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52) 배트맨 3 : 가족의 죽음 세미콜론 배트맨 시리즈
스콧 스나이더 외 지음, 이규원 옮김 / 세미콜론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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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기는 한참 전에 읽었는데, 뒤이어 나온 [제로이어-비밀의 도시] 와 [제로이어-어둠의 도시] 를 읽은 뒤 다시 읽으니 새삼 와닿는 대목들이 있어 다시금 리뷰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올빼미 법정]과 [올빼미의 도시]도 리뷰는 안 했더라.)

배트맨 시리즈는 '뉴52'라는 타이틀로 DC유니버스가 일종의 리부트를 한 작품들 중 가장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사실상 현재까지도 DC코믹스 전체를 하드캐리하는 중이다. 


뉴52 배트맨 시리즈의 3번째 국내 번역본인 [가족의 죽음]에서는 일단 배트맨이 조커를 제압한 몇 년 후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 중 '돌메이커' 라는 또다른 빌런에게 조커는 얼굴 가죽을 뜯긴(!!) 뒤였다. 배트맨은 조커를 제압하고 그 시신을 찾지는 못했지만, 뜯겨진 조커의 얼굴가죽을 발견할 수 있었고, 배트맨의 동료들(로빈, 레드 로빈, 나이트윙, 배트걸)과 고담시는 조커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고담 시경 증거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조커의 얼굴가죽이 도난당하면서 시작된다. 

배트맨은 과연 조커의 얼굴가죽을 훔쳐간 범인, 조커를 자칭하는 그 범인이 진짜 조커인가? 그리고 과연 조커라는 인물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한다. 아캄 수용소를 찾아가며 과거의 행적을 뒤쫓는 사이, 범인은 알프레드를 포함한 배트맨의 동료들을 납치하여 배트맨에게 날릴 절망의 일격을 준비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배트맨 만화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내에 정발된 거의 모든 작품들을 읽긴 했는데, 작화로 보나 내용면으로 보나 가장 충격적인 이슈가 바로 이 작품이었다.

깨끗하게 도려내진 자신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쓰고 등장하는 조커라니. 상피조직이 다 드러난 얼굴에 얼굴 가죽을 무슨 의료용 스테이플러 같은걸로 가죽 밸트에 연결하고, 입 부분에 줄을 매달아 뒤집어 쓴 모습은 그림 그 자체로만 봐도 불쾌할 정도로 잘 표현해놓았다. 

표지부터 그로테스크하고, 배트맨의 가면 뒤에 숨겨진 브루스 웨인을 알고 알프레드부터 납치하는 그의 수법 역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엄청나게 끔찍하긴 하지만, 자신의 폭력적인 범행 사이에 숨겨있는 깨알같은 '조크' 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절묘하게 잘 배치했다. (엔딩까지 끊이지 않는 조커의 조크라니!!) 스콧 스나이더의 위트와 센스가 돋보였고, 어떻게 그의 작품이 DC코믹스 전체를 하드캐리 할 수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전에도 언급했었지만, 배트맨 시리즈의 포인트는 '배트맨을 얼마나 참신하게 괴롭히는가' 일 것이다.

뉴52시리즈는 그 첫 작품이었던 [올빼미 법정]에서부터 엄청나게 강력한 '탈론' 을 통해 배트맨을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괴롭히더니, [가족의 죽음]을 통해서는 정신적으로 탈탈 터는데, 정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 


조커가 아직 조커라 불리지 않고, '레드 후드 리더' 로 불리던 무렵으로 되돌아가는 [제로이어-비밀의 도시] 를 읽고 다시 읽으면 새롭게 눈에 들어오게 되는 장면들도 있고, 조커에게 일말의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장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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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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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작가만큼 호불호가 크게 나뉘는 작가도 많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편에 속하는데,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특히 여성 독자층 중에 정이현 작가를 싫어하는 분들이 꽤 많다는 것을 꽤 여러번 느꼈다.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달콤한 나의 도시]는 특정 연령대에 어필할 만 한 매력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가졌지만, 통속성이라고 폄하 할 수도 있겠고, [너는 모른다] 는 상당히 재미있으나 전반적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랑의 기초]는 딱 봐도 '냉정과 열정 사이'의 기획을 모방한 상품에 가까운 작품이니 그 역시 '깔' 거리가 무궁무진하다.

무엇보다 정이현 작가의 데뷔 작품집과 다름없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 는 동성의 팬들에게 불편을 줄 구석이 많다. 

우리 사회 안에서 속물적으로 소비되(하)는 여성성을 너무나 날카롭게, 관용 없는 차가운 시선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정이현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여성들의 시각을 통해 우리 사회가 단지 '여성' 이라는 이유로 그녀들에게 행하는 수많은 유무형의 폭력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이현 작가의 데뷔 작품집이나 다름없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작품들 역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의 연애, 결혼, 직장, 동성애 등의 소재들을 생활에 밀접시켜 다양하게 풀어내고 있다. 남성으로서 때로는 읽기 불편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다소 속물적이라는 비판을 들어 마땅한, 선택들에 대해 진지하게 그려내고 있다. 능동적으로 남성들의 세계에 비집고 들어가려는 여성들의 시각으로 비틀린 우리 사회의 비틀린 남성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여성' 이란 이유로 당연스레 가해지는 수많은 유무형의 폭력들, 그리고 그것을 감내하기 위한 여성들의 전략과 전술, 타협과 대결을 대해 다채롭게 그려낸다.

 

표제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 는 주인공 여성이 사회적인 지위가 번듯한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처녀성을 잘 지키면서 적당히 즐기는 내용이 펼쳐지는데, 우리 사회가 한 때, 어쩌면 지금도 일부, 여성의 성경험 유무를 인격, 인성, 인생과 결부시키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 오래 된 일도 아닐터다. 

주인공 유리는 때론 여러 남자들을 만나며 잠자리만은 피하기 위해 낡은 속옷을 입고 다니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처녀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인데,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상승시켜 줄 수 있는 남성을 위해 가질 수 있는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20~30년 안쪽이었을 것이다. 여성에게 혼전순결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가치였던 시절이. 지금 친구들은 콧방귀를 뀌겠지만, 90년대 소설만 찾아봐도 '첫날 밤 이불 위의 붉은 꽃' 따위의 메타포를 수두룩하게 찾아볼 수 있을터다. 

우리 사회가 그랬다. 남성들이 그랬다. 불과 내가 10대이던 시절만 해도, 그렇게 원초적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트렁크 안에서 소녀의 시신을 발견하고 야릇한 관계인 회사 상사에게 연락을 하지만 결국 스스로 모든 걸 처리하는 여성이 등장하기도 하고(트렁크), 아빠 차를 한 번 몰아보고 싶어하는 짝사랑하는 용이오빠의 부추김이 있었지만 오히려 한 술 더 떠 부모님을 상대로 자작 유괴극을 펼치는 여고생도 등장한다(소녀시대). 마녀처럼 주변 사람들을 파국으로 이끄는 특별한 기술을 지닌 여성도 등장하고(순수),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끊긴 동성 연인을 찾으려는 레즈비언 여성의 이야기(홈 드라마)는 소수 중에도 소수의 이야기를 다뤄낸다. 결국은 현실에 좌절하고 마는 비만여성의 이야기(신식 키친)도 빼놓을 수 없다. 

작품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20세기 모단 걸; 신 김연실 전'은 일제 강압기에 당당하게 일본으로 유학간 김연실이라는 여성이 한 남성의 찌질함 때문에 결국은 사회의 편견에 굴복하고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되지만,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정도의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김연실도 남성의 폭력에 의해 인생이 '바뀐' 것이었을 터. 


사회에 맞서 '남녀평등'!!! 을 외치며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순응하고, 순응하는 것 처럼 위장하고, 타협하고, 타협하는 것 처럼 위장하며 살아갈 것이다. 

책 말미의 해설(이광호)에도 언급되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녀들의 '위장술' 과 '정치학' 을 참으로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이제스트로 훑어본 정도였던 [여자가 섹스를하는 237가지 이유] 라는 책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확실히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복잡한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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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의 여왕 -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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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개천가에 커다란 고물상이 있었다.

항상 트럭이 드나들던 고물상의 대충 만들어진 울타리 뒤로 한가득 쌓여있는 폐품들은 어린 내 눈에 보물 산처럼 보였다.

한동안 동네 친구들과의 놀이터가 되어 주던 천변에 버려진 오래된 포니 승용차도 거기 어딘가 쳐박혀 있었고, 그렇게 갖고 싶던 다양한 자전거들도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그렇게 보고싶던 아동 문학 전집이나 동화책 무더기도 언듯언듯 보였다. 

내 첫 자전거도 그 고물상에서 사왔던 것 같다. 아버지가 보조바퀴를 떼어 주시고 체인에 기름칠을 하고 여기저기 조이고 닦아서 새 자전거처럼 만들어주셨고, 나도 신나게 동네 언덕에서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한동안 동네 어디에나 고물상들이 있었고, 커다란 철가위를 철컥거리며 폐품을 수집하고 뻥튀기로 바꿔주는 아저씨들이 리어카를 끌고 돌아다녔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고쳐쓰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내가 사는 동네엔 제법 큼지막한 고물상이 있다. 

무심코 그 앞을 지나다가 지창씨 생각이 났다.

지창씨는 해미의 아버지고, 지창씨와 해미 부녀는 [소각의 여왕]의 주인공들이다. 

일전에 읽었던 소설 중에 폴 오스터의 '선셋파크'라는 소설에 버려진 집의 내부를 정리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했었다. '주택보존 서비스' 라 명명되는 이 직업은 오랫동안 방치된 집을 주인이 다시 꾸며 팔기 위해 해묵은 가구와 장식, 쓰레기 따위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당시 그 소설을 읽으며 그 직업에 관한 흥미가 생겨 여러모로 정보를 뒤져보다가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억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의 어린시절, 그렇게 가까웠던 고물상에 드나드는 트럭들 중 하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찮게 엊그제, 동네 어귀의 빌딩 고층에서 가구들을 내리는 큰 트럭에 [폐가구 수거차량] 이라는 팻말이 크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그러니까 지창씨가 이런 트럭을 운전했겠구나.' 

그리고 이윽고 해미가 물려받게 되겠지. 


비슷한 시기에 읽은 [열광금지, 에바로드] 와 [소각의 여왕]의 아버지들은 대단히 닮아있었다.

정의롭고, 정직하고, 순박하게 일평생 자식을 돌보며 살아온 아버지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사라지고 있는 세대로구나, 우리가.

아버지의 직업을 이을 수 없는 세대로구나, 우리가. 


[소각의 여왕] 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부녀를 구분짓지 않는 태도를 통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세대를 구별하지 않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지 불행한 것은 우리 세대만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 소위 386세대라고 하는 이들도 시절의 수혜를 받은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은 함께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을 버텨낼 뿐이다. 

폐휴지 줍는 할머니도, 고물상을 운영하는 지창씨도,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게 되는 해미도 단지 절망만을 향해 치달아갈 뿐이다. 

물론 지창씨는 시절의 수혜를 잠깐 받았지만, 더한 해악을 입고 모두 잃어버린다. 

그나마 작은 조각에 희망을 잔뜩 걸고 있지만, 해미는 그조차도 없었다. 

절망을 향해 달려가는 큼직한 네발달린 철상자 안에서, 그저 절망할 밖에. 


2016년. 눈과 귀를 막아버린 집권층은 여러 악법으로 절망적인 세대의 숨통을 움켜쥐고, 청년들은 헬조선에서 절망으로 신음한다.

방법은, 정말 없는 것 같다.

해미처럼 절망의 트럭 안에서, 절망의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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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의 몰락 2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4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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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으로 이미 큰 감탄을 했던 켄 폴릿의 역사소설이다.

1914년을 시작으로 1920년까지 유럽 각지의 인물들을 다루는데, 시기상 가장 큰 이슈는 단연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방대한 인물 소개와 함께 역사적 실존인물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데, 이 부분은 책의 말미에 저자가 스스로 밝힌 '역사와 허구 사이에 줄을 긋는 법' 과 통해있기도 해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역사소설을 가늠하는 기준이 있는데(이 기준은 판타지 등 장르물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는데) 당시 사람들의 사상이나 습관을 얼마나 '그 시대적' 으로 풀어내면서,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주는가이다.

재미있게도, 이 기준은 켄 폴릿의 [대지의 기둥]을 읽으면서 정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역사소설에 대한 의구심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국가의 많은 인물들을 다루기 때문에 그의 능력이 얼마나 발휘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1910년대 영국. 근대화의 문을 활짝 열고 민주주의의 불꽃을 당겼지만, 아직 신분제 사회였다. 에버로언의 피츠허버트 백작은 여전히 대지주였고, 광부들은 여전히 소작인이었다. 에버로언의 피츠허버트 백작의 저택에서 어린 나이에 하녀장을 맡게 된 에설은 에버로언 광부 노조의 지도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데에 탁월한 당찬 여성이었다. 

 작품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큰 지분은 바로 이 '에설 윌리엄스' 가 차지하고 있다. 광부의 딸에 하녀, 그리고 여성, 게다가 미혼모이기까지 한 그녀가 어떻게 한 사람의 뛰어난 운동가로 자라나는지를 보면 수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어째서 민주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퇴했는지 알 수 있다.

솔직히 [세계의 겨울]까지 읽다보니 당시의 영국,미국 의회보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회가 더 허접스레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한 축은 에버로언 백작의 여동생인 모드 피츠허버트와 독일 외교관의 아들인 발터 울리히가 차지하고 있다. 에설 윌리엄스가 여성 운동가의 일면을 보여준다면, 모드와 발터는 전쟁 속에 피어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고, 유럽을 휩쓴 대전쟁 치하에서 적국에 연인을 둔 두 남녀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참으로 애달프다. 

이 작품 안에는 유독 강인한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기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하기도 한데,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정계나 언론계, 노동계에서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면 보통 외모와 멘탈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드는 그에 걸맞는 신분과 외모, 멘탈을 가지고 있었고, 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성으로서 쓸 수 있는 무기는 다 쓴다" 는 주의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여성 인권 신장에 있어 불같은 추진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는데, 결국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드와 발터가 전쟁이 터지기 직전, 외교가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일희일비 하는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매우 희극적이었다. 본국에서 내려오는 쪽지 한장에 '전쟁이 나면 우린 어째~' 했다가, '전쟁 안 나려나 봐요. 행복해요~' 했다가, 또 , '전쟁 날 것 같아요, 우리 어떡해요.' 했다가, 또 '전쟁 난대요. 우리 어떡해요.' 를 몇차례나 반복하는데, 그 심정이 절절하게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면 의외로 희극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에설과 모드에 대한 이야기가 2/3 정도 차지한다면, 나머지 1/3은 거스 듀어를 통해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과정과 귀족 혈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미국의 상류층 이야기, 그리고 그리고리와 레프 페시코프 형제를 통해 러시아의 붉은혁명과 미국 이민 1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스 듀어의 이야기에서는 로사 헬먼이라는 여성 기자가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으로 생각된다. 진보적인 사회주의자인 헬먼은 이미 화려한 경력을 쌓은 기자로 한쪽 눈에 장애가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거스 듀어와 로사 헬먼의 러브 스토리는 솔직히 남성 판타지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판타지스러운 장면이 바로 이 둘의 러브 스토리 중에 등장한다. 

그리고리와 레프는 남성들이 생각할 때 가장 멋있는 요소들을 나눠가진 인물들이다.

그리고리는 무척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목표를 설정하면, 그 목표를 향해 올곧게 걸어가는 인물이다.

반면 레프는 요령이 좋고, 바람둥이에 말솜씨가 좋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쥐락펴락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리는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이고, 레프는 매력 넘치는 나쁜남자랄까.

그리고리를 통해 당시 러시아 군대의 처참한 상황과, 러시아의 차르가 무너지고 레닌과 트로츠키가 혁명을 성공시키는 과정이 그려지고, 레프를 통해 당시 미국의 러시아 마피아의 생활을 보여준다. 


[거인들의 몰락]의 진짜 흥미로운 부분은 한 타임라인 위에 수많은 세계의 이야기를 동시에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 당했을때 러시아,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의 반응과 얽히고 설킨 국가간의 약속들. 그리고 힘의 균형에 이리저리 휘청이는 중심축. 그 안에서 '위' 의 명령에 따라 역시, 이리저리 휘청이는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무능력한 위정자들, 지도자들, 장교들. 

비슷한 시기 세계 각지의 고위층들의 결정에 수천, 수만, 수백만의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실제 역사적인 사건들을 광범위하게 펼쳐놓고 인물과 이야기에 따라 화려하게 직조하는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무엇보다 정말정말 엄청엄청 재미있다.

1권도, 2권도 무심코 펴들었다가 밤을 홀딱 새버릴만큼 재미있다.

일단 인물들의 개성이 엄청나게 뚜렷해서, 등장인물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무척 쉽게 기억된다. 로마시대에 비하면 이름들도 무척 짧고 간결하며, 참~~ 쉽다.(ㅋㅋㅋ) 게다가 인물 수가 많다지만, 한 국가에 서너명이기 때문에, 이 국가 이야기가 나오면 이 인물, 저 국가 이야기가 나오면 저 인물이 등장하기에 쉽게 각인된다. 

또 한가지, 간간히 등장하는 에로틱한 장면들이 감각을 톡톡 잡아 챈다. 

위에 언급했듯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한 역할의 여성들은 남성 중심 사회의 정점에서 남성들을 쥐락펴락 하는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을 다룸에 있어서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성향만큼 성적인 표현에서도 조금 남다른 적극성을 보여준다. 이런 부분들이 한 밤 중에도 잠을 확 깨게 만들어 결국은 밤새워 읽게 만들곤 했다.

참고로 에설이 남편과 크게 다툰 뒤, 화해의 방법으로 침대 위에서 남편에게 자신의 벗은 가슴을 보여주는데 얼마전 인터넷에서 떠돌았던 '남자친구 화 풀어주는 방법' 이 떠올라서 박장대소를 했더랬다. 이 작품이 '픽션' 임에도 정말 그 시대에도 그랬을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푹 빠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강렬함은 전쟁에 대한 공포이다.

위에는 희극적인 느낌까지 난다고 했으나, 모드와 발터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전쟁에 대한 참상이 잘 묘사되고 있다. 전쟁이 터지고 징집되어 끌려가는 젊은이들. 에버로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츠허버트 백작은 신분에 걸맞게 장교로, 에설의 남동생 빌리는 사병으로 전쟁터로 끌려간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전쟁의 참화 속으로 이끌려간다. 전쟁터에서도 보수와 진보, 신분과 계급도 존재했다. 장교들은 보수주의자로 애국심이 넘쳤지만 무능했고, 사병들의 목숨을 파리보다 못하게 여겼다. 빌리는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사병도 인간이고,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 정도는 알아야 했으니까. 독일이나 영국에 비해 인격, 전력적으로 지나치게 낙후된 러시아의 사병인 그리고리는 더 끔찍한 꼴을 당한다. 바로 이 전쟁통에 그리고리는 혁명정신을 깨우치게 되고, 붉은 혁명에 앞장서게 된다.

끔찍한 참호전도 무척 잘 묘사하고 있다. 런던까지 들렸다던 프랑스 솜강 전투의 대포 소리, 매일매일 전사자 통보가 끊이지 않았던 에버로언의 광부촌, 빵 한덩이를 위해 매일매일 몸을 팔아야 했던 평범한 러시아의 아내들 역시. 전쟁터는 물론이고 전쟁을 치르는 국가들의 끔찍한 참상이 잘 담겨져 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오직 위정자들 뿐이었다. '신분이 높으신' 분들. 이 점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작품의 엔딩 또한 무척이나 돋보였다.

결국 노동당 하원 의원으로 당선된 에설이 의사당 계단에서 피츠허버트 백작과 맞닥뜨리는 장면인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계급과 신분으로 상원의원을 '물려받은' 피츠허버트와, 그의 하녀장이었지만 지역민들의 선거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에설.

그렇지.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였다. 백작과 하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볼 수 있는 사회. 


훌륭한 역사소설은 그 시대의 생활상과 정신을 설득력 있게 묘사해내기도 하지만, 그에 비춰 현실을 되새기게 해준다.

[거인들의 몰락] 역시 그러한 훌륭한 역사소설의 미덕을 정확하게 갖추고 있다. 드라마의 요소도 무척 풍부해서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터, 특히 매력적이고 개성넘치는 인물들에 푹 빠져들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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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정월대보름 입니다!^^
주무시면 눈썹셉니다~하얗게!
 
풀잎관 1~3 세트 - 전3권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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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역사 소설을 꽤나 좋아하는 30대 남자로써 '로마' 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스의 뒤를 이어 유럽 문화의 뿌리가 된 로마 문명.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집정관과 호민관, 원로원이 어우러진 초기 공화정과 제국으로의 변모, 그리고 거대한 대제국. 다신교 문화에서 피어난 유일신교의 씨앗. 그리고 극적인 역전 등, 수박 겉핥기만으로도 충분히 달달한 이야기들이 죽죽 흘러 내린다. 나처럼 어설프게 아는 독자들도 '시저'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영어로는 줄리우스 시저, 원래 발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리고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리고 '부르투스 너도냐!' 까지. 실제로는 했네, 안 했네, 원래는 이런 말이었네, 저런 말이었네 말도 많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일 것이다. 키케르와 클레오파트라까지 덤으로. 


[로마의 일인자] 는 바로 그 '시저' 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이름의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노회한 정치가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눈에 무관 출신의 노숙한 정치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들어온다.


이 두 이름을 보는 순간 이미 가슴이 쿵쾅쿵쾅.

로마 공화정 말기의 이른바 '100년 내전 은 로마사에 아주 약간의 관심만 있는 사람이라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동맹시들의 이탈과 반란, 로마 내부의 정쟁, 평민들의 불만과 궐기, 그리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대표되는 평민파와 술라로 대표되는 귀족파의 본격적인 충돌.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출현과 삼두정치, 그리고 루비콘강에서의 회군.

역시, 바로 그 시기의 이야기로구나!!!!   


어느 왕국이나 멸망 직전이 가장 화려한 법이다.

우리역사만 봐도 삼국시대가 삼국 모두가 그랬고, 통일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다. 특히 고려말~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교체기는 로마의 공화정말기~제정초기와 상당히 닮아있다. 조금 나가 중국 역사만 봐도 수많은 나라들이 멸망 직전에 가장 빛난다. 복잡복잡한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아주 작은 불씨 하나로 어마어마하게 타오른다. 


1권 초반에서부터 이야기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작품 속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미 40세를 훌쩍 넘은데다가 로마의 귀족 혈통도 아니라 집정관이 될 수 없는 처지로 등장한다.

'어라, 이럴리가? 아니, 이럴수가?' 게다가 작품의 1/3쯤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술라는 애인에게 얹혀사는 기둥서방과 다름없는 건달처럼 보인다. 게다가 양성애자!! 로마 공화정 말기,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처지였다니!! 

멀리서 봤던 숲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겉핥기만 했던 수박을 쪼개보니, 진짜가 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각 챕터가 당 해 연도로 되어 있다. 기원전 110년. 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본격적으로 붙기까지는 아직 수십년 더 지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시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나려면 아직 10년은 더 있어야 한다. 

서두를 장식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시저의 할아버지인 것이다.


1부 [로마의 일인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정치적 기반을 다져가는 과정이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상황 묘사로 정말 재미있게 펼쳐진다. 당시 로마의 정치상황에 대한 설명도 간결하기 이를 데 없고,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인물들의 선택에 대한 이해가 충분할 정도로 주어진다. 특히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되던 당시 로마정을 가감없이 묘사하고 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혈통과 돈이 필요하고, 권력을 얻으면 혈통과 돈을 그러모아야 한다. 정치의 이유는 오롯하게 자신의 욕망이며 정치 활동 자체도 피호민을 모아 세를 넓히기 위해서일 뿐이다. 권력의 분립과 견제, 그리고 균형을 모토로 발전해온 공화정은 이미 시궁창 고인물이 되어 썩은내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타고난 군인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돈만 많고 혈통이 별로라 중앙 정계에 들었음에도 좀처럼 로마 정치권력의 정점인 집정관에는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의 준동과 끊임없는 북방 이민족들의 위협으로 '타고난 군인' 인 마리우스는 지속적인 기회를 잡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몇차례나 로마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지만 계속된 원정으로 해외와 지방에 있는 사이, 정작 로마는 사투르니누스의 쿠데타를 경험하게 된다.


2부 [풀잎관] 에서는 뜻하지 않았던 병과 사투르니누스의 의회 전복 사건 이후 모처럼 찾아온 평화의 시기를 맞아 더이상 권력을 붙들고 있을 수 없어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좀처럼 큰 찬스를 잡지 못하고 있는 술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관계는 예전만큼 친밀하지는 않아보였으나 서로에 대한 존중과 우정은 여전했고, 로마의 중앙 정계 또한 좀처럼 변할 줄 몰랐다.

마치 고인물처럼 로마 정계는 썩을대로 썩어있었고, 권력을 지닌 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재산을 불릴 마음 뿐이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몇 대 가 쌓은 어마어마한 황금과 번듯한 혈통이 필요했다. 권력을 잡은 뒤에는 자신이 그동안 투자한 금액을 몇배로 되돌려 받고자 노력했고, 자식들에게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모으고 더 모아야 했다. 권력의 밖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착취당했고, 권력의 안에 있는 자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그것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애 쓸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와 북방민족의 전쟁위협을 통해 권력을 잡았듯, 술라는 이탈리아 속주의 반란과 아시아 속주의 군사적 위협을 통해 집정관위에 오르게 된다. 술라가 아시아 속주를 평정하고, 이탈리아 속주의 반란도 진압, 잔당을 정리하는 사이 로마 중앙 정계에서는 이제 반 은퇴상태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마지막 기회를 잡아 다시 한 번 집정관이 오를 계략을 세우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의 정면대결. 집정관에 의한 첫번째 로마 시내 침공이 벌어지게 되고, 서두에 언급했던 '시저'.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격적으로 활약을 예고한다.  



1부 [로마의 일인자]와 2부[풀잎관] 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역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이다. 

태생부터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 혈통이 아니었던 그는 뛰어난 능력에 비해 지지 세력이 전무했다. 숱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많은 돈을 모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이 혈통이었기에, 가이우스는 바로 한 발 앞에 있는 최고 권력의 의자에 다가설 수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로마 시민들에 대한 책임감과 충성심이 있었지만, 원로원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때문에, 극적으로 최고 권력을 차지한 이후부터는 원로원이 정한 원칙들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인의 권력으로 원칙을 깨뜨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공화정의 의미는 퇴색된다. 이후 벌어진 사투르니누스의 의회 전복 시도와 술라가 집정관위에 오른 뒤 행했던 행동들 모두 가이우스 마리우스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의 반목은 훗날 공화정에 종말을 고하게 되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옥타비아누스)의 반목과 굉장히 닮아있다. 무엇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와의 관계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와의 관계와 무척 닮아있기도 하다. 비슷한 두 인물에 의해 로마 공화정은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아마, 콜린 매컬로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장대한 시리즈의 서막을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통해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역사소설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등장인물들이 정말 그 시대 사람처럼 생각하는가?' 이다. 물론 그건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 다른 계급을 대하는 태도, 옷차림과 습관, 말투나 리액션 등 개별적인 것들이 묘사하고 있는 그 시대에 맞는 것들이냐는 것인데, 의아함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원로원의 의원들을 통해 보여지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로마인들과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아우렐리아로 대표되는 새롭고 혁신적인 로마인들의 끝없는 대립을 바라보며, 우리 역사가 떠올랐고, 또 현재의 대한민국이 떠올랐다. 

고대사회에서는 시간은 둥근 순환 고리와 같아서 쇠퇴와 발전의 사이클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생각하는 순환적 시간감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반면 직선의 시간축 위에서 연속적으로 발전한다는 발상은 신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으로 인류의 시작과 끝이 명확한 기독교의 직선적 시간감각에 의해 태어났으며, 진보사상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17세기 말에 고대인과 근대인 논쟁이 펼쳐진 이래 여전한 논쟁거리인 모양이다.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p.183 참조)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를 읽으며,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며 발전과 쇠퇴를 거듭한다는 순환적 시간감각 쪽에 마음이 더 갔다. 이처럼 대를 이어 긴 역사를 서술하는 시리즈는 보다 넓고 긴 호흡으로 삶을 조명할 수 있게 해 주는데, 왕정으로 시작해 공화정을 거쳐 제정으로 마무리되고, 결국 거대한 서구 역사의 바탕이 되는 로마의 역사 뿐 아니라,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 드루수스의 한 인생만 보아도 정체기가 있을지언정 연속적으로 발전한다는 개념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대하 역사소설은 호불호가 명확한 장르이다.

기본적으로 서사가 사건이 아닌 인물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사건 전후의 논리적 인과관계가 한 눈에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대부분 분량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건들이 끊임없이 중첩되며 인물들이 쉼없이 꼬여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과서가 스포일러' 라는 말이 있듯 기록이 이미 사건의 결과를 알려줄 뿐 아니라,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끝' 과 같은 엔딩이 없다는 점이다. 그 어떤 찬란한 업적은 세운 인물이 주인공이라 해도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이며, 그 업적들 또한 먼지처럼 사라져 한줄의 글로 기억될 뿐이다. 박경리의 [토지] 나  이문열의 [변경] 그리고 콜린 매컬로의 이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처럼 몇대에 걸친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식과 땅, 국가를 위해 인생을 다 쏟지만 결말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하 역사소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특히 작가적 상상력의 극치와 편집증적인 사료조사를 통해 작가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완벽한 '그 시대적 사고'를 종이 위에 구현해 낸 콜린 매컬로에 경외를 보낸다. 특히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족적이 비교적 뚜렷한 인물들을 다루는 대담함에 찬사를 보낸다. 뿐만 아니라, 이미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충분히 알고 있으나, 너무너무 읽고 싶어지는 재미를 주고 있으니, 약간의 시샘이 섞인 거대한 존경과 애정을 보낸다. 

부디 7부까지 무사히 완간되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삶 전체를 즐길 수 있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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