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라는 작품을 기억한다.

나에게 심윤경이란 작가를 알려준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만난 계기는 꽤나 독특했다.

그러니까, 내가 군대를 전역하고 3년째인가, 4년째. 동원 예비군 훈련을 2번째였나, 3번째 받았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 지역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향하는 중이었다. 

 공군 특기병 출신인 나는 동원훈련을 병과에 따라 서울에서 3시간 내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공군 비행단으로 2박3일동안 받으러 갔어야 했는데, 그 때가 충북 청주비행단이었는지, 대전 공군대학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군사훈련이란 어지간한 남자들은 군복을 벗는 순간 다 잊어버리는(잊기위해 노력하는) 것들이니까. 오죽하면 총쏘는 방법도 매번 까먹어서 4년 내내 매년 새로 배워야 할까. 

 여하튼, 그러던 시절, 그 지방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던 지역방송 라디오에서 '어디시청과 함께하는 독서캠페인 이달의 책~ 이번달 책은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라는 책입니다.' 라며 짧은 책 소개를 해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책의 줄거리는 거의 다 비껴가고 작품의 주제의식과 작가의 문장력, 전체적인 짜임새등을 5~10분정도 간략하게 정리한 매우 세련된 리뷰였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무튼 몇시간을 더 기차였는지 버스였는지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서 3일동안 훈련받는다고 용쓴 몇몇 동네 사람들과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해치우고 집에 와서 열심히 검색했다. 당연히, 저자 이름도, 책 제목도 반쯤 잊혀져 있었으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자 이름은 떠오르지 않고, 제목은 계속 황석영 작가님의 [오래된 정원] 만 떠올랐더랬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한겨레' '수상' '정원' 이런 단어들을 조합하여 검색해가며 힘들게 찾아서 구입한 기억이 난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은 정말 너무나 멋진 작품이었다.

소년의 성장기였고, 소년은 나처럼 여동생이 있었고, 광주항쟁과 80년대 한국의 격동기를 다루되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하지만 그 주제의식은 또렷하게 띄우는 무척이나 세련된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는 언제 읽어도 눈물을 삼키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따스하고 정겨웠더랬다. 

이 작품은, '심윤경'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지만, 한 작품으로 작가의 역량을 평가할 수 는 없다는 웃긴 생각을 했더랬다.(내가 뭐라고!!ㅋㅋㅋ) 


 그 다음으로 접한 책은 [이현의 연애] 였다.

10대 중반에는 순정만화가를 꿈꿨던 나는 20대 초반까지 사실 어지간한 연애소설은 수두룩하게 섭렵했더랬다. 일찌감치 채털리 부인을 알았고, 남회귀선과 북회귀선의 은유를 깨우쳤으며, 홍루몽은 물론 할리퀸과 캔디캔디,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와 마리 앙뜨와네뜨(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주인공들. 오스칼은 작품상의 가상인물) 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숱한 연애 창작물들이 사실은 현실 연애와 견주어 접점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는 '연애' 를 소재로 다룬 책들은 여지없이 내쳐버렸더랬다. 심지어 [닥터 지바고]와 [대위와 딸]조차도 '이건 연애얘기 주제에 왜 세계문학이냐!!! [설국] 이건 뭐야, 이건 그냥...불륜인지 아닌지 애매모하지만 어쨌든 문란한 연애질이야기잖아!!! 이런 소설이 노벨 문학상인거냐!!! 셰익스피어, 이 사람은 -비극들 빼면- 다 연애얘기야!!!  그 와중에 [폭풍의 언덕] 은 인생의 책으로 자리잡았다. 그렇지, 사랑과 연애는 이런거라고. 고통, 기다림, 엇갈림, 고통, 괴로움, 또 고통, 또 괴로움, 이게 진짜, 레알, 현실연애다!! 

이런 나였는데...

 [이현의 연애] 이 제목이란. 이현이라는 사람이 연애질하는 내용일게 뻔하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감동을 다 잊어버리고 심윤경이라는 세 글자마저 잃어버릴 때 쯤, 병원 갈 일 있어서, 진료를 기다릴때 보려고 집어 들었더랬다. 시간은, 잘가겠지. 기다리는 지루함은 달달한 연애얘기로 잊어보자, 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현의 연애] 는 [폭풍의 언덕] 과 함께 내 마음속의 2대 현실연애+사랑이야기로 자리잡는다. 달달하기는 개뿔. 역시 진짜 연애란, 진짜 사랑이란,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덮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게 고통이 더 큰 고통으로 덮이면, 전에 겪은 고통은 오히려 행복이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행복해지리라는 희망을 지리하게 이어가며, 고통을 되풀이하는 것. 그것이 연애이고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 달리다] 는 바로 [이현의 연애] 에 등장하는 한 챕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꽤나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사랑의 감정이 그려질 것으로 예상했었다. 제목부터 '달리다' 이다. 폭주 기관차처럼. 광란의 질주를 거듭하는 스포츠카처럼. 폭력적이고 파괴적이어서 결국은 너도 나도 다 만신창이가 되고마는 그런 사랑 이야기. 


 일단, 거침없이 절반쯤을 읽어나간 첫인상은, '흐으으으으음???' 이었다.

유머와 위트를 가득 안고 김학원의 자가용처럼 거침없이 내닫는 문장과 스토리 텔링은 보다 원숙해지고 능란해졌지만 전작들이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주제의식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 혜나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이나 주변인물들까지도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큰 불편 없는 상황 설정도 그다지 와닿지 않았으며, 그런 상황 설정 속에서 돈없다고 징징대는 혜나나 그 가족들에게 또한 쉽게 몰입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심윤경 작가가 베틀에 앉아 물레를 돌려가며 꼼꼼하게 베를 짜듯 이야기를 얽어나가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단어들을 모아 문장의 실들을 잣고, 정해진 계획과 그에 맞는 규칙에 따라 씨실과 날실을 짜맞추듯, 인물과 상황들을 꼼꼼하게 짜맞추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에서도, [이현의 연애] 에서도 그 방식은 매우 달랐지만, 직조해나가는 느낌은 동일했더랬다. 

때문에 [사랑이 달리다] 의 인물과 이야기들 안에서도 그런 짜임을 기대했었다. 복선을 찾아보려 했고, 은유를 찾아보려 했다. 마치 커다란 그림 속에서 빨간 줄무늬 옷을 입은 월리를 찾듯 배경속에 숨겨있는 사람들에게서 작가의 의도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사랑이 달리다] 는 이야기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달리는 것이었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야, 김학원이 사제끼는 자동차에도, 미친듯이 질주하는 그의 운전습관에도, 김철원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와 등기이전의 음모 속에도 그 어떤 다른 의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그냥 삶 속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인 것이다. 수백가지의 우연과 수십가지의 필연이 얽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사건. 음식을 먹었으면 화장실을 찾듯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기는 화학적인 작용들로 인해 우연하도고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여러가지 '일' 들. 사건 인과를 얽기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사건이나 복선, 은유나 상징, 그런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작품은 이야기, 사건 중심의 작품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이 작품의 이야기의 핵심은 '인물이 무엇을 했느냐?' 가 아니라, '그걸 한 인물이 누구냐?' 인 것이다.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물을 보여주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이게 뭔 이야기야?' 를 파고들기보다, '그래서 얘는 대체 어떤 사람인거야?' 를 파고들어보면 보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그렇게 읽어가면, 각 인물들에 걸려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읽힌다. 작품의 중심 인물인 혜나와 학원. 거울처럼 똑 닮은 두 남매의 삶. 하지만, 거울이기에 반대편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인물들에 걸려있는 이야기가 읽히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닌 인물에 집중하며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역시나 세련되게 배치되어 있는 에피소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혜나의 감정 흐름대로 틀 없이 자유분방하게 진행나가는 듯 하지만, 역시나 작가 특유의 세련된 호흡으로 길이를 조절하고 감정의 파고를 설정한다. 누르고, 잡고, 터뜨리고, 모으는 타이밍이 기가막히다. 문장 곳곳에 숨겨있는 유머와 냉소적인 위트도 적절하게 들어온다. 그런 전반적인 흐름의 기술이 탁월하다보니 이야기의 흡입력도 상당하다. 혜나와 함께 웃고 낄낄대고 안쓰러워하다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종장을 향해 치닫는다.     


 독서에는 많은 독법이 존재한다. 

문학성을 따지는건 학자들이지만, 다독가, 애독가들에게도 자신만의 독법이 있고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

누구는 [폭풍의 언덕] 을 인류역사상 최고의 소설이라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최악의 소설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대학의 어떤 교수들이 인류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문학으로 분류했다고 해서 그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 책 안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찾아낼 수는 없고, 찾아낼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는 [파리대왕]이 노벨문학상 감이지만, 누구에게는 어린애들을 미친 폭력 살인마로 몰아가는 미치광이 같은 작품일 수도 있다. [롤리타] 는 어떤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는? [채털리 부인] 은?? [더버빌가의 테스] 는?? 무엇이 음서와, 명작의 기준이 되는가?


 [사랑이 달리다] 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갖고있는 편협한 독법에 크게 놀랐고, 또 많이 생각했다. 

내가 참, 스토리, 사건에 천착하고 있었구나, 라고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모든 책들을 다시 읽어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재미없다고 읽다 덮은 작품들이나, 취향이 아니라고 제껴둔 책들도 다시 다 읽어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서 거침없이 달려가는 혜나의 삶이 문득 부러워졌다. 

확실히 독법을 바꿔서 혜나를 바라보니, 혜나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지나치게 애정을 담았어!! 이건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이야! 라고 외치고 싶기도 하지만, 어쩌랴. 혜나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너무나 사랑스러운걸. 


 한국 사람들은 유독 드라마를 좋아한다.

드라마란, 잘 짜여진 이야기의 틀 안에 딱 맞는 옷을 입은 캐릭터들이 모여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이 달리다] 는 그런 관점에서 볼땐, 잘 짜여진 틀 안에 잘 짜여진 인물들이 제자리에 들어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감정은 들쭉날쭉하고  이야기는 정신없으며 주제의 구심점도 잘 안 보인다.

그런데, 너무나 매력적이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 아글다글 모여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간다. 그러다 보면 불쑥불쑥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좌충우돌 부딪히며 사고도 일어나고, 어이없이 사고가 봉합되기도 한다. 인연과 이연이 되풀이되고, 서로를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사랑했다 미워하고, 미워했다 사랑한다. 


  책속에 항상 답이나 길이 있지는 않다

책속에 있는 길은 책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길이고, 어쩌면 작가의 길이고, 어쩌면 작가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가보고싶은 희망의 길일수도 있다. 모두가 공자처럼 떠돌이 개마냥 돌아다닐 수는 없고, 싯달타처럼 아사직전까지 굶어가며 앉아있을 수도 없으며(일단 며칠안에 엉덩이에 부스럼 생기고 치질에 걸릴 확률 99.999999%), 율곡 이이처럼 신사임당 같은 엄마를 만날 수는 없다.(읭??), '성공하는 몇가지~습관' 이런 책들을 읽는다고 성공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시크릿 같은 책을 100번 읽고 외운다고 갑자기 부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동이나 성취감은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혜나의 삶이나 그 주변 인물들의 삶이 내 삶에 영향을 줄 리는 없다. 나 또한 그들의 삶에서 뭔가를 얻어내거나, 해답을 얻을 생각도 없다. 

하지만, 확실한 하나는,

내 삶 속에 혜나와 욱연, 그리고 학원이 불쑥 뛰어든 것이다. 유비와 조조가 뛰어들었던 것 처럼,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뛰어들었던 것 처럼, 롤리타와 험버트가 뛰어들고, 동구와 이현, 이진이 뛰어들었던 것 처럼.  

잠깐 미쳤다 돌아와도 별 일 없는 삶 속에서, 그들은 또 어떤 일들을 겪에 될까?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나의 삶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엉망진창 좌충우돌 내달린 이 리뷰를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어떤 책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작품속에서 그와 대구를 아주 잘 이룰 것 같은 문장도 하나 떠올랐다. 이 두 문장이면, 이 사태가 어느정도 수습될 듯 싶다. 



"잠깐 미쳤다가 돌아와도 아무 일 없다구" 

[사랑이 달리다/ 심윤경]p.28

"그래, 그거였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다."

[사우스 브로드/펫 콘로이]2권 p. 462 마지막 문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