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 에세이
양정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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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

 : 창비

 : 2021/10/07 - 2021/10/21


미술이야기로 유명한 양정무 선생님의 에세이.

다른 책이나 방송에서 봤을 때도 그렇지만 양정무 선생님의 책은 편안하지만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려서 정말 그림을 못그렸다. 

미술시간마다 혼났다. 놀다가 그림을 대충 그린다고...

미술실에 가서 왜 귀신같은 석고상을 그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앉아서 열심히 그렸었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왜 그런 미술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왜 연필로 그림그리는 걸 데생이라고 하는지도...(자세한 건 직접 책을 읽으시라)

영국, 프랑스에 갈 때마다 박물관에 포로로 잡혀있는 수많은 유물들을 보며 제국주의 한 모습을 보는구나 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나보다. (이 책에도 박물관, 미술관의 유래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미술작품의 저자와 의미, 해석을 넘어서 그 시대를 느끼고 역사를 살펴본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며 이야기로 잘 풀어내는 이야기꾼이 있다는 게 참 좋다.

재미있게 읽었다. 


p18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이런 고전미술품들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이를 석고로 복제해 팔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p20 오늘날 고전이라는 용어는 좁게 보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이지만, 크게 보면 기원전 8세기, 즉 호메로스의 그리스 시대에서 시작해 로마제국이 멸망하는 서기 5세기가지의 방대한 시기를 아우르는 역사 용어가 됩니다

p35 이 책 표지에 "나도 아르카디아에 있다"라고 적어놓았죠. 이 구절은 나도 행복의 당 아르카디아에 있다라는 의미인 동시에 당시 상류층 자제들만이 누리던 이탈리아 여행을 자신도 수행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p45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시대, 나이, 문화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를 표준화, 수치화, 계량화하려는 시도는 현대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p51 파르테논 신전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 시선의 한계를 역이용한 거죠. 인간의 눈은 탁월한 신체기관 중 하나지만 한계도 분명합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지만 우리의 눈은 구형이기 대문에 직선이 세계도 휘어져 들어옵니다

p54 파르테논 신전의 네면에는 총 92개의 메토프가 있는데 각각 네개의 주제로 나뉩니다. 서쪽에는 그리스인과 아마조네스의 사움, 북쪽에는 트로이전쟁, 동쪽에는 올림포스 신과 거신족의 싸움ㅇ, 남쪽에는 라피타이 부족과 켄타우로스의 싸움이 각각 묘사돼 있습니다. 이 싸움들의 공통점은 바로 인간과 반문명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p65 고대 그리스미술에서 보이는 군국주의적 분위기, 다시 말해 그리스 남성 조각들이 보여주는 육체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은 그리스미술에 드리워진 신비를 한꺼풀 걷어내면 드러나는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p87 미소를 띤 쿠로스 조각의 상당수가 묘지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같은 미소는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 그리고 그들의 충만했던 삶을 예찬하는 조각적 결과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p94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웃음을 되돌려주었다면 그의 제자인 알렉산드로스대왕에 이르러서는 구체적인 개인의 얼굴이 살아나게 됩니다

p99 빙켈만이나 레싱 모두 라오콘 군상의 표정을 비명이 아니라 신음 정도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고전을 통해 모든 것을 초월한 인간의 고귀한 정신성을 강조하려 했고, 이런 고집 탓에 라오콘 군상은 울고 있어도 울지 않는 모습으로 해석된 셈이죠

p102 프랑스의 랭스 대성당 입구에 자리한 천사상이 대표적인 사례지요. 대천사 가브리엘의 조각상으로, 기쁜 표정으로 성모마리아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p142 진신의 미소에 뒤센의 이름을 붙인 것은 심리학자 폴 에크먼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진짜 미소는 입꼬리 근육이 올라가고 이마 근육과 눈 밑 근육이 내려가서 눈꼬리에 주름이 생겨야 한다고 합니다

p155 누가 고전을 중심으로 세기의 명작을 차지하는가는 곧 누가 유럽의 정신적 뿌리를 차지하는가의 문제, 즉 유럽 전역에서 권위를 발휘할 정통성 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벌인 이같은 약탈극은 고전의 지위를 한층 더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167 슬론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구성된 초기 영국박물관은 자연과학의 신비함이나 인간의 진기한 문화를 함께 보여주면서 하나의 소우주를 창조한 셈이었죠

p169 윌리엄 해밀턴도 이 협회 소속이었는데 한마디로 영국의 돈많은 귀족 자제들이나 성공한 평민 자제들이 어울려 노는 클럽이었습니다. 이 한량들의 공통분모는 예술과 술이었던 것 같습니다

p170 세리아 루도는 심각한 문제도 놀면서 풀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무 골치 아프게 살지 말자는 거죠. 비바 라 비르투는 고상한 취향이여 영원하라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p182 내셔널 갤러리는 1838년 트라팔가 광장에 완공됩니다. 당시 소장품수를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는데, 이런 대담한 건축적 결정에는 프랑스의 루브르에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 작동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p192 마티스의 경우 색채의 변형과 강조를 통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피카소는 형태의 압축에 집중한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두 작가 모두 아프리카 원시 조각의 영향을 받아 대범한 생략과 왜곡을 통한 마법적이고도 강렬한 힘을 추구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p197 오래된 과거의 건축물을 현대의 박물관으로 사용할 때는 늘 공간이 이어지지 않는 문제, 관람객의 접근이 어려운 문제 등이 발생합니다. 루브르 박물관이 뜰 한가운데에 커다란 피라미드를 짓는 혁신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면 영국의 내셔널갤러리는 상당히 보수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꾀합니다

p209 무엇보다 카의 주장은 역사가 과거의 시점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의해 얼마든지 재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p213 흑사병은 1347년 겨울 시칠리아에 상륙한 후 곧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348년 봄부터 피사, 피렌체, 시에나 같은 중부 내륙의 도시들을 차례대로 괴멸시켰고 곧이어 유럽 구석구석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죠

p222 현대인들이 과학과 의료의 언어로 전염병을 설명하지만 중세인들은 종교의 언어로 전염병을 이해했고 신의 벌을 피하기 위해 더욱 절실하게 종교에 매달리게 되었죠

p231 성당 건축을 후원하는 것보다 성당 내부의 그림을 후원하는 것이 비용 면에서 효과적이라는 것을 피렌체 사람들은 상인의 도시 출신답게 일찌감치 알아차렸던 것이죠. 소위 말해 '가성비'가 좋았기 때문에 흑사병 이후 제대화에 대한 후원이 집중적으로 늘어났습니다

p241 성 게오르기우스와 성 마르코는 도나텔로의 작품이고 세례자 요한은 기베르티의 잡품입니다. 지금은 도나텔로가 훨씬 유명하지만 기베르티 역시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습니다

p243 프랑스 북부에 작은 베니스로 불리는 콜마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으로 동화 속 마을처럼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p255 뭉크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뭉크에게 그림이란 눈앞에 놓인 세계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속의 대상과 그것의 느낌을 되살리는 일이었습니다

p258 역사적으로 흑사병은 르네상스로 이어진 반면 스페인 독감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두 갈림길을 코로나19 이후의 미래에 투영해본다면 우리에게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장밋빛 세계의 가능성과, 지금보다 더 파괴적인 대재앙의 가능성이 공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p264 예술가들은 완벽함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겪는 일상적 번민을 에술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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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스승 장량 더봄 평전 시리즈 2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 더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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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왕의 스승 장량

 : 위리

 : 더봄

 : 2021/10/08 - 2021/10/17


초한지의 주역은 항우와 유방이겠지만 유방의 3총사 한신, 소하, 장량이 없었다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방의 책사였던 장량에 대해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었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장량은 의문의 노인에게 병법의 비법책을 얻게 된다.

10년간의 공부는 장량을 암살자에서 책사로 변화시킨다.

이후 그는 유방을 만나 그의 계책을 널리 펼친다. 

한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로 몇 번 유방을 떠나긴 했었으나 다시 유방에게 돌아와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최정점에 있을 때 미련없이 모든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며 신선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한신과 소하가 유방에게 숙청을 당하지만 장량은 자신의 천수를 누린 후 죽게 된다. 

일찌감치 유방의 그릇을 알아보았던 걸까? 그의 선견지명이 놀라울 따름이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제갈량은 천문을 읽고 하늘을 움직여 질 것 같은 싸움을 이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내용은 대부분 뻥이다.

이 책을 보면 장량이 마치 삼국지연의의 제갈량과 같이 활약을 한다.

모든 일을 미리 알고 있으며, 그에 맞는 적절한 계책을 베풀고 이를 통하여 승리한다. 

장량이 개입하여 패배하거나 잘못된 전쟁이나 정책이 없다. 

너무나 완벽해서 이게 사실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른 책을 통해서 장량의 모습을 추가적으로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재미있게는 읽었다. 


7% 세 번째 진시황 저격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후대 사람들에게 제왕의 스승으로 존경 받는 장량이다. 그는 자신이 추진한 진시황 저격 사건이 그처럼 천하를 뒤흔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8% 사마천의 사기에는 장량의 지위가 소하와 조참 다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장량의 일생을 총괄하여 제왕의 스승이라는 한마디 말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12% 창해군은 평소에도 장량에게 일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먼저 퇴각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에 부합하고, 이 점이야말로 도가에서 말하는 굽은 것이 온전하다는 원리라고 말했다

16% 10년동안 칼 한 자루를 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정말 공허한 시구가 아니다. 장량은 은거 기간 내내 매일 문을 닫고 앉아 태공병법과 옛날 서적을 읽었다

23% 유방은 마치 고정된 모양이 없는 큰 자루처럼 자신의 사고와 주장은 없지만 드넓은 포용력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

28% 어찌된 영문인지 장량은 한왕을 보좌할 때도 몇 가지 작은 계책을 제시했지만 늘 미진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유방과 한자리에서 만나자 자신의 지혜가 마구 용솟음쳐 오르는 것 같았다. 유방의 질문에 장량은 잠시 생각하닥 바로 영감을 뿜어냈다

30% 남양 군수의 귀의를 윤허하노라. 아울러 그들의 목숨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한다

38% 가장 먼저 등장한 돌은 바로 조무상이었다. 그는 유방의 군대에서 좌사마(군대 내의 법 집행관)를 맡고 있었다. 그는 항우가 유방을 아니꼽게 생각할 때 그 낌새를 알아채고 바로 소인배로서 밀고자 역할을 했다. 그는 항우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려 한다고 밀고했다. 그의 목적은 물론 항우로부터 큰 상을 받기 위함이었다

40% 항백은 애초에 장량이 하비에서 아무 계획없이 만난 사람이지만 이처럼 열악한 상황에서 생명의 숨길을 불러오는 훌륭한 역할을 했다. 이번에 장량이 운용한 계책, 즉 항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무마한 계책은 비록 소박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역사 기록에 뚜렷한 자취로 남아 있다

41% 항우는 범증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유방의 언행을 보고 그가 자신의 적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과도하게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48% 유방이 갑자기 기습병을 운용하여 일거에 관중을 함락한 것은 모두 겉으로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몰래 진창 길로 건너가는 한신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다. 한신의 첫 번째 작품은 그의 군사적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준 한 편의 명작이었다

49% 한왕 성의 피살로 한나라의 재상이 되려면 장량의 꿈은 산산히 깨어졌다. 장량은 고통스러운 사유 속에서 마침내 한나라를 재건하고 선왕의 후예를 세우는 일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인생 행로는 이 지점에서 한나라 재건이라는 이전의 꿈이 한나라 보좌라는 현재의 꿈으로 바뀌게 된다

51% 그는 몰래 노현을 출발하여 호릉을 거친 후 하나라 군대의 후방을 돌아 밤새 행군했다. 이로써 군사상 유명한 장거리 습격 사건의 막이 올랐다. 항우는 연도 내내 깃발도 숨기고 복도 울리지 않을 채 아무도 몰래 팽성으로 접근하여 여명이 밝아올 무렵 한나라 군대가 아직 꿈속을 헤맬 때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유방은 서초패왕의 담력과 용맹함을 제대로 맛보았다.

52% 사마천도 인정사정없이 그의 추악한 행위를 기록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방의 도주 수레에는 자신의 두 아이가 함께 타고 있었다. 그런데 항우의 군대가 바짝 추격하자 유방은 악독한 마음으로 세 번이나 자신의 두 아이를 발로 차서 수레에서 떨어뜨렸다

p57% 그가 역이기의 계책에 반대한 것은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곧이곧대로 옛 성현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된다

59% 한신은 이미 유방과 항우 밖에 자리 잡은 제3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유방과 항우 입장에서는 한신이 어떤 펴네 붙느냐에 따라 초한전쟁의 마지막 균형이 솔리게 되어 있었다. 한신은 양편의 균형을 좌우할 중요한 저울추였다

66% 장량이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작은 절차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항우를 격파하기만 하면 더 이상 담판이나 조약을 맺을 치료가 없습니다.

82% 유방이 장량, 소하, 한신 세 사람을 평가하면서 내린 이 명언은 당장 그 자리에서 만조백관의 갈채를 받았고, 후대 사람들도 이 말을 흥미진진하게 언급하며 유방이 중요한 문제의 핵심을 찔렀다고 칭찬하곤 했다

84% 장량은 유순하게 처신하며 남과 다투지 않음이 자연의 원리에 따르는 행동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6% 신은 말을 더듬어서 정당한 논리를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신은 떠듬거리더라도 그 일의 불감함은 압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신다면 신은 떠듬거리더라도 조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88% 장량이 말한 네 사람은 바로 민간 전설에서 말하는 상산사호였다. 상산은 지금의 산시성 상현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호는 백발노인이란 뜻이다. 이 네 노인의 이름은 각각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녹리선생이다

95% 후세 연구자들은 장량의 기이함이 그가 터득한 나아감과 물러남의 방식, 그리고 등장과 퇴장의 과정에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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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대청 외교와 『열하일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서가명강 시리즈 16
구범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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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구범진

 : 21세기북스

 : 2021/09/15 - 2021/09/20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제목만 들어봤지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여름별장이라고 하지만 사실 여러달동안 이곳에 청나라 황제가 머물렀기 때문에 북경에 이어 제2의 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저자는 조선 정조때 파견된 사신들이 북경에서 열하로 변경된 일정을 소화하며 변화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와 국제정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조때까지 남아있던 명나라 숭배와 청나라 배척의 모습이 1780년 정조의 사신파견을 기점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광해군의 명나라,청나라 등거리 외교나 강홍립장군의 항복등에 대해서 현대 역사가들은 광해군의 통찰력을 높이 사고 있는데 반해, 저자는 이런 시각을 부정한다. 

강홍립의 항복도 군사들이 상당히 죽고 나서 어쩔 수 없는 항복이었다고 주장하고, 광해군도 통찰력이 있어 등거리 외교를 한 것이 아니고 청나라가 조선까지 신경을 쓰지 않아서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정확한지는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국뽕에 취해서인지 아직은 광해군의 통찰력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청나라의 최대 전성기 시절과 조선의 르네상스 시절을 알려주면서 티벳등 국제관계까지 두루 살펴보는 책은 드물었는데 당시 국제정세까지 알 수 있어 재미있었다.



p14 열하일기 속의 열하 이야기가 사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는 나의 발견과 1780년을 분수령으로 조선과 청의 관계가 크게 달라졌다는 나의 핵심 주장만은, 조선 후기 사신의 외교 활동 및 여행에 관한 한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깨알 같은 지식들과 더불어 독자 여러분께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p39 인조는 조선 사람들이 금수와 다름이 없다고 무시하던 오랑캐의 우두머리 홍타이지에게 오랑캐의 방식으로 절을 하면서 오랑캐의 신하가 되었다

p68 입관 전 시기 서울과 선양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의 입장에서 청나라의 베이징 천도는 여행 거리와 기간, 그리고 여행으로 인한 노고가 대폭 증가함을 의미했다. 압록강을 건너 선양까지는 옛날 거리 단위로 540리에 불과했다.

p84 17세기 전반 후금-청을 둘러싼 세계에서 조선은 사실 명에 다음가는 큰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조선의 위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터이지만, 1637년 2월 24일 삼전도의 항복 의식이 끝난 뒤에 열린 연회에서 인조에게 주어졌던 의전상 지위를 소개하는 것으로 조선의 위상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p104 이제 열하는 황제가 매년 거의 다섯 달을 머무는 장소가 된 셈이니, 사실상 베이징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두 번째 수도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115 머나먼 이역에서 찾아와 자리를 함께한 특별 하객들은 바로 건륭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 제국의 각 부분을 대표하는 존재였으니, 그날 하례의 광경은 모르긴 몰라도 그 자신이 일군 제국의 축도로 비치지 않았을까?

p126 건륭제 즉위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영조는 52년의 재위 기간 내내 건륭의 생일을 이듬해 정월에야 뒤늦게 축하하는 관행을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지켰다

p139 1780년 진하 특사 박명원에게 주어진 주된 임무는 물론 팔월 13일의 칠순 만수절을 축하하는 것이었지만, 공식 명칭이 성절겸사은사가 아니라 진하겸사은사였다는 점도 주의를 요한다

p157 당시의 기록물들이 제도적,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열하일기는 시대를 앞서가던 자유로운 인간 박지원이 쓴 책이기에 그러한 제약에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p165 청의 최하급 9품 관원들보다도 아래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정사,부사를 청의 2품,3품 관원들과 나란히 서게 한 것은 파격적인 우대라고 할 만했다

p170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조선 사신 일행이 황제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으며, 이러한 종류의 궁정 행사에 조선 사신이 참석한 것은 이때가 역사상 처음이었다는 점이다.

p191 정조는 판첸과의 만남 및 불상 수수와 관련하여 상주내용통지자문 외에 별도의 추가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박명원이 올린 별단에서 찾을 수 있다

p232 박명원은 줄곧 머리를 곧추 치켜들고 있었다. 박지원에 따르자면, 박명원의 배고 거부는 예부상서나 군기대신 등의 강요를 이겨내고 성취한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p260 열하일기에서 적어도 직,간접적으로 판첸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라고 무작정 믿지 말아야 한다

p292 1780년대 초 청의 조선 사신 접대에 일어난 변화는 정조와 건륭이 성의와 은혜를 주고받는 우호 행위를 상승적으로 반복한 결과로 나타난 양국 관계의 증진 또는 격상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p302 조선은 분명 외국으로 인식되었고, 또 그렇게 분류되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조선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청나라에는 절대로 외국이라고 부르지 않는 외번이 존재하였다

p319 건륭제는 원래 연반조근을 하러 온 외번 왕공 등을 접대하는 자리에 조선 사신 등을 초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p321 그들은 모두 건륭 연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에 완전히 복속한 집단이나 지역의 수장들이었다. 고희천자 건륭에게 그들을 대거 한자리에 모은 칠순 만수절의 하례는 곧 자신이 그때까지 평생 이룩한 업적을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p333 홍경모의 친청 언설은 1780년대 이후 조선 사인들의 청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고 보아도 큰 잘못은 아닐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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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야기 - 신들과 전쟁, 기사들의 시대
안인희 지음 / 지식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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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이야기

 : 안인희

 : 지식서재

 : 2021/08/07 - 2021/09/15


시대를 구분해서 역사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사실 시대를 구분하는게 쉽지는 않다.

보통은 시대의 특징이 서로 오버랩되면서 시대가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으로 나는 알고 있다.

이 책에서는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인 1492년까지로 보고 있다.

시대를 어떻게 나누든 중세는 중세만의 특징이 있다.

기독교 중심이라는 것.

기독교가 어떻게 유럽의 중심이 되었고, 그 안에서 삶과 문학, 그리고 전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껍지 않은 분량에 꽤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어 저자의 필력이 대단함을 느낀다.

특히 그동안 잘 몰랐던 중세 문학, 특히 기사문학에 대해서 배웠다.

롤랑의 노래도 말만 들어봤지 내용이나 그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는데 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어서 도움이 됐다.

유럽에 여행을 가게 되면 작은 시골 마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설명이 중세를 그대로 간직한 동네라는 말이다.

막상 가보면 이게 중세마을인가 싶기도 하지만 내가 보고싶은 유럽은 사실 그런 모습이긴 하다.

지금이야 낭만적으로 보이는 중세시대지만 당시 살던 사람들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책을 읽으며 낭만만 생각한 내가 조금은 부끄러워진다.

그래도 중세가 이뻐보이고 그런 유럽을 가보고 싶은 맘은 더 커지기만 한다. 


p16 르네상스가 시작할 때에는 중세의 많은 요소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그 마지막 국민인 미술적 전성기인 16세기는 이미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된 다음이었다

p22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에 속하는 (호전적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평화로운) 나일 문명이 만나는 동부 지중해의 크레타 섬이 바로 고대 유럽 문명의 시작 지점이다(기원전 3000년경). 서로 이질적인 두 문명권이 만나는 곳이니, 고대 크레타 문명은 처음부터 매우 역동적이고 이동과 왕래가 빈번하고 활기에 넘쳤다

p34 그동안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문명인으로서 유럽 역사의 주역이었다면, 이제 새로 펼쳐지는 중세에는 로마 사람들이 "야만인"이라 불렀던 유럽 북방의 게르만 사람들이 주역으로 등장했다

p38 이베리아반도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올라가던 아랍 세력을 막아낸 사람이 카를 대제(독일에서는 카를 대제,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 라틴어로는 카롤루스 대제)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이다. 800년에 그의 손자 카를 대제가 황제가 되면서 서유럽은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된다(이 시기를 카를 대제 시대의 르네상스라는 뜻으로 카롤링 왕조 르네상스라 한다)

p45 최근 연구자들은 주로 언어를 기준으로 문화를 가르고 있다. '프랑스 문화'란 프랑스어 문화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p55 메로빙 왕가가 힘없이 끝나고 카롤링 왕가가 시작되었다(751). 따져보면 피핀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왕권을 찬탈한 인물인데, 유럽 종교 지도자인 로마 주교가 재빨리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도덕성이 뒤로 밀리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p65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왕은 이탈리아의 북부를 비잔틴 제국보다는 서유럽의 북부와 결합시켰다. 그리고 이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과는 별개로 새로운 유럽의 시작을 알린 일이었다

p66 800년 카를 대제의 대관식은 이것을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이 해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기억하기에 편하고, 기억하면 매우 쓸모가 있는 연도이기도 하다

p68 하룬 알-라시드는 아바스 왕조의 황제로서, 이베리아반도에 자리 잡은 우마이야 왕조와 대립하고 있었다. 또한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왕국은 앞에서 보았듯이 카를 대제가 정복하지 못한 적이었다

p81 이 문서는 위조의 시대이던 중세에 나타난 가장 유명한 위조문서의 하나다. 신앙심 깊은 수도사 한 명 도는 여러 명이 750~850년 사이에 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서를 천연덕스럽게 위조했던 것이다.

p83 강력한 통치권을 기반으로 한 왕이 황제가 될 경우에만 황제의 지위도 튼튼했는데, 이 경우에도 그의 힘은 황제라는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질적으로 지닌 영통의 통치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p84 8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서유럽에 출몰하기 시작한 북쪽의 해적들은 해안 지역에서 주로 수도원과 교회들을 약탈했다. 9세기가 되면서 그들의 출몰 횟수가 더욱 늘었고, 10세기가 되자 그들 중 일부가 약탈하던 지역에 차츰 눌러앉기 시작했다.

p108 1060년까지 14년동안 그는 거의 끊임없이 온갖 전쟁을 겪었다. 프랑스 왕과 앙주 백작의 합작 공격까지 막아내고 나서야 마침내 윌리엄은 확고한 승리를 거두었다

p117 이 전투에서 해럴드 왕과 두 형제가 노르만 기사들의 손에 전사했다. 윌리엄은 나중에 해럴드 왕이 쓰려져 죽은 바로 그 자리에 거대한 기념교회를 건설하게 했다. 이것이 배틀 수도원이다.

p122 그의 시대에 잉글랜드의 인구 및 재산 상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왔다. 이 기록은 원래는 왕의 두루마리라 불리는 것이지만, 자주 최후의 심판 책이라고도 불린다. 마치 최후의 심판을 위한 것처럼 그 무엇 하나 빼지 않고 기록했다는 뜻이다.

p129 프랑스 노르망디로 여행을 한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외 자수 박물관을 찾아가 보자. 저 유명한 정복자 윌리엄의 이야기를 새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p138 로마에서 하인리히 4세(당시 독일 왕이자 이탈리아 왕)에게 밀린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에게서 다급한 구조 요청이 왔다. 교황의 봉신이던 로베르는 아드리아해안을 버려두고 서둘로 로마로 달려가서 하인리히 4세를 쫓아내고 교황을 구출했다. 대신 그의 부하들은 로마를 잔인하게 약탈해서 교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p143 매우 뛰어난 교육을 받고 당대의 기독교와 아랍 세계에서 좋은 점을 모조리 받아들인 로저2세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였으며, 서방에서는 예가 없는 하렘을 거느렸다.

p150 인기가 없는 교황이었다. 이 교황처럼 당대의 부자, 권력자, 왕 들과 대립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제한한 개혁가가 고위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다만 평신도들은 그의 개혁을 몹시 반겼다.

p165 로마카톨릭의 기틀을 세운 위대한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살레르노에서 쓸쓸히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옳은 일을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유배지에서 죽는다

p182 마라트에서 한 행위는 아랍 세계에 이교도(기독교) 침입자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알리는 예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아랍의 노래에는 "인육을 먹는 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그 옛날 십자군 전쟁 시기에 쳐들어온 프랑크 기사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p196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이렇게 큰일을 벌여서 마련한 권력과 재물의 이점을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자크 드 믈레가 죽던 같은 해에, 극히 우유부단하던 클레멘스 교황도 죽고, 필리프 왕까지 죽었기 때문이다

p198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는 중세 프랑스의 왕권을 강력하게 만든 왕으로서,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간 사건(아비뇽 유수, 1309~1377)과 성전기사단을 파괴한 일 덕분에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얻었다

p204 3차 십자군 전쟁의 마지막에 리처드가 귀국하다 같은 편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사정은 십자군에 동참한 유럽 영주들의 개인적 이권이 기독교 공통의 전투라는 전체 이념과 동일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p208 전 유럽에서 종교수호를 위해 모였들었다는 연합 군대가 성지 회복은 커녕 같은 기독교 도시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지배하는 깡패 집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미 한 번 시작된 약탈의 버릇은 더욱 고약한 방향을 잡았다

p213 프랑크 사람들은 황금 장식품의 약탈에 열성이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예술품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탐색조를 구성해서 가장 가치 있는 물품들을 베네치아로 가져갔다. 오늘날에도 베네치아의 총독궁전에 그때의 보물 일부가 장식 또는 전시되고 있다

p225 아키텐 공작 윌리엄 9세는 총 11편의 노래들을 남겼는데 이들이 모두 그의 작품인지 아주 분명하지는 않다. 어쨋든 그의 이름을 달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p226 이런 모진 시험을 거친 끝에 여인들은 나그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않으리라 믿고 그가 마음에 들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러니까 목욕물을 마련하고 좋은 시간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는 거기서 8일 이상을 머물며 그들과 188번이나 섹스를 했단다

p233 앞서 3차 십자군 전쟁 이야기에서 만나본 사자심장 리처드는 헨리와 엘레오노르 사이에 태어난 셋째 왕자다. 그의 이야기와 또 다른 유명한 전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의 상당수는 잉글랜드가 아닌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p238 베네딕트 수도원 노래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카르미나 부라나의 중세 필사본이 발견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11,12,13세기에 쓰인 것들이다. 주고 (깨진) 라틴어와 중세 도이치어가 뒤섞여 있고, 많은 작품들은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몹시 불완전한 형태다. 옛날 필사본에 적힌 작품들이 지닌, 피하기 힘든 운명이다

p246 역사적으로는 기독교도들끼리의 싸움이던 것이 서사시 <롤랑의 노래>에서 갑자기 기독교와 이교도의 전투로 바뀌었다

p258 중세 시대를 논하려면 정교와 카톨릭을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정교와 카톨릭이 중세 시대인 1054년에 나뉘기 때문이다.

p265 이교도 기사나 기독교 기사나 가리지 않고 중세 기사 이야기들은 판타지 요소를 띠게 되었다. 중세 문학의 특성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판타지 요소를 지닌다는 점이다. 진지한 역사인 듯이 꾸민 이야기들에도 대부분 판타지 요소가 많이 섞여서 등장한다.

p272 크레티앵의 작품들은 1190년 무렵부터 활발해지는 중세 도이치 궁정 기사소설의 내용과 형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이치 소설 내용의 일부가 다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작품인 에다에도 스며든 만큼, 크레티앵을 전성기 중세 유럽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선구자라고 부를만하다

p279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간통 이야기인데,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자기들의 사랑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 두 사람의 무덤에서 자라난 나무들까지도 서로 뒤엉켜서 굳건히 하나가 된다. 성직자 계층의 작가가 이런 간통 소설을 쓰고, 게다가 그 사랑을 찬미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이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는 하다

p284 오늘날 우리는 종교가 지배한 중세 시대 유럽 여성을이 억압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물론 억압을 받았지만) 중세 전문가 르 고프에 따르면 중세 시대는 전반적인 생활이 후세보다 훨씬 불편한 상황에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평등한 사회였다고 한다. 물론 완전한 평등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p286 운문 에다의 시편들은 대략 800년대부터 130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아이슬란드의 여러 시인들이 쓴 시편들을 수집하여 새로 정리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40편 이상의 장시가 들어있다. 그중 16편까지가 신들의 노래이고, 그 뒤는 영웅들의 노래다

p291 대부분 젊은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낭만주의 작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와는 다른, 게르만 언어와 문화의 뿌리를 중세 문헌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고 야코프 그림의 열혈 제자 하나가 에다 문헌을 번역해서 스승에게 헌정햇다

p292 잔인하고 난폭한데도 여전히 점잖고 게다가 죽지 않는다는 그리스 신들에 비해, 게르만 신들이 지닌 그로테스크한 야만성은 현대인이 가상 세계에서 폭발시키는 난폭함과 코드가 잘 맞는 모양이다. 어쨋든 이들 게르만 신들과 수많은 중세 이야기들은 현대의 판타지 세계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부활했고, 또한 각종 변형까지도 경험하는 중이다

p296 페스트는 1347년에 시칠리아와 제노바를 거쳐 유럽 대륙에 상륙했다. 이듬해에는 벌써 피렌체, 베네치아 등 북부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보다 몇 해 앞서서 인도와 중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괴질로 쓰러졌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p305 언제나 큰 재앙의 시기에는 생각 없는 인간들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어 하는데, 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덕분에 인간이 손쓸 수 없는 두려운 상황에다가 인간의 불필요한 잔혹 행위까지 더해져서 전염병 시대의 삶은 더욱 끔찍해진다

p308 많은 이들이 좋은 것들을 소중하게 아끼고 간직했으나, 전염병이 닥치자 즐기지도 못한 채 죽거나 도망쳐야 했다. 내일을 위해 비축해 둔 것이 아무 소용 없음을 거듭 목격하고 보니,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을 과도하게 즐기자는 생각이 든 것도 이해가 된다

p320 그녀는 푸아티에에서 3주에 걸쳐 성직자와 고위직 인사들의 신뢰성 검사를 통과하고, 시녀들이 수행한 처녀성 검사도 통과했다

p321 2차 종교재판에서도 그녀는 다시 이단 판정을 받은 끝에 1431년 5월에 루앙의 시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사후에 추종자들이 그녀를 순교자로 여겨 숭배할 성유물이 나올까봐 불에 타고 남은 재는 센강에 뿌려졌다

p340 이런 사유의 맨 앞장에 선 인물이 페트라르카다.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소유했던 듯하다. 자연에 대한 미적 안목을 지니고 풍경과 자연을 즐기면서 그런 즐거움을 글로 남겼거니와, 유적지나 고전 서적에 대해서도 특별한 애착을 느꼈다

p348 출신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재능을 후원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다

p350 르네상스 시대 전제군주들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였다. 이런 경쟁 상황에서 특별히 유명한 통치자 집안들과 통치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인문주의자와 작가들을 후원했고, 학자와 작가들은 그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찬미하며 후세에 남겼다. 다만 그들이 행한 악행의 기록들도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다. 자기 힘을 과시하기를 좋아한 통치자들이 건축가, 조각가, 화가 등 예술가들을 후원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364 15세기 초에 태어난 마사초는 원근법을 거의 창안하다시피 하면서 미술에서 완전히 새로운 표현의 길을 열었다. 그때까지의 그림들이 2차원 화폭에서 2차원적인 표현만이 가능했다면, 28살에 요절한 이 젊은 화가는 그림에 깊이와 축을 만들어내면서 3차원의 모습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p384 이들 부부 카톨릭 왕들은 교황의 칙서에 따라, 통합된 에스파냐 왕국에 종교재판 제도를 도입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에스파냐 왕들은 유럽에서 가장 지독한 종교재판과 이교도 및 이단 탄압 정책을 계속해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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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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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 어크로스

 : 2021/08/28 - 2021/09/05


요즘 아주 핫한 책..

철학자들의 나라의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쓴 철학 입문서이자 에세이. 

서양철학만 쓴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인지 두명의 동양철학자도 포함이 되어 있다.

그 두명이 중국과 일본이다. 

철학자라고 할 수도 없는 일본인을 끼워넣는걸 보면 역시 서양에게 동양은 중국과 일본인가보다.

나에겐 평범한 책으로 보이는데 게속 베스트셀러인걸 보면 다른 사람들에겐 꽤 재미있고 괜찮은 책인가보다.. 


2%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5%마르쿠스는 제국을 통치하며 자신의 악마와 씨름을 했고, 나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나의 악마와 씨름을 한다

6% 흄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사실 명제에서 윤리 명제로 넘어가선 안 된다. 침대에서 나가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수익 창출에도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7% 마르쿠스는 스스로에게 생각을 그만두고 행동에 나서라고 누차 촉구한다. 좋은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관둬라. 좋은 사람이 되어라. 철학과 철학을 논하는 것의 차이는 와인을 마시는 것과 와인을 논하는 것의 차이와 같다

9% 철학자들은 거의 외계인에 가까운 이질성이 있다.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조차도 자신을 부적응자로 여겼다. 견유학파의 창시자인 디오게네스는 괴짜 중의 괴짜였다

10% 소크라테스가 인간 탐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오늘날에도 여전히 철학적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것은 이 순진한 무지,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 놀랍고 새로운 천진난만함을 도입한 것이다.

10%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의 사상 같은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수단만 있을 뿐, 그 끝은 없었다

11% 좋은 하루 보내세요나 이와 비슷한 무의미한 표현 대신 우리 서로에게 느긋해지세요나 천천히 하세요라는 말로 인사해보자. 이런 명령식의 표현을 자주 말하다 보면 정말로 속도를 줄이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15%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16% 혼자서 두 발로 여행할 때만큼...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 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걷기는 루소를 살렸다. 또한 걷기는 루소를 죽이기도 했다

17% 루소는 글을 꾸며내지 않는다. 루소의 철학은 다음 네 어절로 요약할 수 있다. 자연은 좋고 사회는 나쁘다

21% 어떤 사람은 소로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소로가 되는 데 성공한다. 대부분은 억지로 소로를 떠안는다

22% 소로가 받는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맡겼다

22% 소로의 한 추종자가 말했듯, 월든은 숲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 아니다. 월든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다

24% 마르쿠스와 달리 소로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의식이 막 돌아온 순간 "꿈과 사색 사이의 그 모호한 지대"를 만끽했고, "모든 지성은 아침과 함께 깨어난다"라는 고대 인도 경전 베다의 한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25% 소로는 모두가 자신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월든은 각성제로 쓰인 것이지, 처방전은 아니었다.

28% 보는 데는 시간뿐만 아니라 거리도 필요하다고, 소로가 내게 말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28% 원래 가려고 했던 쇼펜하우어 기록보관소는 문을 닫았지만 분명 문을 연 곳이 있을 것이다. 아닌가 보다. 유럽인은 공휴일에 진지하다

29% 여태껏 염세적인 철학자는 여럿 있었지만 염세주의를 진정으로 파고든 철학자는 쇼펜하우어 단 한 명뿐이다

30% 철학계의 최하층민이었던 쇼펜하우어는 비판받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것이 더 가혹한 운명임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거의 평생 동안 그의 책은 읽히지 ㅇ낳았고 그의 생각은 사랑받지 못했다

31%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아무 모순도 느끼지 못했다. 이 세계는 실재로 고통이자 엄청난 오류이지만, 그 고통이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가 있다. 짧은 즐거움의 순간들

33% 좋은 철학자는 좋은 청자다. 지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이들은 얼마나 낯설든 간에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이국의 고대 문헌에 숨은 지혜를 발견했다

33% 쇼펜하우어가 당시로선 드물게 불교를 깊이 이해하긴 했지만 자기가 배운 바를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34% 쇼펜하우어가 옳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면 그들의 생각이 내 생각을 밀어낸다

36% 다른 학파는 오로지 아테네의 남성 시민만 받아들인 반면 에피쿠로스는 해방 노예와 여성도 환영했고, 테미스타에게도 여러 편의 글을 헌정했다

38% 정적인 쾌락이 더 우월한 쾌락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적인 쾌락은 목표지, 수단이 아니다

38% 1417년에 포지오 브라치올리나라는 이름의 용감한 학자가 사라진 고대 유물을 찾아 남유럽을 샅샅이 뒤지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마지막 한 부를 발견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을 정리한 책이었다

42%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 보트로 대서양을 항해하거나 에베레스트산을 오를 필요는 없다. 그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뿐이다

43% 배유의 급진적 공감 능력은 관심에 대한 배유의 급진적 견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44%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해결책을 찾아 나서지 말것, 기다릴 것

46% 8월 24일 저녁, 동료가 방문한 직후 배유는 코마 상태에 빠졌다.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시몬 베유는 사망했다. 향년 34세였다

49% 인도에서는 그 무엇도 마지막까지 끝난 것이 아니며, 심지어 마지막도 끝이 아니다. 모든 결말은 하나의 시작이다

50% 미국인 선교사 존 모트가 간디에게 평생 가장 창조적이었던 경험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간디는 남아공에서 겪었던 기차 일화를 들려주었다. 조용한 결의의 순간을 창조와 동일한 것으로 본 것이다

51% 간디는 남성성에 집착했다. 그가 쓴 글에는 남자다움과 힘, 용기 같은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52% 간디는 인도의 아버지였지만 제 자식에게는 형편없는 아버지였다. 정계에서도 간디는 여러 실수를 저질렀다

52% 필요하다면 그것이 폭력이더라도 자기 의무를 다해아 한다는 것이 바가바드기타의 기존 해석이다

52% 바가바드기타는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시도에는 100퍼센트의 노력을, 그 결과에는 정확히 0퍼센트의 노력만을 기울일 것

53%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55% 나는 은밀하게, 깨긋하지 못하게 싸운다. 겉으로는 고분고분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쟁 중이다

58% 노자가 중국 철하계의 서핑족이라면 공자는 땍땍거리는 선생님이다

62% 일본인만큼 좁은 공간에 사는 사람은 없다. 구석 인간들이다

62% 베갯머리 서책을 영어로 옮긴 메러디스 매키니는 짤막한 글과 생각과 일화를 누빈 불규칙한 퀼트라고 말한다

63% 소로가 가르쳐주었듯이, 우리는 볼 준비가 된 것만 본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작은 것을 볼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69% 니체는 여름에는 스위스에, 겨울에는 이탈리아나 남프랑스에 있었다. 니체가 가진 것이라곤 옷, 글을 쓸 종이, 옷과 종이를 담은 커다란 가방이 전부였다

70% 니체는 내게 고함을 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물음표의 철학자였다면 니체는 느낌표의 철학자다. 니체는 느낌표를 사랑한다. 가끔은 두세 개씩 붙여 스기도 한다

74% 정원 벽 뒤에 편안하게 자리잡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스토아 학파는 모두가 지나다니고 상인들과 사제들과 매춘부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철학을 설파했다. 스토아학파에게 철학은 공적인 행위였다

75%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면 작은 기쁨을 더 섬세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는 뜬금없이 우리가 우리라서, 우리가 우연히 살게 된 이 우주 안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살고 있어서 기쁨을 느낀다

75% 스토아철학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이런 무관한 것들은 우리의 인성이나 행복에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무관한 것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79% 이성적 행동은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행동이며 거기에는 냉정한 점이 조금도 없다

82%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86% 나이가 들면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을 안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87% 이 나이에 공공연하게 항의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노년의 장점 중 하나다

89% 보부아르가 나이 듦에 집착한 것처럼 몽테뉴는 죽음에, 더 정확히 말하면 죽어가는 과정에 집착했다

91% 몽테뉴는 말했다. "문이 닫혔는지 알아보려면 먼저 문을 밀어봐야 한다"

92%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93%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하라. 그 뜻밖의 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93% 내가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식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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