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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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 도읍지 이야기

 : 이유진

 : 메디치 미디어

 : 2022/02/20 - 2022/03/07


재미있게 읽었다.

장안의 화제라고 아직까지 이야기되는 시안을 비롯하여, 뤄양, 카이펑, 항저우, 베이징 등 중국의 여섯 수도의 역사를 배웠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각 도시를 수도로 삼았던 왕조들이 정리되어 있어 중국사에 대한 이해도 높힐 수 있었다. 

각 도시의 지리를 잘 모르다 보니 글로만 읽어서는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다. 그건 내가 지식이 짧아서 그런것이지 책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수도를 대상으로 이렇게 책을 써도 꽤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수도라는게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배경도 있고, 그로 인해 어떻게 발전하고 멸망하게 되었는지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테니까...

재미있는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다. 



3% 중국이 세계 중심이자 최고라는 중화사상은 중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그들에게 각인된 일종의 컬쳐코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건국 이후 30년과 개혁개방 이후 30년을 지나온 중국이 이제 새로운 30년을 펼쳐가고 있다. 지난 두 단계 30년의 모토가 각각 계급투쟁과 경제발전이었다면, 향후 30년의 모토는 위대한 중화의 재현이다

4% 로마, 아테네,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로 꼽히는 시안은 역대 가장 많은 왕조가 도읍한 곳이기도 한다. 서주, 진, 한은 물론 수, 당 등 13개 왕조가 이곳에 도읍했다

6% 주왕과 달기는 주지육림의 주인공이다

13% 군막에서 계책을 짜내 천 리 바깥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로하며 군량을 보급하고 운송로가 차단되지 ㅇ낳도록 하는 일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여 이기는 일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재인데, 나는 그들을 쓸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까닭이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나에게 사로잡힌 까닭이다

18% 소릉에서 영원히 이세민과 함께해야 할 여섯 준마는 죄다 제자리에 있다. 지금 소릉에 있는 육준 석각은 복제품이다. 각각의 무게가 2.5톤이나 되는 이 석각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여섯 준마 가운데 삽로자와 권모과는 1914년 미국으로 반출되어 현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넷 역시 해외로 반출될 위기를 겪을 뒤 1918년 산시성도서관에서 보관되다가 1949년 비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0% 실제 역사에서 현장이 태종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간 때가 정관 19년 2월이고, 태종이 고구려로 쳐들어간 때도 2월이다. 태종이 현장을 만난 뒤 바로 침략 전쟁에 나섰던 것이다. 춘추시대 공자도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지 못했듯 현장도 그러했다. 왕은 그들을 존중하는 척했을 뿐 그들의 진심에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24% 최악의 폭군이 걸왕과 주왕을 자신과 비교하라는 태종의 위협 앞에서도 장현소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로 건원전을 수축한다면 걸왕이나 주왕과 마찬가지라고 직간했다. 결국 태종은 건원전 건립을 포기했고 장현소에게 비단을 하사했다. 태종과 장현소의 일화는 태종이 신화의 간언을 얼마나 잘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27% 낙갈발과 홍화공주는 양주로 이주했다. 낙갈발은 고토 수복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당나라에 계속 지원을 청했다. 드디어 함형 원년(670년)에 고종은 설인귀에게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토번을 치게 했다. 결과는 당나라 군대의 대패였다. 잠깐 덧붙이면, 당나라와 토번의 이 대비천 전투가 신라에는 천우신조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신라마저 직할지로 삼으려 했다. 바로 이때 토번 덕에 신라와의 전투를 준비하던 설인귀가 대군을 이끌고 서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신라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0% 지위 높은 어떤 이가 젊고 잘생긴 과거 합격자를 점찍어 억지로 집까지 오게 한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젊은이에게 귀인이 넌지시 말을 건넨다. “나에게 아주 괜찮은 딸이 있다네. 자네와 짝을 맺어주고 싶은데 어떠한가?” “가난하고 미천한 제가 높은 집안에 의지할 수 있게 되면 실로 행운이지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집사람과 아이랑 의논해봐야 하는데 어떠신지요?”

32% 당나라는 견우, 직녀 신앙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 현종은 칠석을 중시해서 1000척(약 30미터)에 달하는 아주 높고 큰 걸교루를 궁중에 세워놓고 칠석이면 이곳에서 즐기며 밤을 새웠다고 한다. 칠석날을 위한 누각이 걸교루다. 궁중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뜰에 누각을 세우고 등과 꽃과 채색 끈으로 장식해 걸교루로 삼았다

33% 평안남도 덕흥리 고구려 고분벽화(408)에도 견우와 직녀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때 그 지역 사람들도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믿었기에 무덤에 그런 하늘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설 속에 담긴 인간 삶의 원형에 많은 이가 공감했기에 이야기가 확산되고 여러 지역에서 공유했을 것이다.

34% 장안에서는 이국의 패션과 오락과 예술이 유행했다. 외래 문물에 개방적이었던 만큼 조로아스커터교, 마니교, 경교(네스토리우스교) 등 다양한 종교가 유입되었고, 외국인이 밀집해 거주하던 서시 주변에는 다양한 종교 사원이 세워졌다. 페르시아 상인은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사원에서 예배를 드렸고, 시리아에서 온 이들은 경교 사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36% 모든 도시는 자신의 상징물을 지닌다. 베이징에 천안문이 있다면 시안에는 종루가 있다고 할 정도로 종루는 시안의 상징이다

41% 공자가 평생 흠모하여 모델로 삼았던 인물이 바로 주공이다. 질서와 조화로 대변되는 주나라의 예악제도는 훗날 유가의 예악사상으로 이어져 수천년간 중국의 정신을 지배했으니, 주공은 중국을 만든 주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뤄양을 찾게 되면 주공 사당을 잊지말고 둘러보자

44% 관우의 머리가 묻힌 곳이 바로 뤄양의 관림이다. 중국 역사상 무덥에 림이라는 말이 적용된 사람은 공자와 관우 두 명뿐이다. 공자가 묻힌 공림, 관우가 묻힌 관림, 그들의 역사적 비중이 무덤 호칭에 반영된 것이다

46% 프리스트는 반양중동뿐 아니라 반양남동,연화동, 봉선사, 고양동의 유물 역시 비열한 방식으로 손에 넣어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와 추악한 계약을 맺었던 웨빈은 용문석굴의 유물을 일본인에게도 팔아넘겼다. 그렇게 그는 국보를 팔아넘기고 큰 돈을 벌었다

47% 봉선사 주불인 노사나불은 크기부터 사람을 앞도한다. 17.14미터 높이의 좌상에 머리 높이는 5미터, 귀의 길이만도 1.9미터나 된다. 노사나불을 비롯해 가벗과 아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두 천왕과 두 역사로 이루어진 봉선사 조각은 당나라의 위대한 시대적 상징으로 칭해진다

48% 엘긴 마블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선 떼어낸 조각들을 이렇게 부른다. 19세기 초, 오스만튀르크 주재 영국 대사를 지낸 토머스 브루스 엘긴은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에서 파로테논신전 조각을 영국으로 가져갔다. 수많은 조각물이 원래 자리에서 떼내지면서 파괴되었고 운반되면서 유실되었다. 영국박물관 듀빈갤러리를 채우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 조각들은 바로 이런 약탈의 결과물이다. 듀빈갤러리에 있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 강의 신 일리소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는 얼굴이 없다. 다름 아닌 약탈의 흔적이다.

52% 북망산에는 빈 땅이 없으니 죄다 뤄양 사람들의 옛 무덤이로구나라는 시구처럼, 우리에게 북망산으로 익숙한 이곳에는 역대 왕조 왕후장상의 무덤이 수두룩하다.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한 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도 이곳 망상에 묻혔다

54% 정저우의 황하박물관에 소장된 민국도구합용기사비는 국민당이 1946년의 제방 복구를 기념하려고 만든 것이다. 비문에 적힌 제국안란이라는 글귀는 장제스 친필인데 나라를 구하고 물길을 다스린다는 의미다. 비문의 기록에 다르면 일본군이 폭파해 화위안커우 제방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진실이 이렇게 엄폐, 왜곡되었고국민당이 타이완으로 퇴각한 이후 수십 년 동안 타이완에서는 이 일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54% 카이펑의 지층 단면은 수천 년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가자 ㅇ아래족에는 전국시대 대량성이 있고, 그 위로 역대 도시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시대별 도시가 묻힌 깊이는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 위나라(12-14미터), 당나라(10-12미터), 북송(8-10미터), 금나라(6미터), 명나라(5-6미터), 청나라(3미터) 성루성 즉 이렇게 도시 위에 도시가 포개진 상황은 바로 황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황하의 범람과 그에 따른 재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57% 종이 ,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형상화함으로써 세계 4대 발명품을 탄생시킨 중국의 문화를 전세계에 자랑하지 않았던가. 4대 발명품 가운데 인쇄술, 화약, 나침반은 바로 송나라때 실용화되었다

67% 하이난의 소수민족인 리족과 더불어 지냈고 하층민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리쩌허우 말대로, “소식은 끊임없이 자아를 위로하며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하고 만족하는 낙관의 정서를 지닌 사람이었다. 철종이 죽은 뒤에야 유배에서 풀린 소식은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창저우에서 세상을 떴다. 이대가 1101년, 그의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69% 호설암의 성공와 몰락은 정경유착의 전형이다. “장사를 하려면 기댈 사람이 있어야만 하니, 권력이 있으면 이익도 있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좌종당이라는 권력에 기대어 비상했던 호설암, 결국 그는 이홍장이라는 권력 때문에 날개 없이 추락했다.

72% 육화탑은 천재 또는 인재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 하지만 늘 재건, 보수되며 그 자리를 지켰다. 970년에 처으 ㅁ세워졌던 육화탑이 지금도 육화탑으로 존재하는 것은 탑을 지켜온 많은 이들 덕분이다. 지담 스님의 청동좌상은 바로 그들의 노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리라

73% 명나라 우겸은 몽골의 공격으로부터 베이징을 수호했다. 그보다 300년 전 남송의 악비는 여진족의 금나라와 맞서 싸웠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목숨을 걸고 지킨 나라이건만 모반죄를 씌워 죽게 한 것이다

75% 난징이 무더운 도시 10위권 밖이긴 하지만 여름철 매우 무더운 도시임은 분명하다. 창장 연안에 자리한 충칭, 우한, 난징이 화로처럼 무더운 데는 아열대 고기압의 영향 외에도 지리적 영향이 크다

76%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외국과 체결하게 된 첫 번째 불평등 조약은 난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난징조약 이후 난징은 줄곧 중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곳이다

80%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 해도 그저 여러 첩 중 하나일 뿐이고 여의치 않으면 내쳐질 수도 있는 존재, 그게 바로 기녀의 운명이었다

83% 쑨원의 유해를 증산릉에 안장하는 봉안대전이 거행된 1929년 6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교통이 3분 동안 멈추었고 전 국민이 3분동안 애도를 표했다. 국부에 대한 최고 예를 표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가 사후에 증산릉 곁에 묻히길 바랐다. 장제스 역시 중산릉 서쪽에 자기 묏자리를 봐둔 적이 있다. 만약 훗날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장제스는 바로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84% 9층 유리탑은 난징을 방문했던 유럽 여행자들에 의해 중세시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힐만큼 예술성이 뛰어났다. 대보은사 유리탑에 대해 ‘큰 규모였다’, ‘뛰어났다’라고 과거형으로 서술한 이유는 그것이 이미 파괴되었기 대문이다. 1856년 벌어진 태평천국의 내분으로 그토록 아름다운 탑이 파괴된 것이다.

89% 천안문 성루에 걸린 초상화는 중국의 정치 지형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개국대전 이후 마오쩌둥 초상화는 해마다 5월 1일 노동절과 10월 1일 국경절에 맞춰 열흘가량 천안문 성루에 걸렸다. 마오쩌둥 초상화가 지금처럼 1년 내내 걸리게 된 건 1966년 8월부터다. 바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가 이루어진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94% 건륭제가 조지 3세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천조는 물산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으며, 만국을 다스리는 천조는 일시동인(모두에게 차별없이 평등하게 어짊을 베풀다)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94% 약탈로 끝이 아니었다. 연합군 요구대로 포로는 석방되었다. 하지만 포로 몇 명이 이미 죽은 것과 포로들이 학대를 받았다는 것을 빌미로 연합군은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게다가 원한을 씻는다는 명분으로 원명원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10월 18일, 원명원은 불길에 휩싸였다

97% 현재 유교는 중국에서 가장 거대한 지적 힘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중국문화의 주체적 정체성을 담보해주고, 시장경제화로 인한 여러 부작용을 해결해주고,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국민 통합을 이뤄낼 열쇠를 유교에서 찾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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