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 항우와 유방 - 제국의 붕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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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이 죽었지만, 아직 진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2세 황제 '호혜'가 건실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로는 호혜는 무능한 임금에 불과했고, 간신배들에게 농간을 당하다 끝내 진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 탓으로 돌리고, 고구려의 멸망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임금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지들끼리 싸웠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결론이다. 원래 망국의 임금이나 지배층은 '결과론적으로' 무능하다고 평가받기 일쑤라는 점을 간과하고서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길 게을리한다면 '역사학의 발전'은 기대할 것인 못될 것이다. 스승의 성과를 답습하고, 그에 딴죽을 걸지 않고서 어찌 청출어람을 바랄 것이냔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김태권은 날카로운 관점을 뽐냈다. 진나라의 멸망은 '회음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이다. '회음후'란 바로 '한신'을 일컫는다.

 

  여러 역사가들이 한신을 몰락한 귀족출신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한신의 신분에 대한 고증은 빈틈이 많은데도 그가 '커다란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는 문구를 곧이 곧대로 해석하여, 시정잡배의 가랑이를 기어가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인내력'을 뿜뿜하였으니 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훗날 '한나라 대장군'을 역임하고, 당당히 제나라의 임금에 올라 천하삼분지계의 한 축을 맡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초한지>의 주인공인 항우와 유방, 그리고 한신이라는 '삼파전'을 흥미진진하게 서술해나가곤 한다.

 

  그런데 정말 한신이 '몰락귀족' 출신이었을까? 여러 사료를 둘러보면, 허리에 큰 칼을 차고 다닐 정도로 비범한 행색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승오광의 농민전쟁'에 참가했을 때에도 변변한 직책을 받지 못했고, 농민군이 연이은 패배로 괴멸되자 초나라 장수인 '항량'의 패거리에 낑겨서 진나라 정규군에 저항할 때도 변변한 직책도 없이 '졸병'에 그쳤을 뿐이다. 훗날 항우와 함께 진나라 군사와 싸울 때도, 유방과 함께 파촉으로 내몰렸을 때까지도 한신은 그저 별볼일 없는 '병졸'에 불과했다. 그러다 유방의 엉뚱한 명령(?)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렸을 때, "어찌 인재를 몰라보고 나(한신)를 죽게 하시나이까?"라는 울분에 찬 외침소리를 낸 뒤에 기발한 계책으로 코너에 몰린 유방을 승승장구하게 만들면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드디어 잠자던 용이 물을 만나 승천하는 기세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다.

 

  이렇게 한신은 '비루한 인생'에서 '대장군'을 거쳐 잠시나마 '한 나라의 임금'에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한신은 제갈량보다 훨씬 앞서서 '천하삼분지계'의 당당한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으나 자기 밥그릇을 제 발로 차버린 격으로 항우와 유방 사이에서 유방을 편드는 쪽을 선택해 결국 '유방의 승리'를 거들어주는 역할에 만족(?)해버리고 만다. 만약, 한신이 유방과 항우의 싸움을 적절히 대거리하다가 둘이 지쳐서 쓰려졌을 때 '어부지리'를 취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역사의 '만약에~'를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사기> '회음후열전'에 따르면, '한신의 선택'은 어려운 처지에 내몰렸을 때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써준 고마움을 차마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권력을 차지하고 승패를 겨루는 싸움에서 '은혜'와 '의리'를 따지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서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유심히 째려보며 고찰해보면, 그의 출신이 '귀족'이 아님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러 역사가들의 견해처럼 그가 '몰락귀족'이었고, '몰락한 가문'을 되살리려는 숙명을 지녔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항우와 유방의 유명한 싸움은 '귀족 도련님 vs 시골 건달'의 대결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먼저 '역발산 기개세'라던 항우는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을 거두며 진나라를 멸망의 문턱까지 내몰아놓고서도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김태권도 이를 적절히 지적하면서 진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해놓고도 고향땅이 그리워 초나라로 되돌아간 정황을 '항우의 잘못된 선택'으로 꼽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애써 힘들게 서울을 점령하고도 고향땅 전라도 광주로 군대를 되돌려 버린 셈이란 말이다. 이를 두고 항우는 "비단옷을 입고도 뽐낼 수 없다면 애써 고생한 보람이 없을 것이다. 고향땅(초나라)으로 되돌아가 당당히 뽐낼 것이다"라고 변명했는데, 여기서 나온 고사가 바로 '금의야행'이다. 비단옷을 입고 밤거리를 거닐다는 뜻인데, 항우는 산을 뒤집는 힘과 세상을 집어 삼킬 기세로 겨우 초나라 왕으로 만족하는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시골 건달 출신인 유계(유방이란 이름은 한나라 고조에 등극하고서 지은 이름이고, '막내'라는 뜻의 '계'가 원래 이름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유막둥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싸웠다하면 지는 운빨만 드럽게 좋은 '럭키보이'였다. 다시 말해, 유계는 배운 것이 없어 무능했으나 주위에 '장자방'이 있고, '한신' 등등 항우와 대신 싸워줄 인재가 넘쳐났다는 점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유계는 '매력덩어리'였을까? 수많은 역사가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태권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시골 건달에게 매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었겠느냔 말이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첫째, 망해가는 진나라에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초나라 편'을 들었다. 둘째, 초나라 편은 '진승과 오광', '항우', '유계(한신)' 등이 있었다. 셋째, 진승과 오광은 출신이 저열해서 무모한 작전을 펴다 괴멸 당했고, 항우는 힘은 셌으나 맞서 싸우도 죽이고, 항복해도 죽이고, 심지어 자기 편도 죽이는 깔끔떠는 도련님이라서 민심을 잃었기에,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겨를도 없이 '유계의 편'에 뛰어들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는 해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계에게 '장자방'과 '한신'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헛발질만 계속 해댔기 때문이다. 거기다 질투심은 얼마나 쎈지 통일대업을 이룬 뒤 장자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목숨을 살리려 도망가버리고, 싸움에서 지고 온 뒤에는 '연전연승'하던 한신의 군대를 뺐어서 자신의 군대로 삼아버리기 일쑤였으며, '한' 건국 이후에는 끝내 한신마저 '토사구팽' 해버리는 천하의 몹쓸 종자가 바로 '유방'이었기 때문이다. 매력덩어리라는 해석보다는 오갈 데 없으니 그나마 만만한 '유계의 편'을 들었다가 각자도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근거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다음 편에선 '유방의 최후'가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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