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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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권오영

 : 21세기북스

 : 2022/08/07 - 2022/08/11


이런 책을 읽어야 성장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저곳에서 책읽고 강의듣고 했던 내용보다 책 한권에서 얻은 지식이 훨씬 크다.

그만큼 유물조사 및 고고학에 의한 역사발견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를 보면 그저 우리나라 만세를 외치는 국뽕주의자나 일본이나 미국에 경도된 바보들이 정말 많은데 그런 엉터리 사이에서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발견하고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지를 알 수 있었다. 

올해 읽은 책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던 책 가운데 하나다.

좋다.. 


p7 일본의 정사서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면서 한일 역사학계에서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다가, 가야 고분군의 발굴 등으로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p13 상고사는 전문 연구자만이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 시민들이 수많은 설을 자유롭게 주장하는 백가쟁명의 장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연구자나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유투버가 등가로 취급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p22 두 책에 의하면 고대부터 일본 천황은 대단히 높은 지위를 누렸고 백제와 신라, 가야 왕들은 천황에게 굽신거리는 낮은 지위에 머물렀다. 이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이용해서 한국 고대사나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려면 독이 가득한 알을 제거하고 복어를 섭취하듯 왜곡된 내용을 전부 걸러내야 한다

p22 이처럼 급변하는 게 고대사이다 보니, 수십 년 전 진실이라 여겼던 역사적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통설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

p30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남해안에는 원거리 국제 교섭을 관장하던 세력이 있었고, 엄청난 부를 독점하던 지배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p36 고고학 자료는 금석문이나 목간처럼 요리하기 좋은 재료가 아니기에 연구자는 자료가 충분히 말을 하도록 자꾸 대화를 걸고 흔들어 깨워야 하는데 그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p47 대표적인 예로 비늘 갑옷을 들 수 있다. 4~5세기 무렵 일본에서도 쇠판으로 만든 갑옷을 많이 사용했지만, 대성동을 비롯한 가야무덤에서 발견한 갑옷들은 그보다 훨씬 발전된 개량 기술로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기마전에서 사용한 재갈, 발걸이 등 마구류와 철제 무기류는 일본을 압도하는 양과 기술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갑옷, 마구, 무기 제조술에서 나타난 우열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왜가 군사적 우위로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p57 익산 미륵사가 무왕과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협력으로 조성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 문헌은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인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800년 통설이 무너졌다. 문헌에는 보이지 않던 사택씨 왕후가 등장했고 무왕의 왕비가 누구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p61 무엇보다도 인천공항을 향할 때마다 근심걱정보다 가슴 설레는 체질이라면 고고학 연구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p72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쳐 장기가 만들어진 무덤들인데, 발굴 결과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현재 발견된 인골 대부분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여 개체의 인골 중에서 편두를 한 두개골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한과 변한은 물론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p101 옥전 M3호분이라고 명명된 다라국 왕릉에서는 고령 지산동만큼의 순장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쇠도끼 수십 점, 말 갑옷과 투구, 사람 갑옷과 투구, 용과 봉황을 화려하게 장식한 고리자루칼이 4점이나 나왔다. 비슷한 시기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용봉문 고리자루칼이 한 점밖에 나오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옥전 M3호분의 후장은 분명 지나치다. 아마 망자의 내세를 위해 현세의 삶을 망가뜨린 것이다.

p127 왕성 자체가 산성의 형태를 취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환도산성 외에도 평지에 있는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위성처럼 여러 개의 산성을 배치했다.

p143 1980년대에 서울 몽촌토성과 하남 이성산성을 발굴조사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연구자는 하남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9년에 진행한 풍납토성 동벽 조사로 인해 위례성 위치 논쟁을 종결할 수 있었다. 전체 둘레 3.5킬로미터, 기저부 폭이 40미터 이상, 높이 12미터 이상인 초거대 토목구조물을 축조하며 동원된 노동력은 2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왕성이 아니고서야 이처럼 큰 규모의 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p146 이런 최첨단의 판축공법과 부엽공법은 백제인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되 토성과 궁궐, 고분, 제방 축조에 활용되었다. 이렇게 풍납토성을 짓는 데는 최첨단 기술과 최고의 기술자가 동원되었다. 풍납토성이란 걸작을 만든 이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임에 틀림없다

p155 무령왕릉을 발굴한 학자들은 최고의 영예와 행복을 누렸을 것 같지만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최대의 발견, 최악의 발굴이라는 야유와 빈정거림 속에 살아야 했다. 모든 유적은 소중하며,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에 유적 발굴조사에 임하는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p162 동북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넘어서 유라시아 동부라는 안경을 쓰고 역사를 보면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이라는 초강대국에 맞서 싸운 세력은 동쪽의 고조선만이 아니었다. 북쪽의 흉노가 한을 압박했고, 서쪽에는 오손, 월지, 사카란 세력이 있었다. 미얀마 쪽에는 퓨라는 종족이, 중국 운남성 지역에는 디안이, 그리고 지금의 중국 광동, 광서, 베트남 북부에는 남월이, 복건성의 민월 등이 마치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를 둘러싼 진돗개 무리처럼 한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긴장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p167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위구르족,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이 모두 투르크계 국가이다. 투르크 벨트의 동쪽에 해당하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 그리고 서쪽으로 갈수록 백인에 가깝다. 이런 양상은 돌궐족의 이동과정 중 생성된 변화다

p169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황금인간전이란 이름으로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사카족 왕자의 무덤, 즉 쿠르간에서 출토된 부장품을 전시했다. 그런데 이 무덤의 구조와 부장품을 5세기 무렵의 신라 왕릉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것들과 매우 유사한다. 문제는 두 유적 사이에 천 년이란 시차가 있다는 것이다.

p175 내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몇 군데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사막길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이란의 이스파한을 꼽는다. 특히 사마르칸트에 있는 비비하눔 모스크의 눈 내리는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p178 국제도시 장안에서는 복장, 음악, 음식 등 많은 분야에서 소그드와 페르시아의 호풍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이 동정했을 때 혼인한 현지의 여성도 소그드인이었고, 당나라를 뒤흔든 안록산-사사명의 반란을 주도한 안록산 역시 소그드와 돌궐의 혼혈이었다.

p184 카타콤 내부에서는 신장 180센티미터가 넘고 편두를 한 장신 여성이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된 채 무기를 잔뜩 보유하고 누워 있는 모습도 찾아냈다. 여성 전사였던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카타콤에 묻힌 이들은 알란과 사르마티아라고 하는 유목 기마민족이었음을 알아냈다.

p190 사기에 등장하는 한나라의 누선장군 양복은 남월 공략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위만조선 침략전에 나섰다. 이 양복이란 인물에 의해 남월과 위만조선이 연결되었다. 그렇기에 남월의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느냐 묻는다면 위만조선을 아는데 남월국의 역사가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다.

p192 참파는 한자로 임읍이라 불리던, 베트남 중부의 다낭과 호이안을 무대로 발전한 항시 국가다. 372년 참파가 동진에 사신을 보낸 기사가 남아 있는데 이 기사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사신을 보낸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p197 아르잔 2호분은 러시아와 독일 연구팀이 공동조사한 것으로, 세계사 서술을 바꿀만한 위대한 발견을 이뤄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흑해 연안에서 발생한 스키타이 문화가 점차 동으로 퍼졌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은 것이다.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스키타이 문화는 아르잔에서 발생하였으며 점차 서쪽으로 퍼져나간 사실이 입증되었다.

p206 우리 민족 제일주의에 입각한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지나친 민족주의적 편향으로 인해 세계 학계의 우스갯거리가 되어가고 있음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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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하인후 옮김,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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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 김상근

 : 시공사

 : 2022/08/06 - 2022/08/12


이탈리아 시리즈를 쓰고 계신 김상근 교수님의 세번째 책..

이번에는 피렌체다.

르네상스의 도시이고, 메디치가로 유명한 곳.

도시는 작지만 볼거리가 풍성하고,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뷰가 멋있었던 곳.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도시가운데 하나..

김상근 교수님은 내가 알고 있는 이런 피렌체의 모습에 피렌체의 역사를 더해주었다.

메디치가가 권력을 잡기 이전의 피렌체의 역사를 상세하게 써내려갔다.

생각보다 심각하게 권력투쟁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평민과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력까지...

다른 도시와 달리 왜 이렇게 권력투쟁이 강했을까? 압도적인 세력이 없기 때문일까?

주변의 도시국가의 힘을 빌려야 도시를 유지할 수 있을만큼 연약한 도시가 내부적인 권력투쟁은 어마어마하게 강하게 진행했다는게 아이러니...

권력을 잡고 나서는 다시 억압의 모습을 보이는 걸 봐서 권력의 속성이 억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음에 피렌체를 방문하게 되면 르네상스 이전의 투쟁의 현장도 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 2011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SERI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도었다. 책을 쓰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p17 그가 우리에게 들려줄 피렌체 이야기는 피렌체 사람들의 일상이다. 한 조각 빵을 얻기 위해 부자들의 밥상 밑에 앉아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넘쳐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세금을 적게 내려고 온갖 꼼수를 부렸던 귀족들의 이야기, 죽어도 귀족들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절규했던 평민들의 이야기, 질투와 배신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그 분노를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내다가 결국 자신이 망가지는 이야기 등이 적나라하게 펼쳐질 것이다.

p41 베키오 다리 위에서 벌어진 이 암살사건은 장차 피렌체를 두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강남을 대표하던 교황파 부온델몬티 가문과 강북을 대표하던 황제파 우베르티 가문의 반목이 시작된 것이다.

p60 곧 보게 되는 것처럼, 이 행정장관직이 바로 귀족의 몰락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이런저럭 구실들로 귀족들을 행정장관직에서 배제했고, 결국 귀족들은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고 파멸했기 때문이다.

p74 단테는 자신의 많은 책과 저술에서 아내 젬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9살 때 만난 동갑내기 첫사랑 베아트리체는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사로 묘사했지만, 불쌍한 아내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p96 두 사람의 예상치 못한 죽음에서 피렌체 시민들은 교훈을 얻었다. 도시의 분열,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결국에는 모두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귀족들의 피렌체 입성을 막은 평민들이 속 좁은 판단으로 귀족들의 피렌체 입성을 막고 외국의 왕을 모셨는데, 그것이 그들을 커다란 고통으로 몰고갔다.

p120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대기근이 피렌체를 덮쳤고, 귀족과 하층민의 불만은 함께 높아졌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평민에게 밀려 위엄을 잃었고, 하층민들은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p133 성당 내부에는 천재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단테를 위시해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브루니, 작곡가 조이카노 로시니 등의 영묘가 안치되어 있다. 이탈리아 영광의 성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p137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때 피렌체는 단순히 르네상스의 도시나 천재들의 도시가 아니라 근대적 계몽의 도시이며, 자유와 평등을 지향한 인류 최초의 도시였다.

p173 지배하려는 자들이 사라진 곳에서 피렌체 사람들은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의 열매가 르네상스다. 이 시기에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아름다운 꽃의 만개를 목격하게 된다. 미술사가들은 1400년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성 세레자 요한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놓고 경쟁했던 때를 르네상스의 시작 지점으로 잡는다.

p174 그의 눈에 비친 피렌체는 지배하겠다는 욕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귀족들의 거만함, 금력과 권력의 경계선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빴던 그란디들의 욕심, 지배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어쨋든 지배받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던 하층민들의 어리석음이 뒤섞이 곳이었다.

p205 도시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은 피렌체 시민들의 심리를 경계심에서 경외감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엄청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예술과 공공 건축물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면, 대중들은 일종의 부채 의식과 기대감을 갖게 된다.

p210 코시모의 탁월함은 관후함에서 출발했다. 모름지기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은 관후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부자의 인색함보다 졸렬한 것이 없다. 권력을 가진 자의 옹졸함보다 더 볼썽사나운 것은 없다.

p228 200년간 피렌체는 그야말로 격동의 정치 일정을 소화해냈다. 13세기 말 귀족의 통치가 자멸로 끝난 다음, 귀족과 평민, 평민과 평민, 평민과 하층민, 하층민과 하층민 그리고 다시 평민과 그란디가 충돌했던 피렌체는 그야말로 공화국의 실험 부대와도 같았다.

p235 정치적 계산에 능수능란하고 자인한 성품을 가진 아들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1423년부터 피렌체를 포함한 이탈리아 중북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쟁을 롬바르디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필리포는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통일하기전, 자기 안마당부터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했다.

p249 약 100여년 전 흑사병이 피렌체를 초토화했을 때, 보카치오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데카메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약 100년 후에 바로 그 성당에서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앞으로 그 가문에서 교황이 2명 탄생할 것이며, 프랑스 왕비가 2명 탄생할 것이고, 무엇보다 르네상스라는 유럽 역사의 전환점을 메디키 가문이 이끌 것이다.

p266 그러나 무엇보다 마키아벨리가 반복적으로 칭찬하고 있는 그의 덕목은 신중함과 관대함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p283 신 성구실의 하이라이트는 미켈란젤로가 건축한 메디치 영묘실과 그 안에 전시된 조각 작품들이다. 방문객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예술이 영혼과 극적으로 소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작은 영혼의 공간과 조각을 처음 주문한 사람은 교황 레오 10세였다.

p302 피에로의 통찰력 덕분에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배출하고 또 왕족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p323 전설적인 용병 대장이 등장하자 볼테라 시민들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싱겁게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몬테펠트로가 이끌고 온 우르비노와 밀라노 연합 용병대들은 성문 앞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12시간이나 계속된 볼테라 침공으로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고, 수많은 볼테라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p328 수많은 피렌체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성당의 내부와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복제품을 전시해놓았다. 진품은 성당 광장 뒤쪽에 있는 두오모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기베르티의 청동문 2개와 도나텔로의 조각 작품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피렌체 피에타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p352 그를 놓아주기에 앞서 왕은 온갖 종류의 친절과 애정의 표시로 로렌체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으며, 공동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그와 영구적인 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로렌초는 몇 달 전 한 위대한 인물로서 피렌체를 떠났지만, 이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국의 평화를 회복했으므로 훨씬 더 위대한 인물이 되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p362 그는 옛 애인 루크레치아 도나티에게 사랑의 시를 바치기도 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점잖은 표현대로, “베누스의 일에 지나치게 빠져 있던”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그는 관능적인 삶을 살면서, 동시에 진중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그를 조합이 거의 불가능한 전혀 다른 두 인간이라고 평한다.

p407 이 책의 들어가며에서 잠시 설명한 대로 마키아벨리는 이곳에서 피렌체의 젊은 지성인들과 정치인들을 가르치면서 로마사 논고와 전쟁의 기술과 같은 명저를 남겼다. 루첼라이 정원은 단순한 고전 강독 모임이 아니었다. 피렌체의 현재 모순을 타파하고 미래의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모임으로 발전해갔다.

p416 싸움을 이어갔지만, 로마는 논쟁을 거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피렌체는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를 갈구했지만, 로마는 양보를 통해 양쪽의 승리를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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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지음 / 푸른역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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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 푸른역사

 : 2022/08/02 - 2022/08/13


몇 번 빌렸으나 시간이 안맞아 읽지 못했던 책을 이번 여름에 읽었다.

역시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다. 

백제역사는 밝혀지지 않은게 너무 많다. 우리나라 백제 문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발굴했지만 정작 무령왕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특히 개로왕 이후 무령왕때까지 백제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쳤다. 

무령왕은 전임 동성왕이 시해를 당한 상태에서 왕이 되었고, 혼란스러웠던 백제를 매우 잘 안정시켰다.

과연 영동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을만하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령왕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역사서와 유물,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채워나간다. 

사마(무령왕)가 일본에서 건너와 왕이 됐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는 못했었다. 

많은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왕족까지 가서 그들을 관리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검토해보고 연구해볼만한 내용으로 보인다. 

아직은 유물이나 자료가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백제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백제문화인데 정작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게 부끄럽다.

우리 아이의 역사책에는 더 풍부한 백제사가 담기기를 소망해본다. 

재미있었다. 


p36 새 국립공주박물관은 걸어서 무령왕릉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인접한 곳에 있어서 무령왕릉을 위한 전시관이자, 수장고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하다.

p57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이 525년, 그 뒤를 이어 왕비가 529년에 왕릉에 안장되었음이 밝혀졌다. 즉 두 번에 걸쳐 유물이 부장된 것이다. 부장품의 절대 연대 확인은 유물 편년의 기준을 제시해주었다. 상대적인 편년차가 심한 고고학계에 기준점이 제시됨으로써 고고학 연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p74 백제 왕력 기사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시기를 파악하는 기준점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시대가 불분명한 여러 기사를 기술하면서 백제 왕력을 중심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p88 백제인들이 집중적으로 정착한 곳은 규슈일대와 가와치 지역이었다. 규슈 일대는 무령왕이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며, 가와치 지역은 동성왕의 탄생과 성장지였다.

p135 사마는 백제와의 해상 교류를 매개한 유력 세력가인 외가에서자란 것으로 보인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사마는 규슈 일대에서 자랐고, 그가 백제계 도왜인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p146 장수왕의 전술이 돋보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넷으로 나누어 협공하면서, 마침 불어온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안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탈출하려는 자도 속출하는 등 초반에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p170 웅진 천도 직후 정국은 한성 시기처럼 해씨오 ㅏ진씨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왕은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p197 실제 동성왕이 정치를 하면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중용된 인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지방으로 내친 것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성왕이 무도하고 포악했다는 평도 그의 정치 운영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p210 이처럼 동성왕 집권 후반기에 추진된, 사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에 대해 한성에 기반을 가졌던 진씨와 해씨 등 남래귀족들은 반발했을 것이며, 또한 웅진 부근 지역에 세력 기반을 가진 백가 등도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p229 정변의 원인으로 백제신찬은 동성왕의 무도와 백성들에 대한 포학을 들고 있다. 이에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백가의 개인적인 불만으로 서술하고 있어 그 내용이 다르게 나타난다

p236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면, 백가는 정변에 참여했고 실질적으로 동성왕을 시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정변을 주도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정변 주도 세력에 의해 밀려났으며, 억울하게도 동성왕 시해의 주범으로 몰린 것이다.

p249 주서에 보이는 관리의 복색에 관한 규정이 고이왕 때 기사로 나오지만, 학계에서는 후대에 완비된 규정이 고이왕 때로 소급,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p254 무령왕 대 22담로의 설치와 파견을 생각하면 번쩍 눈이 뜨일 것이다. 22담로에 자제와 종족을 파견한 것은 전국적인 지방 통치의 실현이며, 그 결과 토착 세력의 경제적 지배력이 약화하는 현상이 생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p291 양직공에 보이는 주변의 소국은 실제 상황이 아닌 백제가 양나라에 과시하기 위해 열거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p293 양직공도에 보이는 방소국은 대국이 된 백제가 거느린 부용국으로 설명되었다. 한반도에서 고구려에 필적할 만한 대국이 되었으며,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달라는 백제의 요청에 양나라는 빠륵 화답했다. 양나라 황제가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영동대장군이라는 작을 내려준 것이다.

p298 무령왕이 공들인 갱위강국 선언의 이면엔 주변 나라와의 관계가 뒤틀어진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이를 고뇌한 무령왕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한성으로 순무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했다. 얼마나 무령왕이 노심초사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p299 무령왕의 묘지석 첫 구절이 바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점은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에 대한 그의 애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p305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은 서로 대구가 된다. 검소를 강조하였으나 누추하지는 않아야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백제 문화가 소박함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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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 개정증보판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2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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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혼자 경주여행

 : 황윤

 : 책읽는고양이

 : 2022/07/11 - 2022/07/15


재미있는 스타일의 여행에세이가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혼자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1인 투어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답사를 하는 컨셉이다. 

경주는 이탈리아의 로마, 일본의 교토처럼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곳이다.

이 말은 하루이틀로 다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저자는 일박이일로 경주를 다니며 경주의 문화유산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유명한 불국사, 석굴암을 포함하여 거대고분군, 남산 그리고 최근에 핫한 황리단길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꼭 가야할 유적지가 많이 있지만 초보자나 가벼운 답사자가 다녀야 할 곳은 거의 다 흝는 것 같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문무왕릉으로 알려졌던 원성왕릉이 현재의 대왕암으로 바뀌는 에피소드는 참 재미있었다. 이런 에피소드를 유적지에서 해야 하는데...

다른 시리즈도 계속 읽어봐야겠다.

역시 스토리텔링이 잘 된 책이 읽기도 쉽고 재미있다. 


p19 봉황대와 황남대총 같은 거대한 무덤이 만들어지던 시기는 신라 시대 마립간이라 불리던 왕들이 즉위하던 때로, 17대 내물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의 기간이다

p23 당시 일본인들은 고분 안에 묻혀 있던 유물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봉분은 대충 걷어내어 놀랍게도 경주 철도 공사에 필요한 흙과 돌로 사용해버렸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지만 당시 문화재에 대한 인식 수준 및 식민지를 낮춰 보는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 증거이기도 하다.

p36 다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서예가이자 고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는 경주 대릉원과 봉황대의 언덕을 왕릉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완당집에 따르면 “경주에 조산이 하나 무너졌는데, 석축이 나온 것으로 보아 왕릉이 틀림없다”하며 남다른 그의 통찰력을 남기고 있다

p37 발굴된 5개의 금관 중 3개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중이며, 나머지 2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3개의 금관은 각각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관이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황남대총, 금령총 금관이다.

p49 신라 왕릉으로 알려진 고분은 38기이고 이중 경주 내 왕릉으로 알려진 고분은 총 36기인데, 이 중 상당수는 위치가 삼국사기 또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맞지 않아 근현대들어와 여러 연구자들이 위치를 새롭게 비정하기도 했다. 다만 학자마다 주장들이 조금씩 달라서 정확하게 누구의 무덤이다라고 판단하기가 쉽지는 않다.

p69 5-6세기 초반 마립간 시대 신라 왕들이 경주 중앙에 거대한 고분을 만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면, 6-7세기 신라왕들은 평지에 거대 사찰을 만들어서 왕가의 힘을 과시했다.

p73 이렇게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시대인 954년, 벼락을 맞고 불타 사라지면서 약 300년 간의 생애를 마감한다. 그럼 역사책에서 배운 몽고 침입으로 불타서 없어졌다는 황룡사 9층 목탑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몽고에 의해 불타 사라진 목팝은 고려 시대 때 복원한 황룡사 9층 목탑으로 고려 현종 때인 1012년, 이전에 벼락을 맞아 사라진 탑을 새로 올리며 만든 것이다. 다름 아닌 이것이 1238년, 몽고 침입으로 사라지게 된다. 결국 신라가 만든 탑은 300년, 고려가 만든 탑은 200년, 총 합쳐서 약 500년을 경주의 기둥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p81 황룡사가 진흥왕과 선덕여왕의 전설이 함께하는 절이라면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만든 절이다

p100 문무왕은 이처럼 위급하던 674년, 이곳에 못을 파고 인공 산을 만들며 화초와 진기한 동물을 기르려 하고 있었다. 여유를 부리 ㄴ것이 아니라 문무왕은 신라 왕으로 봉해진 동생의 저택을 왕실 정원으로 만들어버려 내부 반발을 막고자 한 것이다. 당 편에 선다면 왕의 동생일지라도 신라에 돌아올 자리는 없다는 의미였다

p113 항복 문서를 보내고 그대로 항복했으면 한반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겠으나, 문무왕은 이후 한반도 역사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그런 왕들과는 격이 달랐다.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해내는 인물이었기에 뒤로 물러나는 척하며 준비한 반격을 통해 결국 당나라로부터 승리를 거둔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가장 걸맞는 인물이 한반도에서는 문무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실리를 위해서는 잠시 고개를 숙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난 저 비굴한 표문에 오히려 문무왕의 진면목이 숨겨 있는 듯하여 좋아한다

p118 문무왕은 당시 사람들의 불교 세계관으로 볼 때 인간에서 오히려 짐승으로 격하될지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짐승도 될 수 있다는 사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전 성골 의식이나 부처 재림을 이야기하던 신라 왕들과는 확실히 인품의 격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p125 고고학자 황수영 박사는 동국대 총장 시절인 1982년, 한국 종의 유별난 개성에 대하여 이는 만파식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에 따르면 원통형 긴 음통은 다름 아닌 피리를 형상화한 것이며 용은 피리를 전해준 문무왕을 의미한다 하겠다. 즉 삼국 통일의 영웅이자 만파식적의 주인공인 문무왕의 업적을 종에 장식한 것으로 보자 만파식적이 단순한 전설이 아닌 구체적 모습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p151 석가탑뿐만 아니라 신라의 석탑에서 무구정경 혹은 소탑이 봉안된 사례가 여럿 발견된다. 결국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석탑을 짓고 관리, 유지시키는 데에 거대한 원동력이 된 경전이었던 것이다.

p165 절이 많아지자 이렇듯 본래 신성되던 남산이 더욱 신성시되면서 불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되어진다. 이에 거의 300여 년 동안 특히 통일신라 시대 동안 경주 사람들은 자신의 가문과 집안을 위한 사찰, 또는 사찰이 자금상 한계가 있다면 탑이라도, 그것도 힘들면 돌에 부처를 조각하는 마애불이라도 새기면서 기복 신앙의 꽃을 피웠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만든 것처럼 신라인 하나하나가 남산에 자신만의 불국사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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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탈박물관 - 제국주의는 어떻게 식민지 문화를 말살시켰나
댄 힉스 지음, 정영은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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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약탈박물관

 : 댄힉스

 : 책과함께

 : 2022/07/11 - 2022/07/18


유럽이 아프리카, 아시아를 침략하면서 뺏은 유적물에 대해 쓴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도 프랑스를 비롯해 많은 나라의 침략을 받으면서 문화재를 강탈당한 역사가 있어 더 관심이 갔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넓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베닌이라는 나이지리아 쪽에 있던 아프리카 부족을 영국군이 파괴하면서 약탈한 문화재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직 한 사건만 기록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학자로서 자신의 나라의 치부를 이렇게 자세하고 집요하게 조사하고 책을 냈다는데 놀라웠다.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라든가, 영국에 가지고 왔기 때문에 잘 보존할 수 있었다는 등의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류보편의 발전이라는 허황된 박물관의 목표에 대한 위선도 까발려진다. 

내가 잘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라 따라가기가 좀 어렵긴 했지만 어떻게 아프리카의 문화와 문명이 파괴되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지금도 외국 박물관 수장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우리나라 문화재를 생각해 보면 아프리카의 아픔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런 학자가 있다는 데 놀라웠고, 존경스럽다. 


p19 이 책은 1897년 2월 베닌시티에서 벌어진 영국 군대의 폭력적인 약탈에 관한 책이다.

p45 아프리카 약탈은 제국주의가 진행되며 우연히 발생한 부작용이 아니라 수탈적,군국적 식민주의와 간접적 통치를 달성하기 위해 동원된 핵심적인 기술이었다.

p51 사물의 생애와 상대적 얽힘이라는 두 개념은 기존의 인류학 이론과 연결되며 1990년대부터 서구 박물관들의 주된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p56 푸코의 글 중 박물관을 주제로 한 것은 거의 없다. 푸코는 아마 박물관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부흥한 박물관학은 직서, 통제, 계보학, 규율, 권력 등 푸코식 용어를 적극 사용했다.

p65 드라큘라 이야기처럼, 2897년 베난에 대한 서사에서 엿보이는 고딕의 현대화는 제국주의의 도덕성에 대한 빅토리아인들의 우려, 서구 문명의 불안정성과 유럽 내부에 존재하는 위험한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적극 이용한 것이었다.

p68 콜웰은 1868년 영국군의 막달라 공격이나 1874년 아샨티 왕국 공격, 1892년 프랑스군의 다호메이 공격 등 상대가 준 모욕을 되갚고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적을 처벌하기 위해 벌인 공격에는 사실 대개의 경우 숨은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외국 땅에 질서를 세우기 위해 실행된 일종의 정략적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p71 영국 해군은 야만을 종식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원주민 마을에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했다. 영국은 문명을 보편 가치로 내세우며 아프리카의 왕궁과 성소를 파괴했다.

p103 이들 부대는 영국 해군의 지원하에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마을을 주기적으로 공격하며 지속적이고 폭력적인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p111 나이저회사는 여전히 이러한 행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우리가 흙을 파먹고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괴롭히겠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살아온 이 땅에서 굶어죽느니 그들과 싸우다 죽는 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p133 방법은 똑같았다. 상대에게 대화를 청한 후 만남을 거절당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이를 앞세워 보복 공격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p144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에 대한 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되며 영국은 더 큰 상업적 이익을 좇아 점차 내륙으로 진출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노에제 근절은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p147 일로린은 항복했으나 회사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시에 포격을 퍼붓고 약탈했다.

p171 역설적으로 1897년 베닌 원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기록의 부재다. 공식적인 문서는 물론 비공식적인 기록에서도 공격 이후 발생한 포로, 부상당한 원주민을 위해 운영된 병원, 환경 파괴로 인한 기근 등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p177 역사인류학적으로 볼 때, 앞서 언급한 베닌시티의 흙 건축물과 베닌시티 서쪽에 위치한 베냉공화국 사비의 흙 건축물은 기존에 생각했던 방어 등의 기능 외에도 공공건물로서 복합적인 정치적, 우주론적 중요성을 지녔을 것으로 예측된다. 수세기에 걸친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으로 건설됐을 이 건축물은 종교적 공간과 자연적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했다.

p182 영국은 베닌의 주권을 빼앗고 그것을 자신이 바라는 형태의 통치로 대체하기 역사와 왕권이 살아 있던 한 도시를 통채로 파괴했다.

p207 베닌 왕의 모든 산호와 청동 조각, 상아가 영국군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단절되어버린 역사 그 자체다. 그 단절의 크기를 이해하고 그것에 시각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애사의 층위를 더하기보다는 그 단절된 역사를, 생명 약탈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p218 약탈에는 성직자와 정부관리, 심지어 박물관 큐레이터들도 동참했다. 우리는 이들이 무엇을 약탈했는지, 그들이 가져간 약탈물들이 어떻게 됐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아무런 기록도 없이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p220 서양 국가들은 집단 학살을 통해 상대의 물건을 빼앗아 와서는 야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를 보여주겠다며 본국 곳곳에서, 그리고 박물관에서 전시하며 백인우월주의 이념을 확장했다

p235 약탈품으로서 영국에 도착한 베닌의 물건들은 패배한 적의 원시적인 부족 예술로 전시됐다.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가져왔다는 변명이 무색하게 이 약탈품들은 박물관 내에서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p242 박물관은 전시하는 물건에 공간의 차이가 아닌 시간의 차이를 덧씌웠고, 그렇게 전시된 물건들은 인종주의를 시각화하는 대용물이 됐다.

p250 인류학 박물관들은 새로운 물질주의적 증거와 전시를 통해 이러한 편견을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증오로 재탄생시켰다.

p254 베닌은 타락하고 퇴보한 문명으로 묘사됐다. 영국은 베닌의 예술품을 퇴락한 예술로 전시했고, 열등한 베닌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했으며, 종교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을 파괴했다. 이러한 행위는 곧 다가올 20세기의 폭력의 예고편이었다.

p268 영국박물관은 세계 문화재에 대한 보편적 비전을 담은 근대적 박물관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세계 농장 귀족이 모은 장식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영국박물관이 인류보편의 이상을 바탕으로 설립됐다는 주장은 의도적인 조작이자 신화인 것이다.

p271 대량살상무기 제거는 폭력의 명분이 되어 이라크에서 벌어진 강탈과 점유를 정당화했다. 인권침해를 근절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세운다는 명분은 과거 영국이 내세웠던 노에제와 식인풍습, 인신공양 근절 등 인도주의적 명분을 연상시킨다.

p274 신화학을 연구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2005년 루브르 박물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절대로 인류보편의 박물관이 아니다. 그곳에는 프랑스와 서구사회의 전통을 형성한 것들만 모여 있기 때문이다”

p295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대영제국의 역사는 편리하게도 해적으로 시작해 노예무역 철폐로 끝난다. 박물관들 역시 많은 경우 1838년 노예제 철폐에서부터 2차 보어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영국박물관의 수장고에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본격적으로 쌓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p311 약탈물의 서양 박물관으로의 이동은 이중의 과정이다. 이 행위는 약탈물을 원래의 주인에게서 빼앗았고, 동시에 우리를 풍요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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