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 3 - 완결
꼬마비 지음, 재수 그림 / 애니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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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네이버 웹툰을 통해 이 작품이 연재되었을 때 참신한 기획에 박수를 쳤더랬다.

언제나 날카로운 통찰로 사회를 풍자하는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인 꼬마비 다운 기획이었달까. 

'모 베러 블루스' 이후 오랫동안 장편 만화 쪽에서 보기 힘들었던 재수 작가의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좋았다. 요즘엔 페이스 북을 통한 활발한 드로잉 활동(?)이 눈에 띄지만, 역시 독자로서 긴 호흡의 만화를 보고 싶었다.

웹툰 '천적' 의 전반적인 감상은, 초반엔 신선한 기획에 참신함을 느껴서 재미있게 봤는데, 대결의 패턴이 반복되면서 뒤로 갈수록 단조로워지는 느낌이 강했다. 내용도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딱히 해결책이 없는, 상당히 괴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었기에 30화쯤 보다가 구독을 멈췄던 기억이 난다. 

단행본이 완결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보게 되었는데, 어, 책으로 보니 지루함이 크게 줄어들었다.

웹툰으로 읽었던 내용들이긴 했지만, 1권 내용들도 제법 새롭게 느껴졌다.

특히, 스크롤이라는 습관적인 행동으로 인해 눈여겨 보지 않았던 부분들이 보이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재미들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만화도 책으로 보는 것이 좋다. 한 페이지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한 컷에 오래 머물러도 되는.



일단 첫 장을 열면 귀여운 그림체의 고양이와 쥐 캐릭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름이 '갑순', '을동' 이다. 

특히 이 회색빛 오드아이 고양이는 내가 키우는 다얀이와 꼭 닮아서, 연재 초기에 애정을 갖고 지켜볼 수 있었던 계기이기도 했다. 




△웹툰상의 그림. 갑동이와 을순이. 애니북스판 책에서는 컷 배열 등과 폰트만 약간 달라졌다. 




갑동이와 을순이는 일종의 해설자와 아나운서로써 일상 생활 속에서 평범하게 마주친 인간 군상들의 '대결' 을 중계해주며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네이버 엔스토어를 통해 무료로 볼 수도 있는 첫 에피소드만 간략히 소개해 보자면, 어둑어둑한 저녁, 아파트 단지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나눠피며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고 떠드는 한 떼의 고교생들이 있다.

그들 앞에 70대의 아파트 단지의 경비아저씨가 한 분 등장한다. 

점유하고 있는 자들과 쫓아내야 하는 자. 

잘못하면 큰 사건으로 비화 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대결이 이제 막 시작되는 것이다. 

갑동이와 을순이는 이 사건을 중계하기 시작한다.

고교생들의 성향과 경비원의 성향, 경력, 나이등을 해설한다.

마치 축구 경기의 해설자처럼 팩트와 의견을 적절하게 섞어 맛깔나게 읊어준다.








 

개인적으로 '만화'는 그래픽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텍스트를 활용해서 서술하듯 상황 설명을 하는 방식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고 그다지 선호하지도 않는데(비슷한 이유로 영화에서 도입부에 화면을 꽉 메운 자막이 나오는 작품은 높이 평가할 수 없다), 이 작품에서만큼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야 했다.

텍스트를 활용한 '해설'은 이 작품이 선택한 짧은 옴니버스식 구성 안에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갑동이와 을순이가 쏟아내는 수많은 텍스트들을 통해 대결의 주인공들에게 충분한 설정을 부여함으로써 캐릭터의 깊이가 더해지고 설득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해설자들에게도 충분한 드라마를 부여함으로써 비록 형식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을지라도 작품 안에 함께 녹여내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드러난다. '재미' 를 주기 위해 고민한 노력이 드러난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해설자들의 이름, 갑순, 을동, 병구, 정아에서부터 캐릭터화 한 동물들, 그 조합까지 모두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특히 중요한 대결 뒤에는 카메라 오프 뒤의 스튜디오처럼 둘이 가공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씬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 부분들이야말로 작가가 직접적으로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때로는 작품 자체가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는 구성인데, 외려 해설자들의 드라마는 연속성이 있어서 색다른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갑순 + 을동



△갑순 + 병구




△병구 + 정아


    

결은 마치 토너먼트처럼 이어진다.

담배 피던 고등학생들을 몰아낸 아파트 단지의 경비 아저씨는 아파트 입주민과 부딪히게 되고, 그 아파트 입주민은 자신의 아내와, 또 그 아내는 아랫집에서 시끄럽다며 올라온 부부와, 게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과도 대결 구도를 펼치곤 한다.

이후 대결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구직자와 면접관, 회사원과 성매매 업소 여성, 월세 입주민과 집주인, 어른이 된 후 처지가 바뀐 고교 동창생들을 지나, 마트 캐셔와 손님이었던 이들이 백화점 직원과 손님으로 처지가 뒤 바뀌어 만나는 에피소드들까지 등장한다.

물론, 금수저와 초 금수저의 대결도 기다리고 있다. 



△챕터의 시작부에 이렇게 대진표가 등장하고,



△챕터의 마지막 장에는 승부 결과가 나타난다.


△허나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라, 재대결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른 환경, 상황 속에서.

영원한 갑과 영원한 을은 없듯이.



1,2권에서 비교적 우리 주위에서 보기 쉬운 일화들이 대결 구도로 펼쳐진다면, 3권은 조금 더 극단적인 상황의 군상들이 등장하는데, 작가의 주제 의식은 더욱 짙어지고, 직접적이 된다. 

무척 논쟁적인 주제들이 해설자와 아나운서의 노골적인 멘트를 통해 더더욱 논란을 부추기게 되고, 이러한 작가들의 의도는 독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어 네이버 연재 당시 댓글의 내용들이 꽤나 무시무시했던 기억이 난다. 

풍자와 해학이 가득하지만, 작가의 주제의식은 무척이나 날카롭다.

꼬마비 작가야 '살인자ㅇ 난감' 'S라인' '미결' 로 이어지는 죽음 3부작을 통해 냉철한 통찰을 보여준 전례가 있고, 재수 작가 역시 '모 배러 블루스' 를 통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희망에 대한 온도 차이일 것이다.

꼬마비 작가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따스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재수 작가의 그림은 작품을 지배하는 냉랭한 기류를 다소 완화시켜 준다. 꼬마비 작가의 죽음 3부작 역시 작화는 단순하고 귀여웠듯이, 불편한 내용을 다소 덜 불편하게 느끼게 하기 위한 장치로 작화를 무척 잘 이용한다는 인상이다.


웃는 얼굴로 명치를 쿡 쑤시는 살인마의 송곳처럼 두 작가가 그려내는 일상 생활 속의 대결은 치명적이기 짝이 없다.





△출판용어로 '도비라' 라고 부르는 챕터 나눔용 컷들은 이렇게 영화 포스터를 패러디 해서 쏠쏠한 즐거움을 준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 과 '혐오'는 '인권' 의 테두리를 가뿐히 넘어 '헬조선' 에 이르렀다.

어느 한 곳도 갑질과 혐오가 도사리지 않는 곳은 없고, 갑질과 혐오 안에서 인권은, 안전은 아무것도 아니다. 

작품의 말미에 작가는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분열로 인해 갑질과 혐오가 생겨났을까,

갑질로 인해 분열이 촉발되었을까?'


닭이 먼저든, 달걀이 먼저든, 분열과 갑질, 혐오는 모두 자웅동체처럼 붙어 있다. 

그들은 어디서든 아귀처럼 달려들어 '헬' 을 잉태한다.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가 공동체 의식을 거의 모두 잃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기회만 생기면 자신보다 약한 자를 찾아내 쌓아왔던 모든 분노를 토해낸다. 마치 자신은 그래도 된다는 듯이, 이 사회가 응당 그래왔다는 듯이, 마치 우리 사회는 반상이 뚜렷한 조선이라는 듯이. 마치 자신은 결코 강자 앞에 설 일이 없다는 듯이 독하게 풀어낸다.

상대가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이고, 아들이며 딸이라는 점은 개의치 않는다.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 나의 아들과 딸들이 다른 어딘가에서 똑같은 취급을 받으리라는 사실은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모니터 뒤에 숨어 인터넷 사회로 들어가면 더욱 끔찍한 세상이 펼쳐진다. 

조각조각 분열되어 다른 조각을 비웃고, 욕하고, 때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를 쏟아낸다. 

길고양이를 챙기는 사람들과, 길고양이를 챙기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있었을까?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과,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있었을까? 

장애인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비장애인들과, 심지어 장애인들마저 등쳐먹는 비장애인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있었을까? 

우리역사에 빨갱이들과, 꼴통보수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있었을까?  

남자를 혐오하는 여자들과,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있었을까? 

많다고 느끼는 것이 단순히 체감의 문제 - 인터넷 등을 통한 노출이 많기 때문에 단순히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10년 쯤 전에도 이 정도였나, 싶다.

잠깐이었지만, 공생과 상생을 노래했고, 화합과 평화를 노래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냥 내 착각이었을까?

지금은 어디서든 대결과 파괴만을 노래한다.


대화와 타협은 간데 없고, 시위와 물대포, 고소미가 난무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아직 문제를 인식하지 않고(못하고가 아님!) 있다는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위정자들만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닌, 진짜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깔아 뭉개도 되는, 다수는 소수를 무시해도 되는, 강자는 약자를 억압해도 되는, 배운 자가 덜 배운 자를 모독해도 되는, 권력 있는 자가 권력 없는 자의 모든 것을 빼앗아도 되는.

그래서, 최선을 다해 자기의 자식들을 위로, 더 위로 올리려고 안달하는 그런 

지옥과도 같은 사회가 이미 되었음을.

그러니까, 저기 까마득히 높은 곳에 앉아 그런 말들만 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 작품은 그러한 우리 사회의 특정한 한 부분을 깊은 통찰로 디테일하게 그려낸 책이다.

물론, 재미도 쏠쏠하게~! 

저~~~기 높으신 분들이 꼭 한번씩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아니다, 이 책 보고 진정한 갑질을 배우시려나.

하지만, 이 이야기도 결코 잊지 마시길.


'영원한 갑'은 없다는 사실.

당신들이 부린 갑질은 결국 언젠가 당신의 자식들이 똑같이 돌려 받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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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쇄를 찍자 4
마츠다 나오코 지음, 주원일 옮김 / 애니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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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마, 고등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교과목 선생님이었는지, 교생 선생님이었는지,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다. (이야기가 명확히 기억나는 것으로 보아 '여자' 교생 선생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대도, 나이도 상대적으로 더 비슷했을테고, 남고였던 우리 학교엔 여선생님조차 한 분도 안 계시던 시기였기에, 여자 교생 선생님의 말씀이셨을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 )
할튼, 그 때 쯤 들었다. 고2 땐가, 고3 땐가, 누구에겐가. 
칠판에 하얀 글씨가 기억나니까, 누군가는 했을거다. 

그 내용이 더 중요하니까, 일단 풀어보자면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이 생길거다' 

는 내용이었다. (아니면 그냥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둘 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내용은 이후로 수십년간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중이다. (수많은 윤색을 거치면서) 

'하고 싶은 일' 이 "희망" 이라면, '할 수 있는 일' 은 본인이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 혹은 "재능".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 이란 '지금 당장 선결해야 할 과제' 일 것이다.
이 세가지가 딱 맞아 떨어지기란, 차라리 로또에 당첨되기가 쉬워 보일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위대한 재능을 타고 났어도 운과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꽃피울 수 없다.
예전에 친한 형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다가 
"타케히코 이노우에가 50년 전 쯤 콩고에 태어났다고 생각해봐. 그가 그렇게 위대한 만화가가 될 수 있었겠어? " 
라고 말한 적 있다. 
베토벤, 모차르트가 조선에서 노예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면 그 재능이 발휘될 수 있었을까?
아마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만 하는 일' -새끼줄 꼬기 따위의- 만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 비하면 현대 일본과 한국에서 태어난 만화가 지망생들은 차라리 나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만큼 더 심한 경쟁이 도사리고 있긴 하지만, 확률적으로 '하고 싶은 일' 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이니까. 

한 명의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을 너무 늦지 않게 딱 찾아내고, 꾸준히 기량을 갈고 닦아 작품을 한 편 완성하기까지도 큰 운이 필요하지만, 그 작품이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되기까지는 더 큰 운이 필요하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이라도 정식으로 데뷔하여 작품을 발표하기까지는 역시 꽤나 험난한 과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량을 알아봐 주는 좋은 편집자를 만나서, 좋은 지면에 알맞게 실려야만 비로소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여, '작가'라는 명찰을 달 수 있다. 즉, 내 작품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줄 수 많은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세상에 독자가 없는 작가는 있을 수 없다. 작가의 작품은 독자와 만나야만 '작품' 으로서 첫 호흡을 떼고, 그 후에야 작품과 작가는 '작품'과 '작가' 로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 작품은 어디 사는 어떤 누군가의 취미활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독자가 없는 작가에게 작가라는 명찰은 자뻑에 지나지 않는다. 
태생부터가 '대중들을 위한' 것인 '만화'는 매체의 특성상 더더더더욱 그렇다.
 
[중쇄를 찍자!]는 바로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와 작품을 발굴해서, 지면으로 옮겨 독자들과 만나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출판사 만화 잡지 부서의 편집자들과, 만들어진 책을 서점으로 실어 나르는 영업부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의 갈등을 거친 사람들일 터다. 

△표지의 캐릭터들부터 유쾌상쾌발랄~

 
[중쇄를 찍자!]는 일본 출판계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최근의 우리나라는 넓은 웹 인프라를 통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서도 작품을 발표하고 온라인을 통해 데뷔까지 할 수 있긴 하지만, 출판물 시대 잡지 역할을 하는 대형 포털이나 만화 전문 사이트들이 엄연히 존재하므로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볼 수만은 없다.

[중쇄를 찍자!]는'만화왕국' 일본 안에서 한 편의 만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거쳐 독자들에게 전달되는지, 리얼하고 디테일하면서도 명랑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주인공 코코로는 전도유망한 유도선수로 진지하게 올림픽 국가대표를 노리던 체육대 학생이었지만, 불의의 부상으로 사랑하는 유도를 접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서두에 언급했던,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모두가 오롯하게 한 방향이었던 새파란 청춘이 모든 삶의 계획이 순식간에 어그러진 것이다.
코코로는 펑펑 울고 난 뒤에 잠시 방황의 시간을 거치고 그 모든 일들을 리셋 시킨 상태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펑펑 울던 시기 코코로를 지탱해 준 것은 만화였고 만화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진다. 
이제 한가지는 찾았다. 
하고 싶은 일.
하지만 평생 유도만 해 온 체육소녀가 하루 아침에 만화가가 될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만화 잡지를 출간하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은 출판사에 입사하기 위한 시험 공부를 시작 하는 것이다. 
여러 군데의 면접에서 낙방하면서, 코코로는 사회생활의 엄정함을 깨닫지만, 작품 안에 그러한 내용들이 구구절절 담겨 있지는 않다. 단지, 아래의 몇 컷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통찰은 참 디테일해서, 작가가 진짜 유도를 했나!!! 했더니, 운동엔 젬병이란다.ㅎㅎ
아마 취재의 결과물이었던 듯. 만화는 발로 그리는 것이라던 모 작가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명랑만화체의 가벼운 필치로 그려지지만,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딘 속도기는 하지만 일본도 온라인 매체의 출현으로 종이 잡지는 침체 일로를 걸어가고 있다. 
한 때는 '잡지왕국' 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나게 다양한 - 스포츠나 연예, 취미는 물론 우리가 쉽게 상상조차 하기 힘든 바리스타 전문 잡지라던가, 유치원 전문 잡지, 커텐이나 벽지, 사무용품은 물론 월간지까지!!! - 잡지들이 엄청나게 생산되어 불티나게 팔렸던 곳이 바로 일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시장이 여성잡지와 만화잡지였을 텐데, 이 잡지들도 점차 그 종 수가 눈에 띄게 줄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한 일본 출판계의 현실도 충분히 담아내고 있고, 생업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기성, 신인 작가, 작가 지망생들의 이야기도 만만찮게 실려 있는데, 아무래도 내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쉬이 웃어 넘길 수 만은 없었다. 




△우리는 콘티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네임' 이라고 부른다. 
나는 콘티를 거의 러프 데셍 수준으로 만들어서 보내는 편이다. 대사도 다 타이핑해서 알아보기 쉽게.... 신인의 자세랄까...ㄷㄷ 

  
무엇보다 [중쇄를 찍자!] 의 전체를 관통하는 명확한 주제는 오직 한가지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선. 그 선 위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매개로 하지만 작품을 독자에게 선보인다는 것은 결국, 사람(작가)과 사람(독자)을 연결시켜 준다는 의미이다.
소설과 만화를 불문하고, 작품 속 주제는 대개 작가의 말과 동일시된다. 예를들어, 폭력적인 만화를 그리는 작가는 폭력적인 성향이 강할 것이라고 여긴다거나, 남녀 차별적인 에피소드를 다룬 작가가 여성혐오의 시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등 말이다. 
작가는 때론 비폭력을 주장하기 위해 폭력을 그리고, 남녀 차별을 반대하기 위해 남녀 차별을 그리기도 하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작중 인물의 모든 대사들이 작가의 사상에서 나온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특히 댓글을 통해 독자와 1:1 소통이 가능한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도드라져서, 때로는 작가가 작품이 아닌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해명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렇게 작가와 독자가 1:1로 맞닥뜨리다 보니 작가들은 종종 독자와의 거리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가 온라인을 통해 공개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독자와의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선' 은 존재한다.
우리는 이것을 '인프라' 라고 부르고, 역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간에 꼼꼼하게 메여진 선들이다. 
전기를 발명한 사람이나 인터넷, 월드와이드 웹을 개발한 과거의 사람들까지 운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현재 작품이 실려 있는 포털 사이트의 서버를 관리하는 직원부터 독자의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조립하여 파는 사람은 물론, 작가를 픽업하고 원고를 전달받는 웹 사이트의 담당 편집기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작가는 쉽게 자만한다. 
오로지 나의 재능만으로, 내 작품이 뛰어나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막말로 어느 순간 EMP 라도 터져서 모든 전자장비가 마비된다면, 거리에 나가 펜과 종이로 사람들에게 만화를 팔아먹을 수 있는 웹툰 작가가 몇이나 될까? 
거리의 시민들 앞에 만화를 들이밀고, "보기 싫으면 보지 마시던지 ㅎㅎ "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혼밥' '혼술' 에 익숙한 나에게도 새삼스레 큰 울림을 주었다.
뭐든 혼자 다 하고 있었고, 혼자면 다 좋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수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받아 살고 있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자기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들이 대부분 남을 위한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열심히 책 읽고 리뷰 쓰는 행위만 해도 그런데, 나는 언제나 리뷰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책 읽은 감상을 잊지 않고, 나중에 돌이켜 보려고 쓰는거였다.
하지만, 네이버 블로그 사업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중쇄를 찍자!]의 원 저작자 쇼가쿠칸과 마츠다 나오코, 한국 저작권자 애니북스와 애니북스 마케터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 어쩌면 이 리뷰를 읽고 책을 사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고.
혼자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정말로 새삼스럽지만, 책을 읽다 보니 그런 메시지들이 와닿았다. 
다른 이의 작품을 팔기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노력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러고 보면 당신도 그렇고 있고, 거기 당신도 그러고 있는데.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만들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팔고, 다른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청춘을 바치고 있었지. 
우리 모두는, 비록 어쩔 수 없을지라도,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거였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간만에 보는 참 착한 만화였다.
한없이 밝은 코코로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그래, 누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누구나 '하고 싶은 일' 과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갈등한다.

모든걸 충족시킬 수는 없으니, 하나씩, 포기해 가는 것이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잡을지는 오롯하게 자기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당신과 나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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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아의 騎士 15 - 완결
니헤이 츠토무 지음, 김동욱 옮김 / 애니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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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아의 기사] 는 '파종선' 시도니아에서 시작된다. 

먼 미래, 외우주로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인류는 '가우나' 라는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게 된다.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지만, 도무지 통하지가 않아 방관하며 지내던 도중 가우나가 급, 지구를 침공하게 된다.

어떠한 정보도 없었던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멸망당하고 수백기의 파종선만이 탈출에 성공한다. 

그로부터 수백년. 파종선 시도니아는 우주를 항해하며 정착할 행성을 찾아 떠돌고 있고, 가우나가 그 뒤를 쫓는다.

대다수의 파종선들은 이미 가우나에 당한 듯 하고, 어쩌면 시도니아만이 인류를 태운 최후의 파종선일지도 모른다.

시도니아에는 대 가우나 무기인 '카비자시' 가 있었고, 역시 가우나와 대치하기 위한 인간형 공격기 '모리토' 를 탑재하고 있었다.



주 소재로 쓰인 플롯은 이제는 레퍼런스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도 흔하고 단순하다.

어떤 디자인의 우주선에 어떤 사회와 시스템이 건설되어 있으며, 뒤쫓는 크리쳐들의 디자인과 공격 방식만이 차별점을 느끼게 해 줄 정도로 자주 쓰인 소재이다. 

사실, 첫인상은 '마크로스'와 '배틀스타 갈락티카' 가 엄청 떠오르긴 했지만, 바로 위에 언급한대로 시도니아의 디자인과 내부의 사회 시스템, 가우나라는 외계인의 형태와 전투방식이 굉장히 흥미로웠기에 집중력을 갖고 쭉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   



20대 중반에 타카하시 츠토무의 [지뢰진] 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대충 죽죽 그은 듯 한 선들 속에서 꿈틀거리는 형태들, 흑과 백을 완벽하게 활용하는 감각. 

그 때는 '스타일리시' 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도 잘 몰랐지만, 무척이나 유려하면서도, 견딜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한 위화감은 아마 음울한 이야기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심지어 그 작품은 타카하시 츠토무가 27~8세 경에 연재했던 작품이었으니, 그 필력과 완성된 스타일(실제로는 그 작품 도중에 완성되지만)이 무척이나 놀라웠고, 그 재능이 부러웠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만화계에 뛰어든답시고 학습만화판에서 컬러링을 하고 있던 나에게는 더더욱. 





△타카하시 츠토무의 [지뢰진] 중中



얼마 후에 [바이오메가] 이라는 만화를 접하게 됐다.

책을 펴든 순간, 타카하시 츠토무가 연상되었더랬다. 가독성이 떨어질 정도로 덧입혀진 펜선들과 툭툭 던지듯 그러진 먹선들. 

어딘가 조잡해 보이면서도, 타카하시 츠토무에게 느낄 수 없었던 아득할 정도의 광활한 공간감과 편집증적일 정도로 꼼꼼하게 메워진 컷들이 가득 들어왔다.  

작가 소개를 통해 타카하시 츠토무의 문하에 있었던 니헤이 츠토무라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고, '어쩐지~' 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니헤이 츠토무의 [바이오메가]에는 타카하시 츠토무의 색채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 달랐던 점은 독자에 대한 친절함이었다.

'가독성' 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하기에는 애매했는데, 작품에 대한 설정, 심지어 캐릭터 메이킹에 꽤나 중요한 스토리들마저 충분히 표현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급급한 느낌이었다.

타카하시 츠토무의 작품들이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과감한 명암대비를 통해 캐릭터와 이야기를 부각시켰다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은 비주얼에 초점을 맞춘 느낌이 강했다. 넘쳐나는 상상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니헤이 츠토무의 먹과 선은 살아서 꿈틀거렸지만, 정작 살아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기가 힘들었다. 

후에 찾아본 전작 [브레임!]은 조금 더 난해했다. 

그야말로 한 SF오타쿠가 다른 SF오타쿠들에게 선사하는 수수깨끼 같은 느낌이었다.

답답해서 구글링을 해봤더니 역시 훌륭한 덕님들께서 친절하게 세계관과 직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신 포스팅들이 많이 보였다. 

(게다가 [블레임!]은 확실히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낸 세계관이어서인지 스핀오프랄 수 있는 작품들이 꽤 많았다.)

때문에, 처음 니헤이 츠토무의 "시도니아의 기사" 를 펼쳤을 땐, 그야말로 깜놀!!!! 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걸까? 

[블레임!]과 [바이오메가] 이후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구글에 떠다니는 이미지들을 통해 작화의 변천사를 구경할 수 있었다.




(http://www.dogdrip.net/52279705)


보다 깔끔하게 정리된 펜선과 극도로 자제한 먹칠이 굉장히 낯설었다.
미소녀풍의 캐릭터들도 그랬고.(하지만 디자인들이 비슷해서 가독성은 굉장히 안좋았다 ㅠㅠ)
'시도니아'를 비롯한 니헤이 츠토무만의 거대한 건물들도 실컷 감상할 수 있었고, 그의 시그니쳐라 할 수 있는 대량의 파이프 묶음들도 여전했다. 
이야기의 구조는 직선화 해서 단순화시키고, 메카닉과 가우나라는 크리쳐, 시도니아의 거대함과 도시 내부의 표현에 집중했다. 
먹과 선으로 꼼꼼하게 채워넣던 부분들은 과감하게 여백으로 남겼다. 
비로소 타카하시 츠토무의 그림자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특별했던 액션씬도 하얀 여백 안에서 더욱 가독성이 높아지고 화려해졌다.
단순화시킨 스토리 라인과 인물 구도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없었을 설정 소개를 위한 보너스와도 같은 컷들도 충분하고 특히 밝고 경쾌한 개그컷이나 제법 야한 농담들도 자주 등장해서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 그래도 1~4권 정도 까지는 이렇게 먹을 아낌없이 쓰는 초창기 니헤이 츠토무의 색이 역력하다.(1권중中)
스스로 '파이프를 그리는 것이 좋다! 배경을 그리는 것이 좋다! 어시스턴트에게 인물을 그려달라고 하고 싶다!' 고 했던 니헤이 츠토무의 아이덴티티도 명확히 엿볼 수 있다. 









△중후반을 지나면 여백이 많아지고 먹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다.(11권 중中) 








▲ 이러한 압도적인 대비가 니헤이 츠토무의 장기이다(11권 중中).

 
예외도 있을 수 있고, 주관적인 생각이기도 하지만, 만화가에게 먹과 여백이란 한 단계 높은 작가로의 진화를 은유하기도 한다. 
하얀 여백 위에서 작가의 데셍력과 선을 사용하는 능력은 더욱 도드라질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신인 만화가들은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스크린 톤 기술을 사용한 화려한 기교로 부족한 데셍력을 감추고 부족한 선을 덮는다. 

타카하시와 니헤이 츠토무는 데뷔 초기부터 정확한 데셍을 선보였던 작가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들은 매우 감각적인 앵글과 구성을 뽑아내는 작가들이었다.
오히려 더 자신감 넘치게 여백 위에 선과 먹을 과감하게 흩뿌렸고, 감각적인 연출력으로 압도적인 컷들을 뽑아냈다.

[시도니아의 기사]의 앞권에서는 분명 그러한 경향이 드러난다. 
하지만, 니헤이 츠토무는 과감하게 붓을 버렸다. 심지어 펜선도 더욱 가늘게 쓰기 시작했다. 
'내가 먹을 이렇게 잘 써. 내가 선을 이렇게 잘 써' 
라고 하듯 과감하게 뿌리던 먹과 선을 한 순간에 모두 버려버린 것이다.
먹 없이 약간의 톤만으로 하얀 여백을 꽉 찬 면으로 바꾸어내는 능력을 깨우친 것이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순간 데셍력이 뒷받침 되기 시작했고, 작가 스스로도 그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 판도 1기를 완주했는데, 상당히 재미있었다.
모리토들의 '장위' 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여백과 먹을 아낌없이 사용한 시도니아의 전경을 컬러로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애니 속 시도니아의 전경. 컬러만의 맛이 충분하다.
원작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씬들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했다. 


'테드 창' 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라는 단편이 있다.
하드 SF 장르에서도 걸작으로 인정받는 이 작품은 인류가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외계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우리와 생김새는 커녕 구조 자체가 다르다. 접시모양의 머리에 촉수같은 다리들을 가지고 있고, 눈도 여러개.
앞과 뒤라는 개념도 없고, 앉고 선다는 개념도 없다. 심지어 입도 없고, 먹기는 하는건지 알 수가 없다. 
문자의 개념은 있으나 도무지 어떻게 쓰고 읽는지 알 수가 없다.
서로 통하는 개념이 없으니, 앞으로 이 외계인들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것인가.
일단 적대적인지부터 알 수가 없다.
이를 위해 유능한 언어학자와 공학자들이 팀을 이뤄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는 내용이다.
언어학자는 외계인들의 문자로 보이는 기호를 해석하면서, 공학자는 절대 불변이라 여겨지는 물리 법칙들을 제시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이 유려하게 펼쳐진다.
굉장히 지적이고 재미있는 소설인데, [시도니아의 기사] 를 보는 내내, 특히 '가우나' 를 보는 내내 이 작품이 많이 떠올랐다.

또 하나, 너무나 유명한 작품인 아서C.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이라는 작품도 떠올랐다.
테드 창이 최근 세대의 기수라면, 아서 C. 클라크는 이미 클래식의 반열에 어른 거장 중의 거장이다.
[유년기의 끝] 은 인류의 진화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담은 작품이다.
요새 쉽게 사용되는 '특이점' 에 대한 작품이기도 한데, 과연 인류에게 특이점이 찾아온다면, 어떤 방향으로, 어떤 형태로 구현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과 통찰이 드러난 작품이었다.
(참고로 인간에게 '특이점' 이란 아주아주 간단히 말해서 인류가 진화의 정점에 올라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는 시점을 이야기한다. '스티븐 벡스터' 라는 작가는 [타임십] 이라는 작품을 통해 인류가 어떠한 형태도 없는 거대한 빛의 네트워크로 존재하는 이야기를 그려내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특이점에 도달한 인류는 육신도 없고 독자성도 없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무형태의 존재로 그려진다. 배명훈 작가는 [신의 궤도]라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데이터화하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인간이 특이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육체를 버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메타휴먼' 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이보그'라고 불리우는 육체와 기계의 결합을 그 첫 단계로 묘사하기도 한다.)

[시도니아의 기사] 에 등장하는 '가우나' 는 도무지 인간과 소통할 수 없는 생명체였다. 
몇 권 에선가, 등장인물들 중 누군가가 "가우나가 외로워서 그런건 아닐까" 라고 되뇌이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가우나는 에나를 통해 인간을 침식하고, 인간을 복제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공격적이지만, 어쩌면 에나의 침식이란 가우나의 의사 소통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다. 

결국 [시도니아의 기사]는 엔딩을 통해 [유년기의 끝]이 보여주었던 인류가 특이점으로 가는 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년기의 끝] 에서도 인류는 선의를 가진 외계인을 통해 진화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시도니아의 기사]의 가우나와 시도니아의 인류는 마치 진화의 정점을 선점하기 위한 대결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서로가 각자의 진화를 돕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품 안에서 이미 시도니아의 주민들은 신체 개조를 통해 메타 휴먼의 형태를 띄고 있긴 하지만, 개조를 거치지 않은 나가테와 사실상 인간과 가우나의 융합체라고 할 수 있는 츠무기라는 존재가 바로 그 증거일터.
특이점까지는 도달하지 않지만, 특이점으로 향하는 과정을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완결이 되어 1권부터 천천히 정주행을 했다. 
역시 나의 진화(?)를 위해 큰 도움을 준 친구 덕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다. 
문득, 이런 매니악한 만화가 나올 수 있는 일본의 인프라가 부럽기도 하고, 역시 이런 매니악한 작품을 정발할 생각을 한 애니북스의 용기가 대단하기도 하다. 

부디 많은 팬들에게 읽혀 만화의 즐거움과 더불어 SF의 즐거움을 널리널리 퍼뜨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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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로마사 - 7개 테마로 읽는 로마사 1200년
모토무라 료지 지음, 이민희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대제국 로마의 번영과 몰락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마치 혈관처럼 이탈리아의 주요 지역들로 단단하고 곧게 뻗어있는 도로들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정비된 도로는 아군이 진군하기도 쉽지만, 그만큼 적군에게 침략받기도 쉽다.

아마 로마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로마의 거대한 경기장이나 목욕탕만큼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뻗어있는 단단한 도로 정도는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군대의 진군 뿐 아니라 물자의 수송도, 일반 시민들의 이동에도 큰 이점을 주었던 도로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로마의 자신감과 자존심의 상징이었으며, 결국 로마 중흥의 증거가 되었다. 그 중 '아피아 가도'는 지금도 그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오랜 역사 유적들 중 하나이다.


[처음 읽는 로마사]는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 오브 로마' 에 깊이 빠져 있는데, 함께 보기에 더 없이 좋았다.(마침 3부인 '포르투나의 선택' 의 사전 모니터 선물로 받은 책이기도 했고!)

일던에 교유서가에서 함께 나온 '첫단추 시리즈' - [로마 공화정] 도 읽었는데, [처음 읽는 로마사]와 성향과 집필 기조가 다소 달라서 느낌이 신선했다. 특히 인물들에 대한 평이 다른 부분이 툭툭 튀어나와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게다가 '마스터 오브 로마' 시리즈 까지 함께 읽다보면 한 사건이나 인물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들을 볼 수 있어 읽는 맛이 쏠쏠하다. 특히 '마스터 오브 로마' 의 경우엔 소설이라는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세밀하고 디테일한 고증과 묘사가 더없이 훌륭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후대에 어떻게 전해지고, 각기 다른 연구가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마스터 오브 로마' 가 실제 역사라면, 그를 바탕으로 '로마 공화정' 은 통사로서 흐름을 읽는 재미, [처음 읽는 로마사] 는 좀 더 최근 - 변화된 시각을 발견하는 재미랄까? 예를들어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의 1부와 2부인 [로마의 일인자] 와 [풀잎관] 의 주인공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에 대한 인물평도, 비록 한두줄에 불과하긴 하지만 두 책에서 다루는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 

 


[처음 읽는 로마사]는 일단 굉장히 쉽게, 그야말로 술~술 읽힌다.

마치 강연록 같은 느낌인데, 다양한 방법의 강의 기술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구어체, 특히 경어체로 번역되어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은데, 때문에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설명이 보다 쉽고 부드럽게 읽혔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로마사 전체를 '기, 승, 전, 결' 네 단락으로 나누었다.

흔히 알려진 왕정 - 공화정 - 제정의 구분도 포함되어 있지만, 로마의 태동과 중흥, 멸망을 이야기의 구조로 나누어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이 보다 쉽게 읽힌다.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은 역시 '결'. 로마 제국의 명멸을 단숨에 표현해낸 마지막 부분이다.

로마의 멸망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무너져 가는 로마의 권력을 재정비 하기 위해 로마의 일인자들이 수많은 노력을 했고, 결국 역부족으로 동서로 갈라졌다가 그냥 그렇게 희미하게 옅어져갔다. 저자는 이러한 로마의 멸망을 단순히 한 제국의 멸망이라기보다 '변화' 에 가까운 해석을 내놓는다.

특히 '황제' 라는 개념이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과 상당히 달랐던 로마 제정기에 대해 많은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흔히 우리는 공화정이 제정보다 진보한 정치 형태라고 여기는데, 오히려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변화했다. 개인적인 지식으로는 로마의 정치형태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비롯된 초기 공화정을 계승, 발전해가다가 지배지의 양적인 팽창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제정으로 다소 퇴보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고 난 뒤 약간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치의 행태와 시민의식의 진보, 퇴보는 크게 관계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아직 좀 더 많은 책들을 읽어보고, 인문. 사회. 역사. 철학 등을 폭넓게 접해봐야 하겠지만, 역시 한 두 사람의 책과 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네로에 대한 해석과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해석에 대한 다른 시각도 참 흥미로웠다. 



역사서는 저자의 사관이 깊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대중 역사서, 게다가 사료가 풍부해 숱한 사가들이 수백 수천번 해석과 재해석을 반복했던 시기를 다룬 데다가 한 권으로 압축한 다이제스트의 형태라면 더더욱 그렇다.

독자들은 저자의 기준에 따라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이 추려지고, 통일된 사관만을 멍하니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라는 장르 자체를 접할 때 독자들은 비판적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긴 하지만, 여러 의견을 폭넓게 수용한다는 자세를 가지는 것도 좋다. 비판이란 충분히 다양한 의견과 사고방식들을 습득한 후에야 비로소 올바로 작동하는 것이다. 지나치에 '나만 옳다'는 자세는 자칫 편향된 사관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편향된 역사관의 결과물을 우리는 2015년 정부의 몇몇 뻘짓을 통해 보았지 않은가? 

이 책은 시종일관 그러한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반복해서 저자의 사견임을 주지시키고, 통설과 다른 부분은 자신이 다르게 생각한 이유를 간략하게라도 꼭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의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정]을 함께 읽길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도 아직 '로마 제정'은 못 읽었는데, 기회되면 꼭 읽어보고 싶다.) 첫단추 시리즈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통설들을 소개해주는 개론서 시리즈인데, 함께 읽으면 저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인물이나 사건들을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던 [마스터 오브 로마] 역시 같은 이유로 함께 읽기를 다시 한 번 추천한다. 일례로, 그 유명한 공화정 말기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제정 초기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뉘앙스가 조금씩 다 다르다. 특히, [로마인 이야기],[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물론, BBC의 드라마 [ROME] 과의 차별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역사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 인물들 또한 그렇다. 심지어 우리는 함께 살았던 부모님의 역사에 관해서도 형제, 자매들, 친척들간에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우리 정부는 몇몇 인물들을 획일화된 잣대로 신격화 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심지어 학생들의 역사관마저 획일화 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래, 때때로 통일된 방향성을 보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파시즘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혐오의 시발이 되기도 한다.


1+1이 항상 2인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1+1이 때로는 3이 되기도 하고, 100이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제도권 교육 아래에서 가장 기초적인 인문학은 바로 역사일텐데. 

이런 쉽고 재미있는 대중 역사서들이 많이많이 나오기를, 그리고 그렇게 많이 읽고, 많이 비교하면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하며, 건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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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아해들
김종광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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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문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요즘이다.

삶이 잘 풀리지 않으니, 타인들의 이야기도 좀처럼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9편의 단편이 모여있는 김종광 작가의 작품집 [처음의 아해들].

무심코 첫 작품 [세족식] 을 읽고, 어찌나 키들거렸던지. 생생한 인물들과 쫙쫙 달라붙는 대사들, 날카로운 사회 풍자와 해학 가득한 감칠맛 나는 문장들이 정말이지 '끝내줬다.' 


이 작품집에는 [세족식]을 시작으로 [당장,나가버려!],[처음의 아해들],[옷은 어디에?],[내시경],[시골사람 중국여행], [면민바둑대회], [우라질 양귀비],[뻥집이 사라졌네] 까지 총 9편의 작품들이 모여있다.

초반의 세 작품, [세족식],[당장, 나가버려!],[처음의 아해들]은 교육이라는 소재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각각 학원 선생님, 대학 교수, 옛 제자들을 만난 정년퇴직을 앞둔 고등학교 선생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동료, 제자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학원 선생님들간의 관계와 그 세계가 갖고 있는 생리, 대학 교수와 대학생들간의 묘한 관계, 이제 정년 퇴직을 하는 노선생의 회한과 추억이 담긴 첫 제자들과의 거나한 술자리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능란하게 그려진다.   



[세족식] 은 자신이 몇년간 열심히 다녔던 입시 학원에 강사로 취직하게 된 대학 휴학생 강쇠의 이야기이다. 학원 수강생들을 보충하기 위해 세족식을 열려고 하는 학원 원장과 동료 선생님들의 다양한 생각들의 강쇠의 과거 편린들과 함께 조각되어 있다. 현재 대학생들의 고난스러운 삶이 가감없이 등장하고,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가 아니라 지방 중소도시의 이미지가 묘한 정겨움을 준다. 풍자와 해학은 에로틱을 동반하기 마련, 적절하게 활용된 묘한 에로티시즘 역시 달콤매콤한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한다. 평범한 이야기도 특별하게 만드는 필력이 작품집의 서두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학교 선생님과 학원 선생님은 그 성격이 다를 수 밖에 없다. 특히 입시학원은 '대학 입학' 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서비스업과 같다. 물론 학교 교육 역시 서비스이지만, 지향하는 목표는 다르다. (최근의 학교 교육이 학원과 뭐가 다르냐는 비난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취지 자체는 다르니까.) 당연히 학교 선생님간의 동료 의식과 학원 선생님간의 동료 의식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 학원은 보다 회사의 사원간 관계가 비슷할 것이다. 

특히 주인공 강쇠와 학원 원장 혈녀와의 관계가 재미있다. 고교시절, 혈녀에게 매맞아가며 배우던 학생이 장성해서 상사와 부하로 다시 만났으니, 제자가 부하가 된 것이다. 학생들에게 세족식을 해주자는 혈녀의 기상천외한 발상과, 학원의 주 목적인 입시와 세족식의 상관관계를 도무지 이해하지도, 인정할 수도 없는 강쇠의 의식의 변화가 다른 선생님들과의 회의 석상을 통해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정말 감칠맛나고 찰졌다. 읽는 맛이 참 좋은 작품이었다.


[세족식]은 학원이긴 하지만, 장성한 제자와 재회한다는 점에서 [처음의 아해들]과 맞닿아있다.

[처음의 아해들]은 추억의 냄새가 가득할 것 같은 오래된 술집에서 시작된다. 수십년간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질긴 인연을 이어온 첫 제자들과 노은사의 만남이라는 소재 자체가 참으로 정겨웠다. 서울 같은 대도시라면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지방 중소도시라면 가능할 것도 같다. 그 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라면 아마 몇몇은 끈질기게 그 도시에 남아 삶을 이어갈테니 말이다. 젊은 시절 부임해서 정년 퇴직 할 때 까지 한 고등학교에 재직한 선생님이라면 평생 몇차례라도 부딪히지 않을 요량은 없을 것이다. 

그와 함께 교원노조의 설립 역사와 불합리한 우리 사회의 일면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짧은 분량 안에서도 캐릭터들에게 뚜렷한 개성을 부여하며 단 몇 문장만으로 풍성한 내러티브를 선보이는 작가의 역량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옷은 어디에?]는 동네 세탁소에 맡긴 옷이 없어진 부부의 일화가 코믹하게 펼쳐진다. 가난한 작가인 판돈은 모처럼 외출할 일이 생겨 아내인 쾌순에게 세탁소에 맡긴 면바지를 찾아오라고 시킨다. 판돈에게는 외출용 면바지가 단 두 벌 있었는데, 마침 세탁소에 맡긴 참이었다. 하지만, 쾌순은 판돈에게 빈손으로 돌아오고, 세탁소가 처한 딱한 상황을 들려준다. 동네 작은 세탁소와 거래를 하는 읍내 거대 세탁소간에 문제가 생겨서, 작은 세탁소의 옷들이 몽땅 읍내 거대 세탁소에 압류당했던 것이다. 

쾌순과 판돈을 통해 이 세탁소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편의 블랙 코미디처럼 펼쳐친다. 읽는 내내 키들거림을 멈출 수 없을 정도였다. 역시 이번에도 판돈과 쾌순이라는 캐릭터의 개성이 면밀하게 드러나는 대사들의 맛이 일품이었다. 

특히 작품 중반에 쾌순이 남편 판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한 문단에 가까울 정도의 장문이 있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다.

기업(세탁소)간의 분쟁을 통해 곤란을 겪게되는 소시민적인 일상이 스릴러와 같은 장르의 문법으로 펼쳐지는데, 이토록 별 것 아닌 소재를 대단한 것처럼 풀어내는 기술이 돋보였다. 사실 이 작품은 소재와 문장은 물론 인물과 대사까지 허세와 과장이 가득한데, 그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내시경] 와 [시골사람 중국여행] 은 구조, 형식적인 해학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내시경]은 모두 '~했네.'체로 끝나는데, 단지 그것만으로도 아주 평범한 이야기가 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시골사람 중국여행]은 중국여행을 간 시골의 한 오랜 동창회 멤버들을 인터뷰한다는 방식의 논픽션 형식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동창생들이 중국 여행을 하게 된 계기와 학창시절 이야기, 몇 안남은 동창회 멤버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각자의 시각에서 풀어내는데, 인물들의 개성이 아주 잘 드러난다. 역시, 소시민적인 인간군상을 풀어내는데 탁월한 감성과 시각을 즐길 수 있었다. 새삼, 지난 뒤에 돌이켜보면 인생은 꽤나 길구나, 라는 느낌과 함께 별 탈 없이 살아간다면 나에게도 아직 꽤 많은 시간이 남아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면민바둑대회]는 이 작품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한번 다 읽은 뒤, 바로 다시 또 읽었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고희를 다섯해 남긴 이발사 이상원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잔치를 열어보고 싶었다. 

승부를 가리는 '대회' 만의 긴장감이 잘 살아있었고, 역시나 인물들의 개성이 듬뿍 묻어나는 감칠맛 나는 대사도 몰입감을 높여주었다. 작은 지방 소도시의 정겨운 분위기와 사람 사는 맛이 구수하게 어우러져 무척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몇 번 이나 찬사를 되풀이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인간 군상을 그려내는 저자의 감각은 무척이나 탁월하다. 게다가 한 두 문장만으로 한 인물의 과거와 성격을 표현해내는 기술이 탁월해서 짧은 이야기들임에도 무척이나 풍성한 느낌을 준다.


[빵집이 사라졌네]는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먹고사니즘' 의 정점을 찍는 작품이자, 그 상징과도 같은 우리네 어머니를 다루고 있다. 일절 가계에 신경쓰지 않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남편과 함께 사는 기분씨는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큰아들에게 용돈을 보태주기 위해 읍내 제과점에 취직하게 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장을 가진 기분씨는 창문닦이와 청소등 잡일부터 시작해 손님 응대까지 무려 십일년 간이나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나갔다. 제과점 사장과 기분씨의 사이가 비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제과점 사장이 기분씨를 해고한 뒤  퇴직금을 받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야말로 우리 어머니들이 한번은 겪었을 먹먹한 이야기가 [내시경] 처럼 '~했네' 체로, 마치 누군가에게 전해듣는 듯 한 문체로 펼쳐지느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어머니와 자식과의 관계, 사장과 노동자의 관계 등 우리 사회 전반의 "갑을 관계" 들이 순차적으로 그려진다. 불과 한 두 문장으로 수 년의 세월이 쑥쑥 지나가 버리곤 하는데, 이러한 시도 역시 작품의 주제와 맞물려 관조적이면서도 허망한 감정을 무척 잘 전달하고 있다. 


한 두 작품만 상세한 리뷰를 해 보려고 했는데, 기억을 헤집으며 책을 다시 펼쳐보니 모든 작품을 한마디씩은 꼭 달고 싶었다.

어차피 리뷰는 타인보다는 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문장을 추가해갔다. 


작품집 말미에 문학평론가의 상당한 분량의 비평이 실려있는데, 제목이 "절망의 강바닥에서 퍼올린, 이 싱싱한 낙관들" 이었다.

멋진 제목에 감동하여, 자칫하다가는 내 감상도 흐트러질까봐 비평은 읽지 않았지만,(다 적었으니 이제 읽어봐야지.) 작품 전반에 흐르는 미묘한 낙관이 큰 울림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런 낙관은 작품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해학과 절묘한 웃음 포인트 덕이었겠지만,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넉넉하고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매우 날카롭고 냉정하게 절망적인 현재를 그려내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꿈도, 희망도, 사랑도 풍성히 흘러 넘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다.  


정말로 절망적인 현실을 살고 있다.

나 역시 그렇다. 

10년 뒤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칠흙같은 어두움에 가슴이 무너져서,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 하는 것 자체를 그만두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말도 공허할 뿐이다. 

누군들 안 그럴까?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는 삶인데. 

어차피 종착지는 죽음이다. 절멸이다. 이 땅 위에서는 다시는 소생할 수 없는 영원한 어둠이 예정되어 있는 삶이다. 때문에, 현실은 언제나 절망적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아니면 뭔가를 믿어 어떻게든 부정하던지.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이라면, 절망 안에서 버텨내는 법을 익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삶이란, 버티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었고, 끊임없이 어깃장을 놓는 존재라고 또 누군가가 노래했었다.

결국, 그렇다면, 어떻게 버텨낼 것인가? 

그 방법을 찾기 위헤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신문을 보는 것일테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어제를 버티어낸 결과가 오늘 아니던가?? 

삶이란 그저 기억을 켜켜히 쌓아내는 일에 불과하다. 별 것 아니다. 절망 역시 그러하다. 

'1리터의 눈물'의 카토 아야가 말했듯이, 그저, 오늘을 살아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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