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정민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노벨상 작가 이전에 페미니스트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것도 조금 생소한 "비관적 페미니즘" 의 신봉자이다.
'이정도는 남성 혐오 수준 아니야?' 싶을 정도로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엄청나게 핍박받고, 고통받는다. 남성의 손길을 역겨워하고, 성행위를 고통스러워하며, 아들을, 아이를 혐오한다. 비록 내가 읽은 그녀의 작품은  이 작품까지 총 세권에 지나지 않지만, 작품 속 여성들의 삶은 남자와 관련된 그 어떤 것으로도 위안받지 못한다.
 [욕망] 은 그러한 그녀의 작품들 중 가장 '부유한' 여성이 등장한다. 전쟁이나 가뭄, 기아와도 관계가 없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편, 좋은 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내키면 비싼 옷을 살수도 있고, 동네 여자들은 그런 그녀를 부러워하며, 가끔 그런 시선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야말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이 작품은 매 챕터마다 그녀가 남편과 나누는 성행위 장면이 묘사되는데, 엄청나게 직관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 사용된다. 포르노를 연상시킬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려지는데, 이것은 사랑으로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권력에 의한 착취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제지회사 공장장인 남편은 안락한 침대와 따뜻한 음식, 화려한 옷을 제공하고, 그녀는 그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굽힌다는 등의 묘사이다. 권력관계에 의한 착취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겐 어떠한 권한도, 선택의 폭도 없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이 원하는대로 몸을 대주고, 아이를 낳아주고, 음식을 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살고 있는 사회의 법과도 같다. 이윽고 그녀는 아들조차 혐오하게 된다. 아들 역시 남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영악하게 남자로 자라나고 있으며, 그녀가 낳았지만, 낳는 순간부터 그녀보다 사회적 우위에 있는 존재였다. 그녀의 남편처럼 아들도 그녀를 착취하고 있다.
이러한 절망적인 서사를 통해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이 사회에 뿌리깊은 남성 중심의 구조, 여성 스스로는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공고한 시스템의 부조리를 강변한다.
 [욕망] 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감정이 전혀 없는 욕망의 덩어리로 그려진다. 패거리를 짓고 회사를 통해 누리는 사회적 지위에 탐닉하고, 그로 인해 따먹는 달콤한 열매들은 자신의 집에서도 고스란히 연결되어야 한다. 그녀는 공장장인 남편이 회사에서 부리는 직원들과 다를바 없다. 그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고, 그가 원하는대로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녀는 남편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와 그것으로 벌어들이는 돈의 그늘 안에서 명줄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의 허벅지는 공장장, 그 끔찍한 승객만을 위해 끓고 있는 그의 욕구에 튀겨져 벌려져야 한다. 그러면 그는 바쁘게 움직여 그녀의 진입로에 몸을 떨며 짐을 내려놓고 그 대가로 그녀에게 브로치나 금속 팔찌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 일은 곧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자유롭다.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이웃을 비웃던 이전에 비하면 훨씬 풍요롭다. 당신은 이러한 모습을 구경하라고 초대된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이 신사가 샴페인을 들고 당신 집 대문을 소란스레 두드려도 당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 여자는 즐거워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는 그 자신을 상자에 넣고 포장할 것이다! 푸른 하늘은 경치를 진풍경이 되게 한다.
사업은 잘된다."
p.183

인류의 미래에 대해 디스토피아적 전망과 유토피아적 전망이 있듯,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와 같은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엘프리에 옐리네크를 구글에 검색만 해보아도 수많은 문건들이 뜨는데, 그녀는 대표적인 회의론적 페미니스트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결코 남성의 지위를 빼앗을 수 없으리란 시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런 부분을 읽고([욕망]의 권말에 실려있는 해설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다.), 김영하 작가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인터넷에 검색만 해보면 김영하 작가가 비관적 현실주의자에 대해 강연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물론 그는 우리 '헬조선' 의 젊은이들을 향해 한 강연이지만,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김영하 작가의 그 자리에 그대로 끼워 넣으면 그녀의 생각이 더욱 또렷하게 전달된다. 여성들은 김영하 작가가 대상으로 삼은 그들보다 두배 세배는 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명확하게 설파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덤벼들었다가는 아무것도 못할껄'
그녀가 여성들의 디스토피아를 설파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위', 다시말해 '남성들의 카르텔' 에 도전하는 여성들은 황폐화된 황무지에 덩그러니 던져진 것이니까.
그녀에게 이 세상은 정글이다.
무려 잔디나 잡초, 심지어 흙조차도 자신보다 강한 적인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흙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땅속으로 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 이라는 족쇄에 묶여 '남편' 이라는 악마에게 '섹스' 라는 고문을 당하며 '가정' 이라는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여자' 에게 한없이 이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15개의 챕터로 나뉘어져있는데 위에 언급한 것 처럼 포르노 이상의 직설적인 성애가 묘사되어 있다.
아마 어떤 누군가는 상상도 못했을 각종 행위들이 묘사된다.
하지만, 그 어떤 묘사도 에로틱하거나 사랑스럽지 않다.
그녀는 남편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와 다름없고, 아들을 키우는 보모와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아들로부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남성들에게 읽힐만 하다. 특히나 중고딩 교과서에 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우리나라의 중고딩들은 부적절한 포르노로 물들어있으니까. 나도 그랬듯이.
페미니즘 교육의 1번은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이 작품의 두 챕터 정도(한 30페이지쯤)만 교과서에 실려도 10대 성범죄가 반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그 행위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사무칠정도로 묘사된다.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중인 "부부간, 혹은 연인간에 서로 합의되지 않은 섹스가 강간인 이유" 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공감되는 텍스트가 아닐까?

최악의 상황을 언제나 상정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에 치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 운동만이 아니다. 삶은 거의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법칙이다. 어깃장의 법칙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삶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어깃장을 놓는 법이다. 준비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관적" 이면서도 "현실적인" 시각을 갖는다면,  적어도 '여성이 아닌자, 여성의 삶을 이야기 하지 말라' 던가, '여성운동은 여성들만의 것이다' 와 같은 착오적인 주장은 피할 수 있을터다.
개인적으로 조금 더 덧붙이자면,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이념을 구분하는 방법도 필요한 것 같다. 
예를들어, 페미니즘 비평, 같은 부분이다. 비평에는 여러 기법들이 존재한다. 작품을 컨텍스트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오롯하게 텍스트 안에서만 파고들 수도 있다. 작가의 전작을 포함, 작품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작가 중심의 접근법도 있다면, 당연히 여성주의 시각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작품의 평가는 언제나 비평하는 모두의 것이고, 작품이 독자의 것이듯, 비평 또한 독자의 것이다.
주의해야 할 부분은 전문가의 비평과 독자의 리뷰가 난립하는 바야흐로 백만 네티즌의 시대라는 점 정도이리라.
전문 비평과 단순한 리뷰를 구분하는 역량 정도는 내 스스로가 배워야 할 터다.
적어도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작품' 이나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 차별적인 작품' 과 같은 평들을 구별해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지적받았다고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리스-로마 신화가 그렇듯이, 성경이 그렇듯이 말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그려진 작품에는 언제나 여성 차별, 여성 혐오의 시각이 들어가 있다!!
그 점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의 가치가 폄훼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월북 작가의 작품들을 폄훼하거나, 공산주의자들의 작품을 비하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친일 작가들의 작품을 혐오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터. 인간적인 취향과 작품의 성취는, 적어도 구별하는 삶을 살고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 작품은 남편과의 성생활과 아들 육아를 오로지 '고통' 만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도 평범한 남성들이나 여성, 혹은 일부 여성주의자들조차도 지나치게 과장되고 편향되게 표현된 여성의 성 역할에 읽기조차 힘들 수도 있다. 나 역시 수년 전, 처음 읽었을 땐 불과 몇 챕터 넘기지 못하고 덮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문학의 중요한 특징들 중 하나가 바로 '과장' 과 '편향' 이라 여긴다.
문학은 글을 통해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는 장르다. 세상의 모든 시간과 현상들이 작품의 주인공이나 화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잠깐의 시간이 한정지을 수 없는 긴 시간으로 과장되고, 작은 감정의 편린이 수천배 수만배 늘어난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어떤 여성들이 겪고 있을수도 있는 고통, 그 자체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 위해 편향된 시각과 과장된 역할을 활용한 것 뿐이다. 애초에 문학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일어날 수도 있는 일'. '픽션'. 아닌가.
파괴적이고 절망적인, 과장과 편향으로 가득찬 글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오롯하게 이 책을 읽는 나의, 독자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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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브리튼 마을의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힘들게 촌장의 허락을 구해 아들이 사는 옆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모든 관절이 쑤시고 몸 성한 곳이 거의 없지만, 부부간의 사랑은 그 어느때보다 깊은 부부는 가장 가까운 색슨족 마을에서 위스턴이라는 색슨족 전사를 만나게 되고, 용에게 상처를 입은 에드윈이라는 소년까지 함께 동행하게 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에게 향하는 여정을 계속하기 전에, 색슨족 마을 인근 수도원을 방문하기로 한다.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수도원장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최근 과거의 기억을 거의 다 잃었다. 둘의 젊은시절조차 떠오르지 않고, 아들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아들이 왜 다른 마을로 떠났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어떤 기억들은 사라졌고, 어떤 장면들은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억 상실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나이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으나, 일대의 모든 마을에서 비슷한 일들이 남녀노소를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었다. 치매와 같은 현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원으로 향하는 도중 아서왕의 조카인 늙은 기사 가웨인을 만나게 된다.

가웨인은 오래 전, 아서왕의 명령에 따라 이 지역 어딘가에 잠자고 있는 암용 케리그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기사였다. 

색슨족 전사인 위스턴 역시 자신의 왕의 명령에 따라 암용을 죽이기 위해 이 지역에 파견된 참이었으나, 가웨인은 그와 협력하기는 커녕, 자신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어서 떠나라는 말만 반복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이 과정 속에서 최근 이 일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적인 기억 상실 현상이 암용 케리그가 잠자면서 내뿜고 있는 입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 중 두번째로 읽어본 작품이다.

[나를 떠나지 마] 도 굉장히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는데, 이 작품 역시 대단하다.

고작 두 작품만으로 딱 잘라 평할 순 없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서정적인 묘사에 굉장히 뛰어난 작가인 것 같다. [나를 떠나지 마] 에서도 주인공들이 머물고 있는 학교와 주변 광경들, 병원이 위치한 장소의 풍광들과 인물들에 대한 정적인 묘사가 인상깊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정적이면서도 농밀한 묘사들이 돋보였다. 빽빽한 나무와 바위, 산, 안개로 가득찬 대기에 대한 느낌이 문장 속에서 꿈틀거린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상당히 박력있는 액션들이 많은데도 정적이면서도 고요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나를 떠나지 마] 에서도 그랬다. 내용면에서 상당히 감정적인 동요가 큰 반전이 있었음에도, 그것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서술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렇다.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들인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이라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중요한 이미지들은 눕거나 앉아있는 장면들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 단편적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 안개로 가득찬 당시 영국의 풍광들에 대한 묘사들은 무척 춥고, 눅진하고, 답답하다.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서로의 손을 감싸쥐고, 어깨를 감싸고, 챙겨주는 장면들이 한결 따뜻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장을 덮으니, 눈물이 왈칵 났다.

사무치는 회한과 아쉬움, 안타까움...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대체, 이 감정은 뭐지? 몇페이지의 마지막 장면을 몇번이고 되읽었다. 똑같이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동안 가끔 그 마지막 페이지가 불쑥불쑥 되살아났다. 


사람의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젊은이는 내일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느낌이었다.

앞부분보다, 뒷부분 노인에 대한 부분이 더 또렷하게 남아있다. 거의 정확할 것이다. 

남자들은 나이 먹을수록 "왕년에 내가~" 라는 말을 많이 하기 마련이다. 추억이야말로 노인의 허세이자, 본질이다. 

사람의 삶은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좋은 기억은 더 좋게, 나쁜 기억은 덜 나쁘게, '추억보정' 이 되어 서랍 안에 쌓여진다. 

젊은이는 서랍의 빈 공간에 채울 수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노인은 꽉 채워진 추억들을 끄집어 살피며 하루를 지새운다. 

 

 그렇다면, 일제치하를 경험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아버지, 어머니들의 기억 속에는 어떤 것들이 녹아있을까?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당했던 그분들의 마음 속에는.


지구에 비하면 도저히 길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의 역사책은 동족들의 피로 칠갑이 되어있다.

인류는 끊임없이 서로를 죽이면서 성장해왔다. 오로지 피에는 피로, 살육에는 살육으로 맞서왔다. 이러한 피와 증오의 굴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교활함과 야비함에 기인한다. 날카로운 이빨도, 강인한 손발톱도 없이 진화한 인간에게는 오로지 뇌 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뒤통수를 찌르고, 목을 벤다. 인류의 과학은 언제나 효과적인 살육을 위해 진보했고, 인간의 역사는 시체로 시체를 쌓아온 과정이다. 

위스턴은 같은 색슨족 소년인 에드윈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브리튼족을 증오하거라. " 

친절하고 다정한 브리튼족이었던 액슬에 대한 경애를 품기도 하지만, 그것이 동족과 부모를 학살한 브리튼족들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않는다. 위스턴은 다시 대지를 피로 적시기를 원한다. 그것은 복수의 피가 될 것이다. 진실을 망각 뒤에 숨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색슨족이 원하는 평화는 더더욱 아니다.   

가웨인은 살육의 범죄를 기억의 저편에 묻히기를 원했다. 정복자 아서왕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마법사 멀린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뭔가 중요한 사실을 잊은 것 같은데...'

이 대지에 사는 모든 브리튼족과 색슨족은 끊임없는 망각에 시달리며 불안하고도 평화로운 삶을 이어간다.  

단순히 누가 옳고 그른가를 떠나 이것이 인류 문명의 발자취였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른 가장 첫번째 장면은 얼마전 큰 이슈가 되었던 미얀마 로힝야 족의 대학살극이었다. 그것을 묻고 평화의 지도자로 우뚝 선 아웅산 수치 여사였다. 더 전으로 돌아가볼까. 영국의 수많은 식민지 총독들은 어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천만을 학살하고, 실제로 손발을 잘랐을 뿐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거대한 인종분리 정책은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버금갔다. 미국은 역사책의 첫 페이지가 학살이다. 미국 원주민들은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밀려나 망각을 강요당하고 있다. 


암용의 망각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색슨족인 위스턴은 증오와 고통, 슬픔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색슨족의 왕에게 선택받았고, 거짓 평화를 깨뜨릴 임무를 부여받았다. 

거짓 평화를 깨뜨리려는 위스턴과, 거짓 평화를 지키려는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 

망각의 입김 안에서 과거의 상처를 다스리며 거짓 평화 속에서 안주하는 액슬. 


과연 거짓된 평화도 평화인가. 결국 그렇게 완전히 잊을 때 까지 참고, 기다리고, 또 참고, 또 기다리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마지막 장을 덮으면 책 내용이 싹 잊혀지는 책이 있다. 내가 이렇게 읽은 책의 모든 리뷰를 남기고자 했던 이유이다.

줄거리를 적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적고,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을 적어낸다.

반면, 마지막 장을 덮어도 며칠동안이나 머릿속에 뭔가가 왕왕 울리는 책이 있다. 

이 작품은 정말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이 책을 다 읽은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사실 그 왕왕 울리는 뭔가를, 정리할 수 없어서 이 글을 마무리 할 수가 없었다. 

이라크 군대가 IS의 근거지를 함락시켰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기 테러가 일어났다. 할로윈을 맞은 뉴욕의 한 거리에서 총기 테러가 일어났고, 텍사스의 교회에서도 테러가 일어났다.

그런 기사를 접할 때 마다 이 책이 떠올랐다.

망각속에, 역사의 뒤안길에 잘못을 떠넘긴 사람들이 떠올랐다. 

히틀러와 그 부역자들이 떠올랐고,학살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떠올랐다.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이 떠올랐다.클린턴이 떠올랐고, 오바마도 떠올랐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떠올랐고,히로부미와 하토야마, 아베가 떠올랐다. 

베트남, 남아공, 로힝야, 미얀마, 아웅산, 남아공, 콩고, 토고,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수니파, 시아파, 아우슈비츠, 게토, 킬링필드, 보도연맹, 티벳, 인도,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중국 그리고 미국. 

모든게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이 책이 떠올랐다.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가 떠올랐다.

망각의 시대에 증오를 전래하는 위스턴이 떠올랐다.

어이없이 죽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떠올랐고,어이없이 죽어가는 아들과 딸들이 떠올랐다.    

그 모든 생명들이 중요한가?

그 모든 생명들이 하찮은가? 


죽은 사람들은 죽었으니 끝인가?


그래. 맞다.


죽으면 끝이다. 

내가 죽으면 나의 모든 감정들은 사라질터다. 마치 이 세상에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처럼.

이영도 작가는 인간의 삶,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삶을 "그림자 자국" 이라고 통칭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그림자의 자국.모든 삶은 대지위에 흩뿌려진 그림자 자국에 불과하다.

그 흔적은 불과 몇십년이면 사라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남아도 남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야비한 가해자들은 언제나 피해자들의 '망각' 을 꾀한다.

다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 논하지 말자고, '비가역적' 약속을 강요한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 일관하며 모른체한다.

영국이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민족들에게, 러시아가 소련시절 독립을 꾀하던 소수민족들을 학살한 사실들을, 미국이 무기를 제공하며 내전을 부추겼던 중동의 많은 민족들에게, 일본이 침략하여 강제 징용한 조선인들과 위안부 여성들에게,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때 학살한 베트남인들에게, 군부 독재 정권과 그 부역자들이 자신들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선량한 국민들에게.


거짓과 기만으로 눈을 가리고, 평화라는 단어를 악용하며 망각을 기다린다.


죽으면 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와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든다.

이것은,

허무는 아니다.

농밀하고 강력하다.

세상을 뒤덮는 안개처럼.

쫓고 쫓아, 부모의 가죽을 벗긴 불구대천의 원수를 마주한 아들의 심장처럼. 

잔뜩 부풀어 쉼 없이 펄떡댄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잊으면 일본과 더 가까워질까? 

창씨개명을 당한 할아버지를 잊으면 일본가 더 가까워질까? 



우리는 진정한 답을 알고 있다.

독일의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었던 독일은 자성의 목소리부터 시작했다.

지도자의 목소리에 좌우되지 않는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교육 일성으로 삼았다. 과거를 적확히 기술하고, 아우슈비츠에 자신들의 악행을 남김없이 기록해, 후대를 위해 남겼다.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 여러번 사과하고, 전후에 성실하게 쌓은 국부를 유럽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유럽을 전화로 몰아넣었던 독일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고, 가장 부유한 국가로 우뚝 섰다.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에 피해국들은 충분히 납득했고, 용서했다. 


진정한 사과는 어려운법이다.

사람과 사람간에도 한없이 어려운 것이 사과다.

하물며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라면. 


그렇게 위무하며, 이런 거짓 평화를 누리는 것이 최선인걸까? 

망각속으로 묻어놓고, 오늘만 살아도, 되는걸까? 


이러한 우리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바로 언론의 일이다.

[파묻힌 거인] 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암용 케리그의 입김에 영향을 받아 과거를 망각했고, 여전히 망각 중이지만, 색슨족 전사 위스턴만은 그 입김에 면역성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암용을 죽이는 전사로 선택된 이유였다. 그는 색슨족 소년 에드윈에게 망각한 과거를 알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증오' 도 전한다. 단순한 사실이나 역사에 '증오' 를 얹어준다. 아니, 어쩌면 현대의 언론도 잘 하는 짓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양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언론은 때로 자신들이 설정한 선악과 피아의 잣대를 대중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한다. 언론 공정성이 중요한 이유다. 

암용 케리그의 입김은 정복자이자 학살자인 아서가 대중을 호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것도 언로言路의 한 방향이다. 로마 황제처럼, 전두환처럼 스포츠와 섹스, 영화와 드라마등의 유희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기만했다. 사람들은 웃고 즐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북한 간첩으로 호도당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운 선량한 시민들들을 잊었다. 그 바통을 넘겨받은 노태우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그 시기를 거쳐온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도 기만당해온 삶을 진정한 삶이었다고 우기며 늙어가고 있다.


오랜 암흑, 잠깐의 빛, 다시 고단한 어둠, 그리고 또 잠깐의 빛.

예수는 로마의 부역자들 아래에서 고통받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고 말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암용을 죽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기억을 찾아줄 위스턴을 기쁘게 맞이한다. 하지만, 이윽고 액슬을 알아채게 된다. 암용이 죽고 나면 피를 피로 갚는 잔혹한 셈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것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끈끈한 부부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었다. 현재만을 바라보는 액슬과 비어트리스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었다. 그리워할 젊은 시절도 없었고, 고통과 회한으로 가득찬 과거도 없었다. 서로에게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던 기억들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실망감으로 절망에 빠져 서로를 외면했던 기억들도 없었다. 오로지 지금, 내 옆에서 내 손을 잡아주는 서로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사적인 영역에서, 망각은 신의 선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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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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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년대 중반. 부유하지만 프란체스카 수도회의 교리에 따라 엄격한 금욕생활을 지키고 있는 미망인 이네스 데 토리몰리노스가 피렌체의 산 가브리엘 대수도원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네스는 부유한 남편의 포도밭과 성城 등의 재산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으나, 남편의 성姓을 잇지는 못했다. 딸만 셋을 나은 것이다. 

 한편, 베네치아에서 가장 비싼 곳이자 서양 전체에서 가장 호화로운 집창촌인 파우노 로소 유곽에 베니치아에서 가장 비싼 창녀 모나 소피아가 있었고, 파도바 대학에서 가장 저명한 외과의사이자 해부학자인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는 대학의 자기 방에 유폐되어 종교재판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이 종교재판은 사실상 결과가 정해졌고, 절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파도바 대학의 학장 알레산드로 데 레냐노에게 콜롬보는 눈엣가시 같은 인간이었다. 콜롬보는 명성과 의사로서의 뛰어난 역량, 경력으로 자신이 학장으로 있는 대학에 큰 명예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질투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콜롬보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콜롬보가 '여성의 사랑을 지배하는 기관', 스스로 "비너스의 사랑" 이라 이름붙인 여성 고유의 신체기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발견은 위험했다. 비너스의 사랑이라는 기관은 '항상 모호한 여자의 자유의지를 지배할 힘을 가진 진정한 도구' 였기 때문이다.

 그의 발견에 "만일 악마의 군대가 죄의 대상인 여자를 장악해버린다면, 기독교가 어떤 불행을 겪게 될지 알겠습니까?" 라며 가톨릭교회의 의사들이 분개했다. "가난한 곱사등이라도 가장 비싼 고급 창녀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매춘이 돈 버는 사업이 될 수 있을까요?" 라고 유곽 주인들이 물었고, "여성들이 자신들의 가랑이 사이에 천국의 열쇠와 지옥의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비너스의 사랑' -클리토리스의 발견은 해부학적이었지만, 동시에 이단적이었다. 클리토리스는 여성들의 것이었지만,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여성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여성이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성과 예술의 시대였지만, 여성들에게는 암흑의 시대였다. 

가장 어두울 때, 빛이 가장 잘 보이는 법. 여성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바로 이 때 발현되었다.

그로부터 수백년. 지난한 세월동안 여성들은 스스로 빛을 밝혀가고 있다.


 사유를 시작한 이래 인간의 지성은 크게 나아졌을까?

근력은 확실히 약해졌다. 두뇌학자들은 기억력도 상당히 쇠퇴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실제로, 기록들을 보면 중세의 사람들은 책 너댓권쯤은 거뜬히 외운 것으로 보인다. 기억력이 생존에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자와 각종 기록장치가 발달한 현대엔 기억력이 생존과 크게 관련이 없다. 그 대신, 응용력은 엄청 발달했을 것이다. 맥락을 파악하는 통찰력도 나아졌으리라. 

 하지만, '지성', 생각하는 힘 그 자체를 논한다면, 문명사회를 시작한 인류의 지성은 그 단계에서 이미 최고점을 찍은 상태였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인간의 지성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인간들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고, 지금도 역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인류의 지성 그 자체는, 지구에 머무는 한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지성을 바탕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인류의 역사로 따지면 인간 한명 한명의 수명은 짧다면 짧지, 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짧은 기간동안 개별적으로 쌓은 지식을 정리하여 기록한다. 그 개별 기록들을 한데 모아서 또 정리하고, 또 기록한다. 그 과정 안에서 여러 기술들이 파생되고, 산업으로 발전한다. 지식의 축적이 정체되는 시기는 없었다.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특출난 인간이 태어났다. 이들은 수많은 지식들 속에서도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으며 지식의 결손부위를 찾아내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범인들은 하지 못할 시도로 놀라운 발견을 해냈으며, 참신한 가설을 통해 논리 전개 방식들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지식은, 안타깝게도 '지배' 혹은 '정복' 이라는 단어와 연관될 때 시너지를 일으킨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강력하게. 


 90년대 중반에 발표된 이 작품은, 책 말미를 통해 역자가 소개하듯 안다아시의 모국에서는 출간 자체가 안 될 정도로 논란을 낳은 작품이다. 특히 가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 암투와 시기, 질투로 얼룩진 14세기의 종교재판과 여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낳은 성서의 오독, 또는 몰이해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와 희롱이 가득한 이 작품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을터다.

처음 읽었을 때는, '무슨 이런 작품이 세계문학씩이나!' 라고 느꼈었지만, 두번째 읽고 난 뒤에는 작품의 여러 부분들이 마음속에서 웅웅 울려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첫 문장부터 조롱으로 가득찬 한편의 풍자극이다. 풍자의 대상은 위에 언급했듯 당대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 지도층과 지식층이다.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이 신랄한 풍자에서 비롯된다. 그 당시에는 결코 쓸 수 없었을 내용들이다.

 당시에 가장 강력한 권력은 무엇이었을까?

돈? 명예?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권력은 '지식' 으로부터 파생됐다.

당시 세상의 진리는 성서였다. 평범한 사람들을 성서로 '지배' 했다. 성경에 관련된 지식들이 힘이었다. 라틴어로 쓰여진 성서는 결코 대중들의 문자로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은 커녕 모사조차 할 수 없었다. 라틴어를 배운 일부 성직자만이 성서를 읽을 수 있었고, 성서의 내용은 종교인들만 공유했다. 해석에 이견은 달 수 없었다. 성서의 내용 그 자체가 신의 말씀이었으므로, 평범한 대중들의 일상은 성서의 문장에 따라 재단됐다. 상황에 따른 해석은 오로지 교황만이 할 수 있었다. 일부는 주교들이 했다. 때로는 수도원장이나 작은 교구의 교구장이 하기도 했다.

역사, 문화, 윤리는 물론 일반 법도 모두 성서에 기반했다. 종교 지도자들이 관장했던 것이다.

수많은 왜곡들이 서양 역사를 지배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 에 관한 내용이었다.

성서에서 여성은 남성의 뼈에서 '추출' 된 일부이자, 사탄의 꾀에 빠진 어리석은 존재이자, 그로 인해 인류가 '원죄' 를 짓게 한 원흉이다. 지성과 지식이 뛰어난 여성들은 마녀로 매도당했다. 가톨릭 세계관에서 여성은 욕망에 좌우되는 동물, 남성들을 죄의 길로 이끄는 연약한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동화같은 일화로 여성들은 서양사에서 영영 낙오되고, 그 여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재까지도 가열차게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인류의 역사에 암울한 한 획을 그은 왜곡된 지식의 시대, 특히 가톨릭. 그 전체에 대한 조롱이자 비하, 희화화인 것이다.

서슬 퍼렇던 당대에는 결코 할 수 없었을, 현대에만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가톨릭이 국교나 다름없는 작가의 모국, 아르헨티나에서는 출간을 거절당했고,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을 때에도 비평가들의 강력한 반대에 시달려야 했다.



바야흐로 젠더 감수성의 시대이다.

굳이 '젠더' 라는 외래어와 '감수성' 이라는 한자어가 섞인 이 묘한 조어는 최근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화두이기도 하다. 

이것은 아마도 '미소지니misogyny' 라는 단어를 '여성혐오' 라고밖에 치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일터다. 우리사회에서는 지금까지 여성 차별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조차 시도된 적이 없었으니까. 미소지니처럼 넓은 의미를 지닌 단어를 적절하게 번역할 단어조차 없을 것이고, '젠더 센서빌리티Gender Sensibility' 를 대처할 단어는 물론 개념조차 없었을 터다. 

남성이 보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해부학자] 가 젠더 감수성이나 여성혐오라는 측면에서 자유로운 작품은 아니다. 이는 셰익스피어와 그 시대의 작품 전반에 대한 재평가와 맥을 함께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남성이 여성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다름을 인정하듯이, 남성 작가의 작품에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것 역시 '젠더 감수성'의 본질일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남녀 갈등이 엄혹한 시기에는 날카로운 비평과 지적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모든 가치들을 거세시키고, 한 목소리로 비난해야 한다는 주장, 나아가 그 '가치'의 '잣대'가 남성 중심 사고에서 비롯된 잣대이므로 모두 왜곡되었기에 무의미하다는 주장 역시 지나친 비약이다.

이것은 혐오에는 혐오로, 비약에는 비약으로 맞선다는 주장과 다름없다. 왜곡을 다른 방향에서 왜곡한다고 정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또다른 왜곡일 뿐이다.  

또한, 지나치게 저자와 화자를 동일시 함으로 인해 저자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이야기나 메시지 전체를 곡해하는 일 역시 피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작품 역시 저자가 나름대로 성별에 대해 균형적 시각을 견지하려 노력한 대목들이 있고, 여성문제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와 메시지가 존재한다. '여성혐오' 로 단순히 뭉개기엔 아까울 정도이다. 


 물론, 나 역시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 했던 부분은 지나치게 남성 중심의 시각 때문이었다.

두번째 읽을 때엔 보다 많은 것들이 읽혔고, 곱씹다보니, 또 다른 것들이 텍스트 위쪽으로 떠올랐다. 

이 작품은 여러 분야에서 아주 논쟁적일 수 있는 소재들을 과감하게 활용했다. 국가, 인종, 성별을 떠나 인류를 지배한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그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이 작품은 여성들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인류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보면 가장 화려하고, 지성이 폭발하던 시기였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절반 이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역사였다. 성별 차별 뿐 아니라 인종차별도 극도로 심했던 시기다. 화려함과 지성은 1%의 백인 남성들에게만 해당된 시기였을터다.

인류의 문명과 역사라고 부르는 대부분은 사실 그들의 기록일뿐이고, 이 작품에 그에 대한 거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암흑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헐리우드를 지배하던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이 조금씩 파괴될 조짐이 보인다.

평소에 행실이 안좋던 '지배적인' 남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죄, 자신의 권력으로 약자들을 희롱한 죄의 댓가를, 미미하지만 받기 시작했다. 여성의 참정권은 우리 사회의 공동체 중 가장 마지막에서야 허가됐다.

제 2차 세계대전동안 남성이 전쟁터로 끌려간 사회를 지킨건 여성들이었고, 광기에 휘어잡힌 남성들을 추스른 것도 결국은 여성들이었다.

영국 사회는 이를 통해 가까스로 여성이 우리 구성원의 가장 중요한 일원임을 받아들였고, 여성을 하원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유리천장은 단단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직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좋은 기회가 한번 있었으나,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다행히 찬스 뒤에 또다른 찬스가 와서, 가장 중요한 외교안보 분야에 정말 훌륭한 여성 리더가 자리잡았다.  유리천장은 힘으로 부술 수 없다. 여성들의 힘만으로는 가능할리 없다. 사회 구성원 전체를 아우르는 설득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설득이 혐오로 가능할 리 없다. 비약으로 가능할 리 없다. 왜곡으로 가능할 리 없다. 

1500년대까지 여성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오죽하면 클리토리스가 남성의 음경과 비슷한 매커니즘이라는 표면적 관찰의 결과를 주장한 것 만으로 콜롬보는 공식적인 사형선고를 받을 뻔 했다. (물론, 이 작품은 픽션이지만, 콜롬보가 클리토리스의 해부학적 역할에 중대한 발견을 한 부분만은 역사적 기록이다.)  

  

결국 돌고 돌아 인류의 지성만이 이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것이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사유하고. 좋은 논리를 개발하고, 방법을 찾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남성 중심의 사회가 저지르는 실수들을 그대로 밟을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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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저블 서커스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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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은 깡패다." 라고 일갈했던 제니퍼 이건의 첫 소설이 시간을 거슬러 내 앞에 찾아왔다. 

제니퍼 이건은 [깡패단의 방문] 을 통해 시간 앞에서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의 비애를 담담하게, 하지만 결코 우울하지 않게 그려냈다. 당시에 느꼈던 인상은 필립 로스의 적통, 그 자체였다. 필립 로스가 미처 그릴 수 없었던 미국의 딸들에 대해, 그리고 미국의 딸들이 바라보는 미국 사회와 그 안의 남자들에 대해, 그리고 여성들의 애정과 욕망을 그려내고 있었다. 

필립 로스는 [에브리맨] 에서 "그냥 오는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라고 말했다.

운명의 불가역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순응한다. 그것이 '아버지' 의 자세였다. 그것이 아버지가 세상을 버텨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대다수의 평범한 남자들은 이 방법을 택한다.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가장 잘 할 수 있게 된다. 필립 로스의 작품 세계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남자들은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미국의 목가]의 시모어도 그랬고, [네메시스]의 버키도 그랬다. 주커먼 시리즈의 주인공 주커먼 역시 그랬다.    

제니퍼 이건은 [깡패단의 방문] 을 통해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라고 되묻는다. 

이 두 문장이, 필립 로스의 세대와 제니퍼 이건의 세대를 연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필립 로스의 '받아들여' 라는 메시지가 순종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말하는 '오는' 것들에는 운명의 어깃장 같은 싸움거리들이 대부분이다. 필립 로스는 그런 싸움들까지 모두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피하거나 도망가지 말고, 오는대로, 버티고 서서 받아들인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받아들인다. 얻어터지고 깨지고 부서져도 그 자리에 서서 버틴다. 그 세대의 남자들은 그래야만했다. 등뒤에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도 오는대로 한껏 맞받아친다. 그리고 장렬하게 전사하면 아버지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제니퍼 이건의 [인비저블 서커스]는 그렇게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간 아버지와 그 뒤에 남은 가족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피비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아이와 성인의 경계를 막 넘어온 터다. 열여덟살인 피비는 여덟살 무렵에 아버지를 잃었고, 열살 무렵에 언니인 페이스를 잃었다.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어머니와 IT 관련 사업으로 실리콘밸리에서 승승장구중인 오빠가 있고, 피비는 버클리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 역시 IBM에서 일했기에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1978년. 미국이 풍요의 정점을 찍었던 시기다.     

피비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세 자녀들에게 2천달러씩을 남겼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면 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를 통해 조치해둔 것이다. 세 자녀 중 장남인 배리는 그 돈을 종잣돈 삼아 작은 사업(훗날 대박이 터질)을 시작했고,  둘째인 페이스는 남자친구인 울프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페이스는 그 여행에서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온다. 

 피비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엄마와 크게 다툰 뒤, 충동적으로 비행기에 올라 유럽으로 떠나고, 여행지에서 아버지의 변호사를 통해 자신에게도 똑같이 남긴 돈을 수령해 페이스가 유럽에서 보내왔던 엽서의 주소를 따라 유럽 각지를 누비기 시작한다. 페이스가 죽기 전 밟았던 곳들을 하나하나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피비는 페이스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가 독일에 안착해 살고 있는 울프와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페이스의 최후에 대한 숨겨진 비밀들을 듣게 된다.


정말 정신없이 읽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도 높았고, 흡인력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유려한 묘사들이 인상적이었다. 심상을 이미지화 시키는 제니퍼 이건의 발상은 정말이지 '천재적' 이라는 진부한 표현 말고는 딱히 상찬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특히 이번 작품은 개인의 의식으로 침잠하는 과정들이 유럽 각지의 구체적인 이미지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장면들을 '문장으로' 펼쳐낸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의 호흡 조절에는 약간 실패한 지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게 작가 경력을 시작하는 첫 작품이었다니...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나기도 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오롯하게 관통하는 심상은 단연, "고독" 이다.

모더니즘이 개인의 의식, 그 자체에 천착하면서 절대적 고독이라는 화두를 던졌고, 개개인으로의 분화와 독자성, 형식과 구조의 파괴를 받아들였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보다 다층적인, 다채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과제와 재조합, 재창조; 융화로 번져나갔다. 어떠한 흐름 속에서도 가장 뚜렷한 심상은 여전히 절대적인 고독, 외로움이다. 고독은 인간이 자아를 가지면서 획득한 감정이다. '내'가 '나' 임을 자각하는 순간, 고독이 잉태된다. '나' 는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 뿐이라는 절대적인 진실. 그것이 고독의 본질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각하고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어쩌면 이 수 많은 사람들 중,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결된'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기대가 '외로움' 을 잉태한다. 

인간은 홀로 태어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은 스스로를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하지만, 잉태부터 타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인의 유전자를 지닌 세포를 받아, 타인의 몸 속에서 만들어져서, 타인의 골반뼈를 부수고 나온다. 타인에 의해 보호되고, 양육되어 자라난다. 타인에 의해 생명을 얻지만, 타인에 의해 생명을 잃기도 한다.

삶이라는 거대한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족은 언제나 이 비극의 주연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자,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짐이다. 반드시 필요한 타인들. '내'가 살아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집단. 그리고 가장 강력한 집단, 살아 숨쉬는 동안에도, 어쩌면 죽음 이후에도 벗어날 수 없는, 최소한의 공동체. 

가족이라는 행복한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부모는 자녀와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자녀는 부모와 단절되기를 기대한다. 부모는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자녀가 헤아려주기를 기대하고, 자녀는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부모가 헤아려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흔히 '내리사랑' 이라고 부르는 일방적인 기대의 흐름. 가족이 비극인 이유다. 부모와 자녀는 언젠가는 반드시 단절되기 마련이다. 

반면, '또래집단' 인 형제, 자매는 타인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라이벌이자 친구이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물어뜯고, 상처를 치료해준다. 작은것도 나누고, 작은것까지 빼앗고, 사지로 몰아넣고, 사지에서 구해준다. 영원한 비교대상. 누군가에겐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고, 누군가에겐 가장 골칫덩이이고, 누군가에겐 가장 증오스럽고, 누군가에겐 가장 사랑스러운. 버릴 수 있지만, 버릴 수 없고, 죽일 수 있지만, 죽일 수 없는.

형제, 자매는 가족이라는 비극 안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를 담당한다.


피비와 페이스의 관계 역시 그랬다.

사랑스러운 소녀로 태어났지만, 태어나보니, 이미 '사랑스러운 딸' 시상대의 위층을 선점한 사람이 있었다. 피비는 세번째 자녀였다. 첫째인 오빠 배리는 경쟁에서 이미 한참 밀려난 상태였고, 아빠의 눈은 언제나 둘째인 페이스를 향해 있었다. 피비는 페이스를 향한 질시와 부러움, 동경을 동시에 느끼며 자라났고, 아빠에 대한 사랑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끼며 자라났을터다. 배리도 피비도 각자 아빠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지만, 그는 페이스만을 바라봤다.  

이 작품은 시점은 3인칭으로 전지적이지만, 화자는 작품 안에 있는 피비이다. 때문에, 피비에 대해 서술할 때에는 전지적으로 작동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관찰자의 시점으로 작동된다. 피비가 보는 방식으로 피비의 주변 인물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이 피비의 심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페이스의 행로를 똑같이 밟아가며 피비는 페이스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것은 즉 언니인 페이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아빠와 언니의 상실로 인한 상처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피비는 자신도 모르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처럼 가족의 상실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고, 그것은 아마 페이스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피비는 언니가 남긴 엽서를 지도삼아 언니의 행로를 밟으며 언니의 숨결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 그 대부분은 착각에 불과했을 것이다. 착각에 불과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면은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온다. 실제 트라우마의 심리치료 과정들 중에는,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켰던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법도 있다. 피비가 여행도중 느끼는 신체적인 고통은 마음의 고통의 표출이었고, 그녀는 끝끝내 고통을 주는 실체 그 자체에 다가서게 된다. 

 

 작가들은 대부분, 시대에 천착한다.

자신이 자라온 시대,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 할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시대. 앞으로 살아갈 시대와, 어쩌면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시대까지. 어떤 작가들은 시대상을 그려내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기도 한다. 문학이 갖고 있는 많은 가치들 중, 기록으로서의 가치는 그들 덕분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대, 아버지와 어머니, 배리와 페이스, 피비까지 격동의 시대, 피비의 말을 빌리면 "뭔가가 변화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사실 배리가 선택한 IT산업과 부와 풍요, 페이스가 선택한 모험과 변화, 파괴는 노골적일 정도로 쉽게 읽히는 상징들이다. 그것들은 역동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누구나 만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갈림길에서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마력에 사로잡힌 필연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배리와 페이스, 피비를 각자의 세대를 은유하는 메타포로 읽고싶지는 않다. 

이 이야기는 가족과 남매의 이야기이다. 서로의 고독을 보듬어주고, 외로움을 채워주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끔찍한 독설을 내뱉기도 하고, 따뜻한 치유의 온정을 나누기도 하는, 가족과 남매의 이야기다. 



 "어쨌거나." 그가 말했다. "네가 돌아오서 기쁘다. 그냥 나는 그렇다고."

  "이유를 모르겠는데, 베어."

 그는 놀란 눈치였다. "왜 이래. 넌 내 동생이잖아." 그가 말했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물기 어린 앞유리를 응시했다. 이따금 흰 연기 아래 타오르는 석탄처럼 안개 너머에서 불빛 무리가 확 밝아졌다. "오빠도 무서웠어?" 피비가 말했다. "내가 거기 가 있는 동안?"

 "그래." 배리가 말했다.(...)

 그가 말했다. "어쨌거나, 그러면서도 네가 괜찮을 거란 감은 늘 있었어. 그 감이 더 셌지, 아마도. 결국에는."

 "허. " 그녀는 실망했다.

 "그렇다고 내가 마음을 놓았다는 게 아니라-"

 "그 말이 맞는데 뭐." 피비가 말했다. "오빠 말이 맞아. 난 한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인가봐" 어쩐 이유인지 그녀는 웃었다.

 "넌 생존자야." 배리가 간단히 말했다. 진부한 말이지만 그의 진심이 담기니 뜻밖에도 진실로 다가왔다. "넌 딱 그래. 너도 나도 둘 다." 

p.496~7



상실을 극복하고, 과거로 향했던 시선을 가까스로 현실로 옮긴, 

살아남기로 한 이의 이야기다. 


이토록 고독하고 고단한 삶에,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아야 할 이유는 알 것 같다.

이 질문을, 내일도 던지기 위해서다. 

그 정답을, 내일도 찾아 헤매기 위해서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무서워 할 사람들과 함께. 


우린 생존자니까. 내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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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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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운다.

일반병들은 무척 간단한 기술을 배운다. 생명만큼 소중히 여기라는 총기 안에 총알이 가득찬 탄창을 넣고, 노리쇠를 잡아당겨 총알을 장전한 다음, 조종간 위치를 격발에 놓고, 상대방을 향해 겨눈 다음,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난 2년 6개월간 군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그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은 있었지만, 상상 속에서도 그 인간을 힘껏 두들겨 패기나 했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살인무기를 활용할 생각은 정말이지 1도 한 적이 없다. 

아마도 우리 내무실에 있는 사람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물론 우리 부대는 지원부대라 초소근무를 나갈 때 마다 실탄 지급을 받지는 않았지만, 당직실엔 언제나 정문 근무자용 실탄이 구비되어 있었고, 분기별로 하루는 사격을 하면서 영점조정도 하고 실력별로 포상을 주기도 했다. 

실탄은 언제나 묵직했고, 화약냄새는 항상 피냄새 같았다. 실탄사격을 하는 날은 부대 전체가 정적에 휩싸이곤 했다. 주기적으로 산속에 울려퍼지는 총소리는 무시무시했고, 모든 장병들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지만,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그것을 사람을 향해 쏜다고 생각한 사람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정정하겠다.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실, 매일아침 당직사관이 점호시간에 알려주는 전날밤의 사건사고들에는 총기사고가 언제나 있었으니까.

목을 메는 이들보다는 자신을, 혹은 다른 누군가를 쏘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우리 부대에도 몇 명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이 나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았던 것은, 그저 순전히 운이었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내가 전역한지 딱 1년 뒤, 전방 어떤 부대에서 어떤 사병이 내무반 안에 수류탄을 던지고, 같은 부대 대원들을 겨누었으니.

난 2004년 6월에 전역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2005년 6월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콜럼바인 사건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1999년은 나 역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과과정과 미국의 교과과정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콜럼바인 사건의 두 주범자는 아마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학생들이었을터다.

이후 콜럼바인 사건과 함께 따라붙었던 국내의 칼럼들은 대부분 '집단 따돌림', '총기 소유의 위험성' 등 특정한 키워드에 집중됐다. 

으레 안좋은 가정환경 아래에서, 음침하고 내성적으로 자란 아이들이 자유롭게 총기를 소유하게 되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처럼 보도되고 그쳤다. 

무시무시한 사건이었지만, 총기 소유를 아무나 할 수도 없고, 학원 폭력이나 따돌림과는 거리가 있는 학창시절을 보내던 나에게 그저 그렇게 외국의 어떤 사례에 불과했고, 국내 언론의 자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 해는 나에겐 수학능력시험이라는 인생의 큰 관문이 기다리고 있던 터라 큰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다.


콜럼바인에 대해 보다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훨씬 뒤에 김일병 총기 난사사건과 2007년 조승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 국적의 미국 영주권자가 벌였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그 일 이후 콜럼바인 사건에 대한 글들을 다시 접하게 됐고, '화씨 9/11' 과 '식코' 로 잘 알았던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 이라는 작품을 찾아 봤던 기억도 난다. (반면 내용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지 않아있어서 이번 기회에 다시 찾아봤더니, 콜럼바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총기 소유 자체와 선정적인 언론등에 대한 부분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역시 김일병이 부대 안에서 따돌림을 당했겠거니, 조승희군이 학교 안에서 잘 어울리지 못했겠거니, 하고 말았더랬다.

실제 당시의 기사들도 각각 군대라는 특수성과 재미교포라는 특수성, 인종차별과 열등의식 등으로 해석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면, 나의 확증 편향이던지.


그렇다. 확증 편향.

모든 인물은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에 걸리는 말들, 눈에 보이는 글들 중에서 '그럴 만한' 부분들만 저장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고정 관념이나 언론이 만들어준 이미지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뿐 아니라, 언론의 헤드라인이나 짧은 한 줄 기사로 얻은 정보만으로도 쉽게 "안다" 고 인식해버린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자신이 "아는" 방향과 같은 쪽을 가리키는 정보들만을 인식하고 저장한다. 한번 잘못 저장된 정보는 쉽게 수정되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정보들은 "틀린" 정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책 [콜럼바인] 은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얕은지, 그리고, 우리가 '안다' 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13명이 죽고 24명이 다쳤다.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는 미국의 여느 중산층 가족과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났다. 학교 생활도 곧잘 했다. 특히 딜런은 더 어렸을 때는 영재로 여겨질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고, 에릭은 셰익스피어와 안톤 체홉을 외울 정도로 문학을 사랑하는 소년이었다. 딜런은 소극적이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아이였지만,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도 있고,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붙여볼까 공상하는, 그 나이때의 여느 아이와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에릭은 쾌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싹싹한 아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범죄의 징후가 없었다. 주변의 대부분의 어른들에겐 자신의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웃집 아이였다.

단, 에릭의 경우에는 몇몇 징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대다수의 어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졌다.

몇몇 사건들이 있었지만, 정당한 벌을 받았고, 법원에서 부과한 사회봉사와 교화교육과정들을 충실히 이행했다. 학업 성적도 좋았다. 모두가 치기어린 시절 한번쯤 겪을 수 있는 실수였으며, 교화 프로그램을 통해 응분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고, 반성했다고 여겨졌고, 법원에서 지정한 상담의에게도 합격점을 받았다. 그 사이에 놓친 몇몇 징후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평범한 고등학생 아이들이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징후들을 약 1년여 후에 있을 미국 총기 사고 역사에 기록될 대학살의 전조로 볼 수는 없었을터다.  



 볼륨도 상당하고, 내용도 무척 빡빡하지만 페이지는 굉장히 잘 넘어간다.

우리나라에서 책으로 나올 정도의 르포르타주라면 세간의 관심을 끌만한 자극적인 소재이거나 유명한 작가의 글이라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책은 특히 더 술술 넘어갔다. 무엇보다 이런 책이 만들어지고, 출간될 수 있는 미국의 환경이 놀라우면서도 부럽다. 이 책은 음모론을 혁파하고 제퍼슨 카운티 경찰 당국의 실수를 꼬집으며 언론의 치졸한 행태를 드러내는 책이다. 몇 년 동안 이 사건을 이용해 이득을 얻은 장사꾼들의 속내를 파헤치고, 희생당한 이의 유족들과 가해자의 가족들 간의 진흙탕 같은 지저분한 다툼도 가감없이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후원금의 내역과, 그 용처를 두고 일어난 희생자 가족간의 사적인 법적다툼까지 샅샅히 실려있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 사건을 쫓은 저널리스트의 의지와 용기는 물론,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힘썼을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진다.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까??

김일병을 다룬 사건은 군대의 폐쇄성 때문에 힘들지라도, 인천 유아 살해사건이나 세월호는 이런 객관적인 논조로 담담하고, 침착하게, 어느 한 곳에 쏠림 없이 공정하게, 백서의 형태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책의 구조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독립적인 다섯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각각의 챕터가 공히 시간의 순서대로는 사건 이전, 사건 당시, 사건 이후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다섯번의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에릭과 딜런의 시점에서, 희생자와 가족들의 시점에서, 보안관과 경찰들의 시점에서, 주변의 교회와 신도들 시점에서, 에릭과 딜런의 가족들 시점에서. 모든 챕터가 첫장은 사건 이전이고, 마지막장은 사건 이후인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결코 끼어들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감정적인 서술은 최대한 자제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자료들을 '정리' 하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고른 느낌이 역력히 묻어난다.


에릭과 딜런이 모의하고 준비한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도 대단하지만, 이후 진행된 수많은 송사들과 후원금의 분배, 종교적인 이용, 언론의 수많은 오보와 그것에 떠밀려간 대중들의 심리, 희생자 가족들과 가해가 가족들, 그리고 생존 학생들과 주변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갈등, 중상자들의 재활과,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피폐해진 삶까지 건조하고 담담하게 서술되어 가슴을 깊이 후벼팠다.

그 누구의 말처럼, 단순히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부상자를 남긴 한 건의 사건이 아니라,

37건의 총격사건인 것이다. 

그 한 건,한 건들이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재현되고, 또 재현된다. 



 이 책을 통해 드러난 콜럼바인 사건 이후 일련의 과정들은 9.11 테러 당시의 미국사회와 흡사할 정도로 닮아 있다.

쏟아지는 추측성 보도, 확증 편향에 따른 대중들의 이해, 그로 인한 분노, 희생양, 음모론, 오보, 오보, 또 오보.

물론 김일병 총기 난사 사건과, 세월호와도 닮아있다. 

대참사; 거대한 사건을 접했을 때 인간들이 저지르는 똑같은 실수들.

매번, 매번 똑같이 반복한다.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행정기관들은 은폐하거나 최소한 축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숨기고 감추고. 언론들은 속보 경쟁에 뛰어들어 크로스 체크조차 하지 않은 추측성 기사를 남발한다. 그 과정 중에 희생양도 생기고 수혜자도 생긴다. 귀신같이 돈냄새를 맡는 사람들도 있다. 이권 경쟁마저 생긴다. 오보는 오보를 낳고, 확증 편향은 또다른 편향을 낳는다.

결국 다른 사건이 터지면, 대중들의 관심은 그 쪽으로 쏜살같이 옮겨간다.

관계자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관련자들은 여전히 잘 숨기고, 감춰서 면피의 기회로 삼는다. 

진실은 그렇게 묻히고, 실수를 되짚어 올바른 대응책을 마련할 기회는 사라진다.

그래서, 같은 사건은 똑같이 반복된다.

특히 대한민국 군대는 소름끼칠 정도로 차폐된 세계이다. 사건 하나하나에 직업의 명운이 달린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며,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거짓말의 향연을 벌인다.

 

 콜럼바인 사건 당시 미국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가해자들이 자살했기에 희생자 가족들과 대중들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없었다. 언론들은 '트렌치 코트 마피아' '고스족' '학교내 따돌림' 등을 언급했고, 생존자들을 통해 반복 재생산 되었다. 수년간 그것이 진실처럼 여겨졌다.(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더라.) 가해자의 가족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너희가 아들을 잘못 키웠어."

제퍼슨 카운티 당국은 과거 에릭의 사건기록을 삭제하고 경관끼리 입을 맞추면서 콜럼바인 사건 1년 전에 에릭을 제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이후에 드러난 자료들- 특히 에릭과 딜런이 사고 직전에 찍은 동영상을 은폐하고, 사건의 주요한 정보들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보들이 희생자 가족 개개인들과 변호사들의 대처로 순차적으로 세상에 공개됐고, 제퍼슨 카운티 경찰의 폭넓은 은폐시도가 드러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경찰은 그것이 '의례적인 일' 이었다고 수습했다. 내부적으로 판단해서 자료의 공개 여부나 파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경찰의 본디 업무들 중 하나라고 말이다. 정보 공개와 손해 배상에 대한 소송은 몇년으로 길어졌고, 희생자 가족들이 "비극 팔이" 를 한다는 자극적인 기사가 언론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대체 어느 나라, 어느 사건 이야기인가 싶어, 몇번을 다시 읽었다.


에릭과 딜런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매혹적이었다. 

사건의 심리 담당 중 한명이었던 퓨질리어는 에릭과 딜런에 대해 가장 깊이 파고든 인물이었다.

FBI 협상전문가인 그는 여러 인질사건을 겪은 베테랑이었고, 범죄수사의 전문가였다. 에릭과 딜런의 일지와 발견된 비디오 테이프들을 바탕으로 둘의 심리를 분석했고, 딜런은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에릭은?

싸이코 패스였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1999년은 싸이코 패스에 대한 연구가 초기단계였다.

에릭은 싸이코 패스의 전형에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에릭과 딜런은 표면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알콜 중독자거나 폭력적인 성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다. 형제간에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가끔 어린 애들을 괴롭히고 말썽을 일으키긴 했지만, '살인' 과는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에릭은 순종적인 아들이었고,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피잣집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영리하고 일 잘하는 직원이었다. 사장과도 친하게 지냈고, 손님들에게도 싹싹했다. 딜런은 다소 음침한 구석이 있었지만, 에릭과 함께 있으면 밝게 웃었고, 학업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누가봐도 얌전하고 순종적인 학생이었다. 에릭은 사건 직전에 남긴 비디오 테이프에 '좋은 엄마에게서 나쁜 아들이 태어났다' 는 말을 남겼다.


에릭이 싸이코 패스라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사람들은 "왜?" 라는 의문을 비로소 풀 수 있었다. 

반면 딜런은 싸이코 패스는 아니었지만, 그의 일지를 통해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상태였으며, 에릭을 통해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에릭과 딜런이 싸이코 패스가 시너지를 이룰 수 있는 조합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싸이코 패스만이 이런 대학살극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조승희를 비롯, 콜럼바인 이전에도 총격 사건은 있었지만, 이후에는 좀 더 심해졌다.

조승희의 예처럼 에릭과 딜런이 어떤 학생들에게는 일종의 모티프로 작용한 것이다. 



결국은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는 총기가 문제였을까?

미국에서도 미성년자의 총기 구입은 상당한 규약이 따른다. 총기 소지가 자유라지만, 아무런 규약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총기를 쏴 본 적도 없다. 오히려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는 한국인들이 총기사용에 더 능숙할지도 모른다.

에릭과 딜런은 총기 판매시 규제가 덜 엄격한 총기 박람회에서 총기들을 구매했고, 그들에게 총기를 판 딜러는 5년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사는 사람보다 파는 사람에게 엄격한 법을 적용함으로써 총기 규제를 엄하게 했다지만, 어디에나 꼼수는 존재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 에서 마이클 무어가 중점적으로 다뤘던 부분이 총기 소유 허가에 대한 부분이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엄청난 총격 사건이 있었다. 

우린 SNS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그 충격적인 광경을 접했다. 한밤중에 흥겨운 콘서트장을 향해 발사된 수백발의 총알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쓰러졌다. 60여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콜럼바인에서 일어났던 리액션들이 몇초만에 일어났다.

SNS를 통해 추측성 글들이 퍼졌고, 공모자나 배후자가 의심됐다. 하지만, 이번엔 경찰과 당국의 대응은 달랐다. 최대한 빠르게 범인의 신상을 확보하고, 언론에 공개했다. 합리적이고 합당한 증거들은 모두 공개했고, 대중들은 빠르게 희생자와 피해자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콜럼바인에서처럼 총기 규제에 대한 이슈가 도마에 올랐지만, 미국 정부 당국은 역시 애써 외면중이다.

사회적 문제는 제쳐두고, 살인자 개인에게 모든 원인을 돌리고 있다. 


총을 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물건인지.

얼마나 쉽게 옆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물건인지.

과녁을 앞에 두고, 실탄이 가득찬 총을 전방을 향해 겨눈 상황에서 누구도 그 총구를 동료들에게 돌릴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를 떠올리면 등 뒤에 소름이 돋는다.

어쩌면 그 중에 한두명 정도는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계획을 세운 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2015년 5월 13일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에 있던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로에서 일어나 자신의 사격을 돕던 부사수와 옆사로의 예비군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자살했다. 3명이 죽고 2명이 크게 다쳤다.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의 사건이었다.


분명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

통계적으로 범죄율은 꾸준하게 감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매스 미디어에서는 범죄와 관련된 영상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평화로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은 범죄와 폭력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악' 이 얼마나 일상적인 것인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는지 알고 있다. 

분열과 분노의 세상 속에서 약자는 언제나 폭력의 대상이다. 폭력이 축적되는 만큼 분노도 축적된다. 

비단 싸이코 패스만 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것을 방지하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얼마나 얄팍한가.

우리는 과연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김영하 작가는 '작가란 질문을 던지는 사람' 이라고 했다. 

이 책 역시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 몇편을 링크한다.

어느정도 정리된 콜럼바인 고교의 사건현장




사건 당일 도서관에서 걸려온 911신고 음성 파일






콜럼바인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재현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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