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대청 외교와 『열하일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서가명강 시리즈 16
구범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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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구범진

 : 21세기북스

 : 2021/09/15 - 2021/09/20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제목만 들어봤지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여름별장이라고 하지만 사실 여러달동안 이곳에 청나라 황제가 머물렀기 때문에 북경에 이어 제2의 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저자는 조선 정조때 파견된 사신들이 북경에서 열하로 변경된 일정을 소화하며 변화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와 국제정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조때까지 남아있던 명나라 숭배와 청나라 배척의 모습이 1780년 정조의 사신파견을 기점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광해군의 명나라,청나라 등거리 외교나 강홍립장군의 항복등에 대해서 현대 역사가들은 광해군의 통찰력을 높이 사고 있는데 반해, 저자는 이런 시각을 부정한다. 

강홍립의 항복도 군사들이 상당히 죽고 나서 어쩔 수 없는 항복이었다고 주장하고, 광해군도 통찰력이 있어 등거리 외교를 한 것이 아니고 청나라가 조선까지 신경을 쓰지 않아서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정확한지는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국뽕에 취해서인지 아직은 광해군의 통찰력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청나라의 최대 전성기 시절과 조선의 르네상스 시절을 알려주면서 티벳등 국제관계까지 두루 살펴보는 책은 드물었는데 당시 국제정세까지 알 수 있어 재미있었다.



p14 열하일기 속의 열하 이야기가 사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는 나의 발견과 1780년을 분수령으로 조선과 청의 관계가 크게 달라졌다는 나의 핵심 주장만은, 조선 후기 사신의 외교 활동 및 여행에 관한 한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깨알 같은 지식들과 더불어 독자 여러분께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p39 인조는 조선 사람들이 금수와 다름이 없다고 무시하던 오랑캐의 우두머리 홍타이지에게 오랑캐의 방식으로 절을 하면서 오랑캐의 신하가 되었다

p68 입관 전 시기 서울과 선양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의 입장에서 청나라의 베이징 천도는 여행 거리와 기간, 그리고 여행으로 인한 노고가 대폭 증가함을 의미했다. 압록강을 건너 선양까지는 옛날 거리 단위로 540리에 불과했다.

p84 17세기 전반 후금-청을 둘러싼 세계에서 조선은 사실 명에 다음가는 큰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조선의 위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터이지만, 1637년 2월 24일 삼전도의 항복 의식이 끝난 뒤에 열린 연회에서 인조에게 주어졌던 의전상 지위를 소개하는 것으로 조선의 위상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p104 이제 열하는 황제가 매년 거의 다섯 달을 머무는 장소가 된 셈이니, 사실상 베이징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두 번째 수도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115 머나먼 이역에서 찾아와 자리를 함께한 특별 하객들은 바로 건륭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 제국의 각 부분을 대표하는 존재였으니, 그날 하례의 광경은 모르긴 몰라도 그 자신이 일군 제국의 축도로 비치지 않았을까?

p126 건륭제 즉위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영조는 52년의 재위 기간 내내 건륭의 생일을 이듬해 정월에야 뒤늦게 축하하는 관행을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지켰다

p139 1780년 진하 특사 박명원에게 주어진 주된 임무는 물론 팔월 13일의 칠순 만수절을 축하하는 것이었지만, 공식 명칭이 성절겸사은사가 아니라 진하겸사은사였다는 점도 주의를 요한다

p157 당시의 기록물들이 제도적,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열하일기는 시대를 앞서가던 자유로운 인간 박지원이 쓴 책이기에 그러한 제약에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p165 청의 최하급 9품 관원들보다도 아래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정사,부사를 청의 2품,3품 관원들과 나란히 서게 한 것은 파격적인 우대라고 할 만했다

p170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조선 사신 일행이 황제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으며, 이러한 종류의 궁정 행사에 조선 사신이 참석한 것은 이때가 역사상 처음이었다는 점이다.

p191 정조는 판첸과의 만남 및 불상 수수와 관련하여 상주내용통지자문 외에 별도의 추가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박명원이 올린 별단에서 찾을 수 있다

p232 박명원은 줄곧 머리를 곧추 치켜들고 있었다. 박지원에 따르자면, 박명원의 배고 거부는 예부상서나 군기대신 등의 강요를 이겨내고 성취한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p260 열하일기에서 적어도 직,간접적으로 판첸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라고 무작정 믿지 말아야 한다

p292 1780년대 초 청의 조선 사신 접대에 일어난 변화는 정조와 건륭이 성의와 은혜를 주고받는 우호 행위를 상승적으로 반복한 결과로 나타난 양국 관계의 증진 또는 격상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p302 조선은 분명 외국으로 인식되었고, 또 그렇게 분류되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조선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청나라에는 절대로 외국이라고 부르지 않는 외번이 존재하였다

p319 건륭제는 원래 연반조근을 하러 온 외번 왕공 등을 접대하는 자리에 조선 사신 등을 초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p321 그들은 모두 건륭 연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에 완전히 복속한 집단이나 지역의 수장들이었다. 고희천자 건륭에게 그들을 대거 한자리에 모은 칠순 만수절의 하례는 곧 자신이 그때까지 평생 이룩한 업적을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p333 홍경모의 친청 언설은 1780년대 이후 조선 사인들의 청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고 보아도 큰 잘못은 아닐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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