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함께 산책을 -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여행하는 법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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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와 함께 산책을

 : 시라토리 하루이코

 : 다산초당

 : 2022/03/08 - 2022/03/10


니체에 대한 내용이 아닌것 같은데 왜 제목에 니체가 들어가지?

과거 유명했던 작가들의 산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고나 할까.. 

책제목만 봤을 때는 니체가 산책을 통해서 얻었던 영감이나 그의 생애에 대한 책일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좀 당황했다.

표지도 예쁘고, 내용도 가벼워서 에세이 읽는 느낌으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내 취향은 아니라 몰입이 되지는 않았다. 



9% 영원회귀는 그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든 순간이 앞으로도 똑같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철학개념이다

20% 니체는 자연에서 찾아낸 세 가지를 사랑했는대, 바로 광대함, 고요함, 햇빛이었다

25% 보름달 빛을 받으며 로마를 거니는 아름다움은 실제로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다. 도시의 모든 것이 빛과 그림자와 커다란 덩어리에 삼켜지고, 가장 크고 가장 일반적인 형상만이 눈앞에 나타난다

29% 릴케는 저서 말테의 수기에서도 시는 사실 체험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런 체험은 보통 사람이 평소에 생활하면서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집중할 때, 어떤 계기로 지금까지의 세속적인 사고와 습성을 무의식중에 버렸을 때 만나는 체험이다

36% 프롬은 존재의 기술에서 마인드풀니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국내에는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로 두루 알려졌다) 마인트풀니스는 산스크리트어를 영어로 충실하게 번역한 단어인데, 집중 또는 선정(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해 아믕이 하나의 경지에 머물러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을 의미한다. 비즈니스업계에서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마인드풀니스 개념과는 다르다

40% 질문을 받으면 대답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면 그에 응해야 한다. 이 일상적인 생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쓴 책이 바로 그의 대표작 나와너다

45% 선과 깨달음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명확하게 이해시키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이세쓰는 냉난자지를 강조했는데 ‘차가운지 따뜻한지는 직접 마셔봐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53% 도겐은 세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를 배열해 세상이 되느니라... 나를 배열해 내가 그것을 보느니라

55% 이것은 바로 진인의 삶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아첨하지 마라. 남이 고마워하길 바라지도 마라 / 선뜻 무언가를 남에게 베풀어라.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아낌없이 줘라 /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보시다 / 나에게도 베풀어라 / 마음을 주고, 목숨을 주는 것도 보시다 / 다른 사람에게 자상하게 말하라 / 나만 특별해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타인과 너무 다르면 안 된다. 남이 하는 것도 하라 / 사람을 싫어하거나 귀찮아하지 마라 / 모든 일을 온화한 표정으로 마주하라

77% 정적 속에 앉아 홀로 식사하며 음식을 맛본다. 식기를 씻고 그저 앉는다. 저물어가는 하늘에서 새들이 훌훌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흔들리는 검은 구름 사이로 달이 나오는 광경을 바라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마치 영원을 산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 자체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다

89% 모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이 중요한 발언은 역시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나는 오로지 그곳에 보이는 하나의 현상을 거의 완벽하게 붙잡으려고 애썼습니다. 왜냐하면 현상이란 반드시 실재와 깊이 관계되어 있으니까요. 알려지지 않은 실재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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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보다 1 - 선사.고조선.삼국 한국사를 보다 1
박찬영.정호일 지음 / 리베르스쿨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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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한국사를 보다1

 : 박찬영

 : 리베르스쿨

 : 2022/03/07 - 2022/03/12


사진이 많아서 역사 유물들을 많이 보여줘서 좋다.

역사이야기, 특히 고대사는 유적이 발견될 때마다 내용이 바뀌기 때문에 꾸준하게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단적인 예로 내가 어릴때는 장군총이 광개토태왕의 묘로 추정됐었는데 광개토태왕의 묘가 발견되어 발굴중이기 때문에 장군총은 장수왕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그외에도 금동대향로의 발견으로 백제의 문화수준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참고서로도 좋고 일반인들의 교양쌓기로도 좋다.

나는 환단고기때문에 상고사에서 국뽕이 잔뜩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책에서 고대사의 국뽕의 느낌을 조금 받다 보니 그런 부분은 아무 이유없이 의심하게 되고 경계하게 된다.

그런 것만 빼면 화보도 많고 설명도 쉬워 추천할만한 한국사책이다. 


p30 작물을 재배하기 전이었지만 인간은 고기잡이를 하면서 비로소 정착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석기인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수렵이나 채집 활동을 했다면 신석기인은 점차 한곳에 정착하면서 짐승을 돌보거나 농사를 지었지요

p56 단군 조선이 아사달에서 건국됐지만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어요. 즉, 수도를 옮기면서 단군 조선의 세력을 확대한 것이지요

p61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돌도끼나 괭이,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해 곡식을 심었어요.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지요. 농업은 주로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답니다.

p81 랴오허 문명의 흥산 문화는 중원의 양사오 문화와 교류를 시작했고, 이어 산둥 반도 일대 량주 문화, 다원커우 문화가 중원과 교류했어요.

p94 치우는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구려족의 우두머리로서 헌원과 전쟁을 벌였지요. 전투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중국에서는 전쟁의 신이나 병기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지요

p126 왕검성은 함락됐지만 한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에 참여한 한의 장수 대부분이 처벌을 받았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어요.

p130 부여, 고죽, 고구려, 예, 맥, 추, 진번, 낙랑, 임둔, 현도, 숙신, 청구, 양이, 양주, 발, 유, 옥저, 기자 조선, 진, 비류, 행인, 해두, 개마, 구다, 조나, 주나, 한, 삼한 등은 모두 단군 조선의 거수국이라고 합니다.

p133 낙랑은 고구려 대무신왕 때 멸망했는데, 삼국사기에는 300여 년이 지난 미천왕 때 멸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대무신왕 때의 낙랑은 단군 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하나이고, 미천왕 때의 낙랑은 한사군 가운데 하나였다고 봐야 해요

p159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자를 신지, 작은 세력을 형성한 자를 읍차라고 불렀어요

p186 고구려의 고분 양식은 초기에는 돌무지무덤이 주를 이루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어요. 돌무지무덤은 시신 또는 석곽 위에 돌을 정밀하게 쌓아 올려 만든 무덤입니다. 그래서 적석총이라고도 하지요.

p188 삼족오에는 고구려의 통합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삼족오 또는 세발 까마귀는 단군 조선과 고구려 뿐만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의 신으로 널리 숭배받았던 전설의 새예요. 삼족오를 숭배하는 지역은 곰 토템 지역과 대부분 일치하지요. 랴오허 문명의 주축인 흥산 문화 유적지에도 삼족오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p192 고구려에는 신라의 화랑과 유사한 조의선인이 있었어요. 조의선인이란 검은색의 조복을 입은 선인이란 뜻입니다. 조의선인은 선비 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인재로서, 어린 나이에 선발돼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을 통해 심신의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을파소, 을지문덕, 강이식, 양만춘, 연개소문 등이 조의선인 출신이에요

p207 광개토호태왕의 업적은 무엇일까요? 일일이 열거하자면 굉장히 많지만 그 업적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단군 조선을 계승해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려고 했던 정신이예요

p221 중화 문명의 세계관은 황제가 하늘을 대신해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황제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중국이 국력이 강해지면 주변국을 지배하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인 이유가 바로 이 세계관 때문이랍니다.

p268 4세기에는 아직기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습니다. 아직기는 근초고왕의 명으로 두 필의 말을 일본의 왕에게 선사한 후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고 해요. 일본 왕은 아직기가 경서에 능한 것을 알아보고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노리사치계는 성왕의 명으로 불경과 불상을 일본에 전했어요

p302 후기 신라 이후에 후고구려, 후백제 등이 다시 일어섰고, 고려 시대엔 묘청의 난을 계기로 서경천도론과 삼한 정통론이 맞서기도 했습니다.

p308 신라의 건국 신화는 단군 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과 해양 세력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어요.

p324 고구려에서는 귀족이 제가 회의를 통해 수상인 대대로를 선출했지요. 또한 백제에는 수상인 상좌평을 투표로 선거했다는 정사암 회의가 전해지고 있어요

p341 풍류의 연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그 가르침 속에는 이미 유불선 3교가 포함돼 있다. 안으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으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매사에 무위로 대하며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고, 악한 일들을 행하지 않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의 가르침과 같다라고 기록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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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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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 도읍지 이야기

 : 이유진

 : 메디치 미디어

 : 2022/02/20 - 2022/03/07


재미있게 읽었다.

장안의 화제라고 아직까지 이야기되는 시안을 비롯하여, 뤄양, 카이펑, 항저우, 베이징 등 중국의 여섯 수도의 역사를 배웠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각 도시를 수도로 삼았던 왕조들이 정리되어 있어 중국사에 대한 이해도 높힐 수 있었다. 

각 도시의 지리를 잘 모르다 보니 글로만 읽어서는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다. 그건 내가 지식이 짧아서 그런것이지 책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수도를 대상으로 이렇게 책을 써도 꽤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수도라는게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배경도 있고, 그로 인해 어떻게 발전하고 멸망하게 되었는지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테니까...

재미있는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다. 



3% 중국이 세계 중심이자 최고라는 중화사상은 중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그들에게 각인된 일종의 컬쳐코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건국 이후 30년과 개혁개방 이후 30년을 지나온 중국이 이제 새로운 30년을 펼쳐가고 있다. 지난 두 단계 30년의 모토가 각각 계급투쟁과 경제발전이었다면, 향후 30년의 모토는 위대한 중화의 재현이다

4% 로마, 아테네,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로 꼽히는 시안은 역대 가장 많은 왕조가 도읍한 곳이기도 한다. 서주, 진, 한은 물론 수, 당 등 13개 왕조가 이곳에 도읍했다

6% 주왕과 달기는 주지육림의 주인공이다

13% 군막에서 계책을 짜내 천 리 바깥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로하며 군량을 보급하고 운송로가 차단되지 ㅇ낳도록 하는 일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여 이기는 일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재인데, 나는 그들을 쓸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까닭이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나에게 사로잡힌 까닭이다

18% 소릉에서 영원히 이세민과 함께해야 할 여섯 준마는 죄다 제자리에 있다. 지금 소릉에 있는 육준 석각은 복제품이다. 각각의 무게가 2.5톤이나 되는 이 석각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여섯 준마 가운데 삽로자와 권모과는 1914년 미국으로 반출되어 현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넷 역시 해외로 반출될 위기를 겪을 뒤 1918년 산시성도서관에서 보관되다가 1949년 비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0% 실제 역사에서 현장이 태종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간 때가 정관 19년 2월이고, 태종이 고구려로 쳐들어간 때도 2월이다. 태종이 현장을 만난 뒤 바로 침략 전쟁에 나섰던 것이다. 춘추시대 공자도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지 못했듯 현장도 그러했다. 왕은 그들을 존중하는 척했을 뿐 그들의 진심에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24% 최악의 폭군이 걸왕과 주왕을 자신과 비교하라는 태종의 위협 앞에서도 장현소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로 건원전을 수축한다면 걸왕이나 주왕과 마찬가지라고 직간했다. 결국 태종은 건원전 건립을 포기했고 장현소에게 비단을 하사했다. 태종과 장현소의 일화는 태종이 신화의 간언을 얼마나 잘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27% 낙갈발과 홍화공주는 양주로 이주했다. 낙갈발은 고토 수복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당나라에 계속 지원을 청했다. 드디어 함형 원년(670년)에 고종은 설인귀에게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토번을 치게 했다. 결과는 당나라 군대의 대패였다. 잠깐 덧붙이면, 당나라와 토번의 이 대비천 전투가 신라에는 천우신조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신라마저 직할지로 삼으려 했다. 바로 이때 토번 덕에 신라와의 전투를 준비하던 설인귀가 대군을 이끌고 서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신라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0% 지위 높은 어떤 이가 젊고 잘생긴 과거 합격자를 점찍어 억지로 집까지 오게 한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젊은이에게 귀인이 넌지시 말을 건넨다. “나에게 아주 괜찮은 딸이 있다네. 자네와 짝을 맺어주고 싶은데 어떠한가?” “가난하고 미천한 제가 높은 집안에 의지할 수 있게 되면 실로 행운이지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집사람과 아이랑 의논해봐야 하는데 어떠신지요?”

32% 당나라는 견우, 직녀 신앙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 현종은 칠석을 중시해서 1000척(약 30미터)에 달하는 아주 높고 큰 걸교루를 궁중에 세워놓고 칠석이면 이곳에서 즐기며 밤을 새웠다고 한다. 칠석날을 위한 누각이 걸교루다. 궁중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뜰에 누각을 세우고 등과 꽃과 채색 끈으로 장식해 걸교루로 삼았다

33% 평안남도 덕흥리 고구려 고분벽화(408)에도 견우와 직녀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때 그 지역 사람들도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믿었기에 무덤에 그런 하늘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설 속에 담긴 인간 삶의 원형에 많은 이가 공감했기에 이야기가 확산되고 여러 지역에서 공유했을 것이다.

34% 장안에서는 이국의 패션과 오락과 예술이 유행했다. 외래 문물에 개방적이었던 만큼 조로아스커터교, 마니교, 경교(네스토리우스교) 등 다양한 종교가 유입되었고, 외국인이 밀집해 거주하던 서시 주변에는 다양한 종교 사원이 세워졌다. 페르시아 상인은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사원에서 예배를 드렸고, 시리아에서 온 이들은 경교 사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36% 모든 도시는 자신의 상징물을 지닌다. 베이징에 천안문이 있다면 시안에는 종루가 있다고 할 정도로 종루는 시안의 상징이다

41% 공자가 평생 흠모하여 모델로 삼았던 인물이 바로 주공이다. 질서와 조화로 대변되는 주나라의 예악제도는 훗날 유가의 예악사상으로 이어져 수천년간 중국의 정신을 지배했으니, 주공은 중국을 만든 주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뤄양을 찾게 되면 주공 사당을 잊지말고 둘러보자

44% 관우의 머리가 묻힌 곳이 바로 뤄양의 관림이다. 중국 역사상 무덥에 림이라는 말이 적용된 사람은 공자와 관우 두 명뿐이다. 공자가 묻힌 공림, 관우가 묻힌 관림, 그들의 역사적 비중이 무덤 호칭에 반영된 것이다

46% 프리스트는 반양중동뿐 아니라 반양남동,연화동, 봉선사, 고양동의 유물 역시 비열한 방식으로 손에 넣어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와 추악한 계약을 맺었던 웨빈은 용문석굴의 유물을 일본인에게도 팔아넘겼다. 그렇게 그는 국보를 팔아넘기고 큰 돈을 벌었다

47% 봉선사 주불인 노사나불은 크기부터 사람을 앞도한다. 17.14미터 높이의 좌상에 머리 높이는 5미터, 귀의 길이만도 1.9미터나 된다. 노사나불을 비롯해 가벗과 아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두 천왕과 두 역사로 이루어진 봉선사 조각은 당나라의 위대한 시대적 상징으로 칭해진다

48% 엘긴 마블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선 떼어낸 조각들을 이렇게 부른다. 19세기 초, 오스만튀르크 주재 영국 대사를 지낸 토머스 브루스 엘긴은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에서 파로테논신전 조각을 영국으로 가져갔다. 수많은 조각물이 원래 자리에서 떼내지면서 파괴되었고 운반되면서 유실되었다. 영국박물관 듀빈갤러리를 채우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 조각들은 바로 이런 약탈의 결과물이다. 듀빈갤러리에 있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 강의 신 일리소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는 얼굴이 없다. 다름 아닌 약탈의 흔적이다.

52% 북망산에는 빈 땅이 없으니 죄다 뤄양 사람들의 옛 무덤이로구나라는 시구처럼, 우리에게 북망산으로 익숙한 이곳에는 역대 왕조 왕후장상의 무덤이 수두룩하다.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한 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도 이곳 망상에 묻혔다

54% 정저우의 황하박물관에 소장된 민국도구합용기사비는 국민당이 1946년의 제방 복구를 기념하려고 만든 것이다. 비문에 적힌 제국안란이라는 글귀는 장제스 친필인데 나라를 구하고 물길을 다스린다는 의미다. 비문의 기록에 다르면 일본군이 폭파해 화위안커우 제방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진실이 이렇게 엄폐, 왜곡되었고국민당이 타이완으로 퇴각한 이후 수십 년 동안 타이완에서는 이 일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54% 카이펑의 지층 단면은 수천 년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가자 ㅇ아래족에는 전국시대 대량성이 있고, 그 위로 역대 도시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시대별 도시가 묻힌 깊이는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 위나라(12-14미터), 당나라(10-12미터), 북송(8-10미터), 금나라(6미터), 명나라(5-6미터), 청나라(3미터) 성루성 즉 이렇게 도시 위에 도시가 포개진 상황은 바로 황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황하의 범람과 그에 따른 재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57% 종이 ,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형상화함으로써 세계 4대 발명품을 탄생시킨 중국의 문화를 전세계에 자랑하지 않았던가. 4대 발명품 가운데 인쇄술, 화약, 나침반은 바로 송나라때 실용화되었다

67% 하이난의 소수민족인 리족과 더불어 지냈고 하층민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리쩌허우 말대로, “소식은 끊임없이 자아를 위로하며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하고 만족하는 낙관의 정서를 지닌 사람이었다. 철종이 죽은 뒤에야 유배에서 풀린 소식은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창저우에서 세상을 떴다. 이대가 1101년, 그의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69% 호설암의 성공와 몰락은 정경유착의 전형이다. “장사를 하려면 기댈 사람이 있어야만 하니, 권력이 있으면 이익도 있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좌종당이라는 권력에 기대어 비상했던 호설암, 결국 그는 이홍장이라는 권력 때문에 날개 없이 추락했다.

72% 육화탑은 천재 또는 인재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 하지만 늘 재건, 보수되며 그 자리를 지켰다. 970년에 처으 ㅁ세워졌던 육화탑이 지금도 육화탑으로 존재하는 것은 탑을 지켜온 많은 이들 덕분이다. 지담 스님의 청동좌상은 바로 그들의 노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리라

73% 명나라 우겸은 몽골의 공격으로부터 베이징을 수호했다. 그보다 300년 전 남송의 악비는 여진족의 금나라와 맞서 싸웠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목숨을 걸고 지킨 나라이건만 모반죄를 씌워 죽게 한 것이다

75% 난징이 무더운 도시 10위권 밖이긴 하지만 여름철 매우 무더운 도시임은 분명하다. 창장 연안에 자리한 충칭, 우한, 난징이 화로처럼 무더운 데는 아열대 고기압의 영향 외에도 지리적 영향이 크다

76%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외국과 체결하게 된 첫 번째 불평등 조약은 난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난징조약 이후 난징은 줄곧 중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곳이다

80%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 해도 그저 여러 첩 중 하나일 뿐이고 여의치 않으면 내쳐질 수도 있는 존재, 그게 바로 기녀의 운명이었다

83% 쑨원의 유해를 증산릉에 안장하는 봉안대전이 거행된 1929년 6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교통이 3분 동안 멈추었고 전 국민이 3분동안 애도를 표했다. 국부에 대한 최고 예를 표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가 사후에 증산릉 곁에 묻히길 바랐다. 장제스 역시 중산릉 서쪽에 자기 묏자리를 봐둔 적이 있다. 만약 훗날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장제스는 바로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84% 9층 유리탑은 난징을 방문했던 유럽 여행자들에 의해 중세시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힐만큼 예술성이 뛰어났다. 대보은사 유리탑에 대해 ‘큰 규모였다’, ‘뛰어났다’라고 과거형으로 서술한 이유는 그것이 이미 파괴되었기 대문이다. 1856년 벌어진 태평천국의 내분으로 그토록 아름다운 탑이 파괴된 것이다.

89% 천안문 성루에 걸린 초상화는 중국의 정치 지형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개국대전 이후 마오쩌둥 초상화는 해마다 5월 1일 노동절과 10월 1일 국경절에 맞춰 열흘가량 천안문 성루에 걸렸다. 마오쩌둥 초상화가 지금처럼 1년 내내 걸리게 된 건 1966년 8월부터다. 바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가 이루어진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94% 건륭제가 조지 3세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천조는 물산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으며, 만국을 다스리는 천조는 일시동인(모두에게 차별없이 평등하게 어짊을 베풀다)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94% 약탈로 끝이 아니었다. 연합군 요구대로 포로는 석방되었다. 하지만 포로 몇 명이 이미 죽은 것과 포로들이 학대를 받았다는 것을 빌미로 연합군은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게다가 원한을 씻는다는 명분으로 원명원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10월 18일, 원명원은 불길에 휩싸였다

97% 현재 유교는 중국에서 가장 거대한 지적 힘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중국문화의 주체적 정체성을 담보해주고, 시장경제화로 인한 여러 부작용을 해결해주고,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국민 통합을 이뤄낼 열쇠를 유교에서 찾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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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 어슬렁어슬렁 누비고 다닌 미술 여행기
류동현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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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 류동현

 : 고유서가

 : 2022/02/20 - 2022/03/02


고유서가의 책들중 인문학이나 미술관련 책들은 수준이 높은 편이다. 

이 책도 고유서가에서 나온 책이라 기대가 많았다. 

길지 않은 미술관 설명과 많은 미술관 작품들 사진..

나처럼 출퇴근 하면서 책을 읽거나 커피숖에 앉아서 읽기에 좋은 분량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이탈리아에 이렇게 가봐야 하는 곳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기껏 큰도시들밖에 가보지 않아서 중간중간 숨어있는 소도시들과 소도시들이 품고있는 멋진 미술관을 많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사진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자세히 볼 수 있어도 실제로 보면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더 늙기 전에 하루빨리 방문해서 작품들을 느껴보고 싶다.

이탈리아는 선조들 덕분에 정말 복받은 동네다. 부럽다. 


p17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외적에 쫓긴 롬바르디아 피난민이 베네치아만 기슭에 마을을 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p34 단테 알레기에리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수로 지내고, 지동설을 제창한 니콜리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수학한 파도바대학이 있는 파도바는 볼로냐와 함께 이탈리아의 대학 도시로 명성이 높다.

p45 베로나는 단순히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가 아니라 로마시대의 아레나를 비롯하여 다양한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멋지 ㄴ도시였다. 구시가지에 자리잡은 2000년 전의 로마시대 아레나가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근사한 무대로 사용되었다

p46 베로나에는 줄리엣의 집 외에도 줄리에타의 묘와 로미오의 집인 몬터규 저택(실제로는 몬테키 가문의 저택) 등이 있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필수 탐방 코스라고도 할 수 있다

p59 무능한 황제였던 호노리우스의 취미는 닭을 기르는 것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닭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붙인 황제가 로마의 함락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손바닥 위에 로마가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p95 이탈리아 역사에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는 해양 강국으로 꼽혔던 공화국인데, 이 네 공화국 문장이 현재 이탈리아 해군 깃발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

p108 구스미 마사유키가 우연한 산보에서 산책이란 “우아한 헛걸음”이라고 했는데, 좁게 난 오솔길과 바닷길을 허허롭게 걷고 있자니, 그 우아한 헛걸음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다가오는 듯했다

p151 대지의 수확물로 인물화를 그리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16세기 프라하 합스부르크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와 루돌프 2세 통치 시절에 궁정화가로 활동한 밀라노 출신의 주세페 아르침볼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르침볼도는 20세기 초현실주의 화파의 그림같이 과일, 채소, 동물, 책 등의 사물을 배치하여 인물화를 그렸다.

p190 아그리투리스모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독특한 숙박형태로 농업의 이탈리아어인 아그리콜투라와 관광이라는 의미의 투리스모가 결합된 합성어다

p220 아레초는 과거 로마시대 이전부터 발달했던 유서깊은 도시다. 기원전 5세기 에트루리아인들이 조성한 도시는 기원전 3세기 로마에 정복된 이후에도 로마까지 연결되는 카시아 가도의 군대 주둔 도시로 발전했다

p266 산프란체스코성당은 프란체스코가 선종하고 2년 뒤인 1228년 카톨리교가 그를 성자로 시성한 직후 거대한 규모로 짓기 시작했다. 사실 청빈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삶을 살아온 프란체스코 입장에서 볼 때 산프란체스코성당의 규모는 꽤 아이러니했다

p276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지만 이곳을 찬찬히 걷고 있노라면 고대 로마의 위대함과 인류 역사의 깊이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바로 옆 콜로세움이 관광객으로 시끌벅적한 데 비해 이곳은 의외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조용히 산책하기도 좋다

p277 작품들이 모여 있는 미술관이면 편하련만, 벽화들을 보려면 그 장소에 가야만 한다. 여행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하나하나 찾아가야 하는 곳, 그 장소, 그 흔적을 내 발로 디디는 것은 나름 짜릿한 긴장감을 인생에 선사한다

p318 로마시대의 도시 폼페이는 79년 8월 24일 정오에 폭발한 베수비오산으로 인해 파편과 재가 덮치면서 그 시대상이,그 뜨거운 날의 정경이 순식간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느 여름날 도시의 정경을 포착한 스냅사진처럼.

p349 나폴리 남부 해안가를 아말피 해안이라 부르고, 아말피 문장이 베네치아, 제노바, 파시의 문장과 함께 이탈리아 해군 깃발 문장으로 사용되는 것에서 아말피가 과거에 얼마나 큰 위세를 떨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p356 나폴리, 소렌토, 포시타노, 아말피 등 해안가 마을의 인상이 강한 남부 이탈리아에서 산꼭대기에 위치하여 독특한 위상을 드러내는 작은 마을 라벨로로 향하는 길이었다

p368 아르키미데스의 원리를 비롯하여 도형의 넓이 계산, 원주율 계산, 지레의 원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업적을 쌓았다. 그는 공학자로서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포에니전쟁중 제2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18년~201년) 때 카르타고와 손잡은 시라쿠사를 위해 수많은 무기를 만들어 로마를 괴롭혔다

p370 만화를 보고 이곳을 찾다니... 내가 생각해도 꽤 무모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곳에서 일주일을 머무르고 말았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드는 오르티자의 좁은 골목을 거닐고, 주변 바닷가 길에서 고흐의 감성을 떠올리고, 성당 앞 광장에서 연주하는 악사를 보고 있자니 무모함이 여행의 원동력이라는 여행의 기본이 절로 떠올랐다

p406 성당 자체로는 뭐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이 성당이 위치해 있는 동네와 비교하면 그랬다. 12세기 노르만왕조가 팔레르모 대사제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과시용으로 지은 성당이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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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 - 역사와 문화가 보이는 서양 건축 여행
스기모토 다쓰히코나가오키 미쓰루.가부라기 다카노리 외 지음, 고시이 다카시 그림, 노경아 / 어크로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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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엔 알고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

 : 스키모토 다쓰히코

 : 어크로스

 : 2022/02/19 - 2022/02/22


일본 저자들의 책은 나하고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내용을 너무 간결하게 정리해서 쓰다보니 읽는 맛이 잘 안난다.

책 제목만 보고 골랐는데 일본 저자...

역시나 읽기는 너무나 편한데 읽는 재미는 떨어진다. 

전세계의 유명 건축물들을 소개하는 책인데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소개한다.

신선할 수도 있는데 사진과 같이 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는 건축물이야 그림만 봐도 되지만 모르는 건축물은 실제 어떤 모습이길래 이렇게 표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봐야 했다.

간결한 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지만 나에겐 그리 감흥이 남지 않는 책이다. 


p18 이곳 묘지의 변과흘 보면 사람들이 빵과 맥주, 고기, 채소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유물과 상형문자는 마을 사람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만족하며 일했음을 보여줍니다.

p27 3000년에 걸친 고대 이집트의 위대한 역사에서도 문명이 가장 화려하게 꽃핀 때가 BC15세기경 신왕국 시대였습니다.

p43 신전은 이 신들의 신상을 모시는 곳이었고, 사람은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 신전에서는 외관이 중시되어 오더와 비례가 특히 발달했습니다.

p63 집중식 교회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유적이 로마에 있는 산타코스탄차 성당입니다. 산타코스탄차 성당은 354년 세상을 떠난 콘스탄티나(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딸)의 세례당으로 지어졌습니다.

p86 순례 교회당은 이전의 교회당과 어떻게 다를까요? 가장 큰 특징은 순례자가 예식에 지장을 주지 않고 교회당을 둘러볼 수 있도록 바깥쪽에 회유 동선을 추가했다는 것입니다.

p104 서양에서 대성당이라 하면 주교석이 있는 교회당을 말합니다.

p152 보르비콩트 성이 어찌나 훌륭했는지, 루이 14세가 그보다 더 나은 성을 짓기 위해 비콩트 성을 지었던 세 명의 예술가를 자신의 성을 건설하는 데 그대로 등용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만화경처럼 다양한 양식을 보여 주는 눈부신 흰벽의 건물, 베르사유 궁전이 완성되었습니다.

p174 미술 비평가 존 러스킨은 ‘중세 건축이나 장식이 아름다운 것은 당시 장인들이 기쁨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중세 사회를 이상화했습니다.

p210 큐비즘 회화는 극단적으로 왜곡된 인체, 평면적인 표현, 나아가 원근법을 무시한 장면들이 여러 시점에서 결합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p218 아르누보는 자연을 모델로 삼았고 미래파는 기계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동경했던 혁신적 기술을 도시 설계에 도입했습니다.

p247 식민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미국은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고, 자유를 표현하는 양식으로 아르데코를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모든 돗에서 아르데코 양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다양한 작품이 있는 곳이 뉴욕으로, 이 시대에 지어진 거의 모든 마천루의 개구부와 정상부에서 전형적인 아르데코 장식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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