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비저블 서커스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시간은 깡패다." 라고 일갈했던 제니퍼 이건의 첫 소설이 시간을 거슬러 내 앞에 찾아왔다.
제니퍼 이건은 [깡패단의 방문] 을 통해 시간 앞에서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의 비애를 담담하게, 하지만 결코 우울하지 않게 그려냈다. 당시에 느꼈던 인상은 필립 로스의 적통, 그 자체였다. 필립 로스가 미처 그릴 수 없었던 미국의 딸들에 대해, 그리고 미국의 딸들이 바라보는 미국 사회와 그 안의 남자들에 대해, 그리고 여성들의 애정과 욕망을 그려내고 있었다.
필립 로스는 [에브리맨] 에서 "그냥 오는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라고 말했다.
운명의 불가역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순응한다. 그것이 '아버지' 의 자세였다. 그것이 아버지가 세상을 버텨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대다수의 평범한 남자들은 이 방법을 택한다.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가장 잘 할 수 있게 된다. 필립 로스의 작품 세계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남자들은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미국의 목가]의 시모어도 그랬고, [네메시스]의 버키도 그랬다. 주커먼 시리즈의 주인공 주커먼 역시 그랬다.
제니퍼 이건은 [깡패단의 방문] 을 통해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라고 되묻는다.
이 두 문장이, 필립 로스의 세대와 제니퍼 이건의 세대를 연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필립 로스의 '받아들여' 라는 메시지가 순종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말하는 '오는' 것들에는 운명의 어깃장 같은 싸움거리들이 대부분이다. 필립 로스는 그런 싸움들까지 모두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피하거나 도망가지 말고, 오는대로, 버티고 서서 받아들인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받아들인다. 얻어터지고 깨지고 부서져도 그 자리에 서서 버틴다. 그 세대의 남자들은 그래야만했다. 등뒤에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도 오는대로 한껏 맞받아친다. 그리고 장렬하게 전사하면 아버지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제니퍼 이건의 [인비저블 서커스]는 그렇게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간 아버지와 그 뒤에 남은 가족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피비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아이와 성인의 경계를 막 넘어온 터다. 열여덟살인 피비는 여덟살 무렵에 아버지를 잃었고, 열살 무렵에 언니인 페이스를 잃었다.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어머니와 IT 관련 사업으로 실리콘밸리에서 승승장구중인 오빠가 있고, 피비는 버클리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 역시 IBM에서 일했기에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1978년. 미국이 풍요의 정점을 찍었던 시기다.
피비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세 자녀들에게 2천달러씩을 남겼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면 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를 통해 조치해둔 것이다. 세 자녀 중 장남인 배리는 그 돈을 종잣돈 삼아 작은 사업(훗날 대박이 터질)을 시작했고, 둘째인 페이스는 남자친구인 울프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페이스는 그 여행에서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온다.
피비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엄마와 크게 다툰 뒤, 충동적으로 비행기에 올라 유럽으로 떠나고, 여행지에서 아버지의 변호사를 통해 자신에게도 똑같이 남긴 돈을 수령해 페이스가 유럽에서 보내왔던 엽서의 주소를 따라 유럽 각지를 누비기 시작한다. 페이스가 죽기 전 밟았던 곳들을 하나하나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피비는 페이스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가 독일에 안착해 살고 있는 울프와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페이스의 최후에 대한 숨겨진 비밀들을 듣게 된다.
정말 정신없이 읽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도 높았고, 흡인력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유려한 묘사들이 인상적이었다. 심상을 이미지화 시키는 제니퍼 이건의 발상은 정말이지 '천재적' 이라는 진부한 표현 말고는 딱히 상찬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특히 이번 작품은 개인의 의식으로 침잠하는 과정들이 유럽 각지의 구체적인 이미지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장면들을 '문장으로' 펼쳐낸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의 호흡 조절에는 약간 실패한 지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게 작가 경력을 시작하는 첫 작품이었다니...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나기도 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오롯하게 관통하는 심상은 단연, "고독" 이다.
모더니즘이 개인의 의식, 그 자체에 천착하면서 절대적 고독이라는 화두를 던졌고, 개개인으로의 분화와 독자성, 형식과 구조의 파괴를 받아들였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보다 다층적인, 다채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과제와 재조합, 재창조; 융화로 번져나갔다. 어떠한 흐름 속에서도 가장 뚜렷한 심상은 여전히 절대적인 고독, 외로움이다. 고독은 인간이 자아를 가지면서 획득한 감정이다. '내'가 '나' 임을 자각하는 순간, 고독이 잉태된다. '나' 는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 뿐이라는 절대적인 진실. 그것이 고독의 본질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각하고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어쩌면 이 수 많은 사람들 중,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결된'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기대가 '외로움' 을 잉태한다.
인간은 홀로 태어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은 스스로를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하지만, 잉태부터 타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인의 유전자를 지닌 세포를 받아, 타인의 몸 속에서 만들어져서, 타인의 골반뼈를 부수고 나온다. 타인에 의해 보호되고, 양육되어 자라난다. 타인에 의해 생명을 얻지만, 타인에 의해 생명을 잃기도 한다.
삶이라는 거대한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족은 언제나 이 비극의 주연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자,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짐이다. 반드시 필요한 타인들. '내'가 살아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집단. 그리고 가장 강력한 집단, 살아 숨쉬는 동안에도, 어쩌면 죽음 이후에도 벗어날 수 없는, 최소한의 공동체.
가족이라는 행복한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부모는 자녀와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자녀는 부모와 단절되기를 기대한다. 부모는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자녀가 헤아려주기를 기대하고, 자녀는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부모가 헤아려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흔히 '내리사랑' 이라고 부르는 일방적인 기대의 흐름. 가족이 비극인 이유다. 부모와 자녀는 언젠가는 반드시 단절되기 마련이다.
반면, '또래집단' 인 형제, 자매는 타인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라이벌이자 친구이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물어뜯고, 상처를 치료해준다. 작은것도 나누고, 작은것까지 빼앗고, 사지로 몰아넣고, 사지에서 구해준다. 영원한 비교대상. 누군가에겐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고, 누군가에겐 가장 골칫덩이이고, 누군가에겐 가장 증오스럽고, 누군가에겐 가장 사랑스러운. 버릴 수 있지만, 버릴 수 없고, 죽일 수 있지만, 죽일 수 없는.
형제, 자매는 가족이라는 비극 안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를 담당한다.
피비와 페이스의 관계 역시 그랬다.
사랑스러운 소녀로 태어났지만, 태어나보니, 이미 '사랑스러운 딸' 시상대의 위층을 선점한 사람이 있었다. 피비는 세번째 자녀였다. 첫째인 오빠 배리는 경쟁에서 이미 한참 밀려난 상태였고, 아빠의 눈은 언제나 둘째인 페이스를 향해 있었다. 피비는 페이스를 향한 질시와 부러움, 동경을 동시에 느끼며 자라났고, 아빠에 대한 사랑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끼며 자라났을터다. 배리도 피비도 각자 아빠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지만, 그는 페이스만을 바라봤다.
이 작품은 시점은 3인칭으로 전지적이지만, 화자는 작품 안에 있는 피비이다. 때문에, 피비에 대해 서술할 때에는 전지적으로 작동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관찰자의 시점으로 작동된다. 피비가 보는 방식으로 피비의 주변 인물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이 피비의 심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페이스의 행로를 똑같이 밟아가며 피비는 페이스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것은 즉 언니인 페이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아빠와 언니의 상실로 인한 상처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피비는 자신도 모르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처럼 가족의 상실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고, 그것은 아마 페이스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피비는 언니가 남긴 엽서를 지도삼아 언니의 행로를 밟으며 언니의 숨결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 그 대부분은 착각에 불과했을 것이다. 착각에 불과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면은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온다. 실제 트라우마의 심리치료 과정들 중에는,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켰던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법도 있다. 피비가 여행도중 느끼는 신체적인 고통은 마음의 고통의 표출이었고, 그녀는 끝끝내 고통을 주는 실체 그 자체에 다가서게 된다.
작가들은 대부분, 시대에 천착한다.
자신이 자라온 시대,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 할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시대. 앞으로 살아갈 시대와, 어쩌면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시대까지. 어떤 작가들은 시대상을 그려내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기도 한다. 문학이 갖고 있는 많은 가치들 중, 기록으로서의 가치는 그들 덕분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대, 아버지와 어머니, 배리와 페이스, 피비까지 격동의 시대, 피비의 말을 빌리면 "뭔가가 변화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사실 배리가 선택한 IT산업과 부와 풍요, 페이스가 선택한 모험과 변화, 파괴는 노골적일 정도로 쉽게 읽히는 상징들이다. 그것들은 역동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누구나 만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갈림길에서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마력에 사로잡힌 필연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배리와 페이스, 피비를 각자의 세대를 은유하는 메타포로 읽고싶지는 않다.
이 이야기는 가족과 남매의 이야기이다. 서로의 고독을 보듬어주고, 외로움을 채워주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끔찍한 독설을 내뱉기도 하고, 따뜻한 치유의 온정을 나누기도 하는, 가족과 남매의 이야기다.
"어쨌거나." 그가 말했다. "네가 돌아오서 기쁘다. 그냥 나는 그렇다고."
"이유를 모르겠는데, 베어."
그는 놀란 눈치였다. "왜 이래. 넌 내 동생이잖아." 그가 말했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물기 어린 앞유리를 응시했다. 이따금 흰 연기 아래 타오르는 석탄처럼 안개 너머에서 불빛 무리가 확 밝아졌다. "오빠도 무서웠어?" 피비가 말했다. "내가 거기 가 있는 동안?"
"그래." 배리가 말했다.(...)
그가 말했다. "어쨌거나, 그러면서도 네가 괜찮을 거란 감은 늘 있었어. 그 감이 더 셌지, 아마도. 결국에는."
"허. " 그녀는 실망했다.
"그렇다고 내가 마음을 놓았다는 게 아니라-"
"그 말이 맞는데 뭐." 피비가 말했다. "오빠 말이 맞아. 난 한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인가봐" 어쩐 이유인지 그녀는 웃었다.
"넌 생존자야." 배리가 간단히 말했다. 진부한 말이지만 그의 진심이 담기니 뜻밖에도 진실로 다가왔다. "넌 딱 그래. 너도 나도 둘 다."
p.496~7
상실을 극복하고, 과거로 향했던 시선을 가까스로 현실로 옮긴,
살아남기로 한 이의 이야기다.
이토록 고독하고 고단한 삶에,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아야 할 이유는 알 것 같다.
이 질문을, 내일도 던지기 위해서다.
그 정답을, 내일도 찾아 헤매기 위해서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무서워 할 사람들과 함께.
우린 생존자니까. 내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