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 개정증보판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2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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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혼자 경주여행

 : 황윤

 : 책읽는고양이

 : 2022/07/11 - 2022/07/15


재미있는 스타일의 여행에세이가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혼자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1인 투어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답사를 하는 컨셉이다. 

경주는 이탈리아의 로마, 일본의 교토처럼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곳이다.

이 말은 하루이틀로 다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저자는 일박이일로 경주를 다니며 경주의 문화유산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유명한 불국사, 석굴암을 포함하여 거대고분군, 남산 그리고 최근에 핫한 황리단길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꼭 가야할 유적지가 많이 있지만 초보자나 가벼운 답사자가 다녀야 할 곳은 거의 다 흝는 것 같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문무왕릉으로 알려졌던 원성왕릉이 현재의 대왕암으로 바뀌는 에피소드는 참 재미있었다. 이런 에피소드를 유적지에서 해야 하는데...

다른 시리즈도 계속 읽어봐야겠다.

역시 스토리텔링이 잘 된 책이 읽기도 쉽고 재미있다. 


p19 봉황대와 황남대총 같은 거대한 무덤이 만들어지던 시기는 신라 시대 마립간이라 불리던 왕들이 즉위하던 때로, 17대 내물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의 기간이다

p23 당시 일본인들은 고분 안에 묻혀 있던 유물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봉분은 대충 걷어내어 놀랍게도 경주 철도 공사에 필요한 흙과 돌로 사용해버렸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지만 당시 문화재에 대한 인식 수준 및 식민지를 낮춰 보는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 증거이기도 하다.

p36 다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서예가이자 고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는 경주 대릉원과 봉황대의 언덕을 왕릉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완당집에 따르면 “경주에 조산이 하나 무너졌는데, 석축이 나온 것으로 보아 왕릉이 틀림없다”하며 남다른 그의 통찰력을 남기고 있다

p37 발굴된 5개의 금관 중 3개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중이며, 나머지 2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3개의 금관은 각각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관이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황남대총, 금령총 금관이다.

p49 신라 왕릉으로 알려진 고분은 38기이고 이중 경주 내 왕릉으로 알려진 고분은 총 36기인데, 이 중 상당수는 위치가 삼국사기 또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맞지 않아 근현대들어와 여러 연구자들이 위치를 새롭게 비정하기도 했다. 다만 학자마다 주장들이 조금씩 달라서 정확하게 누구의 무덤이다라고 판단하기가 쉽지는 않다.

p69 5-6세기 초반 마립간 시대 신라 왕들이 경주 중앙에 거대한 고분을 만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면, 6-7세기 신라왕들은 평지에 거대 사찰을 만들어서 왕가의 힘을 과시했다.

p73 이렇게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시대인 954년, 벼락을 맞고 불타 사라지면서 약 300년 간의 생애를 마감한다. 그럼 역사책에서 배운 몽고 침입으로 불타서 없어졌다는 황룡사 9층 목탑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몽고에 의해 불타 사라진 목팝은 고려 시대 때 복원한 황룡사 9층 목탑으로 고려 현종 때인 1012년, 이전에 벼락을 맞아 사라진 탑을 새로 올리며 만든 것이다. 다름 아닌 이것이 1238년, 몽고 침입으로 사라지게 된다. 결국 신라가 만든 탑은 300년, 고려가 만든 탑은 200년, 총 합쳐서 약 500년을 경주의 기둥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p81 황룡사가 진흥왕과 선덕여왕의 전설이 함께하는 절이라면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만든 절이다

p100 문무왕은 이처럼 위급하던 674년, 이곳에 못을 파고 인공 산을 만들며 화초와 진기한 동물을 기르려 하고 있었다. 여유를 부리 ㄴ것이 아니라 문무왕은 신라 왕으로 봉해진 동생의 저택을 왕실 정원으로 만들어버려 내부 반발을 막고자 한 것이다. 당 편에 선다면 왕의 동생일지라도 신라에 돌아올 자리는 없다는 의미였다

p113 항복 문서를 보내고 그대로 항복했으면 한반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겠으나, 문무왕은 이후 한반도 역사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그런 왕들과는 격이 달랐다.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해내는 인물이었기에 뒤로 물러나는 척하며 준비한 반격을 통해 결국 당나라로부터 승리를 거둔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가장 걸맞는 인물이 한반도에서는 문무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실리를 위해서는 잠시 고개를 숙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난 저 비굴한 표문에 오히려 문무왕의 진면목이 숨겨 있는 듯하여 좋아한다

p118 문무왕은 당시 사람들의 불교 세계관으로 볼 때 인간에서 오히려 짐승으로 격하될지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짐승도 될 수 있다는 사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전 성골 의식이나 부처 재림을 이야기하던 신라 왕들과는 확실히 인품의 격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p125 고고학자 황수영 박사는 동국대 총장 시절인 1982년, 한국 종의 유별난 개성에 대하여 이는 만파식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에 따르면 원통형 긴 음통은 다름 아닌 피리를 형상화한 것이며 용은 피리를 전해준 문무왕을 의미한다 하겠다. 즉 삼국 통일의 영웅이자 만파식적의 주인공인 문무왕의 업적을 종에 장식한 것으로 보자 만파식적이 단순한 전설이 아닌 구체적 모습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p151 석가탑뿐만 아니라 신라의 석탑에서 무구정경 혹은 소탑이 봉안된 사례가 여럿 발견된다. 결국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석탑을 짓고 관리, 유지시키는 데에 거대한 원동력이 된 경전이었던 것이다.

p165 절이 많아지자 이렇듯 본래 신성되던 남산이 더욱 신성시되면서 불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되어진다. 이에 거의 300여 년 동안 특히 통일신라 시대 동안 경주 사람들은 자신의 가문과 집안을 위한 사찰, 또는 사찰이 자금상 한계가 있다면 탑이라도, 그것도 힘들면 돌에 부처를 조각하는 마애불이라도 새기면서 기복 신앙의 꽃을 피웠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만든 것처럼 신라인 하나하나가 남산에 자신만의 불국사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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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탈박물관 - 제국주의는 어떻게 식민지 문화를 말살시켰나
댄 힉스 지음, 정영은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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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1 - 2022/07/18


유럽이 아프리카, 아시아를 침략하면서 뺏은 유적물에 대해 쓴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도 프랑스를 비롯해 많은 나라의 침략을 받으면서 문화재를 강탈당한 역사가 있어 더 관심이 갔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넓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베닌이라는 나이지리아 쪽에 있던 아프리카 부족을 영국군이 파괴하면서 약탈한 문화재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직 한 사건만 기록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학자로서 자신의 나라의 치부를 이렇게 자세하고 집요하게 조사하고 책을 냈다는데 놀라웠다.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라든가, 영국에 가지고 왔기 때문에 잘 보존할 수 있었다는 등의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류보편의 발전이라는 허황된 박물관의 목표에 대한 위선도 까발려진다. 

내가 잘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라 따라가기가 좀 어렵긴 했지만 어떻게 아프리카의 문화와 문명이 파괴되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지금도 외국 박물관 수장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우리나라 문화재를 생각해 보면 아프리카의 아픔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런 학자가 있다는 데 놀라웠고, 존경스럽다. 


p19 이 책은 1897년 2월 베닌시티에서 벌어진 영국 군대의 폭력적인 약탈에 관한 책이다.

p45 아프리카 약탈은 제국주의가 진행되며 우연히 발생한 부작용이 아니라 수탈적,군국적 식민주의와 간접적 통치를 달성하기 위해 동원된 핵심적인 기술이었다.

p51 사물의 생애와 상대적 얽힘이라는 두 개념은 기존의 인류학 이론과 연결되며 1990년대부터 서구 박물관들의 주된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p56 푸코의 글 중 박물관을 주제로 한 것은 거의 없다. 푸코는 아마 박물관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부흥한 박물관학은 직서, 통제, 계보학, 규율, 권력 등 푸코식 용어를 적극 사용했다.

p65 드라큘라 이야기처럼, 2897년 베난에 대한 서사에서 엿보이는 고딕의 현대화는 제국주의의 도덕성에 대한 빅토리아인들의 우려, 서구 문명의 불안정성과 유럽 내부에 존재하는 위험한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적극 이용한 것이었다.

p68 콜웰은 1868년 영국군의 막달라 공격이나 1874년 아샨티 왕국 공격, 1892년 프랑스군의 다호메이 공격 등 상대가 준 모욕을 되갚고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적을 처벌하기 위해 벌인 공격에는 사실 대개의 경우 숨은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외국 땅에 질서를 세우기 위해 실행된 일종의 정략적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p71 영국 해군은 야만을 종식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원주민 마을에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했다. 영국은 문명을 보편 가치로 내세우며 아프리카의 왕궁과 성소를 파괴했다.

p103 이들 부대는 영국 해군의 지원하에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마을을 주기적으로 공격하며 지속적이고 폭력적인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p111 나이저회사는 여전히 이러한 행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우리가 흙을 파먹고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괴롭히겠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살아온 이 땅에서 굶어죽느니 그들과 싸우다 죽는 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p133 방법은 똑같았다. 상대에게 대화를 청한 후 만남을 거절당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이를 앞세워 보복 공격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p144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에 대한 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되며 영국은 더 큰 상업적 이익을 좇아 점차 내륙으로 진출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노에제 근절은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p147 일로린은 항복했으나 회사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시에 포격을 퍼붓고 약탈했다.

p171 역설적으로 1897년 베닌 원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기록의 부재다. 공식적인 문서는 물론 비공식적인 기록에서도 공격 이후 발생한 포로, 부상당한 원주민을 위해 운영된 병원, 환경 파괴로 인한 기근 등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p177 역사인류학적으로 볼 때, 앞서 언급한 베닌시티의 흙 건축물과 베닌시티 서쪽에 위치한 베냉공화국 사비의 흙 건축물은 기존에 생각했던 방어 등의 기능 외에도 공공건물로서 복합적인 정치적, 우주론적 중요성을 지녔을 것으로 예측된다. 수세기에 걸친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으로 건설됐을 이 건축물은 종교적 공간과 자연적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했다.

p182 영국은 베닌의 주권을 빼앗고 그것을 자신이 바라는 형태의 통치로 대체하기 역사와 왕권이 살아 있던 한 도시를 통채로 파괴했다.

p207 베닌 왕의 모든 산호와 청동 조각, 상아가 영국군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단절되어버린 역사 그 자체다. 그 단절의 크기를 이해하고 그것에 시각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애사의 층위를 더하기보다는 그 단절된 역사를, 생명 약탈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p218 약탈에는 성직자와 정부관리, 심지어 박물관 큐레이터들도 동참했다. 우리는 이들이 무엇을 약탈했는지, 그들이 가져간 약탈물들이 어떻게 됐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아무런 기록도 없이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p220 서양 국가들은 집단 학살을 통해 상대의 물건을 빼앗아 와서는 야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를 보여주겠다며 본국 곳곳에서, 그리고 박물관에서 전시하며 백인우월주의 이념을 확장했다

p235 약탈품으로서 영국에 도착한 베닌의 물건들은 패배한 적의 원시적인 부족 예술로 전시됐다.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가져왔다는 변명이 무색하게 이 약탈품들은 박물관 내에서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p242 박물관은 전시하는 물건에 공간의 차이가 아닌 시간의 차이를 덧씌웠고, 그렇게 전시된 물건들은 인종주의를 시각화하는 대용물이 됐다.

p250 인류학 박물관들은 새로운 물질주의적 증거와 전시를 통해 이러한 편견을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증오로 재탄생시켰다.

p254 베닌은 타락하고 퇴보한 문명으로 묘사됐다. 영국은 베닌의 예술품을 퇴락한 예술로 전시했고, 열등한 베닌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했으며, 종교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을 파괴했다. 이러한 행위는 곧 다가올 20세기의 폭력의 예고편이었다.

p268 영국박물관은 세계 문화재에 대한 보편적 비전을 담은 근대적 박물관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세계 농장 귀족이 모은 장식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영국박물관이 인류보편의 이상을 바탕으로 설립됐다는 주장은 의도적인 조작이자 신화인 것이다.

p271 대량살상무기 제거는 폭력의 명분이 되어 이라크에서 벌어진 강탈과 점유를 정당화했다. 인권침해를 근절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세운다는 명분은 과거 영국이 내세웠던 노에제와 식인풍습, 인신공양 근절 등 인도주의적 명분을 연상시킨다.

p274 신화학을 연구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2005년 루브르 박물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절대로 인류보편의 박물관이 아니다. 그곳에는 프랑스와 서구사회의 전통을 형성한 것들만 모여 있기 때문이다”

p295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대영제국의 역사는 편리하게도 해적으로 시작해 노예무역 철폐로 끝난다. 박물관들 역시 많은 경우 1838년 노예제 철폐에서부터 2차 보어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영국박물관의 수장고에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본격적으로 쌓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p311 약탈물의 서양 박물관으로의 이동은 이중의 과정이다. 이 행위는 약탈물을 원래의 주인에게서 빼앗았고, 동시에 우리를 풍요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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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을 위한 없는 나라 지리 이야기 - 2022 세종도서,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전국지리교사모임 추천도서
서태동 외 지음 / 롤러코스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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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시민을 위한 없는 나라 지리이야기

 : 서태동

 : 롤러코스터

 : 2022/05/13 - 2022/06/28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주 대상은 청소년인것 같은데 성인이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유익했다.

컨셉이 재미있다. 지리를 공부할 때 주로 무엇이 어디에 분포되어 있는지를 공부했는데, 이 책은 그 지역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책이 씌여졌다.

공항이 없는나라, 철도가 없는 나라, 스타벅스가 없는 나라 등등 왜 이 나라에는 이런 물건이 없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지리를 보는 시각을 넓혀준다.

청소년들에게는 사회책과 더불어 읽는 참고서적으로 좋을 것 같고, 일반인은 교양으로 읽기에 좋다. 

학교다닐때 공부할 때는 지리가 외울 게 너무 많아서 무척 힘들었던 과목인데 오히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지리야말라고 정말 도움이 많이 되는 학문이다.

총균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문화와 인류가 결국은 지리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걸 점점 더 많이 느끼게 된다.

학교다닐 때 이런 연관관계를 더 많이 배웠으면 지리가 훨씬 재미있었을텐데 아쉽다.

하긴, 일주일에 한두시간으로 그 많은 내용을 커버해야 하는데 이런 양념까지 배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겠다..

좋은 교양서적을 읽었다. 


p41 홉스굴호는 단층호이기 때문에 깊고 담수량이 많습니다. 자연적 작용으로 만들어진 호수에는 빙하오, 하적호, 석호, 화구호, 언지호, 단층호 등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이칼호와 2위인 탕가니카호는 모두 단층호입니다.

p60 아직까지 그린란드의 경제는 덴마크의 보조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9년에 자치정부를 출범시켰고, 영토 내 자원 탐사 및 개발권한을 얻으며 경제적 힘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식민 지배 300주년이 되는 2021년을 기점으로 완전한 독립을 꿈꾸기도 합니다.

p73 갯벌은 이러한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우리나라의 서천 갯벌, 고창 갯벌, 신안 갯벌, 보성-순천 갯벌로 구성된 한국의 갯벌은 2021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p94 아름다운 밤이었다. 우리가 젊을 때만 만날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 표도르 도스토엡스키의 소설 백야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p101 이 모든 것은 코리올리 효과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코리올리 효과는 지구의 자전으로 만들어지는 전항력이 작용함으로써 생깁니다.

p109 여러분이 잉티난에 가게 되면, 가이드는 적도에 놓인 개수대에서는 물이 돌지 않고 바로 빠진다고 설명하며 조심스럽게 물을 뺄 겁니다. 또한 개수대를 적도에서 북쪽으로 몇 미터 이동시켜 물을 빼보고, 다시 적도에서 남쪽으로 몇 미터 이동시켜 물을 빼볼 거에요

p134 겨울은 철도 운영에 혹독해 아이슬란드에서는 철도를 볼 수 없습니다.

p186 총균쇠의 저자로도 유명한 지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유럽을 만성적 분열이 일어나는 곳이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잡한 해안선과 산맥, 섬 등으로 인해, 유럽에는 통합된 하나의 제국이 등장하지 않고 작은 나라들로 쪼개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p191 북유럽 국가들은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얘기가 나오면 지금까지도 서로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p215 현재 WGS84 타원체 등에서 사용하는 본초 자오선은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가는 경선보다 동쪽으로 102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관광객들이 구조물로 만들어진 선을 보며 본초 자오선이라고 좋아하지만, 현재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본초 자오선은 그 선이 아닌 셈입니다.

p220 늦은 시간대에서 이른 시간대로 변경해야 해서 하루를 생략하기 위해 12월 29일에서 12월 30일을 건너뛰고 바로 12월 31일로 넘어갔습니다. 사모아는 해가 늦게 지는 명소에서 해가 일찍 뜨는 명소로 바뀌었습니다.

p225 코소보 출신인 두아 리파의 언행을 해석하면, 알바니아인들의 실지회복주의 주장에 공감하며 코소보를 알바니아와 통합하고 싶어하는 셈입니다.

p247 스타벅스에 대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인식을 바꾼 비결은 바로 겸손 전략 덕분이라고 합니다. 하워드 슐츠도 이탈리아 진출의 핵심 전략으로 “이탈리아는 겸손하게 다가가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습니다.

p254 뉴질랜드에 정착한 새들은 포유류 천적이 없는 환경의 영향으로 날지 못하는 형태로 진화한 경우가 많습니다.

p264 칠레는 초석과 구리라는 천연자원뿐만 아니라 아이오딘, 리튬, 레늄 등도 풍족해 광업을 국가의 주력 산업 중 하나로 성장시키며 발전해왔습니다.

p271 전쟁은 칠레가 시작했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현혹되어 조약을 무시한 볼리비아가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전쟁 결과는 오늘날 볼리비아를 남아메리카 최빈국으로, 칠레를 남아메리카 최고 경제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p289 유럽 안보 협력 위원회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러시아인 또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느 ㄴ이들에 대해 사회적 차원의 적대감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아제르바이잔에 살고 있는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에게 내부적으로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 거꾸로 아제르바이잔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 등 소수 민족을 배타적으로 대하게 만든 셈입니다.

p317 칠레의 극남 지점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세계에서 남북으로 가장 긴 나라의 순위가 변동될 수도 있습니다. 최남단을 혼곶으로 볼 경우에는 브라질이 칠레보다 60km 정도 더 길고, 최남단을 아길라섬으로 볼 경우에는 칠레가 브라질보다 3km정도 더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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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한국사 - 동아시아를 뒤흔든 냉전과 열전의 순간들
안정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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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전의 한국사

 : 안정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06/22 - 2022/06/23


집에 있는 동안 읽은 책.

일반적인 역사책에 잘 나오지 않은 부분을 들여다보고 해석해줘서 그런지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

사료에 적혀 있는게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사료와 유물과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잘 읽어내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양직공도의 그림과 양나라 역사서를 통해 당시 백제와 신라의 위상을 보게 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왜곡을 서숨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의 외교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국익앞에서는 이웃국가를 깎아내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선지 장군은 이름만 들었는데 이 책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의 뛰어난 전략과 전투능력은 그를 높은 장군의 지위에 올리지만 뇌물을 쓰고 포악했던 성정으로 결국 몰락하게 된다. 이방인으로서 특히 망한 나라의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몽골점령 당시 고려의 생존 전략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원종이라는 괜찮은 왕이 있어서 고려왕조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걸 보면서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악하고 무능한 지도자가 대통령으로 있다보니 새삼 깨닫는다. 


p6 조선 후기에도 도시를 중심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자리를 잡고 소설책 등을 읽어주고 돈을 받던 사람들이 있었다. 일명 전기수라고 불린 이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솜시가 뛰어나서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p49 양서 제이전에는 문신국이나 흑치국이니 하는 나라들이 일본 동쪽 해상에 있으며 기괴한 풍습이 있다고 전한다. 이들은 아마도 혜심과 같이 조공 사절을 빙자한 사기꾼들이 꾸민 허구의 나라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p54 이 그림의 정식 명칭은 양직공도로, 6세기 전반 양나라에서 제작되었다. 양나라를 세운 무제의 아들 소역이 직접 그린 것이 저본이 되었다고 전한다. 안타깝게도 원본은 소실되었고 여러 버전의 모사본들이 남아 있는데, 자료에 따라 적게는 12개국, 많게는 33개국 사신들의 모습이 그림에 담겨 있다

p63 무령왕은 20여년을 재위하면서 대내적으로 왕권을 탄탄하게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중,남부 권역으로 차츰 영향력을 확대했다. 521년에 무령왕이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던 것은 백제가 다시 부강해졌으며 이전의 영향력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함이었다

p65 백제가 양나라 조정을 상대로 벌인 외교적 책략의 결과, 양나라가 후대에 남긴 한반도 중남부의 정세에 대한 기록, 즉 양직공도와 양성 신라전의 기록은 실상과 크게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왜곡과 과장이 가득한 이 기록들은 역설적이게도 6세기 전반 양나라에서 백제와 신라가 벌인 외교전의 실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p71 역사의 연구는 단순히 사료를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의 국제 정세와 다양한 외교적 행위의 이면을 살피지 않은 채 사료 내용만 그대로 믿는다면, 송서의 표문에서 보이는 왜 국왕의 허풍이나 과장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p118 한마디로 고구려는 풍홍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당시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외교는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을 뿐, 천자국의 실질적인 규제를 동반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p134 5세기 전반에 벌어졌던 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는 풍홍이라는 한 사내가 벌인 무모하고도 저돌적인 행보가 있었다. 그리고 북위, 고구려, 송 등 당시 동아시아의 내로라하는 국가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이 분쟁을 더욱 확대시킨 비정한 조연들이었다. 각국이 모두 입을 모아 의와 리를 부르짖으며 풍홍 사건에 개입했지만, 정작 드러낸 것은 탐욕이요, 남은 것은 이해뿐이었다

p146 위 이야기는 700년 무렵에 당나라 장안에서 벌어진 연회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신당서의 기록이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던 고구려인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 이민족 출신들을 어떤 방식으로 공공연하게 무시했는지 등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p161 그동안 여러 차례 서역 원정길에 나셨지만, 이처럼 휘하 병력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적이 별로 없엇다. 그야말로 토번을 단숨에 제압하고 영향력을 확복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고선지는 소발률국에 군사 3,000명을 남겨두고, 왕과 왕비를 사로잡아 당당하게 귀환길에 올랐다

p173 탈라스 전투 이후 한족 왕조는 다시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주변의 여러 세력이 모두 이슬람 세력으로 돌아서면서 그들의 종교,문화 역시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 탈라스 전투가 동서 문명 교류사의 일대 사건으로 평가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고선지가 탈라스에서 지지 않았다면, 서역 일대 많은 나라의 정치,문화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p229 사실상 몽골 사람이 된 홍복원은 고려 원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고려-몽골의 전쟁 과정에서 그 이름이 최소 다섯 차례 이상 역사서에 등장하는데, 직접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의 각지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교통로를 안내하는가 하면, 개경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려 조정을 압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p233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왕준은 외모가 아름답고 적극적인 성격에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고려는 의도적으로 황제의 마음에 들 수 있는 나름 매력적인 인물을 선별해서 몽골로 보냈던 것이다

p253 1274년 5월 11일, 고려 세자 왕심은 쿠빌라이의 친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쿠빌라이가 결국 고려 왕자와 몽골 공주의 혼인을 허락한 것이다. 이처럼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된 것은 몽골의 강제가 아닌 전적으로 고려 왕실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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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전략은 삼국지에서 탄생했다
임용한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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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략삼국지

 : 임용한

 : 교보문고

 : 2022/06/11 - 2022/06/20


명불허전 이야기꾼 임용한 선생님의 삼국지이야기.

토크멘터리나 유튜브에서 재미있게 들었던 강의였는데 책으로 읽으니 또 다른 맛이다

정사와 소설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도 재미있지만 영웅호걸들의 강점 약점, 그리고 그들의 선택으로 정세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정말 재미있게 설명해 나간다.

중간중간 약도로 그려진 전쟁의 모습은 왜 형주가 중요하고 세 나라가 서로 뺏고 뺏기는 지역들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지를 배운다.

소설에서 제갈량이 너무 크게 그려져 있어 토크멘터리에서는 너무 깎아내리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책에서는 제갈량에 걸맞은 자리로 다시 설명하는 것 같아서 균형있는 시각으로 인물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별거 아닌 사람으로 봤는데 사실 대단한 존재인 여러 인물들을 배울 수 있었다.(특히 등애)

삼국지를 읽을 때 꼭 끼고 읽으면서 소설과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조만간 삼국지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재미있는 책을 읽어서 좋다.. 


p7 소설은 위나라의 인재가 가진 재능은 축소하고 촉나라의 인재가 가진 재능은 부풀렸다. 실제로 위나라는 영토가 넓고 전쟁도 많이 해서 기록이 많다

p8 서기 3세기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을 기록한 정사 삼국지와 2천 년 가가이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대중이 느끼고, 보고 싶어 했던 로망을 담은 소설 삼국지연의다

p19 권력은 선을 넘기 전까지는 조심하려 한다. 하지만 선을 넘은 권력에는 한계가 없다. 수습을 해야 할 때 십상시는 당고의 화보다 더 가혹하게 청류파를 탄압했다.

p29 외모 뿐 아니라 다양한 에피소드까지, 관우는 소설에서 가장 강화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는 대단한 용사였고 제갈량이 미염공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p32 유비가 걷는 가시밭길은 백 없는 사람이 겪는 모든 고난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읽었던 삼국지는 한나라의 부정부패가 눈에 들어왔다면, 세월이 지나 읽는 삼국지는 우리 인생의 축소판 같다.

p34 전쟁의 유일한 장점은 낡고 오래된 사회와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치고 출세하는 고인물 사회를 능력자와 야심가가 지배하는 사회로 한순간에 바꾸어 놓는 것이다.

p48 조조의 발빠른 봉기는 그가 왜 삼국지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역사는 미래의 변화를 예측해 징조가 드러나기 전에 준비하고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앞장서서 뛰어드는 사람의 몫이다.

p77 유비는 천재 조조와 바보 여포, 멍청한 월술 사이에서 운명의 줄타기를 반복했다

p87 정욱은 보잘것 없는 유비가 서주에서 엄청난 인심을 얻은 것을 보고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조조는 반대로 이 때문에 유비가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조는 여포를 제거한 뒤에 차주를 서주자사로 임명하고 유비를 예주목으로 임명했다. 유비를 예우하면서도 서주에서 떼어 놓은 것이다.

p90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용기다. 아무리 원소의 단점을 확신한다고 해도 그런 대군을 머리 위에 두고 누가 우회적해서 허리를 드러내고 적을 칠 수 있을까? 이는 판단과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와 실천력의 영역이다

p100 소설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빠지지 않고 소재로 사용하면서도 절묘한 밸런스와 설정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넣었다. 섬세하고 교묘하게 내용과 순서를 조작한 것은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문학적 재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p115 유비가 유종을 제거하고 양양을 차지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일, 10만 명의 피난민이 따라올 때 그들을 버리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

p150 조조는 언제나 빨랐다. 망설이느라 상대가 힘을 키울 기회를 주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는 용서할 수 없다. 한중을 차지하고 그다음에 유비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p153 출신과 과거를 묻지 않고 능력대로 등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비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이를 시도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그것도 토착민과 이주민의 갈등이 강한 지역에서 단기간에 말이다

p157 소설은 이 한중대전에 꽤 공을 들였다. 아이디어는 조금 진부하지만 촉의 새 장수들이 게속 등장해서 신선함을 준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모두가 늙었다고 걱정하는 노장 황충의 활약이다.

p165 조조는 서황의 대활약에 찬사를 터트렸다. 관우의 허무한 패전에는 부족한 보급과 오나라군의 개입으로 인한 사기 저하 등이 함께 작용한 것 같다

p169 관우의 양양 전투는 자만심과 오만으로 벌인 과욕이 아니었다. 삼국의 입장과 책략, 역량이 집중된 삼국지 1막을 정리하는 빅뱅에 가까운 전투였다. 관우의 진짜 실수는 전투의 규모, 전술적 의미보다 역사적 전략적 구도가 훨씬 크고 방대한 사건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그 사실을 감지했으나 지금의 상황을 감당할 조직과 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p203 명제(조예)는 침착하고 굳세며 결단력과 식견을 갖추어 자기 생각에 따라 행동했다. 군주다운 지극한 기개가 있었다.

p214 삼국지에서 결정력을 갖춘 사람들을 찾아 자신의 휘하에 배치했다. 삼국지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거나 활약한 인물인 곽가, 순유, 제갈량, 방통, 법정, 정욱, 가후 등의 공통점은 격식 파괴자라는 것이다.

p226 좌절해도 굴복하지 않았다라는 유비의 리더십에 답이 있다. 유비는 여포에게 배신당해 가족을 잃고, 조조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봉착해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p230 나관중은 이 기막힌 장면을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의 삼고초려로 재창조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3번이나 찾아간 것을 맞지만, 유비가 낮잠을 자는 제갈량의 방문 앞에서 기다린 적은 없다. 이를 보고 분노한 장비가 제갈량의 집에 불을 질러버리겠다고 소리친 적도 없다.

p241 장수의 모사였던 가후도 원소의 동맹을 거절하고 조조에게 귀순하라고 권했다. 원소는 우리를 푸대접할 것이고, 조조는 우대할 것이라는 이유를 붙였다

p249 세상은 항상 불합리하며 편견이 지배하고, 외지인을 배격한다. 부당하게 설치한 장벽이라도 생존하려면 그것을 넘어야 한다. 요포는 여기서 실패했다.

p251 시간이든 공간이든 변화한 환경에 처했을 때는 기존의 방식대로 판단하고 대응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지에서 자기 방식만 고수하느라 승리할 기회를 놓치고 패배한 인물을 여포만이 아니다.

p258 소설 속 주유의 마지막 대사가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이해하지만, 이는 우리의 성공을 방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악습이다. 그러니 우리는 소설 속 주유가 아닌 정사 속 주유가 되어야 한다.

p263 그보다는 전략을 세우고 군을 통수하며, 보급과 조직을 관리하는 데 탁월했다. 사마의가 제갈량을 천재라 칭한 것도 촉군의 진영을 보고 이러한 그의 능력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승상으로서의 제갈량은 탁월한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다.

p265 제갈량은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손자의 말이 답이 될 듯하다. “패망하지 않는 것은 내게 달렸지만 승리하는 것은 적에게 달렸다”. 내가 아무리 지피지기하고 탁월한 계책을 세워도 상대 역시 똑똑하고 모든 조건이 우월하다면, 아군을 보존하고 위태롭게 하지는 않을 수 있어도 승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p271 가후는 언제나 현실을 냉정하게 보고 자신의 약점도 장점이 되도록 활용했다. 이것이 그를 완벽한 승자로 만들었다

p274 봤느냐. 장소가 천하에 명성을 얻고 있다. 이게 내 공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번 일로 나는 더욱 명성을 떨칠 것이다. 손책은 이런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꼭 맞는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으며, 내 사람이라 생각하면 끝까지 믿고 그의 능력을 키워주었다.

p287 삼국지연의에서 순욱은 모략과 이간질로 서로 다른 세력이 싸우게 만드는 모사가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역량은 정확한 정세 분석과 인물평을 근거로 거시적인 전략을 세우거나 전략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었다.

p292 곽가가 유달리 뛰어났던 것은 정보를 모으는 실력뿐 아니라 그렇게 모은 정보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력이었다.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만이 정보를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곽가의 지력은 더욱 상승했던 것 같다.

p301 소설 속 대립구조 때문에 제갈량과 사마의의 우위를 가리려는 사람이 많다. 비슷한 능력의 장수가 맞붙었을 때는 지략이 아니라 객관적 조건이 유리한 사람이 우세하다

p311 조조가 소국의 인재를 등용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출세가 보장된 사람, 적당한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모험을 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조조에게 필요한 사람은 거침없이 가교를 건너는 두기였다.

p313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경우의 수를 제시하는 사람을 탁월한 전술가로 착각하는데 이는 탁상공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전에서는 확실하게 집중할 수 있는 전략을 결정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

p320 정식으로 의형제를 맺은 사실이 없다고는 하지만 세 사람은 진짜 혈육보다 더 충성과 의리를 지키며 평생을 함께했다. 유비가 겪은 수없는 패배와 실패에도 관우와 장비는 유비를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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