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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위한 정의, 모두를 위한 정의 - 존 롤스가 들려주는 정의 이야기 ㅣ 위대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어린이 인문교양 13
오채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4월
평점 :
초등아이들에게 '철학수업'은 매우 힘들었다. 웬만큼 독서실력이 된다고 여겼기에 과감히 도전을 했는데 예상은 쉽게 벗어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이들에게 '정의감'과 같은 깊은 가치관을 설명하는 일은 더욱 어렵기 그지 없었다. 그저 착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을 '정의롭다'고 여겼고, 영화속에서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이 하는 일을 막연하게나마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주변에서 소방대원이나 경찰관을 떠올리며 '정의'에 대한 생각을 조금을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또 역사수업에서 공부했던 4·19혁명이나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6월항쟁을 떠올리며 독재정권이 함부로 휘두르던 불의에 맞서서 당당히 자유와 평등을 외치던 수많은 민주항쟁운동가들을 떠올리며 막연하게나마 정의란 무엇인지 가늠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떠올린 아이들은 없었다.
현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했던 '공리주의'조차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 초등학생의 철학수준이라는 점이다.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 교육현실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4차 산업혁명이 닥쳐왔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달달 외우는 지식에 만족하고 마는 것이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라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아이들 나름대로 괴리감을 느낄 것이다. 자신이 배우고 평가를 치루는 내용과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현실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말이다. 그런 현실에서 적절히 타협하며 공부는 공부대로 사회현실은 현실대로 따로따로 배우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이대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는 생각이 도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현명한 이들은 그런 미래를 최대한 늦추려 들겠지만, 언젠가는...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은...다시 말해, '창의성을 발휘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인공지능 로봇에게 밀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 때문에 초등학생일지라도 '철학수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 스스로 인생의 가치관을 형성할 줄 알고,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미래 사회에서 '인공지능 로봇'이라는 유용한 도구(!)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코 '인공지능 로봇'의 노예가 되어 모든 의사결정과 선택권마저 내어주고 길들여지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편리함과 안락함이 나태와 굴종으로 변질되는 것을 용납해서도 안 되고 말이다.
암튼, 이 책은 '무지의 장막'으로 유명한 존 롤스의 <정의론>을 쉽게 풀어쓴 책이다. '무지의 장막'이란 공정한 원칙 잘 지켜질 수 있도록 모두가 동의하는 절차를 통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훌륭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모두를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될 수 없기에 불평등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불평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선천적인 능력과 지위를 모르는 '원초적 입장'에서 가장 불리한 사람에게 최대한 이익이 돌아가도록 원칙을 정한다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공정한 원칙'이 세워질 거라는 이야기다.
이를 테면, 무지의 장막 안에 있는 사람이 '모든 흑인은 백인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법안에 찬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자신이 백인이라면 손해 볼 것이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장막을 걷고 나와보니 흑인이었다면 자기 스스로 노예가 되어 버리는 법안에 찬성할 꼴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지의 장막을 이용하면 애초에 '불공정한 일'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존 롤스의 주장이다.
허나 이는 너무 낙관적이고 안일하다는 비판에 놓이게 된다. 왜냐면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결정을 내리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손해볼 위험성이 아무리 높더라도 '엄청난 이득'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불복 게임'이 그렇다. 상품을 차등적으로 나누고 1등이 독차지하고 나머지는 빈털터리가 된다는 규칙에 쉽게 동의한 다음 '승자독식'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그런 복불복 게임을 조장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승자가 전부를 가질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뛰어드는 '주식투자'가 좋은 예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하는 현실에서 존 롤스의 주장은 너무나 이상적인 허상을 쫓는 어리석은 짓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그런 세상을 '바람직한 사회'라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돈을 맹목적으로 쫓으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돈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것에 가치를 부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돈을 엄청나게 갖고 있는 부자도 그렇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돈'이 전부라고 가르쳐도 말이다. 물론 돈에 쪼들리면 비참한 삶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어서 '돈이 전부인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존 롤스도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길 좋아하는 비합리적인 사람은 논외로 놓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정한 게임'을 원할 것이라는 이상적인 결론에 다다른 셈이다. 따라서 완벽한 정의가 지켜지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가 최소화될 수 있다면 비교적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공정함'이 바로 설 거라고 존 롤스는 말했다.
이처럼 존 롤스의 <정의론>을 따르면 '공리주의'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강요 당하는 소수의 불행을 미연에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무지의 장막'이 자신을 다수의 행복에 속한 사람인지 소수의 희생을 당할 사람인지 원초적으로 가려주어서 한 사람이 받을 불행을 최소화하려고 누구나 노력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렇게 '소수의 의견'도 반영하고 배려할 줄 아는 믿음이 널리 퍼진 사회에서는 불우한 사람이 적어질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