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 - 신화가 아닌 보통 사람의 삶으로 본 그리스 로마 시대
개릿 라이언 지음, 최현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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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

 : 게릿 라이언

 : 다산초당

 : 2022/03/26 - 2022/04/04


예전에 읽었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생각하고 읽으면 안된다.

이 책의 컨셉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일상생활에 대한 역사책이다.

왕이나 영웅의 이야기가 주류인 그리스로마사에서 간만에 민중 또는 서민의 이야기로 채워진 책이 나왔다.

왕이나 귀족의 이야기는 기록도 많이 있지만 서민들의 이야기는 기록이 많지 않다보니 중간중간 추정과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부분은 당시 기록을 참조했기 때문에 터무니 없는 추정은 아닌것 같다.

검투사들이 보리 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이라든가, 그리스 사람들의 동성애의 모습에서 성적 주도권은 남,여가 아니라 자유민 또는 성인같은 계급에 따라 결정되다는 것, 마차가 생각보다 불편했다는 것 등은 새롭게 안 사실이다.

역사라는 게 어릴 때는 영웅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사람사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간다. 물론 그렇다고 영웅의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건 아니다.

단지, 영웅의 이야기 때문에 실제로 죽고 고통받았던 민중들에게도 이제는 눈길이 많이 간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한국사도 이런 백성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책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p33 황제들은 특히 사자를 좋아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기가 싫어하는 원로원 의원을 사자 중 가장 사나운 놈과 강제로 싸우게 했던 적도 있다.

p40 로마의 원형경기장의 야만성과 고내 노예 제도의 비정한 비인간성처럼 영아 유기도 고대인들과 현대인을 구분하는 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로마인들에게 인생은 투쟁이었으며 가족을 가지는 것은 힘든 선택을 요구했다.

p49 많은 그리스, 로마인은 자기 의사가 마침내 자기 의술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깨닫고 장의사가 되었다고 농담한 시인에게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p54 로마인들은 그리스를 정복했을 때 그리스인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좋은 음식을 먹고 산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로마의 상류층은 그리스의 요리사와 조리법을 들여오기 시작했고 요리사와 조리법 양쪽에 경쟁과 과시라는 로마인의 정신을 주입했다.

p63 포도주를 마시는 교양 있는 방법은 물에 섞는 것이었다.

p64 건강한 사람들에게 폭음은 사교적 의미가 컸다. 특정 종교행사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만취가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장되기도 했다.

p103 디오클레티아누스 최고 가격령에 따르면 제빵사는 농장 노동자보다 2배 더 많은 돈을 벌었고 벽화 화가는 3배, 작업 화가는 6배 더 많은 돈을 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p125 로마에서의 삶을 죽음으로 향하는 전주곡으로 만들었던 주역은 화재나 도둑이 아니라, 하수구에서 부화한 모기와 보이지 않는 병원균이었다

p130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는 자들(다른 말로 야만인)은 본성적인 노예라고 주장했다.

p138 사람들은 부부가 서로에 대한 연애 감정으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거나 심지어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p139 로마 속주 이집트에서 나온 파피루스 문서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성격 차이가 중산층의 흔한 이혼 사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p144 고대 세계에서 남성의 성 정체성은 욕구 대상에 의해 규정되지 않았고 성관계에서 맡은 역할에 의해 규정되었다. 자유인으로 태어난 남성은 섹스할 때 항상 주도적이며 삽입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다. 상대가 여성인지 소년인지는 비교적 덜 중요했다. 여성과 소년 모두 사회적으로 열등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p158 그리스 로마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점잖게 성기를 단속한 신사들의 대척점에는 야만인과 괴물의 늘어진 큰 성기가 있었다.

p168 철학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로마제국 시대의 학식있는 그리스,로마인들은 신들에 대한 순수한 신앙과 신화의 부도덕성에 대한 혐오를 동시에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p223 부유하든 빈곤하든 모든 대형 도시의 신자들은 주교의 감독하에 있었고, 주교에 의한 관리는 규모에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들에 일종의 결속감을 주었다. 이는 전통적인 이교 신앙에서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p252 단거리 달리기가 언제나 운동의 레퍼토리에 포함된 것과 반대로 장거리 달리기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리스, 로마의 남성들은 걷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고, (부유층의 경우) 운동을 위해 승마를 했다.

p260 마차는 이렇게 호화스럽더라도 충격 흡수 작용이 부족했으므로, 이 굴러다니는 궁전에 타면 덜커덩덜커덩 흔드릴 수밖에 없었다. 긴 방석이 깔리고 커튼이 있는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훨씬 더 편안했다. 길 위에서 낮잠을 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도 있었다

p279 동물들을 포획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어려운 것은 포획한 동물들을 로마로 데리고 와서 시합이 있을 때까지 살려두는 것이었다.

p284 콜로세움에서 막바지 시합이 개최될 즈음 터키의 표범, 이란의 호랑이, 이집트의 하마, 북아프리카코끼리는 전부 사냥되었거나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 로마 제국주의에 희생된 것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었다

p287 왜 검투사들만 보리와 콩을 먹었을까? 에페수스에서 발굴된 검투사의 뼈를 분석한 과학자들은 그 식단이 체중을 늘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했다. 몇 cm에 달하는 피하 지방은 검투사들의 신체 장기를 보호했다. 즉, 검투사들은 전투 능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얕은 자상 정도는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p334 정해진 정확한 위치에 솥과 변소를 설치했고 깔끔하게 열을 지어 가죽 막사를 쳤다. 위압적인 질서 정연함은 마찬가지로 전투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p337 게르만인들은 도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갈리아인(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사람)과 다르고, 정착민이라는 점에서 동유럽의 유목 민족과 다르고, 특징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졌다는 점에서 동유럽의 유목 민족과 다르다는 인식이 있었다.

p339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는 게르마니아에서 20여년 동안 끈기 있게 지속된 속주 건설을 파괴했다. 살아남은 로마군은 라인강으로 후퇴했다.

p346 순례자들과 교황의 권위만이 로마가 무명 도시로 추락하는 것을 막았다. 9세기 즈음, 로마 인구는 95% 감소하여 3-4만 명이 100만 명을 위해 건축된 도시의 폐허 속에 흩어져 살았다.

p367 비잔티움의 제국의 침략자, 십자군, 오스만 제국은 순서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실 묘지들을 약탈하고 훼손하였으며 파괴했다.

p174 라틴어는 근대 초기까지도 진지한 학술 연구에 적합한 유일한 도구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확고하고도 완전한 화석 언어가 되었고 학구적인 담론에만 국한되어 사용되며 학생들의 악몽이 되었다.

p379 후손을 남겼다는 전제하에, 천 년 전에 살았던 유럽인은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럽인의 조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유전적 표본이 말해주고 있다.

p388 가장 원초적인 수준으로 답하자면 그들은 돈과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이들은 에게해를 중심으로 하는, 작지만 돈이 되는 제국을 건설했어요

p391 여러 모험 중에서도 그의 우상이었던 아킬레우스의 무덤 주위를 벌거벗고 뛰어다녔고, 술에 취한 채 페르시아의 수도를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으면, 인도에서 화살을 폐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정이 모두 끝났을 때 31세의 알렉산드로스는 불가리아에서 파키스탄까지 펼쳐진 제국의 주인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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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
남종국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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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

 : 남종국

 : 서해문집

 : 2022/03/18 - 2022/03/23


르네상스가 읽을 것도 많고 재미있다.

현대 세계의 예술이나 기술, 문화의 출발점이다 보니 연관된 내용도 많고 상상하기도 쉽다.

반면 중세는 그냥 신비의 영역이다.

중세에는 거인이나 마법사가 있을 것 같고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 같다.

그림만 봐도 촌스러운 금박으로 종교화만 잔뜩 그려놔서 다 그게 그거 같은 느낌이다.

중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중세사람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을 모은 책이다.

칼럼으로 나왔던 내용이 책으로 엮여져서 통일감은 떨어진다. 

대신 어느 부분부터 읽는다고 해도 부담이 없다. 

흑사병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몽골의 세균전이 사실 근거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말이 제일 인상깊었다.

내가 알고 있는 단편적 지식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역사책은 꾸준히 신간을 읽어주지 않으면 새로운 사료의 발견으로 뒤집어진 역사적 사실들은 모른채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역시 계속 배워야 한다.

재미있는 책을 읽어서 좋다. 


p6 기독교적 관점을 가진 학자들은 유럽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그 덕분에 유럽 세계가 기독교 문명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중세 유럽 기독교 세계는 찬란한 종교예술을 꽃피웠고, 위대한 성직자와 신학자들이 눈부신 지적 성취를 이뤘다면서 중세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도 중세 후반 지중해 교역과 교류를 연구하면서 11세기 이후 서유럽 세계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음을 확인했다.

p22 오늘날에는 수익성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가 규형 잡힌 학문 생산을 어렵게 만든다면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종교적 편견이 학문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p29 흑사병에 걸린 제노바인들의 배가 흑해에서 시칠리아섬까지 항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몽골과 제노바 간의 전투를 최초의 세균적이라고 부르고 전염병 확산 책임을 몽골인들에게 전가하는 유럽 중심적인 해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p47 교회는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날과 방식까지 규제했다. 축일과 금식일, 일요일, 월경과 임신기간, 수유기간, 출산후 40일 등의 기간에는 성행위가 금지되었다.

p63 다티니 부부의 불임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 중 하나는 이들을 포함한 당시 이탈리아 도시민들이 불임을 신의 저주나 원죄의 결과, 악마의 소행이라는 비합리적이면서 종교적인 믿음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p72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서 왕의 손 대기 치료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볼테르는 풍속에 관한 시론에서 루이 14세가 자신의 정부 중 한 명이었던 수비즈 부인을 많이 만졌지만 치료하지 못했다라고 조롱했다.

p85 유럽 역사에서 교회가 불평등한 신분 질서를 만들고 유지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종교가 인간의 도덕적 진보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마이클 셔머의 신랄한 지적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p96 인간이 원죄의 고통을 짊어지고 낙원에서 추방된 것은 모두 이브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다.

p99 악마와 계약을 맺고 악마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어떻게도 증명할 수 없었기에 대부분 마녀를 판정하는 최후 수단은 고문을 통한 자백이었다.

p111 유대인에 대한 낙인찍기는 무엇보다도 이들이 다른 종교를 믿는 소수자였기 때문이다.

p122 종교적 교리를 시대를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 종교적 교리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긴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확립되었고, 때로는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변화하고 폐기되기도 했다.

p131 연옥은 불로써 자신의 죄를 정화하고 최종적으로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중간 단계의 공간이었다. 전적으로 의로운 사람은 바로 천국으로 가겠지만 가벼운 죄인들은 연옥으로 가서 불로 죄를 씻고 종국에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p133 오랜 역사에서 인간의 과학 지식은 무한히 증가했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지식은 티끌만큼도 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학이 아니라 여러 종교에서 계속해서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p156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때로는 비합리적인 듯 보이는 인간의 상상력이다.

p174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던 로마의 초기 역사는 음모, 폭력, 친족 살인, 납치와 강탈 등 야만적 이야기로 가득하다

p178 로마인들은 약탈하고 살해하고 강탈했다. 이를 제국이라 잘못 부르고 있다. 그들은 황폐화시켜 놓고 이를 평화라고 부른다라고 말한 타키투스의 비판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 평가일 것이다.

p184 문서를 위조한 사람은 주로 성직자들이었고 이들은 위조를 부끄럽게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신의 뜻을 따랐기에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p187 우리 모두는 죄가 있건 없건 또한 젊으나 늙으나 이 과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 과거의 결과를 넘겨받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라면서 과거 나치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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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함께 산책을 -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여행하는 법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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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와 함께 산책을

 : 시라토리 하루이코

 : 다산초당

 : 2022/03/08 - 2022/03/10


니체에 대한 내용이 아닌것 같은데 왜 제목에 니체가 들어가지?

과거 유명했던 작가들의 산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고나 할까.. 

책제목만 봤을 때는 니체가 산책을 통해서 얻었던 영감이나 그의 생애에 대한 책일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좀 당황했다.

표지도 예쁘고, 내용도 가벼워서 에세이 읽는 느낌으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내 취향은 아니라 몰입이 되지는 않았다. 



9% 영원회귀는 그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든 순간이 앞으로도 똑같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철학개념이다

20% 니체는 자연에서 찾아낸 세 가지를 사랑했는대, 바로 광대함, 고요함, 햇빛이었다

25% 보름달 빛을 받으며 로마를 거니는 아름다움은 실제로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다. 도시의 모든 것이 빛과 그림자와 커다란 덩어리에 삼켜지고, 가장 크고 가장 일반적인 형상만이 눈앞에 나타난다

29% 릴케는 저서 말테의 수기에서도 시는 사실 체험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런 체험은 보통 사람이 평소에 생활하면서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집중할 때, 어떤 계기로 지금까지의 세속적인 사고와 습성을 무의식중에 버렸을 때 만나는 체험이다

36% 프롬은 존재의 기술에서 마인드풀니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국내에는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로 두루 알려졌다) 마인트풀니스는 산스크리트어를 영어로 충실하게 번역한 단어인데, 집중 또는 선정(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해 아믕이 하나의 경지에 머물러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을 의미한다. 비즈니스업계에서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마인드풀니스 개념과는 다르다

40% 질문을 받으면 대답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면 그에 응해야 한다. 이 일상적인 생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쓴 책이 바로 그의 대표작 나와너다

45% 선과 깨달음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명확하게 이해시키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이세쓰는 냉난자지를 강조했는데 ‘차가운지 따뜻한지는 직접 마셔봐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53% 도겐은 세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를 배열해 세상이 되느니라... 나를 배열해 내가 그것을 보느니라

55% 이것은 바로 진인의 삶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아첨하지 마라. 남이 고마워하길 바라지도 마라 / 선뜻 무언가를 남에게 베풀어라.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아낌없이 줘라 /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보시다 / 나에게도 베풀어라 / 마음을 주고, 목숨을 주는 것도 보시다 / 다른 사람에게 자상하게 말하라 / 나만 특별해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타인과 너무 다르면 안 된다. 남이 하는 것도 하라 / 사람을 싫어하거나 귀찮아하지 마라 / 모든 일을 온화한 표정으로 마주하라

77% 정적 속에 앉아 홀로 식사하며 음식을 맛본다. 식기를 씻고 그저 앉는다. 저물어가는 하늘에서 새들이 훌훌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흔들리는 검은 구름 사이로 달이 나오는 광경을 바라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마치 영원을 산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 자체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다

89% 모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이 중요한 발언은 역시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나는 오로지 그곳에 보이는 하나의 현상을 거의 완벽하게 붙잡으려고 애썼습니다. 왜냐하면 현상이란 반드시 실재와 깊이 관계되어 있으니까요. 알려지지 않은 실재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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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보다 1 - 선사.고조선.삼국 한국사를 보다 1
박찬영.정호일 지음 / 리베르스쿨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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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를 보다1

 : 박찬영

 : 리베르스쿨

 : 2022/03/07 - 2022/03/12


사진이 많아서 역사 유물들을 많이 보여줘서 좋다.

역사이야기, 특히 고대사는 유적이 발견될 때마다 내용이 바뀌기 때문에 꾸준하게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단적인 예로 내가 어릴때는 장군총이 광개토태왕의 묘로 추정됐었는데 광개토태왕의 묘가 발견되어 발굴중이기 때문에 장군총은 장수왕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그외에도 금동대향로의 발견으로 백제의 문화수준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참고서로도 좋고 일반인들의 교양쌓기로도 좋다.

나는 환단고기때문에 상고사에서 국뽕이 잔뜩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책에서 고대사의 국뽕의 느낌을 조금 받다 보니 그런 부분은 아무 이유없이 의심하게 되고 경계하게 된다.

그런 것만 빼면 화보도 많고 설명도 쉬워 추천할만한 한국사책이다. 


p30 작물을 재배하기 전이었지만 인간은 고기잡이를 하면서 비로소 정착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석기인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수렵이나 채집 활동을 했다면 신석기인은 점차 한곳에 정착하면서 짐승을 돌보거나 농사를 지었지요

p56 단군 조선이 아사달에서 건국됐지만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어요. 즉, 수도를 옮기면서 단군 조선의 세력을 확대한 것이지요

p61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돌도끼나 괭이,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해 곡식을 심었어요.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지요. 농업은 주로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답니다.

p81 랴오허 문명의 흥산 문화는 중원의 양사오 문화와 교류를 시작했고, 이어 산둥 반도 일대 량주 문화, 다원커우 문화가 중원과 교류했어요.

p94 치우는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구려족의 우두머리로서 헌원과 전쟁을 벌였지요. 전투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중국에서는 전쟁의 신이나 병기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지요

p126 왕검성은 함락됐지만 한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에 참여한 한의 장수 대부분이 처벌을 받았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어요.

p130 부여, 고죽, 고구려, 예, 맥, 추, 진번, 낙랑, 임둔, 현도, 숙신, 청구, 양이, 양주, 발, 유, 옥저, 기자 조선, 진, 비류, 행인, 해두, 개마, 구다, 조나, 주나, 한, 삼한 등은 모두 단군 조선의 거수국이라고 합니다.

p133 낙랑은 고구려 대무신왕 때 멸망했는데, 삼국사기에는 300여 년이 지난 미천왕 때 멸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대무신왕 때의 낙랑은 단군 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하나이고, 미천왕 때의 낙랑은 한사군 가운데 하나였다고 봐야 해요

p159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자를 신지, 작은 세력을 형성한 자를 읍차라고 불렀어요

p186 고구려의 고분 양식은 초기에는 돌무지무덤이 주를 이루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어요. 돌무지무덤은 시신 또는 석곽 위에 돌을 정밀하게 쌓아 올려 만든 무덤입니다. 그래서 적석총이라고도 하지요.

p188 삼족오에는 고구려의 통합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삼족오 또는 세발 까마귀는 단군 조선과 고구려 뿐만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의 신으로 널리 숭배받았던 전설의 새예요. 삼족오를 숭배하는 지역은 곰 토템 지역과 대부분 일치하지요. 랴오허 문명의 주축인 흥산 문화 유적지에도 삼족오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p192 고구려에는 신라의 화랑과 유사한 조의선인이 있었어요. 조의선인이란 검은색의 조복을 입은 선인이란 뜻입니다. 조의선인은 선비 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인재로서, 어린 나이에 선발돼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을 통해 심신의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을파소, 을지문덕, 강이식, 양만춘, 연개소문 등이 조의선인 출신이에요

p207 광개토호태왕의 업적은 무엇일까요? 일일이 열거하자면 굉장히 많지만 그 업적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단군 조선을 계승해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려고 했던 정신이예요

p221 중화 문명의 세계관은 황제가 하늘을 대신해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황제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중국이 국력이 강해지면 주변국을 지배하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인 이유가 바로 이 세계관 때문이랍니다.

p268 4세기에는 아직기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습니다. 아직기는 근초고왕의 명으로 두 필의 말을 일본의 왕에게 선사한 후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고 해요. 일본 왕은 아직기가 경서에 능한 것을 알아보고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노리사치계는 성왕의 명으로 불경과 불상을 일본에 전했어요

p302 후기 신라 이후에 후고구려, 후백제 등이 다시 일어섰고, 고려 시대엔 묘청의 난을 계기로 서경천도론과 삼한 정통론이 맞서기도 했습니다.

p308 신라의 건국 신화는 단군 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과 해양 세력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어요.

p324 고구려에서는 귀족이 제가 회의를 통해 수상인 대대로를 선출했지요. 또한 백제에는 수상인 상좌평을 투표로 선거했다는 정사암 회의가 전해지고 있어요

p341 풍류의 연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그 가르침 속에는 이미 유불선 3교가 포함돼 있다. 안으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으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매사에 무위로 대하며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고, 악한 일들을 행하지 않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의 가르침과 같다라고 기록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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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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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 도읍지 이야기

 : 이유진

 : 메디치 미디어

 : 2022/02/20 - 2022/03/07


재미있게 읽었다.

장안의 화제라고 아직까지 이야기되는 시안을 비롯하여, 뤄양, 카이펑, 항저우, 베이징 등 중국의 여섯 수도의 역사를 배웠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각 도시를 수도로 삼았던 왕조들이 정리되어 있어 중국사에 대한 이해도 높힐 수 있었다. 

각 도시의 지리를 잘 모르다 보니 글로만 읽어서는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다. 그건 내가 지식이 짧아서 그런것이지 책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수도를 대상으로 이렇게 책을 써도 꽤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수도라는게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배경도 있고, 그로 인해 어떻게 발전하고 멸망하게 되었는지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테니까...

재미있는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다. 



3% 중국이 세계 중심이자 최고라는 중화사상은 중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그들에게 각인된 일종의 컬쳐코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건국 이후 30년과 개혁개방 이후 30년을 지나온 중국이 이제 새로운 30년을 펼쳐가고 있다. 지난 두 단계 30년의 모토가 각각 계급투쟁과 경제발전이었다면, 향후 30년의 모토는 위대한 중화의 재현이다

4% 로마, 아테네,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로 꼽히는 시안은 역대 가장 많은 왕조가 도읍한 곳이기도 한다. 서주, 진, 한은 물론 수, 당 등 13개 왕조가 이곳에 도읍했다

6% 주왕과 달기는 주지육림의 주인공이다

13% 군막에서 계책을 짜내 천 리 바깥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로하며 군량을 보급하고 운송로가 차단되지 ㅇ낳도록 하는 일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여 이기는 일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재인데, 나는 그들을 쓸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까닭이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나에게 사로잡힌 까닭이다

18% 소릉에서 영원히 이세민과 함께해야 할 여섯 준마는 죄다 제자리에 있다. 지금 소릉에 있는 육준 석각은 복제품이다. 각각의 무게가 2.5톤이나 되는 이 석각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여섯 준마 가운데 삽로자와 권모과는 1914년 미국으로 반출되어 현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넷 역시 해외로 반출될 위기를 겪을 뒤 1918년 산시성도서관에서 보관되다가 1949년 비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0% 실제 역사에서 현장이 태종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간 때가 정관 19년 2월이고, 태종이 고구려로 쳐들어간 때도 2월이다. 태종이 현장을 만난 뒤 바로 침략 전쟁에 나섰던 것이다. 춘추시대 공자도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지 못했듯 현장도 그러했다. 왕은 그들을 존중하는 척했을 뿐 그들의 진심에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24% 최악의 폭군이 걸왕과 주왕을 자신과 비교하라는 태종의 위협 앞에서도 장현소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로 건원전을 수축한다면 걸왕이나 주왕과 마찬가지라고 직간했다. 결국 태종은 건원전 건립을 포기했고 장현소에게 비단을 하사했다. 태종과 장현소의 일화는 태종이 신화의 간언을 얼마나 잘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27% 낙갈발과 홍화공주는 양주로 이주했다. 낙갈발은 고토 수복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당나라에 계속 지원을 청했다. 드디어 함형 원년(670년)에 고종은 설인귀에게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토번을 치게 했다. 결과는 당나라 군대의 대패였다. 잠깐 덧붙이면, 당나라와 토번의 이 대비천 전투가 신라에는 천우신조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신라마저 직할지로 삼으려 했다. 바로 이때 토번 덕에 신라와의 전투를 준비하던 설인귀가 대군을 이끌고 서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신라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0% 지위 높은 어떤 이가 젊고 잘생긴 과거 합격자를 점찍어 억지로 집까지 오게 한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젊은이에게 귀인이 넌지시 말을 건넨다. “나에게 아주 괜찮은 딸이 있다네. 자네와 짝을 맺어주고 싶은데 어떠한가?” “가난하고 미천한 제가 높은 집안에 의지할 수 있게 되면 실로 행운이지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집사람과 아이랑 의논해봐야 하는데 어떠신지요?”

32% 당나라는 견우, 직녀 신앙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 현종은 칠석을 중시해서 1000척(약 30미터)에 달하는 아주 높고 큰 걸교루를 궁중에 세워놓고 칠석이면 이곳에서 즐기며 밤을 새웠다고 한다. 칠석날을 위한 누각이 걸교루다. 궁중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뜰에 누각을 세우고 등과 꽃과 채색 끈으로 장식해 걸교루로 삼았다

33% 평안남도 덕흥리 고구려 고분벽화(408)에도 견우와 직녀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때 그 지역 사람들도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믿었기에 무덤에 그런 하늘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설 속에 담긴 인간 삶의 원형에 많은 이가 공감했기에 이야기가 확산되고 여러 지역에서 공유했을 것이다.

34% 장안에서는 이국의 패션과 오락과 예술이 유행했다. 외래 문물에 개방적이었던 만큼 조로아스커터교, 마니교, 경교(네스토리우스교) 등 다양한 종교가 유입되었고, 외국인이 밀집해 거주하던 서시 주변에는 다양한 종교 사원이 세워졌다. 페르시아 상인은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사원에서 예배를 드렸고, 시리아에서 온 이들은 경교 사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36% 모든 도시는 자신의 상징물을 지닌다. 베이징에 천안문이 있다면 시안에는 종루가 있다고 할 정도로 종루는 시안의 상징이다

41% 공자가 평생 흠모하여 모델로 삼았던 인물이 바로 주공이다. 질서와 조화로 대변되는 주나라의 예악제도는 훗날 유가의 예악사상으로 이어져 수천년간 중국의 정신을 지배했으니, 주공은 중국을 만든 주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뤄양을 찾게 되면 주공 사당을 잊지말고 둘러보자

44% 관우의 머리가 묻힌 곳이 바로 뤄양의 관림이다. 중국 역사상 무덥에 림이라는 말이 적용된 사람은 공자와 관우 두 명뿐이다. 공자가 묻힌 공림, 관우가 묻힌 관림, 그들의 역사적 비중이 무덤 호칭에 반영된 것이다

46% 프리스트는 반양중동뿐 아니라 반양남동,연화동, 봉선사, 고양동의 유물 역시 비열한 방식으로 손에 넣어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와 추악한 계약을 맺었던 웨빈은 용문석굴의 유물을 일본인에게도 팔아넘겼다. 그렇게 그는 국보를 팔아넘기고 큰 돈을 벌었다

47% 봉선사 주불인 노사나불은 크기부터 사람을 앞도한다. 17.14미터 높이의 좌상에 머리 높이는 5미터, 귀의 길이만도 1.9미터나 된다. 노사나불을 비롯해 가벗과 아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두 천왕과 두 역사로 이루어진 봉선사 조각은 당나라의 위대한 시대적 상징으로 칭해진다

48% 엘긴 마블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선 떼어낸 조각들을 이렇게 부른다. 19세기 초, 오스만튀르크 주재 영국 대사를 지낸 토머스 브루스 엘긴은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에서 파로테논신전 조각을 영국으로 가져갔다. 수많은 조각물이 원래 자리에서 떼내지면서 파괴되었고 운반되면서 유실되었다. 영국박물관 듀빈갤러리를 채우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 조각들은 바로 이런 약탈의 결과물이다. 듀빈갤러리에 있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 강의 신 일리소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는 얼굴이 없다. 다름 아닌 약탈의 흔적이다.

52% 북망산에는 빈 땅이 없으니 죄다 뤄양 사람들의 옛 무덤이로구나라는 시구처럼, 우리에게 북망산으로 익숙한 이곳에는 역대 왕조 왕후장상의 무덤이 수두룩하다.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한 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도 이곳 망상에 묻혔다

54% 정저우의 황하박물관에 소장된 민국도구합용기사비는 국민당이 1946년의 제방 복구를 기념하려고 만든 것이다. 비문에 적힌 제국안란이라는 글귀는 장제스 친필인데 나라를 구하고 물길을 다스린다는 의미다. 비문의 기록에 다르면 일본군이 폭파해 화위안커우 제방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진실이 이렇게 엄폐, 왜곡되었고국민당이 타이완으로 퇴각한 이후 수십 년 동안 타이완에서는 이 일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54% 카이펑의 지층 단면은 수천 년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가자 ㅇ아래족에는 전국시대 대량성이 있고, 그 위로 역대 도시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시대별 도시가 묻힌 깊이는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 위나라(12-14미터), 당나라(10-12미터), 북송(8-10미터), 금나라(6미터), 명나라(5-6미터), 청나라(3미터) 성루성 즉 이렇게 도시 위에 도시가 포개진 상황은 바로 황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황하의 범람과 그에 따른 재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57% 종이 ,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형상화함으로써 세계 4대 발명품을 탄생시킨 중국의 문화를 전세계에 자랑하지 않았던가. 4대 발명품 가운데 인쇄술, 화약, 나침반은 바로 송나라때 실용화되었다

67% 하이난의 소수민족인 리족과 더불어 지냈고 하층민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리쩌허우 말대로, “소식은 끊임없이 자아를 위로하며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하고 만족하는 낙관의 정서를 지닌 사람이었다. 철종이 죽은 뒤에야 유배에서 풀린 소식은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창저우에서 세상을 떴다. 이대가 1101년, 그의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69% 호설암의 성공와 몰락은 정경유착의 전형이다. “장사를 하려면 기댈 사람이 있어야만 하니, 권력이 있으면 이익도 있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좌종당이라는 권력에 기대어 비상했던 호설암, 결국 그는 이홍장이라는 권력 때문에 날개 없이 추락했다.

72% 육화탑은 천재 또는 인재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 하지만 늘 재건, 보수되며 그 자리를 지켰다. 970년에 처으 ㅁ세워졌던 육화탑이 지금도 육화탑으로 존재하는 것은 탑을 지켜온 많은 이들 덕분이다. 지담 스님의 청동좌상은 바로 그들의 노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리라

73% 명나라 우겸은 몽골의 공격으로부터 베이징을 수호했다. 그보다 300년 전 남송의 악비는 여진족의 금나라와 맞서 싸웠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목숨을 걸고 지킨 나라이건만 모반죄를 씌워 죽게 한 것이다

75% 난징이 무더운 도시 10위권 밖이긴 하지만 여름철 매우 무더운 도시임은 분명하다. 창장 연안에 자리한 충칭, 우한, 난징이 화로처럼 무더운 데는 아열대 고기압의 영향 외에도 지리적 영향이 크다

76%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외국과 체결하게 된 첫 번째 불평등 조약은 난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난징조약 이후 난징은 줄곧 중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곳이다

80%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 해도 그저 여러 첩 중 하나일 뿐이고 여의치 않으면 내쳐질 수도 있는 존재, 그게 바로 기녀의 운명이었다

83% 쑨원의 유해를 증산릉에 안장하는 봉안대전이 거행된 1929년 6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교통이 3분 동안 멈추었고 전 국민이 3분동안 애도를 표했다. 국부에 대한 최고 예를 표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가 사후에 증산릉 곁에 묻히길 바랐다. 장제스 역시 중산릉 서쪽에 자기 묏자리를 봐둔 적이 있다. 만약 훗날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장제스는 바로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84% 9층 유리탑은 난징을 방문했던 유럽 여행자들에 의해 중세시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힐만큼 예술성이 뛰어났다. 대보은사 유리탑에 대해 ‘큰 규모였다’, ‘뛰어났다’라고 과거형으로 서술한 이유는 그것이 이미 파괴되었기 대문이다. 1856년 벌어진 태평천국의 내분으로 그토록 아름다운 탑이 파괴된 것이다.

89% 천안문 성루에 걸린 초상화는 중국의 정치 지형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개국대전 이후 마오쩌둥 초상화는 해마다 5월 1일 노동절과 10월 1일 국경절에 맞춰 열흘가량 천안문 성루에 걸렸다. 마오쩌둥 초상화가 지금처럼 1년 내내 걸리게 된 건 1966년 8월부터다. 바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가 이루어진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94% 건륭제가 조지 3세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천조는 물산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으며, 만국을 다스리는 천조는 일시동인(모두에게 차별없이 평등하게 어짊을 베풀다)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94% 약탈로 끝이 아니었다. 연합군 요구대로 포로는 석방되었다. 하지만 포로 몇 명이 이미 죽은 것과 포로들이 학대를 받았다는 것을 빌미로 연합군은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게다가 원한을 씻는다는 명분으로 원명원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10월 18일, 원명원은 불길에 휩싸였다

97% 현재 유교는 중국에서 가장 거대한 지적 힘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중국문화의 주체적 정체성을 담보해주고, 시장경제화로 인한 여러 부작용을 해결해주고,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국민 통합을 이뤄낼 열쇠를 유교에서 찾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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