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의 한국사 - 동아시아를 뒤흔든 냉전과 열전의 순간들
안정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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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전의 한국사

 : 안정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06/22 - 2022/06/23


집에 있는 동안 읽은 책.

일반적인 역사책에 잘 나오지 않은 부분을 들여다보고 해석해줘서 그런지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

사료에 적혀 있는게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사료와 유물과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잘 읽어내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양직공도의 그림과 양나라 역사서를 통해 당시 백제와 신라의 위상을 보게 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왜곡을 서숨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의 외교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국익앞에서는 이웃국가를 깎아내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선지 장군은 이름만 들었는데 이 책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의 뛰어난 전략과 전투능력은 그를 높은 장군의 지위에 올리지만 뇌물을 쓰고 포악했던 성정으로 결국 몰락하게 된다. 이방인으로서 특히 망한 나라의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몽골점령 당시 고려의 생존 전략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원종이라는 괜찮은 왕이 있어서 고려왕조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걸 보면서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악하고 무능한 지도자가 대통령으로 있다보니 새삼 깨닫는다. 


p6 조선 후기에도 도시를 중심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자리를 잡고 소설책 등을 읽어주고 돈을 받던 사람들이 있었다. 일명 전기수라고 불린 이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솜시가 뛰어나서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p49 양서 제이전에는 문신국이나 흑치국이니 하는 나라들이 일본 동쪽 해상에 있으며 기괴한 풍습이 있다고 전한다. 이들은 아마도 혜심과 같이 조공 사절을 빙자한 사기꾼들이 꾸민 허구의 나라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p54 이 그림의 정식 명칭은 양직공도로, 6세기 전반 양나라에서 제작되었다. 양나라를 세운 무제의 아들 소역이 직접 그린 것이 저본이 되었다고 전한다. 안타깝게도 원본은 소실되었고 여러 버전의 모사본들이 남아 있는데, 자료에 따라 적게는 12개국, 많게는 33개국 사신들의 모습이 그림에 담겨 있다

p63 무령왕은 20여년을 재위하면서 대내적으로 왕권을 탄탄하게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중,남부 권역으로 차츰 영향력을 확대했다. 521년에 무령왕이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던 것은 백제가 다시 부강해졌으며 이전의 영향력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함이었다

p65 백제가 양나라 조정을 상대로 벌인 외교적 책략의 결과, 양나라가 후대에 남긴 한반도 중남부의 정세에 대한 기록, 즉 양직공도와 양성 신라전의 기록은 실상과 크게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왜곡과 과장이 가득한 이 기록들은 역설적이게도 6세기 전반 양나라에서 백제와 신라가 벌인 외교전의 실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p71 역사의 연구는 단순히 사료를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의 국제 정세와 다양한 외교적 행위의 이면을 살피지 않은 채 사료 내용만 그대로 믿는다면, 송서의 표문에서 보이는 왜 국왕의 허풍이나 과장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p118 한마디로 고구려는 풍홍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당시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외교는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을 뿐, 천자국의 실질적인 규제를 동반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p134 5세기 전반에 벌어졌던 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는 풍홍이라는 한 사내가 벌인 무모하고도 저돌적인 행보가 있었다. 그리고 북위, 고구려, 송 등 당시 동아시아의 내로라하는 국가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이 분쟁을 더욱 확대시킨 비정한 조연들이었다. 각국이 모두 입을 모아 의와 리를 부르짖으며 풍홍 사건에 개입했지만, 정작 드러낸 것은 탐욕이요, 남은 것은 이해뿐이었다

p146 위 이야기는 700년 무렵에 당나라 장안에서 벌어진 연회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신당서의 기록이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던 고구려인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 이민족 출신들을 어떤 방식으로 공공연하게 무시했는지 등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p161 그동안 여러 차례 서역 원정길에 나셨지만, 이처럼 휘하 병력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적이 별로 없엇다. 그야말로 토번을 단숨에 제압하고 영향력을 확복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고선지는 소발률국에 군사 3,000명을 남겨두고, 왕과 왕비를 사로잡아 당당하게 귀환길에 올랐다

p173 탈라스 전투 이후 한족 왕조는 다시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주변의 여러 세력이 모두 이슬람 세력으로 돌아서면서 그들의 종교,문화 역시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 탈라스 전투가 동서 문명 교류사의 일대 사건으로 평가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고선지가 탈라스에서 지지 않았다면, 서역 일대 많은 나라의 정치,문화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p229 사실상 몽골 사람이 된 홍복원은 고려 원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고려-몽골의 전쟁 과정에서 그 이름이 최소 다섯 차례 이상 역사서에 등장하는데, 직접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의 각지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교통로를 안내하는가 하면, 개경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려 조정을 압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p233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왕준은 외모가 아름답고 적극적인 성격에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고려는 의도적으로 황제의 마음에 들 수 있는 나름 매력적인 인물을 선별해서 몽골로 보냈던 것이다

p253 1274년 5월 11일, 고려 세자 왕심은 쿠빌라이의 친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쿠빌라이가 결국 고려 왕자와 몽골 공주의 혼인을 허락한 것이다. 이처럼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된 것은 몽골의 강제가 아닌 전적으로 고려 왕실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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