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불태우다 - 고대 알렉산드리아부터 디지털 아카이브까지, 지식 보존과 파괴의 역사
리처드 오벤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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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을 불태우다

 : 리처드 오벤든

 : 책과함께

 : 2022/04/12 - 2022/04/21


제목을 보면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건 진시황의 분서갱유다.

실제로는 많은 책을 불지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독재자의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대표적인 억압정책으로 남아있다.

이 책에서는 고대시대부터 나타나는 책에 대한 탄압이 나온다.

생각보다 많은 탄압이 있었다.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종교개혁가들이 책들을 많이 없애버렸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또한 나찌의 금서 및 분서는 엄청났었다. 

순수성을 강조하는 집단이 얼마나 배타적일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조심해야할 일이다. 


p5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과거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 조지 산티아나

p12 이것은 정보의 보존이 개방 사회를 지키는 데 여전히 핵심적인 도구임을 적시에 일깨워 준 일이었다. ‘또 하나의 사실’의 대두에 맞서 진실을 지키는 것은 그러한 진실들과 그 진실들을 부정하는 진술들을 포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p18 선택, 취득, 목록화 과정과 처분, 보유 과정은 결코 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들의 사회적, 시간적 맥락 속에서 하는 것이다.

p32 앗슈르바니팔의 거대한 도서관이 발견되고 이 제국(그리고 그 조상들 및 이웃들)의 온전한 역사가 드러나기까지는 다시 2200년이 지나야 했다. 이후 발굴되는 여러 앗시리아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와 특히 그런 발굴들에서 나온 기록들을 통해서 말이다.

p40 도서관은 미래를 위해 필요했다. 그들이 과거로부터 수집한 지식을 의사결정자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고, 니네베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자는 앗슈르바니팔 자신이었다.

p62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야만적 무지가 문명화한 진실에 승리했다는 파멸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식을 보존하고 공유하는 기관을 금전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후순위로 돌리며 전반적으로 경시하는 데 따른 점진적인 몰락의 위험성에 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p90 글래스턴베리 도서관에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60권 정도가 전 세계의 30개 현대 도서관에 보존돼 있는데, 더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많은 필사본들이 중세에 어떤 도서관 소장품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표지가 없기 때문이다.

p102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은 여러모로 지식의 역사에서 최악의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수십만 권의 책이 훼손됐고, 어떤 책들은 보관돼있던 도서관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p115 종교개혁은 유럽의 여러 도서관, 그리고 특히 브리튼제도의 도서관들을 초토화했다. 그 손실은 정확한 수치로 계량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증거 조각들을 모아보면 종교개혁 이전에 브리튼제도의 도서관들에 있던 소장물들의 70-80퍼센트가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수도원 도서관 서가에 있던 책들 가운데는 그보다 약간 적은 비율이 사라졌다

p142 제퍼슨과 타결하고 워싱턴에서 통과된 이 거래는 6487권의 책을 총액 2만 3950달러에 굽매하는 것이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단숨에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수준 높은 장서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p156 바이런은 1824년 사랑하는 그리스로 옮겨갔다. 그는 그해 거기서 열병으로 죽었다. 바이런은 매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었지만 물의를 야기하는 삶을 살아 전 세계에서 매우 유명해졌다.

p161 알베말가 50번지의 벽난로에서 바이러 ㄴ회고록 원본이 소각된 후 어떤 사본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는 친구들로서는 미래에 대한 우려가 컸고 역사를 통제할 필요학 있었음을 말해 준다

p168 그것은 지금 대체로 세 군데에 나뉘어 보관돼 있다. 가장 많은 부분은 옥스포드대학 보들리 도서관에 있고, 다른 것 중 상당수는 독일 마르바흐의 독일문학기록관에 있으며, 나머지는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국가도서관에 있다. 세 기관 모두 협력하며 카프카의 엄청난 문학 유산을 보존하고 공유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p177 한밤 무렵에 독일군이 대학도서관에 난입해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건물 전체와 그 장서 거의 대부분이 잿더미가 됐다. 중요한 필사본과 희귀본 모음에 더해 현대 인쇄본과 잡지들이었다.

p193 불탄 책 가운데 하나의 저자인 H.G. 웰스는 1933년 9월 “사상에 대한, 분별력에 대한, 책에 대한 망나니들의 혁명”에 반대의 뜻을 천명하며 “그것이 독일을 어디로 끌고 갈지” 의문을 표했다.

p194 뉴욕의 브루클린 유대인센터는 1934년 12월 미국 나치스금서도서관을 설립했다. 그 자문단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업튼 싱클레어 같은 유명 지식인들이 이름을 올렸다.

p217 리투아니아 국가도서관과 YIVO의 협력의 상징으로 문서 열 건이 뉴욕의 공개 전시에 출품됐다. 거기에는 아브라함 수츠케베르가 빌나 게토에서 쓴 시 묶음도 들어 있었다. 이 부서지기 쉬운 묶음이 여러 번의 파괴 시도를 견디고 남아 있다는 것은 동유럽 유대 공동체의 지식을 보존하려는 많은 개인들의 놀라운 헌신을 입증하는 것이다.

p247 그것은 이슬람교도 주민들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넘어서 그들의 절멸을 노린 세르비아 군대가 의도적으로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주변의 어느 건물도 포격을 당하지 않았다. 도서관이 유일한 표적이었다.

p253 이슬람교도들의 소유 재산에 대한 기록이 파괴되고 심지어 묘비까지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이슬람교도들이 보스니아 땅에 묻혔다는 흔적까지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p280 기록물을 물속에 가라앉힐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그는 거기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아마도 이 파일들은 그런 식으로 처리되지 못한 듯하다. 양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제리 독립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 매우 논란이 있고 프랑스의 명예에 위험한 문서들이었음에 틀림없다.

p304 문서를 빼낸 것은 불법이었을까?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책임 있는 행동이었을까? 특히 살아 있는 개인들이 문서에 언급돼 있어 그들의 생명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데 말이다 .

p342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도서관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줄였다. 그들은 흔히 온라인 정보가 있으니 도서관은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정반대다. 미국에서 도서관은 이용량이 크게 늘어 도서관을 당혹스럽게 했다.

p345 지식을 보존하는 일은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금 조달은 지속적이고 성공적인 도서관 운영의 핵심에 있다.

p348 지식을 평가하고 정리하고 보존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보다 파괴하는 것이 더 값싸고 더 편리하고 더 쉽고 더 빠르겠지만, 단기적인 편의 때문에 지식을 버리는 것은 사회의 진실 파악 능력을 약화시키는 확실한 길이다.

p352 이 기관들에 대한 자금 지원의 현실은 매우 도전적이다. 영국에서는 2017-2018년에 공공도서관에 대한 자금 지원이 3천만 파운드 줄었다. 130여 개의 도서관이 문을 닫았고, 닫지 않은 500개 도서관은 전문적인 사서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p360 기반이 되는 데이터에 대중의 접근이 가능해 과학자가 주장한 것을 다른 과학자가 입증할 수 있는가? 이 과정은 데이터가 독립적으로 보관돼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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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바다 -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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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의 바다

 : 황현필

 : 역바연

 : 2022/04/05 - 2022/04/08


역사강사로 유명하신 분이 이순신 일대기를 썼다.

어릴 때 이순신 위인전을 읽었었는데 위인전을 다시 읽으니 옛날 생각이 난다.

무과 시험을 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실제였구나.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 않아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보낸게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적재적소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에 비해 원균은 어찌 그렇게 무능한지...

능력은 없는데 욕심만 많은 경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원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역사는 항상 되풀이되는데, 지금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임진왜란의 전장터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어 이해도 쉽고 내용도 참 읽기 쉽게 잘 썼다.

좋은 책이다. 


p22 조선의 무과 합격자들은 말을 타고 칼을 쓰고 활을 다루는 등 제대로 된 정규 무인 코스를 수년간 밟은 프로급 무사들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낸 무인들이었다.

p79 긴장된 상황에서 이순신은 전 수군을 엄중히 타일렀다.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정중하라”

p104 당시 직책만 전라좌수영의 조방장일 뿐 실제 이순신의 고문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셈이었다. 이 거물급 고참을 진중에 모셔놓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으니, 정걸을 부른 이순신도 대단하거니와 도와 달라는 새까만 후배의 요청을 받아들인 정걸 역시 대단한 인물이었다

p145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의 상황까지 계산해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고, 또 적군 패잔병에 의한 우리 백성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이순신의 애민의 마음을 원균은 헤아릴 수 없었다

p153 한산도 대첩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 차례 이순신과 대결하였지만 용인전투에서처럼 용감한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어떤 전투를 앞두건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와키자카는 이순신에게 패배의 쓴맛을 톡톡히 보았고 이순신에게 겸손을 배웠다

p185 부산포해전 한달 후인 1592년 10월, 일본군은 호남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이었던 진주성을 공격했으나, 성주 김시민과 진주성 주민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진주성은 지켜졌고 일본군은 육지로의 호남 진출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시민은 전사하였지만 그의 위명은 일본에까지 남아 모쿠소라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p204 나라로부터 별로 받은 것도 없으면서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떨쳐 일어나는 이상한 DNA를 가진 민족성을 일본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p235 사상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에서 최고 지휘관인 윤두수와 권율은 전장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이들은 이순신에게만 무리한 공격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 수군은 장문포해전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은 채 2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시켰다.

p236 이원익은 이순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순신은 침착하고, 남에 대한 말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라 걱정이 가득했다. 항상 계획적이었고 꼼꼼한 사령관이다”. 사람 보는 눈이 밝은 이원익은 원균 또한 직접 만나보고는 이렇게 평가했다. “원균은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p244 순왜자는 조선인으로서 왜에 항복하고 왜군 편을 들었던 이들을 말한다. 반면 항왜자는 일본군임에도 조선에 항복한 후 조선 편을 들면서 일본에 저항하는 이들을 가리켰다

p263 1595년 한산도를 찾아와 잔치를 베풀며 수군을 위로해주었고, 이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원익은, 직접 구례까지 백의종군 중의던 이순신을 찾아와준 것이다. 이원익은 이순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알고 소복을 입고 이순신을 문상했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p287 칠천량해전은 육지의 용인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최대 패전이었다. 134척의 판옥선 중 122척이 불탔거나 침몰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의 정한위략에 남아 있다. 배설의 판옥선 12척이 살아서 이순신에게 돌아가게 되니 교차 검증이 된 셈이다

p298 실제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다시 임명받은 후 정유재란이 전개되는 동안 임금 선조를 향한 망궐례를 올리지 않았다. 지방관이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충성의 의무를 이순신은 행하지 않았다.

p369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

p385 이순신은 나라를 잃고 이민족에게 지배당할 뻔한 역사적 수치스러움을 개인의 능력과 헌신으로 막아내었다. 이순신은 분명 조선을 살린 것이 맞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조선의 미래까지 바꾸지는 못하였다.

p387 훗날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번이 조슈번과 연계하여 에도 막부를 타도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내었고, 그들이 정한론의 선두주자가 되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을 도다시 침략했던 중심세력이 되었으니, 역사가 참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일본 내 가장 극우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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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 2022-04-17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cafe.naver.com/booheong/214016 오류가 많은 책입니다ㅠ
 
빵으로 읽는 세계사 - 10가지 빵 속에 담긴 인류 역사 이야기
이영숙 지음 / 스몰빅인사이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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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으로 읽는 세계사

 : 이영숙

 : 스몰빅 인사이트

 : 2022/03/26 - 2022/03/31


요즘 이런 책이 유행인가?

비슷한 류의 책들이 많이 나왔다. 단순한 세계사가 아니라 질병, 빵 등 매개체를 통해 세계사를 풀어나가는 책.

나도 음악으로 읽어보는 세계사 이런책을 한번 내보고 싶었는데 출판사에서도 이런 류의 책들이 요즘 트렌드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빵으로 읽다보니 결국 유럽사가 되어 버렸다.

빵의 이름을 알려주고 그 빵을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이 붙고, 그 빵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의 역사가 이어진다.

루이 14세가 후추와 소금을 좋아해서 그것만 넣어서 음식을 먹어서 유럽의 음식문화에서 후추와 소금이 중요해졌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이 책에는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프랑스의 음식문화가 메디치가문의 딸들이 시집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알려준다.

프랑스가 외부의 음식문화를 잘 버무려 자신들만의 문화로 잘 수용해낸 것 같다.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책을 읽으니 새롭게 알게 된다.

좋다.


9% 빵은 역사가 길다. 세계 최초의 도시로 꼽히는 우르에도 기록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기존에는 빵이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에서 시작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더 이전에 빵을 먹은 흔적이 속속 발견되면서 언제부터 인간이 빵을 먹었는지는 미궁에 빠져있다

13% 플랫브레드 중 가장 대표적인 라바시는 땅에 묻어놓은 타니르라고 부르는 화덕 벽에 얇게 민 밀가루 반죽을 붙여 구워낸다

13% 너는 왜 빈둥거리고 있느냐? 학교에 가고 숙제를 외워라. 네가 (공부를) 마쳤으면 내게로 오너라. 길거리를 떠돌아다니지 말아라.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알아듣겠느냐? 거의 4,000년 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부하고 다그치는 말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촌음을 아껴 공부에 매진하라는 충고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는 잔소리와 꽤 닮았다

21% 이집트인들은 이 나일강의 범람 주기와 시기, 그 치수 기술을 위해서 달력과 천문학과 수학이 필요했고, 범람 후 원래의 농지를 구획 짓기 위해 기하학이 필요했다. 나일강이 이집트 문명의 알파요 오메가였던 셈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강이 중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23% 토리노 파피루스 문서가 발견된 이후, 람세스 3세가 재위한 지 27년째 되던 해(기원전 1152년)에 급료인 빵을 제때 받지 못한 100여 명의 노동자가 모여 파업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기존의 역사는 수정되었다. 급료를 받고 일하는 지위라면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가 되니 말이다

25% 넷플릭스의 문화 다큐멘터리 COOKED의 3부를 보면 빵과 관련된 영상이 나온다. 모로코의 한 마을에서는 수확한 밀을 가루로 빻을 때 빻은 곡물가루의 10퍼센트를 제분 삯으로 떼어주는 방식으로 마을의 제분소를 이용한다

26% 천연발효종을 이용한 샤워도우 빵은 소화도 쉽고 맛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엔 건강, 웰빙, 소확행 등과 같은 트렌드에 맞추어 제과 제빵소에서도 직접 연구하고 만든 샤워도우를 파는 빵집들도 있다

33% 식문화만 보더라도 유명한 셰프들이 공식 대화를 할 땐 프랑스어로 된 요리용어를 쓸 정도였다. 옛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동경하여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딸이었던 카트린을 며느리로 맞았고 그 결과 이탈리아 식문화가 프랑스의 식탁을 업그레이드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39% 클레멘스 7세의 실정으로 로마는 1527년 에스파냐 황제 카를 5세에게 점령된다. 세계사에서 흔히 로마 약탈로 언급되는 사건이다. 그 후 피렌체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클레멘스 7세 교황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40% 카트린은 이름뿐 왕비로 소외당하고 디안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을 흔드는 상황은 앙리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카트린은 온갖 꼴을 다 보고 겪으면서도 26년간이나 남편과 디안 뒤에서 묵묵히 참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그의 정부에게 맞서거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남편의 관심을 끌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남편 사후에 카트린은 디안에게서 쉬농소 성을 빼앗고 왕으로부터 받은 보석들도 압수한 채 궁 밖으로 내쫓았다

44% 이탈리아만 프랑스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식문화 또한 프랑스에 깃들어 있다. 이 역시 스페인의 두 왕녀가 프랑스로 시집가면서 영향을 끼친 것이다.

47% 마카오는 중국의 식자재로 광둥요리와 포르투갈요리를 퓨전한 매케니즈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50% 사그레스 성에는 항해에 필요한 정보와 지리 관련 지식이 각종 지도와 항해 관련 서적, 기행문 등과 함께 수집되었다. 자료가 축적되어가자 이 자료를 보기 위해 세계 도처의 전문가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이 나눈 대화와 연구가 다시 기록으로 남아 사그레스 섬에 보관되었다. 이러한 선순환으로 사그레스 성은 거대한 학교요 도서관이자 천문대로 항해를 준비하는 두뇌 역할을 하게 되었다.

52% 그는 평생 권력 욕심 없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탐함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 엔리케가 실지로 직접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일은 없었지만 해양 탐험에 쏟은 공적들로 인해 그에겐 항해 왕자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그의 리더쉽과 용기, 도전은 오늘날에도 자주 언급되곤 한다

63% 일암 이기지가 북경을 방문하고 일암연기는 60년 뒤 연암이 쓴 열하일기의 본이 되었다. 이기지는 박지원, 홍대용, 등 북학파, 실학파들의 롤모델이었을 정도로 후대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67% 마젤란의 최후는 끔찍했다. 최정예 병사 60명을 이끌고 포함외교가 무엇인지 보여 주려 했지만, 라푸라푸와 전투를 벌이던 중에 그는 필리핀 부족 병사들에게 머리엔 창, 다리에는 독화살이 박히는 등 심각한 상처를 입는다. 이에 마젤란은 급히 배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결국 라푸라푸 병사들에게 끔찍하게 살육을 당했고,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74% 토르티야에 음식을 완전히 쌌는지, 반으로 접기만 했는지, 돌돌 말았는지, 아니면 부재료 없이 토르티야를 튀겼는지에 따라 케사디야, 타코, 부리또, 나초 등의 음식이 되니, 기승전 토르티야다

76% 콜럼버스와 코르테스, 피사로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겉으로는 십자가와 탐험 정신이었지만, 속으로는 향신료와 황금으로 대변되는 물욕이었다. 황금을 향한 욕심은 커다란 동기가 되어 침략과 약탈을 추진하게 했다

78% 말린체에게는 정복자를 위해 부역한 배신자라는 차가운 시선 한편으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운명에 순응했던 여인이란 동정적인 시선도 있다. 식민지 문화의 특성으로 꼽히는 숙명주의를 일컫는 스페인어 말리치스모라는 말도 그녀의 이름에 유래되었다

84% 이슬람법상 무슬림이 먹을 수 있게 허용된 음식인 할랄 식품이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율법에서 허용된 식품이 있는데, 그것이 코셔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나 조개류 등을 제한하는 코셔 식품을 꽤 까다롭게 지키다 보니 그것이 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86% 로스차일드 가문의 유대인 금융인 야콥시프는 러일전쟁 대 일본 국채의 절반을 사서 일본의 전쟁자금을 도왔다. 일본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러시아가 미워서였다. 그랬으니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러시아가 포그룸으로 유대인을 박해했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1%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위도가 높아서 추운 날씨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난로와 그 위에 뭉근히 끓이는 수프가 일상이다. 추운 날 뜨거운 수프에 흑빵을 부수어 넣어 먹으면 속이 확 풀리는 든든한 한 끼가 된다

95% 명칭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도시는 제정 러시아 때인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만들어진 이래 200년간 로마노프 왕종의 수도가 되면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구식 발전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표트르 대제 덕에 시인 푸쉬킨은 이곳을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을 만큼 유럽의 건축 양식이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인 도시다

95%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당시 레닌그라드라는 작품을 작곡했는데, 우울하거나 비탄에 잠긴 선율이 아니다. 의외로 광기인지 결기인지 베짱인지 모를 힘이 느껴지는 곡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느낀 전쟁의 느낌을 그대로 선율로 옮겼다는 말과 함께, 레닌그라드인들을 기억해달라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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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 - 신화가 아닌 보통 사람의 삶으로 본 그리스 로마 시대
개릿 라이언 지음, 최현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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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

 : 게릿 라이언

 : 다산초당

 : 2022/03/26 - 2022/04/04


예전에 읽었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생각하고 읽으면 안된다.

이 책의 컨셉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일상생활에 대한 역사책이다.

왕이나 영웅의 이야기가 주류인 그리스로마사에서 간만에 민중 또는 서민의 이야기로 채워진 책이 나왔다.

왕이나 귀족의 이야기는 기록도 많이 있지만 서민들의 이야기는 기록이 많지 않다보니 중간중간 추정과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부분은 당시 기록을 참조했기 때문에 터무니 없는 추정은 아닌것 같다.

검투사들이 보리 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이라든가, 그리스 사람들의 동성애의 모습에서 성적 주도권은 남,여가 아니라 자유민 또는 성인같은 계급에 따라 결정되다는 것, 마차가 생각보다 불편했다는 것 등은 새롭게 안 사실이다.

역사라는 게 어릴 때는 영웅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사람사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간다. 물론 그렇다고 영웅의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건 아니다.

단지, 영웅의 이야기 때문에 실제로 죽고 고통받았던 민중들에게도 이제는 눈길이 많이 간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한국사도 이런 백성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책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p33 황제들은 특히 사자를 좋아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기가 싫어하는 원로원 의원을 사자 중 가장 사나운 놈과 강제로 싸우게 했던 적도 있다.

p40 로마의 원형경기장의 야만성과 고내 노예 제도의 비정한 비인간성처럼 영아 유기도 고대인들과 현대인을 구분하는 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로마인들에게 인생은 투쟁이었으며 가족을 가지는 것은 힘든 선택을 요구했다.

p49 많은 그리스, 로마인은 자기 의사가 마침내 자기 의술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깨닫고 장의사가 되었다고 농담한 시인에게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p54 로마인들은 그리스를 정복했을 때 그리스인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좋은 음식을 먹고 산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로마의 상류층은 그리스의 요리사와 조리법을 들여오기 시작했고 요리사와 조리법 양쪽에 경쟁과 과시라는 로마인의 정신을 주입했다.

p63 포도주를 마시는 교양 있는 방법은 물에 섞는 것이었다.

p64 건강한 사람들에게 폭음은 사교적 의미가 컸다. 특정 종교행사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만취가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장되기도 했다.

p103 디오클레티아누스 최고 가격령에 따르면 제빵사는 농장 노동자보다 2배 더 많은 돈을 벌었고 벽화 화가는 3배, 작업 화가는 6배 더 많은 돈을 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p125 로마에서의 삶을 죽음으로 향하는 전주곡으로 만들었던 주역은 화재나 도둑이 아니라, 하수구에서 부화한 모기와 보이지 않는 병원균이었다

p130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는 자들(다른 말로 야만인)은 본성적인 노예라고 주장했다.

p138 사람들은 부부가 서로에 대한 연애 감정으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거나 심지어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p139 로마 속주 이집트에서 나온 파피루스 문서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성격 차이가 중산층의 흔한 이혼 사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p144 고대 세계에서 남성의 성 정체성은 욕구 대상에 의해 규정되지 않았고 성관계에서 맡은 역할에 의해 규정되었다. 자유인으로 태어난 남성은 섹스할 때 항상 주도적이며 삽입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다. 상대가 여성인지 소년인지는 비교적 덜 중요했다. 여성과 소년 모두 사회적으로 열등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p158 그리스 로마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점잖게 성기를 단속한 신사들의 대척점에는 야만인과 괴물의 늘어진 큰 성기가 있었다.

p168 철학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로마제국 시대의 학식있는 그리스,로마인들은 신들에 대한 순수한 신앙과 신화의 부도덕성에 대한 혐오를 동시에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p223 부유하든 빈곤하든 모든 대형 도시의 신자들은 주교의 감독하에 있었고, 주교에 의한 관리는 규모에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들에 일종의 결속감을 주었다. 이는 전통적인 이교 신앙에서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p252 단거리 달리기가 언제나 운동의 레퍼토리에 포함된 것과 반대로 장거리 달리기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리스, 로마의 남성들은 걷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고, (부유층의 경우) 운동을 위해 승마를 했다.

p260 마차는 이렇게 호화스럽더라도 충격 흡수 작용이 부족했으므로, 이 굴러다니는 궁전에 타면 덜커덩덜커덩 흔드릴 수밖에 없었다. 긴 방석이 깔리고 커튼이 있는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훨씬 더 편안했다. 길 위에서 낮잠을 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도 있었다

p279 동물들을 포획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어려운 것은 포획한 동물들을 로마로 데리고 와서 시합이 있을 때까지 살려두는 것이었다.

p284 콜로세움에서 막바지 시합이 개최될 즈음 터키의 표범, 이란의 호랑이, 이집트의 하마, 북아프리카코끼리는 전부 사냥되었거나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 로마 제국주의에 희생된 것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었다

p287 왜 검투사들만 보리와 콩을 먹었을까? 에페수스에서 발굴된 검투사의 뼈를 분석한 과학자들은 그 식단이 체중을 늘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했다. 몇 cm에 달하는 피하 지방은 검투사들의 신체 장기를 보호했다. 즉, 검투사들은 전투 능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얕은 자상 정도는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p334 정해진 정확한 위치에 솥과 변소를 설치했고 깔끔하게 열을 지어 가죽 막사를 쳤다. 위압적인 질서 정연함은 마찬가지로 전투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p337 게르만인들은 도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갈리아인(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사람)과 다르고, 정착민이라는 점에서 동유럽의 유목 민족과 다르고, 특징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졌다는 점에서 동유럽의 유목 민족과 다르다는 인식이 있었다.

p339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는 게르마니아에서 20여년 동안 끈기 있게 지속된 속주 건설을 파괴했다. 살아남은 로마군은 라인강으로 후퇴했다.

p346 순례자들과 교황의 권위만이 로마가 무명 도시로 추락하는 것을 막았다. 9세기 즈음, 로마 인구는 95% 감소하여 3-4만 명이 100만 명을 위해 건축된 도시의 폐허 속에 흩어져 살았다.

p367 비잔티움의 제국의 침략자, 십자군, 오스만 제국은 순서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실 묘지들을 약탈하고 훼손하였으며 파괴했다.

p174 라틴어는 근대 초기까지도 진지한 학술 연구에 적합한 유일한 도구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확고하고도 완전한 화석 언어가 되었고 학구적인 담론에만 국한되어 사용되며 학생들의 악몽이 되었다.

p379 후손을 남겼다는 전제하에, 천 년 전에 살았던 유럽인은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럽인의 조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유전적 표본이 말해주고 있다.

p388 가장 원초적인 수준으로 답하자면 그들은 돈과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이들은 에게해를 중심으로 하는, 작지만 돈이 되는 제국을 건설했어요

p391 여러 모험 중에서도 그의 우상이었던 아킬레우스의 무덤 주위를 벌거벗고 뛰어다녔고, 술에 취한 채 페르시아의 수도를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으면, 인도에서 화살을 폐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정이 모두 끝났을 때 31세의 알렉산드로스는 불가리아에서 파키스탄까지 펼쳐진 제국의 주인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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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
남종국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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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

 : 남종국

 : 서해문집

 : 2022/03/18 - 2022/03/23


르네상스가 읽을 것도 많고 재미있다.

현대 세계의 예술이나 기술, 문화의 출발점이다 보니 연관된 내용도 많고 상상하기도 쉽다.

반면 중세는 그냥 신비의 영역이다.

중세에는 거인이나 마법사가 있을 것 같고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 같다.

그림만 봐도 촌스러운 금박으로 종교화만 잔뜩 그려놔서 다 그게 그거 같은 느낌이다.

중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중세사람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을 모은 책이다.

칼럼으로 나왔던 내용이 책으로 엮여져서 통일감은 떨어진다. 

대신 어느 부분부터 읽는다고 해도 부담이 없다. 

흑사병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몽골의 세균전이 사실 근거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말이 제일 인상깊었다.

내가 알고 있는 단편적 지식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역사책은 꾸준히 신간을 읽어주지 않으면 새로운 사료의 발견으로 뒤집어진 역사적 사실들은 모른채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역시 계속 배워야 한다.

재미있는 책을 읽어서 좋다. 


p6 기독교적 관점을 가진 학자들은 유럽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그 덕분에 유럽 세계가 기독교 문명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중세 유럽 기독교 세계는 찬란한 종교예술을 꽃피웠고, 위대한 성직자와 신학자들이 눈부신 지적 성취를 이뤘다면서 중세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도 중세 후반 지중해 교역과 교류를 연구하면서 11세기 이후 서유럽 세계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음을 확인했다.

p22 오늘날에는 수익성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가 규형 잡힌 학문 생산을 어렵게 만든다면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종교적 편견이 학문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p29 흑사병에 걸린 제노바인들의 배가 흑해에서 시칠리아섬까지 항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몽골과 제노바 간의 전투를 최초의 세균적이라고 부르고 전염병 확산 책임을 몽골인들에게 전가하는 유럽 중심적인 해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p47 교회는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날과 방식까지 규제했다. 축일과 금식일, 일요일, 월경과 임신기간, 수유기간, 출산후 40일 등의 기간에는 성행위가 금지되었다.

p63 다티니 부부의 불임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 중 하나는 이들을 포함한 당시 이탈리아 도시민들이 불임을 신의 저주나 원죄의 결과, 악마의 소행이라는 비합리적이면서 종교적인 믿음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p72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서 왕의 손 대기 치료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볼테르는 풍속에 관한 시론에서 루이 14세가 자신의 정부 중 한 명이었던 수비즈 부인을 많이 만졌지만 치료하지 못했다라고 조롱했다.

p85 유럽 역사에서 교회가 불평등한 신분 질서를 만들고 유지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종교가 인간의 도덕적 진보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마이클 셔머의 신랄한 지적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p96 인간이 원죄의 고통을 짊어지고 낙원에서 추방된 것은 모두 이브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다.

p99 악마와 계약을 맺고 악마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어떻게도 증명할 수 없었기에 대부분 마녀를 판정하는 최후 수단은 고문을 통한 자백이었다.

p111 유대인에 대한 낙인찍기는 무엇보다도 이들이 다른 종교를 믿는 소수자였기 때문이다.

p122 종교적 교리를 시대를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 종교적 교리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긴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확립되었고, 때로는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변화하고 폐기되기도 했다.

p131 연옥은 불로써 자신의 죄를 정화하고 최종적으로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중간 단계의 공간이었다. 전적으로 의로운 사람은 바로 천국으로 가겠지만 가벼운 죄인들은 연옥으로 가서 불로 죄를 씻고 종국에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p133 오랜 역사에서 인간의 과학 지식은 무한히 증가했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지식은 티끌만큼도 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학이 아니라 여러 종교에서 계속해서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p156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때로는 비합리적인 듯 보이는 인간의 상상력이다.

p174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던 로마의 초기 역사는 음모, 폭력, 친족 살인, 납치와 강탈 등 야만적 이야기로 가득하다

p178 로마인들은 약탈하고 살해하고 강탈했다. 이를 제국이라 잘못 부르고 있다. 그들은 황폐화시켜 놓고 이를 평화라고 부른다라고 말한 타키투스의 비판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 평가일 것이다.

p184 문서를 위조한 사람은 주로 성직자들이었고 이들은 위조를 부끄럽게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신의 뜻을 따랐기에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p187 우리 모두는 죄가 있건 없건 또한 젊으나 늙으나 이 과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 과거의 결과를 넘겨받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라면서 과거 나치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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