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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3 - 1921-1925 의열투쟁,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투쟁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ㅣ 35년 시리즈 3
박시백 글.그림 / 비아북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일제강점기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눈다. '무단통치-문화통치-민족말살기'로 말이다. 하지만 이는 그저 '표면상'의 구분일 뿐, 일제의 목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세계속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아예 없애는 것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아니, 지금까지도 일본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아예 없는 것처럼 여길 뿐이다. 그저 '필요'에 따라 '이용'해먹을 가치쯤으로 여길지는 몰라도 여전히 '무시 일변도'라는 점은 달라진 것이 없다. 이는 1920년대 이후에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저지른 만행을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일제는 '3·1혁명'을 겪으면서 조선을 철저히 '식민지화'하기로 본색을 드러낸다. 허나 '무단통치기'에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부드러운 정책'을 앞세웠다. 그것이 바로 '친일파 키우기'였다. 이 당시의 친일파들은 '3·1혁명'을 지켜보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들이 보기에도 '조선인'들은 저항을 상실하고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 거듭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매국을 하고 변절을 한 까닭도 '조선의 무능'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세계대전에서도 승리를 거두는 일제의 우월함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독립'을 바라는 조선인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일제는 튼튼했다.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제국주의'로 팽창해나가는 일제의 강력함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조선인'은 두 갈래 길목에 서게 되었다. 임시정부와 독립군으로 험난한 길을 걸을지, 아니면 변절과 앞잡이 따위의 친일파로 달콤한 길을 걸을지 말이다. 물론 일제의 교활한 수법은 '인간이길 포기한 것'처럼 악랄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된 이들이 씁쓸하게도 많아졌다.
친일파들의 변명은 한결 같다. 강력해진 일본을 상대로 조선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내세운 것이 '참정권'을 얻어내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었고, '자치'를 허락받아 조선인을 위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으며, '민족실력(문화운동)'을 키워서 추후에 독립을 이루자는 '그럴 듯하고 미적지근한 주장'만 늘어놓기 일쑤였다. 하긴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이승만 등의 '외교론'과 안창호 등의 '실력론'이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심지어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던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 가운데 변절자가 많이 생긴 것도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회유에 따라 '동조'한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독립의 꿈'이 얼마나 멀고도 험한 시절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험난한 독립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이들이 있었단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 시절엔 다들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는 친일파들의 뻔한 변명이 무색할 정도로 당당히, 그리고 기꺼이 고통스런 가시밭길을 걸어간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이들이 '무장투쟁'만이 독립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을 보여주어야 온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그 결과,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청나라, 러시아, 그리고 서구열강과 싸워서 승리를 거둔 일제가 부끄러워서 '패배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일부 폭도들의 만행이었고 일제의 피해는 미미했다고 '사실 왜곡'마저 할 정도로 말이다.
또, 의열단의 투쟁도 불을 뿜었다. 이들은 정의로운 일을 불꽃처럼 행하겠다고 선언한 이들로서 매국노와 친일파, 그리고 누구를 막론하고 일제협력자 등을 '칠가살'로 정하고 폭탄투척, 사살 등을 거리낌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가장 유명한 사건을 꼽으라면 일본경찰 40명의 추격을 쌍권총을 들고서 홀로 대적했던 김상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의열단의 투쟁은 변화를 주어야만 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이들뿐 아니라 '무고한 희생자'도 속출했기 때문이다. 던져진 폭탄과 총구를 벗어난 총알은 '나쁜놈'만 골라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조선은 독립의 꿈을 계속 꿀 수 있었다. 비록 당장은 일제의 압제에 눌려 기를 쓰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먼저' 쓰러져간 독립운동가의 뒤를 쫓아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간 이들이 '끊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한민국의 독립'은 누가 뭐래도 독립운동가들에게 공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한편, '3·1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약도 잊어선 안 된다. 물론, 초기부터 임시정부 운영에 삐걱거리는 면이 없지 않으나, 다양한 '독립운동노선'의 변화속에서도 끝까지 남아 독립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탄핵, 이념에 따른 파벌다툼 등등의 혼란은 오히려 임시정부가 제대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파벌싸움이나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비난도 들어 마땅하지만, 그런 혼돈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독립운동을 했다면 오히려 일제의 철통같은 압제와 악랄한 탄압에 의해 쉽게 발각이 되어 일망타진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열된 만큼 큰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었지만 분열되었기에 '다양한 독립운동의 방향'을 탐색할 수 있었고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꺾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혼란속에서 꽃피운 것이 바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깨어난 노동자, 농민, 여성 들이 노동·농민·여성운동으로 활발하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일제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국가와 국경을 초월한 '무정부주의(아나키즘)'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는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 등이다. 암튼, 이들의 활약은 다음 권에서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