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브리튼 마을의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힘들게 촌장의 허락을 구해 아들이 사는 옆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모든 관절이 쑤시고 몸 성한 곳이 거의 없지만, 부부간의 사랑은 그 어느때보다 깊은 부부는 가장 가까운 색슨족 마을에서 위스턴이라는 색슨족 전사를 만나게 되고, 용에게 상처를 입은 에드윈이라는 소년까지 함께 동행하게 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에게 향하는 여정을 계속하기 전에, 색슨족 마을 인근 수도원을 방문하기로 한다.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수도원장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최근 과거의 기억을 거의 다 잃었다. 둘의 젊은시절조차 떠오르지 않고, 아들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아들이 왜 다른 마을로 떠났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어떤 기억들은 사라졌고, 어떤 장면들은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억 상실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나이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으나, 일대의 모든 마을에서 비슷한 일들이 남녀노소를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었다. 치매와 같은 현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원으로 향하는 도중 아서왕의 조카인 늙은 기사 가웨인을 만나게 된다.

가웨인은 오래 전, 아서왕의 명령에 따라 이 지역 어딘가에 잠자고 있는 암용 케리그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기사였다. 

색슨족 전사인 위스턴 역시 자신의 왕의 명령에 따라 암용을 죽이기 위해 이 지역에 파견된 참이었으나, 가웨인은 그와 협력하기는 커녕, 자신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어서 떠나라는 말만 반복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이 과정 속에서 최근 이 일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적인 기억 상실 현상이 암용 케리그가 잠자면서 내뿜고 있는 입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 중 두번째로 읽어본 작품이다.

[나를 떠나지 마] 도 굉장히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는데, 이 작품 역시 대단하다.

고작 두 작품만으로 딱 잘라 평할 순 없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서정적인 묘사에 굉장히 뛰어난 작가인 것 같다. [나를 떠나지 마] 에서도 주인공들이 머물고 있는 학교와 주변 광경들, 병원이 위치한 장소의 풍광들과 인물들에 대한 정적인 묘사가 인상깊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정적이면서도 농밀한 묘사들이 돋보였다. 빽빽한 나무와 바위, 산, 안개로 가득찬 대기에 대한 느낌이 문장 속에서 꿈틀거린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상당히 박력있는 액션들이 많은데도 정적이면서도 고요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나를 떠나지 마] 에서도 그랬다. 내용면에서 상당히 감정적인 동요가 큰 반전이 있었음에도, 그것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서술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렇다.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들인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이라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중요한 이미지들은 눕거나 앉아있는 장면들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 단편적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 안개로 가득찬 당시 영국의 풍광들에 대한 묘사들은 무척 춥고, 눅진하고, 답답하다.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서로의 손을 감싸쥐고, 어깨를 감싸고, 챙겨주는 장면들이 한결 따뜻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장을 덮으니, 눈물이 왈칵 났다.

사무치는 회한과 아쉬움, 안타까움...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대체, 이 감정은 뭐지? 몇페이지의 마지막 장면을 몇번이고 되읽었다. 똑같이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동안 가끔 그 마지막 페이지가 불쑥불쑥 되살아났다. 


사람의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젊은이는 내일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느낌이었다.

앞부분보다, 뒷부분 노인에 대한 부분이 더 또렷하게 남아있다. 거의 정확할 것이다. 

남자들은 나이 먹을수록 "왕년에 내가~" 라는 말을 많이 하기 마련이다. 추억이야말로 노인의 허세이자, 본질이다. 

사람의 삶은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좋은 기억은 더 좋게, 나쁜 기억은 덜 나쁘게, '추억보정' 이 되어 서랍 안에 쌓여진다. 

젊은이는 서랍의 빈 공간에 채울 수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노인은 꽉 채워진 추억들을 끄집어 살피며 하루를 지새운다. 

 

 그렇다면, 일제치하를 경험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아버지, 어머니들의 기억 속에는 어떤 것들이 녹아있을까?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당했던 그분들의 마음 속에는.


지구에 비하면 도저히 길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의 역사책은 동족들의 피로 칠갑이 되어있다.

인류는 끊임없이 서로를 죽이면서 성장해왔다. 오로지 피에는 피로, 살육에는 살육으로 맞서왔다. 이러한 피와 증오의 굴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교활함과 야비함에 기인한다. 날카로운 이빨도, 강인한 손발톱도 없이 진화한 인간에게는 오로지 뇌 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뒤통수를 찌르고, 목을 벤다. 인류의 과학은 언제나 효과적인 살육을 위해 진보했고, 인간의 역사는 시체로 시체를 쌓아온 과정이다. 

위스턴은 같은 색슨족 소년인 에드윈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브리튼족을 증오하거라. " 

친절하고 다정한 브리튼족이었던 액슬에 대한 경애를 품기도 하지만, 그것이 동족과 부모를 학살한 브리튼족들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않는다. 위스턴은 다시 대지를 피로 적시기를 원한다. 그것은 복수의 피가 될 것이다. 진실을 망각 뒤에 숨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색슨족이 원하는 평화는 더더욱 아니다.   

가웨인은 살육의 범죄를 기억의 저편에 묻히기를 원했다. 정복자 아서왕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마법사 멀린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뭔가 중요한 사실을 잊은 것 같은데...'

이 대지에 사는 모든 브리튼족과 색슨족은 끊임없는 망각에 시달리며 불안하고도 평화로운 삶을 이어간다.  

단순히 누가 옳고 그른가를 떠나 이것이 인류 문명의 발자취였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른 가장 첫번째 장면은 얼마전 큰 이슈가 되었던 미얀마 로힝야 족의 대학살극이었다. 그것을 묻고 평화의 지도자로 우뚝 선 아웅산 수치 여사였다. 더 전으로 돌아가볼까. 영국의 수많은 식민지 총독들은 어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천만을 학살하고, 실제로 손발을 잘랐을 뿐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거대한 인종분리 정책은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버금갔다. 미국은 역사책의 첫 페이지가 학살이다. 미국 원주민들은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밀려나 망각을 강요당하고 있다. 


암용의 망각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색슨족인 위스턴은 증오와 고통, 슬픔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색슨족의 왕에게 선택받았고, 거짓 평화를 깨뜨릴 임무를 부여받았다. 

거짓 평화를 깨뜨리려는 위스턴과, 거짓 평화를 지키려는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 

망각의 입김 안에서 과거의 상처를 다스리며 거짓 평화 속에서 안주하는 액슬. 


과연 거짓된 평화도 평화인가. 결국 그렇게 완전히 잊을 때 까지 참고, 기다리고, 또 참고, 또 기다리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마지막 장을 덮으면 책 내용이 싹 잊혀지는 책이 있다. 내가 이렇게 읽은 책의 모든 리뷰를 남기고자 했던 이유이다.

줄거리를 적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적고,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을 적어낸다.

반면, 마지막 장을 덮어도 며칠동안이나 머릿속에 뭔가가 왕왕 울리는 책이 있다. 

이 작품은 정말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이 책을 다 읽은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사실 그 왕왕 울리는 뭔가를, 정리할 수 없어서 이 글을 마무리 할 수가 없었다. 

이라크 군대가 IS의 근거지를 함락시켰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기 테러가 일어났다. 할로윈을 맞은 뉴욕의 한 거리에서 총기 테러가 일어났고, 텍사스의 교회에서도 테러가 일어났다.

그런 기사를 접할 때 마다 이 책이 떠올랐다.

망각속에, 역사의 뒤안길에 잘못을 떠넘긴 사람들이 떠올랐다. 

히틀러와 그 부역자들이 떠올랐고,학살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떠올랐다.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이 떠올랐다.클린턴이 떠올랐고, 오바마도 떠올랐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떠올랐고,히로부미와 하토야마, 아베가 떠올랐다. 

베트남, 남아공, 로힝야, 미얀마, 아웅산, 남아공, 콩고, 토고,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수니파, 시아파, 아우슈비츠, 게토, 킬링필드, 보도연맹, 티벳, 인도,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중국 그리고 미국. 

모든게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이 책이 떠올랐다.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가 떠올랐다.

망각의 시대에 증오를 전래하는 위스턴이 떠올랐다.

어이없이 죽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떠올랐고,어이없이 죽어가는 아들과 딸들이 떠올랐다.    

그 모든 생명들이 중요한가?

그 모든 생명들이 하찮은가? 


죽은 사람들은 죽었으니 끝인가?


그래. 맞다.


죽으면 끝이다. 

내가 죽으면 나의 모든 감정들은 사라질터다. 마치 이 세상에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처럼.

이영도 작가는 인간의 삶,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삶을 "그림자 자국" 이라고 통칭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그림자의 자국.모든 삶은 대지위에 흩뿌려진 그림자 자국에 불과하다.

그 흔적은 불과 몇십년이면 사라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남아도 남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야비한 가해자들은 언제나 피해자들의 '망각' 을 꾀한다.

다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 논하지 말자고, '비가역적' 약속을 강요한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 일관하며 모른체한다.

영국이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민족들에게, 러시아가 소련시절 독립을 꾀하던 소수민족들을 학살한 사실들을, 미국이 무기를 제공하며 내전을 부추겼던 중동의 많은 민족들에게, 일본이 침략하여 강제 징용한 조선인들과 위안부 여성들에게,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때 학살한 베트남인들에게, 군부 독재 정권과 그 부역자들이 자신들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선량한 국민들에게.


거짓과 기만으로 눈을 가리고, 평화라는 단어를 악용하며 망각을 기다린다.


죽으면 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와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든다.

이것은,

허무는 아니다.

농밀하고 강력하다.

세상을 뒤덮는 안개처럼.

쫓고 쫓아, 부모의 가죽을 벗긴 불구대천의 원수를 마주한 아들의 심장처럼. 

잔뜩 부풀어 쉼 없이 펄떡댄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잊으면 일본과 더 가까워질까? 

창씨개명을 당한 할아버지를 잊으면 일본가 더 가까워질까? 



우리는 진정한 답을 알고 있다.

독일의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었던 독일은 자성의 목소리부터 시작했다.

지도자의 목소리에 좌우되지 않는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교육 일성으로 삼았다. 과거를 적확히 기술하고, 아우슈비츠에 자신들의 악행을 남김없이 기록해, 후대를 위해 남겼다.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 여러번 사과하고, 전후에 성실하게 쌓은 국부를 유럽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유럽을 전화로 몰아넣었던 독일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고, 가장 부유한 국가로 우뚝 섰다.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에 피해국들은 충분히 납득했고, 용서했다. 


진정한 사과는 어려운법이다.

사람과 사람간에도 한없이 어려운 것이 사과다.

하물며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라면. 


그렇게 위무하며, 이런 거짓 평화를 누리는 것이 최선인걸까? 

망각속으로 묻어놓고, 오늘만 살아도, 되는걸까? 


이러한 우리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바로 언론의 일이다.

[파묻힌 거인] 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암용 케리그의 입김에 영향을 받아 과거를 망각했고, 여전히 망각 중이지만, 색슨족 전사 위스턴만은 그 입김에 면역성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암용을 죽이는 전사로 선택된 이유였다. 그는 색슨족 소년 에드윈에게 망각한 과거를 알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증오' 도 전한다. 단순한 사실이나 역사에 '증오' 를 얹어준다. 아니, 어쩌면 현대의 언론도 잘 하는 짓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양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언론은 때로 자신들이 설정한 선악과 피아의 잣대를 대중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한다. 언론 공정성이 중요한 이유다. 

암용 케리그의 입김은 정복자이자 학살자인 아서가 대중을 호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것도 언로言路의 한 방향이다. 로마 황제처럼, 전두환처럼 스포츠와 섹스, 영화와 드라마등의 유희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기만했다. 사람들은 웃고 즐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북한 간첩으로 호도당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운 선량한 시민들들을 잊었다. 그 바통을 넘겨받은 노태우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그 시기를 거쳐온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도 기만당해온 삶을 진정한 삶이었다고 우기며 늙어가고 있다.


오랜 암흑, 잠깐의 빛, 다시 고단한 어둠, 그리고 또 잠깐의 빛.

예수는 로마의 부역자들 아래에서 고통받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고 말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암용을 죽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기억을 찾아줄 위스턴을 기쁘게 맞이한다. 하지만, 이윽고 액슬을 알아채게 된다. 암용이 죽고 나면 피를 피로 갚는 잔혹한 셈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것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끈끈한 부부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었다. 현재만을 바라보는 액슬과 비어트리스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었다. 그리워할 젊은 시절도 없었고, 고통과 회한으로 가득찬 과거도 없었다. 서로에게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던 기억들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실망감으로 절망에 빠져 서로를 외면했던 기억들도 없었다. 오로지 지금, 내 옆에서 내 손을 잡아주는 서로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사적인 영역에서, 망각은 신의 선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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