남는 내용은 바로 '여우와의 만남'이었다. 친구가 되기 위해 자신을 길들여야 하며, 오후 네 시에 만나기로 했으면, 자신은 두 시간 전부터 가슴 두근두근하는 설렘으로 기뻐질 거라는, 그런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말하는 여우의 대사가 정말 인상 깊었다. 그래서 십대에 읽은 나의 <어린 왕자>는 우정에 관한 책이었다.
논술수업을 위해 다시 읽은 책이며, 사십대에 다시 읽은 <어린 왕자>는 단연코 사랑에 관한 책이었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동적인 책이었다. 명작을 읽으면서 다시금 느끼는 것은 '10년 단위'로 반복해서 읽어봐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굳이 '10년'으로 기준을 삼은 까닭은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 속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한두 해가 지나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강산의 변화를 10년이라는 세월은 단박에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란 말이다. 어디 강산뿐이겠는가. 사람도 10년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같은 책'이라도 우정으로 읽혔다가, 사랑으로 바뀐 것이 틀림없다.
어쩌다보니, 책내용만 나열했는데, 같은 <어린 왕자>라도 '삽화'가 달라지니 그 느낌이 사뭇 달라졌다. 기존의 <어린 왕자>가 진중하고 진지하기만 했다면 '감성적인 그림체'로 바꾸어 읽으니 한결 가볍고 산뜻하게 느껴졌다. 또 하나는 그동안 '영어판 뒤침책'을 주로 접하다가 '불어판 뒤침책'을 새로 접하니, 읽는 맛도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지은이인 생텍쥐페리가 프랑스인인데 어쩌다 '영어판'을 먼저 읽게 된 것일까? 궁금했었는데, <어린 왕자>가 먼저 출판된 곳이 미국이었고,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난 뒤에야 비로소 프랑스에서 출판하게 되었다는 헤프닝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한국독자들도 '불어판'보다 '영어판'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뒤늦게나마 '불어판'을 읽어보니, 문장 하나하나가 더욱 감성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어'에서 '영어', '영어'에서 '한국어'로 뒤쳐지게 되면서 '뜻만 전하는 뒤침(의역)'이 되었다면, '프랑스어'에서 '한국어'로 곧장 뒤쳐지니 비로소 '뜻과 감성이 온전히 전달되는 뒤침(완역)'이 된 듯 했다. 기회가 된다면 '영어판'과 '불어판'을 동시에 읽어보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 점을 직접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암튼, 예쁜 책으로 다시 만난 <어린 왕자>가 정말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다시 10년 뒤에 만나면 또 어떤 느낌으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