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정민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노벨상 작가 이전에 페미니스트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것도 조금 생소한 "비관적 페미니즘" 의 신봉자이다.
'이정도는 남성 혐오 수준 아니야?' 싶을 정도로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엄청나게 핍박받고, 고통받는다. 남성의 손길을 역겨워하고, 성행위를 고통스러워하며, 아들을, 아이를 혐오한다. 비록 내가 읽은 그녀의 작품은  이 작품까지 총 세권에 지나지 않지만, 작품 속 여성들의 삶은 남자와 관련된 그 어떤 것으로도 위안받지 못한다.
 [욕망] 은 그러한 그녀의 작품들 중 가장 '부유한' 여성이 등장한다. 전쟁이나 가뭄, 기아와도 관계가 없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편, 좋은 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내키면 비싼 옷을 살수도 있고, 동네 여자들은 그런 그녀를 부러워하며, 가끔 그런 시선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야말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이 작품은 매 챕터마다 그녀가 남편과 나누는 성행위 장면이 묘사되는데, 엄청나게 직관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 사용된다. 포르노를 연상시킬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려지는데, 이것은 사랑으로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권력에 의한 착취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제지회사 공장장인 남편은 안락한 침대와 따뜻한 음식, 화려한 옷을 제공하고, 그녀는 그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굽힌다는 등의 묘사이다. 권력관계에 의한 착취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겐 어떠한 권한도, 선택의 폭도 없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이 원하는대로 몸을 대주고, 아이를 낳아주고, 음식을 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살고 있는 사회의 법과도 같다. 이윽고 그녀는 아들조차 혐오하게 된다. 아들 역시 남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영악하게 남자로 자라나고 있으며, 그녀가 낳았지만, 낳는 순간부터 그녀보다 사회적 우위에 있는 존재였다. 그녀의 남편처럼 아들도 그녀를 착취하고 있다.
이러한 절망적인 서사를 통해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이 사회에 뿌리깊은 남성 중심의 구조, 여성 스스로는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공고한 시스템의 부조리를 강변한다.
 [욕망] 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감정이 전혀 없는 욕망의 덩어리로 그려진다. 패거리를 짓고 회사를 통해 누리는 사회적 지위에 탐닉하고, 그로 인해 따먹는 달콤한 열매들은 자신의 집에서도 고스란히 연결되어야 한다. 그녀는 공장장인 남편이 회사에서 부리는 직원들과 다를바 없다. 그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고, 그가 원하는대로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녀는 남편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와 그것으로 벌어들이는 돈의 그늘 안에서 명줄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의 허벅지는 공장장, 그 끔찍한 승객만을 위해 끓고 있는 그의 욕구에 튀겨져 벌려져야 한다. 그러면 그는 바쁘게 움직여 그녀의 진입로에 몸을 떨며 짐을 내려놓고 그 대가로 그녀에게 브로치나 금속 팔찌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 일은 곧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자유롭다.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이웃을 비웃던 이전에 비하면 훨씬 풍요롭다. 당신은 이러한 모습을 구경하라고 초대된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이 신사가 샴페인을 들고 당신 집 대문을 소란스레 두드려도 당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 여자는 즐거워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는 그 자신을 상자에 넣고 포장할 것이다! 푸른 하늘은 경치를 진풍경이 되게 한다.
사업은 잘된다."
p.183

인류의 미래에 대해 디스토피아적 전망과 유토피아적 전망이 있듯,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와 같은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엘프리에 옐리네크를 구글에 검색만 해보아도 수많은 문건들이 뜨는데, 그녀는 대표적인 회의론적 페미니스트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결코 남성의 지위를 빼앗을 수 없으리란 시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런 부분을 읽고([욕망]의 권말에 실려있는 해설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다.), 김영하 작가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인터넷에 검색만 해보면 김영하 작가가 비관적 현실주의자에 대해 강연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물론 그는 우리 '헬조선' 의 젊은이들을 향해 한 강연이지만,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김영하 작가의 그 자리에 그대로 끼워 넣으면 그녀의 생각이 더욱 또렷하게 전달된다. 여성들은 김영하 작가가 대상으로 삼은 그들보다 두배 세배는 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명확하게 설파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덤벼들었다가는 아무것도 못할껄'
그녀가 여성들의 디스토피아를 설파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위', 다시말해 '남성들의 카르텔' 에 도전하는 여성들은 황폐화된 황무지에 덩그러니 던져진 것이니까.
그녀에게 이 세상은 정글이다.
무려 잔디나 잡초, 심지어 흙조차도 자신보다 강한 적인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흙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땅속으로 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 이라는 족쇄에 묶여 '남편' 이라는 악마에게 '섹스' 라는 고문을 당하며 '가정' 이라는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여자' 에게 한없이 이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15개의 챕터로 나뉘어져있는데 위에 언급한 것 처럼 포르노 이상의 직설적인 성애가 묘사되어 있다.
아마 어떤 누군가는 상상도 못했을 각종 행위들이 묘사된다.
하지만, 그 어떤 묘사도 에로틱하거나 사랑스럽지 않다.
그녀는 남편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와 다름없고, 아들을 키우는 보모와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아들로부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남성들에게 읽힐만 하다. 특히나 중고딩 교과서에 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우리나라의 중고딩들은 부적절한 포르노로 물들어있으니까. 나도 그랬듯이.
페미니즘 교육의 1번은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이 작품의 두 챕터 정도(한 30페이지쯤)만 교과서에 실려도 10대 성범죄가 반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그 행위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사무칠정도로 묘사된다.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중인 "부부간, 혹은 연인간에 서로 합의되지 않은 섹스가 강간인 이유" 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공감되는 텍스트가 아닐까?

최악의 상황을 언제나 상정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에 치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 운동만이 아니다. 삶은 거의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법칙이다. 어깃장의 법칙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삶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어깃장을 놓는 법이다. 준비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관적" 이면서도 "현실적인" 시각을 갖는다면,  적어도 '여성이 아닌자, 여성의 삶을 이야기 하지 말라' 던가, '여성운동은 여성들만의 것이다' 와 같은 착오적인 주장은 피할 수 있을터다.
개인적으로 조금 더 덧붙이자면,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이념을 구분하는 방법도 필요한 것 같다. 
예를들어, 페미니즘 비평, 같은 부분이다. 비평에는 여러 기법들이 존재한다. 작품을 컨텍스트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오롯하게 텍스트 안에서만 파고들 수도 있다. 작가의 전작을 포함, 작품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작가 중심의 접근법도 있다면, 당연히 여성주의 시각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작품의 평가는 언제나 비평하는 모두의 것이고, 작품이 독자의 것이듯, 비평 또한 독자의 것이다.
주의해야 할 부분은 전문가의 비평과 독자의 리뷰가 난립하는 바야흐로 백만 네티즌의 시대라는 점 정도이리라.
전문 비평과 단순한 리뷰를 구분하는 역량 정도는 내 스스로가 배워야 할 터다.
적어도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작품' 이나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 차별적인 작품' 과 같은 평들을 구별해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지적받았다고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리스-로마 신화가 그렇듯이, 성경이 그렇듯이 말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그려진 작품에는 언제나 여성 차별, 여성 혐오의 시각이 들어가 있다!!
그 점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의 가치가 폄훼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월북 작가의 작품들을 폄훼하거나, 공산주의자들의 작품을 비하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친일 작가들의 작품을 혐오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터. 인간적인 취향과 작품의 성취는, 적어도 구별하는 삶을 살고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 작품은 남편과의 성생활과 아들 육아를 오로지 '고통' 만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도 평범한 남성들이나 여성, 혹은 일부 여성주의자들조차도 지나치게 과장되고 편향되게 표현된 여성의 성 역할에 읽기조차 힘들 수도 있다. 나 역시 수년 전, 처음 읽었을 땐 불과 몇 챕터 넘기지 못하고 덮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문학의 중요한 특징들 중 하나가 바로 '과장' 과 '편향' 이라 여긴다.
문학은 글을 통해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는 장르다. 세상의 모든 시간과 현상들이 작품의 주인공이나 화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잠깐의 시간이 한정지을 수 없는 긴 시간으로 과장되고, 작은 감정의 편린이 수천배 수만배 늘어난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어떤 여성들이 겪고 있을수도 있는 고통, 그 자체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 위해 편향된 시각과 과장된 역할을 활용한 것 뿐이다. 애초에 문학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일어날 수도 있는 일'. '픽션'. 아닌가.
파괴적이고 절망적인, 과장과 편향으로 가득찬 글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오롯하게 이 책을 읽는 나의, 독자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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