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공병 7 - 완결
마츠모토 지로 지음, 주원일 옮김 / 애니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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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문제작. 여자공병의 완결편이 국내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이 정식 발간된다는 소문만으로도 많은 팬들이 우려를 표했었다. 아무리 애니북스가 용자라지만, '그런' 시기에 '이런' 작품이라니.


[여자공병]은, 일단은 거대로봇물이다.

단, 거대로봇이 세라복을 입은 여고생이라는 점만 빼면; 거대로봇물이지만 내용은 리얼로봇물에 가깝다.

로봇을 조종하는 파일럿들은 이차원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시달리며 지속적인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여자공병에 타고, 이차원의 공간에 진출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오염' 이라는 증세가 진행되고, 전투를 계속 하다보면 결국 심각한 지경에 도달하고 만다. 기체와 일체가 되어서 정신과 육체를 통째로 먹혀 버리는 것은 물론, 그들이 타고 있는 로봇, '여자공병' 마저 끔찍하게 변이되어 말 그대로 '괴물' 병기가 된다. 주인공 타키가와는 '러브 폭스' 라는 여자공병 기체를 조종하는 파일럿으로 정신오염이 심하게 진행된 아군들을 '처리' 하는 이른바 '엽대' 라는 특수부대의 리더이다. 아군을 처리하는 일종의 사형집행인인 셈. 



 세라복과 기관총, 혹은 칼.   

작정하고 덤벼들면 수많은 성적인 메타포들을 발'굴'할 수도 있겠지만,(그리고 아마 수많은 논문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일본인들이 사방에 혈흔을 흩뿌리는 여고생에 대한 판타지, 혹은 동경, 혹은 성적 이상화가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일본 만화들 중에서도 교복을 입고 무기를 든 여고생이 등장하는 작품은 수도없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은 물론 클램프의 작품들이다. 

그녀들의 작품세계에서 교복은 전투복이자, 살인면허와 다름없다.(^^;;)

그녀들이 일본에서도 소위 '소녀만화' 로 분류되는 하위장르의 정점에 위치한 창작팀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무장한 여고생의 메타포는 비단 남성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고생과 일본도" 는 '국화와 칼' 이라는 이미지로 서양에 널리 알려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가 대중문화의 컨셉들과 어우러지며 탄생한 새로운 아이콘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장미와 가시처럼 이중적인 메타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니까. 

'세라복과 칼, 혹은 총(혹은 전기톱)'.


어쩌면, 마츠모토 지로는 단순히 각종 무기를 손에 쥐고 활약하는 여고생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권 말미에 작가의 대담이 실려있긴 하지만, 일단 차치하자.) 

그리고, 그러한 거대 여고생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빌딩을 부수고, 시가지를 아작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이족보행의 거대 로봇의 디자인이 여고생이며, 두부가 열린다는 부분은 장난치듯, 닥치는대로 그리다가 나온 아이디어일 것이다. 거대로봇의 두부에 조종석이 있다는 설정은 일본산 거대로봇물의 전통적인 레퍼런스다. 캐노피의 디자인은 에반게리온의 그것과 닮아있다. 여자공병의 적의 공격에 의해 침식당해 수많은 팔들이 파일럿에게 뻗어나가는 장면은 정확히 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봤던 그것이다. 

거대한 이족보행 여고생 로봇이 종횡무진 활약할 수 있는 세계가 필요했다.

가급적이면 그러한 여고생들이 무리를 지어 전투를 벌일 수도 있어야 했다. 

괴이한 차원공간을 창조해내고, 현실적인 개연성이 1도 없는 설정들을 쏟아부었다.

다시 말하지만, 단순히 거대 여고생들이 각종 화기를 들고 무차별 학살을 벌이게 하기 위해서다. 

겉보기엔 여성이고, 여학생이지만, 파괴를 일삼는 거대한 로봇이다. 그 사실을 독자들에게 인지시키기 위한 공간이다. 


이러한 나의 추측은 초반 1~2권까지는 어느정도 유효한 것 같았다. 

등장인물들은 이 차원공간의 괴랄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고, 여자공병들이 시가에서 벌이는 전투는 작가가 원했던 판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교복 페티쉬를 갖고 있는 밀리터리 오타쿠가 자신의 취향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주연급 기체인 여자공병 '러브 폭스' 의 두부에 탑승해 있는 '타키가와' 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괴랄한 판타지적 세계관이 현실과 접점을 이루게 된다. 타키가와가 여자공병 러브 폭스에 타기 전 현실은 현재 일본 남성의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괴랄한 모양새로 종횡무진하는 여체들과 고단한 삶을 살았던 남성 타키가와의 리얼함이 얽히며 작품은 난데없는 깊이를 보여주게 된다.

 클라이맥스에 다가가면 존재의 본질에 대한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데, 6권~7권에 이르는 실존과 실재의 증명은 그 자체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줄 만큼 훌륭한 에피소드였다. 이 에피소드만 따로 한편의 단편으로 발표했다면 상당한 걸작으로 인정받을 만큼 훌륭했다.

작가가 이 클라이맥스를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단순히 판치라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작가 자신도 뚜렷하게 밝힐수 없을듯 하다.

전체를 놓고 보면, 이야기의 균질성을 떨어진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장면들간의 개연성은 놓치지 않는다. 이러한 인과관계들이 계산된 것이라면, 그것으로도 훌륭하고, 작가의 본능적인 감각이라면, 그냥 천재적이랄 수 밖에 없겠지.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의 판단이 인상적이다. 그 역시 흡입력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이 작품이 논란을 일으켰던 이유는 '젠더 감수성'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작가들에게 젠더 감수성은 가장 큰 이슈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한쪽에 편중되면 일베, 다른 쪽에 편중되면 메갈이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작품 내적인 해석 뿐 아니라 작가의 개인적인 영역,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의 글까지 타겟 범위에 들어있다.  

'여자공병'은 그런 시기에 국내에 상륙했다. 

이미 웹툰이 만화시장을 점령하고 있어서일까, 이 작품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 어떤 작품보다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데도 말이다. 아마... 논란이 일 만큼 팔리지 않아서겠지... 


'여자공병' 이 그리고 있는 '기호' 로서의 '여체' 는 묘하다. 

여성이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로봇, 병기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머리 안에 타고 있는 남성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공병이 로봇이라는 표식은 없고, 성적인 묘사 또한 적나라하다. 머릿속에 타고 있는 타키가와의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성행위와 로봇인 여자공병들이 벌이는 성행위도 등장한다. 작가는 '이 여자공병은 여고생처럼 생겼지만, 여고생이 아니야' 라고 변명하지만, 여고생들이 벌이는 성애 행위와 남녀 성기를 연상시키는 크리쳐등 성적인 메타포를 가득 메워 독자들을 자극한다.

단순히 그것으로 젠더 감수성을 운운할 것은 아니다. 어차피 19금 딱지가 선명한 작품이고, 성행위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젠더 감수성을 무시한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젠더 감수성이란 작품 안에서 '여성' 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느냐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공병의 작품 안에서, 여성은 단순히 성기, 혹은 자궁 이상의 역할이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작품의 배경이 치열한 전쟁터이기 때문에 실제 이야기 안에서 여성의 활약도는 미미하다. 여자공병에 탑승하는 파일럿들은 모두 남성들이고, 대부분 사회 낙오자들이다. 여자공병을 운용하는 일은 100% 정신오염이라는 부작용을 수반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퇴로가 없는 이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가는 방식으로 파일럿들을 선정했다.  

왜, 모두 남성뿐이냐고 묻는다면, '군인=남성' 이라는 편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부분이 바로 젠더 감수성의 부족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자 고등학생 형태의 로봇" 의 조종석에 "찌질한 쓰레기 중년 남성들" 을 태우는 것이 작가의 첫번째 의도라는 것이 보다 정답에 가깝다. [여자공병] 세계는 페미닌한 세계는 아니지만, 남성들의 이야기만을 그리고 싶었던 것으로 읽힌다. 

애초에 '세라복과 머신건' 처럼 상반되는 이미지로 위화감을 주기 위한 설정인 것이다.   

또 하나, 파일럿 타키가와와 여자공병 러브폭스를 어떻게 분리하여,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젠더감수성은 양쪽 극단을 오가게 된다.

타키가와의 여자공병인 '러브폭스' 는 '키리코' 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타키가와의 엽대를 구성하고 있는 부하기체들 역시 별칭이 있고, 대부분 그 이름으로 불리운다. 머릿속에 중년 남성인 타키가와가 있다지만, 실제 작품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는 여고생인 것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대상과, 그 안의 실체가 다른 파일럿과 여자공병의 관계야말로 마츠모토 지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다. 키리코는 단순한 무기물이고, 타키가와에게 조종되는 기체이지만, 한 명의 인간 여고생으로 읽힌다. 

이 의도적인 혼동과 혼란, 그리고 위화감이야말로 작가의 의도, 그 자체인 것이고, 젠더 감수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젠더 감수성 때문에 작품 자체가 폄하당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젠더 감수성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품이 그리고자 하는 내용와 캐릭터, 시대배경 등을 따져서 들이대야 할 부분이고, 작가 역시 충분히 고민해서 접근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마츠모토 지로가 어떤 생각으로 거대 여고생을 그렸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법이다. 

작품은 오롯하게 독자들의 것이고. 


다시 강조하지만, 6권과 7권을 아우르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대단히 철학적이고, 깊이있는 사유가 동반된다.

타키가와와 러브폭스는 결국 최후의 스테이지에 도착해 예원자가 치밀하게 설계한 현실과 똑같은 가상(시뮬라크르가 연상된다)에서 츠키코와 마주한다. 

현실과 똑같지만, 타키가와가 무시되고, 러브폭스가 키리코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작가가 여자공병을 여고생으로 그린 의도가 여기서 등장한다.

7권은 한 편의 거대한 사이코 드라마인 동시에, 현대 일본 고등학생들의 현주소다. 굳이 여고생이었던 이유는, 당연히 주 독자층의 기호일 테고.(남고생의 하루 따위 읽고 싶지 않으니)


러브 폭스(키리코)와 타키가와의 관계는 7권에 이르러 숨겨왔던 메타포를 드러낸다.

러브 폭스가 육체라면, 타키가와는 정신이다.

예원자가 만들어낸 세상; 현대의 일본에서 타키가와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정신병의 증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지만, 여자공병에 탑승하는 동안 파일럿들은 정신 오염에 침식된다. 자기 자신을 잃고, 여자공병에 동화되는 것이다.

쉽게말해 육체(여자공병)에 정신(파일럿)이 '먹히는' 것이다. 

결국, 정신오염은 육체의 쾌락적 욕망에 사로잡혀 파괴적인 선택을 하는 인간들에 대한 조롱이고, 폄하이다.

그런 세계에서 타키가와는 고고하게 버텨낸다.

그 누구보다 찌질한 모양새지만, 그 누구보다 존엄하다.

그가 그 자신으로서 살아남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그는 버티고 또 버텨낸다.

어떻게 해서든,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고자 하기 때문에, 그는 고고하고, 존엄하다.


결국 마츠모토 지로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작가는 신이 아니다. 소설 속에 답이 없는 것 처럼, 만화 속에도 답은 없다.

소설가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듯이, 만화가 역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가? 


찌질하고 구차하게, 수많은 상처와 고통을 안고, 자신을 무시하고 기만하는 운명과 세상 안에서,

왜,

그렇게 고통뿐인 삶을 어떻게든 이어나가야 하는 것인가?


작품 안에는 수많은 메타포가 등장하고, 그 모든 것들을 폭사시키기도 한다.

솔직히,

'에라 씨발, 나는 모르겠다' 

라는 말이 들리는 듯도 하지만. ^^

 

'그래, 몰라도 나는 살아가련다'

찌질하고 구차하더라도, 살아가련다.

스스로를 위무해서라도.

라는 말도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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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야상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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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도착한 주인공은 일부러 허름한 모텔에 투숙한다.

좋은 호텔로 안내하겠다는 택시에서 문을 박차고 내려, 가난하고 더러운 골목으로 찾아든다. 

허름한 벽에는 눌러죽인 벌레의 흔적들이 가득한, 좁고 더러운 방 안에서 매춘부를 부르는데, 특정한 이름을 언급한다. 주인이 다른 여자를 권하지만, 몇시간이고 기다리겠다며 그 여자만을 원한다. 

여자가 도착하자, 당연한 행위는 등장하지 않고, 주인공은 그녀에게 어떤 남자의 이름을 말한다.

그 매춘부도 알고, 주인공도 아는 바로 그 남자.

주인공은 연락이 끊긴 친구를 찾아 인도에 왔다. 

결코 찾을 수 없는 남자를.



 참 묘한 작품이었다.

두께는 굉장히 얇지만, 내러티브가 엄청나게 쌓여있는 느낌이다.

챕터는 12개로 나뉘어 있는데, 한 챕터 한 챕터가 엽편에 가까울 정도로 적은 분량이다.

시간의 흐름, 서사가 명확하지 않아서 챕터의 순서가 의미가 없다. 1챕터가 12챕터보다 뒤인 것 같기도 하고, 2챕터가 맨 앞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어떤 챕터를 다른 챕터의 앞이나 뒤에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모든 챕터에 등장하는 화자가 모두 동일인이라는 보장도 없고, 같은 인물을 찾아다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이 남자는 주인공의 친구라지만, 그 어떠한 일화도 들려주지 않는다. 친구인지도 확실치 않다. 


일전에 읽었던 다자와 요코의 [용의자의 야간열차]가 살짝 떠올랐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좀 더 혼란스럽다. 

문장은 간결하고, 묘사는 명징하다. 

단어 사용도 적확해서, 묘사되는 모든 것들이 또렷한데, 주인공이 흐릿하다. 목표가 흐릿하다. 목적지도 흐릿하다.

주인공이 찾아다니는 남자가 흐릿하다. 

무엇을 찾아다니고 있는가? 

매 챕터마다 수수깨끼 같은 사람이 등장해, 수수깨끼 같은 말을 던진다. 


 친구를 찾아다니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마지막 챕터에 엄청난 반전을 던진다.

어쩌면, 1챕터부터 11챕터까지의 이야기가 현실이 아닐 수도 있고,  주인공이 찾아다니는 그 인물이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으리란 여지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과연 이 주인공은 누굴 찾아다니는거지?" 

그리고, 

"과연 주인공이 찾고자 하는 이 사람은 주인공과 어떤 관계인거지?"

라는 생각을 하며 서사를 쫓아가던 나에게 엄청난 혼란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찾기 위한 여정을 그린 작품인 동시에, 

'내' 가 누구인지, 내가 찾는 '누군가' 는 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얇디얇은 이 책의 말미에 자리잡고 있는 12챕터는 독자들에게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1부터 10 이라는 챕터의 어느 자리에 넣어도 새로운 서사를 펼쳐낼 수 있을 정도다. 

사실은 처음엔 좀 화도 났다.

"아니, 이 사람이 장난하나!!!! 내가 이렇게 열심히 당신의 페이지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는데, 이게 말이요 당나귀요!!" 

마지막 챕터에는 픽션을 일종의 메타픽션으로 바꿀 수 있는 신박한 키워드를 지니고 있다. 

나도 언젠가 어디선가 써먹어보고 싶은,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아닌 반전이다.


'선생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한 제자가 부처에게 물었다.  

부처는 제자의 질문에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이 많은 시장에서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날아온 독화살이 그 남자의 허벅지를 뚫었다.

시장에 있던 주변 사람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진 남자에게 달려가 안위를 살피며 의원에게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화살에 맞은 남자는 치명적인 독이 퍼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날 쏜 놈 누구야!! 그 놈 보기 전엔 난 이 곳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을거요!!

날 부축하지 말고, 어서 그 놈이나 찾아봐요!! 도망가기 전에!!!"

라며 바락바락 성질을 부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네가 그 남자와 같다.' 


이 이야기뿐 아니다.

파랑새를 쫓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이야기도 있고, 무지개를 쫓는 나막신장수의 이야기도 있다. 

조금 더 신경써서 찾으면, 찾을 수 없는 것들을 찾아 짧디 짧은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멀리서 엄한 것 찾다가 평생 다 보내지 말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라는 교훈으로 귀결된다.

윗 단락에 인용한 부처의 이야기도 그렇다.

이 세상에서 평범한 삶으로는 찾을 수 없는 대답이다. 시장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형이하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형이상의 세계에 투신한다 해도 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답이다.

설사 찾아낸다 해도 그 어떤 보상도 없는 문제다.

전세계 어디에서건 이런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모든 시대에, 모든 문명에 얼마든지 널려있다.

전설이나 신화 뿐 아니라, 이렇게 근현대에도.

심지어, 이제는 다른 해석도 종종 엿볼 수 있다.

무지개를 찾아다니는 나막신장수는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종종 끝없이 도전하는 인간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산과 싸우던 남자는 비록 수명에 패했지만, 그 자손이 대를 이어 도전한 끝에 결국은 승리해 평지로 만들고 만다. 


그렇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런 인간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지만, 사고思考는 글을 통해 무한히 전래되지 않던가.

의문을 갖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그야말로 생뚱맞은 것에 의문을 가진 몇몇 인간들 덕분에 우리의 사고력을 그만큼 넓어졌다.

불에 손을 대보고, 번개를 맞아보고, 바닷속에 들어가고, 풀과 과일들을 맛보고, 동물을 해부하고, 사람을 해부하고.


이 책의 각 챕터들은 각각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의문과 그 답을 찾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마치 헤라의 시험을 통과하는 허큘리스처럼.

그리고 그 모든 시험과정이 담겼던 이야기들처럼.

인도는 신의 나라이다. 그래서, 더더욱, 신들과 만나는 이야기들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처음 만난 택시 운전수와 모텔 직원부터 기차 안에서 만난 이상한 형제와 식당에서 대화한 여인까지.


인류의 문명은 오롯하게 정답이 없는(것 같이 느껴지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발전했다. 

그 질문이 엉뚱하고 어리석을수록 정답의 가치는 높아진다.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사람은 왜 죽는가?'

와 같은 질문은, 사실, 지금도 여전히 거대한 화두이다.

이 질문들에 대해 쉽게 대답한다면, 당신은 신이거나, 아직, 좆도 모르는 그냥 인간이다.


어떻게 살것인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그렇게 묻고 있다.

너무나 얇고, 가벼웠지만, 도저히 쉽게,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나의 모든 생은 누군가에겐 단 한 문장일 수도 있다.


"모년 모월 모일 사망"



그래. 

그것이 인생이다.

중하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다른 누구에게도 무겁지 않다. 

오직 '나'에게만 무거운 법이다.

이 책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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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2-03-17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 읽고 나서 이제야 마음놓고 다른 리뷰들을 읽고 있는데요 (스포일러가 있을까봐) 열혈명호님 리뷰가 너무 좋아서 댓글을 남기고 갑니다. 말이요 당나귀요!? ㅋㅋ 그래도 역시 그 반전이 싫지 않죠.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는데 열혈강호님이 이 작품의 매력을 너무 잘 정리해 주셔서 아 리뷰는 이렇게 쓰는구나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고고심령학자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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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 우리나라에서는 "공상과학소설" 이라고 번역된다.

내 머릿속에서 SF는 빛의 속도로 광활한 우주를 누비는 이름모를 첨단과학 엔진을 장착한 우주선으로 이런 저런 행성에 조성된 최첨단 콜로니 도시들을 들락날락하며 각양각색의 외계인들과 갈등을 빚으며 사건을 일으켜야만 하는 장르였다. 아니면, 인간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깊고 깊은 심해나 지구의 멘틀 아래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거나, 타임머신 등이 등장해야만 했다. 최소한 인류의 자리를 노리는 로봇이나 인공지능 정도는 등장해야지!! 

 나의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려준 작품이 바로 '어슐러 르 귄' 여사님의 작품들이었다.  

사실 'SF'는 '미래' 와 어떠한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슐러 르 귄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 과학과 마술의 경계가 애매해서 과학과 종교가 치열한 갈등을 빚던 시기,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천문학자의 이야기를 그리기도 했다.

 이야기를 통해 "과학" 그 자체를 그린 것이다. 그 작품을 맞닥뜨렸을 때의 짜릿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고심령학자] 에도 미래는 등장하지 않는다.

 광활한 우주도, 이름모를 첨단과학 엔진도 등장하지 않는다. 깊은 심해나 타임머신이 등장하지도 않고, 외계인과 우주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배명훈 작가도 이런 영역을 무척 잘 다루긴 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뿌리는 언제나 그 곳에 닿아있지 않았다. (살짝 거친 적은 있을지언정.)

배명훈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고고심령학" 이라는 기찬 아이디어로 "심령" 을 "학문" 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빙의"를 일종의 과학(사회)현상으로 치환하여 전통과 문화를 관통하는 신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런 장르의 팬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우와' '우와아아!!!!!!!!' 할 수 밖에 없었다.


"심령학적인 관찰을 통해 고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학문. 

고고심령학은 대강그렇게 정의되는 학문 분야였다. (...)

 천년 전 사람들이 쓰던 언어를 어떻게 재구성해낼 것인가? 다른 해석의 여지 없이 소리 하나하나에 정확히 대응되는 문자 체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살던 사람들이 하던 말을?

 이 질문에 대한 고고심령학의 대답은 간명하고 매혹적이었다. 천년 전에 죽은 혼령이 하는 말을 직접 들어보면 된다는 것이었다." 

p.15


작품 안에서 고고심령학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들만의 뚜렷한 영역이 있고, 학계가 존재한다.

은수는 고고심령학계의 기린아로 문인지 박사의 제자였다. 문박사는 고고심령학의 학문적 성취가 뛰어난 학자 중의 학자였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학구적인 자세때문에 대학 중심의 학계에서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제자를 백수로 만드는 교수를 고고심령학과를 개설한 그 어떠한 대학에서도 환영할 리 없었고, 고고심령학 역시 다른 학계와 마찬가지로 대학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수는 얼마전 타계한 문인지 박사의 마지막 수제자나  다름 없었고, 문박사보다는 유연한 편이라 현실적으로 앞길을 모색하는 중에 고고심령학에 기반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장중인 이한철 대표의 제안으로 문박사의 개인 서재를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마치 뇌의 구조처럼 문박사가 수집한 연구 업적과 자료들을 3차원 디스플레이로 재현하는 내용이었고, 개인 소장 서적의 서지정보는 물론, 중요한 메모와 낙서등을 분리하는 작업도 필요했기에 은수야말로 적임자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고고심령학이 대중적으로 알려질만한 큰 사건이 일어난다.

무려, 성벽, 그러니까 고대의 요새 하나가 통째로 서울에 빙의한 것이다. 고고심령학과 관계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서울의 노른자위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들까지 영향을 받게 되자 결국 서울시 당국이 나서 전문가들을 수배하면서 고고심령학 자체가 폭넓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고고심령학계에서는 이 현상을 "요새빙의" 라고 칭하며, 흔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기록이 존재하는 도시규모의 심령현상이었다.

은수는 이 거대 심령현상에 문인지 박사의 '종말론' 연구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대학 친구인 은경, 문인지 박사의 동료뻘인 한나 파키노티 박사와 함께 현상의 실체에 다가서게 된다. 


유령, 고고학, 장기, 고무줄 놀이 노래, 서울, 용산, 인도, 그리고 일제 강점기 경성.

접점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소재들을 씨줄과 날줄삼아 엄청난 작품을 짜냈다.

배명훈 작가의 작품은 [안녕, 인공존재] 부터 흠뻑 빠졌더랬다. 놀라운 상상력과 그것을 현실에 풀어내는 능력이 비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실과 인간, 그리고 사회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돋보였다. 

단편과 중편연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 모든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아쉬운 부분이 바로 드라마였다.

그의 장편은 한마디로, 매력적이긴 하지만, 유혹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이랄까.  

이것은 배명훈 작가의 감정이 절제된 세련된 문체와 간결하고 명징한 스토리 텔링 방식 때문이기도 한데, 독자들의 호흡을 가지고 놀지언정,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약하다고 느꼈다. 인간의 심리나 감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 텔링의 방식에 있어서 드라마의 우선순위를 약간 뒤에 두었다는 인상이 강했다. 이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배명훈 작가의 작품세계 자체가 전체적으로 드라이한 느낌이기에 통일성 면에서는 조화로운 선택이긴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야말로 '배명훈 식' 드라마가 비로소 온전하게 드러났다는 느낌이다.

은수와 은경, 한나 파키노티, 그리고 문인지 박사와 유령 아이와 아미타브까지.

인간들의 심리가 얽히는 드라마들이 감정의 과잉 없이, 배명훈 작가만의 특유의 문체로 너무나 잘 표현되고 있다.  

드라이해도 촉촉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그 뿐 아니라, 스토리 텔링에 있어서도 크게 한 발을 내딛은 느낌이다.

마지막까지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이 파편처럼 흩어진 에피소드들이 마치 퍼즐처럼 차근차근 맞아들어가는 과정은 짜릿할 정도의 즐거움을 준다. 사실 여러 상징들을 복선으로 던져주는데, 이야기의 중심 개념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반부에는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다 읽은 뒤에는 이 세계관의 다른 이야기들을 읽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은수와 은경의 에피소드들도 더 읽고 싶을 정도로, 모두 다 흥미롭다. 

두번 읽을때 더 재미있는 소설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새라니...

도시가 도시에 빙의한다니!!! 

상주하는 유령, 심장을 지닌 도시, 그리고 역사. 전통. 전래.

비과학인 소재들을 인문,공학,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채워넣은 절묘한 이야기이다.

 

서두에 어슐러 르 귄을 언급한 이유는,  그녀가 인문학적인 통찰로 과학을 그려내는 작가이며, 내가 배명훈 작가에게 받았던 첫인상과, 앞으로 기대하는 바 역시 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안녕 인공존재] 도 그랬지만, [타워] 같은 연작과 [신의 궤도] 같은 장편에서도 인문학적 통찰과 과학적 사유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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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 바람!! 

전해들은 바로는 영화와는 결말도, 해석도 다르다고 하니 영화 보실 분들은 관계 없을지도...



굉장히 짧고, 마치 영화의 씬들이 연결된 것 처럼 수많은 단락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게 정말 김영하 작가님의 장편인가? 싶었다.

어쩌다보니, 김영하 작가님 작품도 엄청 많이 읽었다.

장편은 [빛의 제국], [퀴즈쇼], [너의 목소리가 들려] 에 [살인자의 기억법] 까지.

단편집은 너댓권 읽었으니, 어지간히 다 읽었다는 의미다. 

김영하 작가는 장편과 단편의 색채가 상당히 다른 작가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나 '오빠가 돌아왔다'(단편) 와 '빛의 제국'(장편) 이 같은 사람이 쓴 소설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더랬다.

단편은 물론, 단편답게 수많은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갖가지 심상들을 녹여내지만, 장편은 "정색하고" 글을 쓰는 느낌이랄까.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유머와 위트를 던지고, 가끔은 끝모를 낙관주의를 풀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장편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새까맣고, 진득하고, 들러붙는 끈끈이처럼 비관과 고통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러다 결국 주인공과 독자를 나락 저 밑까지 끌어 내린다. '비상구' 라는 단편이 보여줬던 유머와 위트는 간데 없는, 그야말로 비상구가 없는 잔인한 운명의 나락으로 휙 던져버린다.

김영하 작가의 장편은 독자의 오해가 없을, 적확하고 세련된 문장과 독자가 끼어들 틈 없는 적절하게 치고 빠지는 플롯으로 꼼꼼하게 설계된 '출구 없는 미로'와도 같다. 일전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 라는 작품의 리뷰에서 '꼼꼼하게 쌓아올린 레고' 로 비유했었는데, 내가 받은 김영하 작가의 장편들이 공히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다.   


그래서, [살인자의 기억법] 은 상당히 놀라웠다.

주인공이 '치매' 라는 병에 걸리긴 했지만, 플롯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심지어 결말은, 그야말로 미로에 미로를 끼얹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런 결말을 '아 시발 꿈!' 류의 결말이라고 부르는데, 가장 싫어하는 방식의 결말이다.

책이 워낙 얇기 때문에, 정색하고 다시 읽어봤다.


이 작품은 결말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장르적으로 접근해보자, 김영하 작가는 장르적 장치의 사용에도 능한 작가니까.

숭숭 뚫린 구멍들은 독자들의 참여를 요구하는 부분들일 터다. 


기억에 관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역시 놀란 형제의 놀라운 등장이었던 "메멘토" 였을 것이다.

단기 기억 상실에 걸린 주인공이 살해당한 아내의 복수를 하는 과정을 담은 메멘토는 관객들을 이 미스테리에 참여시키기 위한 장치를 하나 사용한다.

그것을 "문신". 중요한 키워드들을 몸에 새겨놓는다. 

이 문장들은 적확하지만, 앞뒤 맥락이 생략되어 있기에 수많은 오해를 낳는다. 

관객들은 주인공의 해석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 각자의 해석을 할 수도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

기억과, 메모, 그리고 해석.


[살인자의 기억법]에도 그러한 장치가 등장한다.

주인공 병수는 70대의 중증 치매환자로서 중요한 것들을 공책에 메모한다. 그리고 녹음기를 목에 걸고 다니며 중요한 것들을 녹음한다.

공책에 적힌 메모와, 녹음.

병수의 기억은 믿으면 안된다. 마치 실제 치매환자의 기록처럼 단편적으로 펼쳐지는 씬들은 모두 진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진실은 오로지 메모와 녹음 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사실은 병수의 입을 통해 되풀이된다.

망상과 팩트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두번째 읽을 때는 진실과 망상을 구분하기 위해 이런저런 장르적 장치들을 통해 여러가지 재미있는 가설들을 세우고 혼자 검증하며 놀았다.

이 작품은 두 연쇄 살인마, 병수와 주태의 대결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병수의 딸인 은희가 있다. 병수는 은희를 주태로부터 지켜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마지막 남은 정신을 그러모아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병수의 기억은 끊임없이 깜빡이고, 정신을 잃고 어딘가를 헤매이다가 동네 청년들이나 경찰에 손에 이끌려 정신을 되찾기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억은 딸, 은희. 

김영하 작가는 곳곳에 허방다리를 놓았다.

밟으면 빠져드는 늪이다.

장르적인 접근으로는 수많은 가설을 세울 수 있는 장치들을 요소요소에 박아 넣었다.


 가장 먼저 든 의문은 "박주태는 진실인가, 허상인가? " 였다. 

병수는 박주태라는 인물의 명함을 잘 챙기고, 공책에도 적어 놓았다. 장치에 따르면 박주태라는 인물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병수와 같은 연쇄살인마임은 확신할 수 없다. 병수는 박주태가 연쇄살인마라는 내용을 적어놓지도 않고, 녹음해 놓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혼잣말로 되뇌이기만 한다. 작품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이 녹음기에 녹음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분명한 함정이다. 하지만, 그 밖에 힌트는 없다.

결론, 박주태는 존재하지만, 그가 연쇄살인마라는 증거는 없다.


여기서 도출되는 또다른 가설은, 박주태가 병수의 또다른 인격일 가능성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가설이 가장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병수는 자신이 연쇄살인을 끝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끝낼 수 없었기에 다른 인격이 만들어져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의 초반부에 언급되는 세명의 희생자는 병수 안의 박주태가 죽였을 것이고, 그들 중 한명은 은희의 전 개인 요양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작품속에 "개" 가 등장하는데, 이 개 역시 장르적 장치로 읽으면, "병수의 개라고 인지하는 상황" 과 "병수 이웃집 개라고 인지하는 상황" 이 존재한다. 이것은 주인공 병수의 착각이라기보다, 실제로 다른 의식임을 드러내는 것일수도 있다. 

즉, "우리 개" 라고 대답하는 은희와, "우리개가 아니" 라고 대답하는 은희는 서로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 요양사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에.) 병수는 두명, 혹은 세명의 은희가 번갈아가며 등장해도 서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중증 치매 환자이다. 


 두번째 의문은 '안형사 는 누구인가?'  이다. 

안형사는 작품 안에서 끈질기게 병수의 뒤를 캐는 인물인데, 이 인물도 상당히 미스테리하다.

병수가 박주태와 안형사를 혼동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안에서 안형사의 존재는 활용도가 무척 높다. 맥거핀처럼 이용될 수도 있고, 사실은 그가 형사의 탈을 쓴 살인마일수도 있다. 수많은 장르소설 안에서 경찰은 범죄를 덮는 가장 큰 위장복이 아니던가? 

 안형사가 이중생활을 하는 연쇄살인마라면 이 역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나 이미 병수가 연쇄살인마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고, 그의 개인 요양사와 친하게 지내면서 병변을 확실히 파악한 뒤, 자신의 죄를 덮어씌울 계획을 꾸몄을 수도 있다. 

이런 가설로 이야기를 읽어도, 맞아 떨어지는 대목들이 있어서 클라이맥스의 많은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김영하작가의 장편이지만, 단편처럼 신선하고 새로운 시도들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마치 페이스 북이나 인스타에 올릴 법한 짤막한 단락들, 단락 사이에 중간 점을 찍어 명확하게 전달한 '분절' 의 의미, 수많은 생략과, 없는 듯 하지만, 정확하게 작동하는 플롯 등 도전적인 실험들이 이채롭다.

주인공 병수가 앓고 있는 중증 치매 증상에 대한 병변들도 명확하다.

작가는 발로 쓴다는 말이 있다. 만화가도 마찬가지지만, 현실을 그리는 작가에게 '디테일'은 필수다.

인터뷰 하지 않는 작가에게, 취재하지 않는 작가에게 미래는 없다. 관찰과 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이 작품을 읽고 치매나 요양사에 대한 태클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완벽한 취재와 연구가 돋보이는 디테일이 여기저기서 듬뿍 느껴진다.


장르적 재미를 차치하고, 작품이 주는 '치매' 에 대한 공포는 대단하다.

나는 '자아' 란 '타자' 가 있음으로 의미가 생긴다고 믿는다. 그것이 같은 인간이건, 동물이건, '나' 는 '너' 로 인해 존재한다. 

헌데, 내 주변의 수많은 타자들이 나의 기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사실은 내 기억과 다르고, 내가 겪었던 사건들이 내 기억과 다르며, 나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도 하나도 없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성은 "내가 나" 임을 인지하면서, 그리고 "내가 왜 나?"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짐으로써 진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증거는 대부분 '기억'에 의존한다. 타인에게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함께 했던 기억뿐이다. 치매가 무서운 이유는 그 기억들을 지워버리는 병이기 때문이고, '노화' 라는 피할 수 없는 '살아있음의 증거' 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방을 위한 노력이 없다면, 당신이나 내가 높을 확률로 피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의 지성은,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어느날 갑자기 모든 기억을 잃고, 심지어 말하고, 읽고, 쓰는 법가지 잃고, 무엇을 배워야 할 지 알려줄 부모나 선배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지성이라고 부르는 것.

어쩌면, 영혼과 가장 비슷한 것이 사라진다. 

소시오패스건, 쾌락 살인마이건, 누구에게다 동등하게 찾아오는 노년. 

이 책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살인마가 아니라, 노년 그 자체였다.

현대 영미문학의 찬란한 대가인 '필립 로스' 는 '에브리맨' 이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년은 학살이다.'

 그리고, 이 책은 노년을 맞은 학살자의 이야기.

[살인자의 기억법] 은 그래서, 무척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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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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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수많은 작품들 중 장편 소설만 6권 정도를 읽었다. 굳이 찾아 읽으려 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여기저기 그의 책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읽게 됐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20대 중반에 읽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다.
'건강하게 뚱뚱한 예쁜' 소녀(건강하게 살찐다는 개념 자체가 좋았다)가 길잡이로 등장해, 기묘한 동물이 사는 다른 의식의 세계로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의 현실판 같았다.
 [상실의 시대] 와 [어둠의 저편] 을 읽은 직후였어서 얼핏 동화같기도 한 판타지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댄스댄스댄스]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접한 나에게 그는 리얼리스트에 가까운 작가였는데, 이런 망상공상가였구나, 싶었다.
주인공의 직업도 독특했고, 세상에 대한 묘사도 이전의 작품들과는 궤가 달라서 처음엔 적응하기가 꽤나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초반 장벽만 조금 넘어서니, 그런 이질적인 느낌들이 참 좋았다.
리얼리스트가 그려내는 몽상의 세계. 
'현실처럼 뚜렷한 꿈' 이란 느낌.
꿈 속이지만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있는 느낌이 뚜렷했다. 
그래, 백일몽, 같달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한 낮에 길 위에서 문득 꾸게되는, 그런 꿈 같았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해변의 카프카] 이다.
본격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좋다고 느낀 책이었다. 외려 일부 골수팬들은 이 책을 기점으로 외면하게 된 듯도 하지만.
(어쩌면 좀 더 미래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 전반을 다룰 때, 이 책을 어떠한 기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지금 잠깐 했다.)  
 [해변의 카프카]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와 이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관의 공유'까지는 아니고, 망상공상의 범위는 현실에 가까웠지만, '비현실적인 현상이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일어나는 세계를 그린다' 는 연장선에 함께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속 판타지를 다루는 기술이 더 익숙해져서, 되도 않게 '판타지 리얼리즘' 이라는 역설같은 명칭이라도 붙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 연장선에는 당연히 [1Q84] 도 놓인다. 하지만, [1Q84] 는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던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판타지에 무게중심이 확 쏠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암살자와 종교단체가 등장하고, 패러렐월드가 차용되었으며, 책 속 인물들까지 현실에 등장하는 [1Q84]는 여러모로 장르적 장치들이 활용된 작품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여러모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물론, [1Q84]와 부모 자식처럼 닮아있다.
특히, [1Q84] 에서  후카에리의 소설 '공기번데기' 와 관련 있는 리틀피플들이 현실에 등장하는 부분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그림 속에서 이데아와 메타포가 현실에 구현되는 부분의 아이디어와 상당히 닮아있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꽤나 묘한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화가인 '나' 에게 얼굴없는 남자가 찾아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안개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는 남자이다. 화가로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고, 초상화가로서도 평판이 좋은 '나' 이지만, 이런 모델은 처음이다. 얼굴 없는 남자의 얼굴을 어떻게 그린단 말인가?!  '나'는 얼굴 없는 남자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겨우 돌려보낸다. 
책을 다 읽으면 알 수 있지만, 꽤나 오싹한 느낌을 주는 이 부분은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이다. 마치 순환구조처럼 작품의 맨 앞에도 어울리지만, 시간상으로는 작품의 가장 마지막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얼굴이 없는 남자의 방문을 받기 한참 전으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니 '나' 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뒤적여 봤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1인칭 작품에는 종종 화자의 이름이 등장하는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는 아내인 '유즈' 와 몇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이혼조정에 맞춰 별거에 들어간다. 집과 재산에 대한 처분은 일단 아내인 유즈에게 맡기고 몇주간 정처없이 홋카이도 지방을 떠돌다가 같은 미대 동기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오다와라 지역의 깊은 산골에 위치한 저택에 신세지게 된다. 이 저택은 아다마 마사히코의 아버지인 아다마 도모히코의 자택이자 작업실이었다. 마사히코는 90세가 넘은 고령에 중증 치매를 앓고 계신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면서 빈 집 관리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마침 대학 동기이자 전업 화가인 '나' 에게 선듯 내준 것이었다. 
 '나'는 집안 곳곳을 살피던 도중, 지붕으로 통하는 다락방 입구를 발견하게 되고, 그 곳에서 봉인된 듯 포장되어 먼지를 잔뜩 먹고 있던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아다마 도모히코의 그림으로 보이는 일본화로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이 그림을 찾은 뒤, 건너편 골짜기의 화려한 저택에 사는 '멘시키' 라는 인물과 인연을 맺게 되고, 한 밤 중에 정체모를 방울 소리를 듣게 된다. 멘시키의 도움으로 찾아낸 방울 소리의 근원지는 저택 뒤편 깊은 골짜기에 있는 커다란 우물과도 같은 깊은 석실이었고, 실제로 그 안에 방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뒤, 멘시키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마리에' 라는 소녀의 초상화를 그려주게 되고,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안에 있던 기사단장의 형체가 스스로를 '이데아' 라고 칭하며 '나'의 눈 앞에 나타나며 이야기는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구조적인 완성도나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정신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려고 보니 뚜렷한 중심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다닌다. 회수되지 않는 떡밥들의 잔치, 의도를 알 수 없는 맥거핀들의 향연, 비록 '나' 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내러티브들이 단지 '나' 의 주변을 멤돌 뿐, 명확히 수렴되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모더니즘 시대의 의식의 흐름에 기반한 작품들처럼 읽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다. 흡인력은 보장한다는 의미. 거침없는 아이디어 전개와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 특유의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정갈한 문장들은 여전하다.

 멘시키와 마리에, '나' 가 만들어내는 삼각 관계, 그리고 "나" 와 유즈, 그리고 불륜남과의 삼각관계, 그리고 "스바루의 남자" 등 인물관계의 설정이 굉장히 흥미롭다.
인물들이 서로 맞붙는 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재미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성적 긴장감을 표현하는 데에는 이제 명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대사 하나하나와 행동 하나하나가 직간접적으로 성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심지어 동성간의 관계에서도. 
 멘시키와 "나" 가 보여주는 케미스트리는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문화 전반에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한 재력가에, 미적인 안목도 뛰어난 멘시키는 그야말로 성을 막론한, 매력의 화신이다. 남자라면 닮고싶고, 여자라면 만나보고 싶은. "나" 가 멘시키와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나 내용, 자세와 행동에 대한 묘사들은 몇번씩 읽어도 재미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애착과 트라우마로 인한 폐소공포증이 있는 화자 "나" 의 캐릭터도 참 좋았다. 예술가다운 섬세한 성격을 드러내기에 좋은 장면들을 무척 설득력 있게 그려냈고, 표현들도 아주 세심해서 그의 삶 자체가 부러울 정도였다.
'스바루의 남자' 는 얼핏, 맥거핀처럼 보였다. 중심 서사의 주변에서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매우 잘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맥거핀이랄지, 떡밥이랄지, 그렇게 중심 스토리의 긴장감을 완화하거나, 가중하는 등 장치의 사용에 무척 능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정말 빛을 발한다. 

 내가 이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서사적으로 겉돈다고 느낀 부분은 이데아와 메타포, 그리고 그림 속 세계에 대한 부분이다.
이데아나 긴 얼굴의 남자(메타포) 같은건 집어 치우고, 인물들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었어도 굉장히 밀도 깊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됐을 것 같다.
 결론만 놓고 보면, 이데아와 메타포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과거를 서술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이들 존재가 '역사적 사건' 을 끌어내기 위해 다소 억지로 갖다붙인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절대적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서사 자체가 비틀리는 느낌이었다.
 
 소설에서 작위적인 설정이 과연 단점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 소설이 곧 작위적인 이야기 아닌가' 라고 대답할 것이다. 작위를 숨기는 것이 소설의 '기술' 일 수는 있겠지만, 그 기술의 수준으로 소설의 완성도나 의미를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이데아'와 '메타포'의 등장과 활용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다.
[1Q84]의 세계처럼 패러렐 월드를 상정한 것도 아니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처럼 "의식핵" 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데아의 등장은 정신분열처럼 불현듯 등장하고, 그 모습도 뜬금없다.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온다.

  물론 독자들에게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의도였을 수는 있으나, 비슷한 장치가 사용되는 [해변의 카프카] 같은 작품과 비교하면, 관념적이고 신화적인 피안의 존재들 피상의 세계로 불러오는 방법이 거칠고 투박하다.
 특히, 뭐든지 "모른다" 고 설정들을 얼버무리는 방식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이질적인 존재를 이 세계로 불러들이는 방식은 판타지 작가들도 잘 하지 않는 방식이다. 마법을 쓰거나 드래곤이 등장하는 데에도 세계관에 따른 명확한 개연성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이데아와 메타포의 등장은 뜬금없을정도로 개연성이 없고, 이들의 존재적 증명에 관해 이야기 안에 어떠한 힌트도 없다. 무슨 이유로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다른 세계와의 접점이 생겼으며, 이데아라는 자가 어떻게해서 현실에, 그것도 "나" 와 "도모히코" 에게만 보이는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또 그 세계가 지하 석실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그 어떤 인과관계도 제시되지 않는다. 단순히 "모른다" 고 얼버무릴 뿐이다.  
캐릭터의 등장과 활용에 비하면 허술하게 툭툭 던진 느낌인데, 이것이 의도적이라면, 어떤 의도였을지 감이 잘 안잡힌다.

 일단, 그렇다 치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이데아와 메타포를 매우 '뜬금없이' 등장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 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물고기 비가 내린 것 처럼(이것은 실제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뜬금없는 쪽으로 흐르게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데아" 였을까? 왜 하필 "메타포" 였을까?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하루키가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 부분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주인공 "나" 는 화가이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미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
미술을 손재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림은 사실 '손'의 재능보다 '눈'의 재능이 더 필요하다.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실제 스케일의 오브제들을 캔버스라는 제한된 공간안에 적정 배율로 축소시켜 집어넣는 과정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뇌에서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직관적으로 이뤄지는 속도가 '그림' 의 재능이다. 
 가끔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릴때 연필을 든 손을 쭉 뻗어 비율을 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렇게 정확하게 축소시킬 수 없다. 때문에 연필을 가늠자로 이용해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자신의 눈과의 거리에 따른 배율을 측정하여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의 일정 수준에는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 화가의 성격이나 재료의 사용법에 따라 약간 편차는 있지만, 시간을 들이면 누구나 대가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때문에 미술 작품의 완성도는 붓질이나 재료의 활용도로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정도로 과감한 사용법이나 활용도는 인정받지만, 연습하면 누구나 똑같이 따라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똑같은 붓과 물감, 종이를 주고, 똑같은 사과를 줘도, 100개의 완전히 다른 사과 그림이 나온다.
 눈은 뇌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배아가 태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뇌에서 더듬이처럼 두개의 줄기가 뻗어나와 눈이 되고, 꼬리처럼 줄기가 뻗어나와 중추신경이 된다. 중추신경은 뼈와 근육, 피부로 감싸지지만, 눈은 그렇지 않다.
 눈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돌출된 뇌'인 것이다.
화가들이 해부학을 공부하고, 산업디자이너들이 기계공학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무조건 뇌를 거친다. 그리고 화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것들로 필터링되어, 손을 통해 캔버스에 옮겨진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에서 나온 인물들의 이름이 "이데아" 이고, "메타포" 인 이유일 것이다.
화가의 그림속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어떠한 현실이 화가의 머릿속에서 분해되고 재구성되어 종이 위에 새로운 형상으로 재조합된다. '정신(이데아)' 과 결합되어 일종의 아이콘화, 혹은 도식화, 혹은 기호화, 혹은 이미지화(이 모든 것들을 '은유(메타포)' 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는 은 일종의 기록화이다. 과거에 오스트리아에서 겪었던 사건은 도모히코의 삶을, 삶에 대한 시각을 변모시켰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손을 통해 뇌 밖으로 흘러나와 캔버스 위에서 형체를 얻었다. 
다른 장르의 그림들보다 더더욱 정신과 은유와 관련이 깊다.

 그렇게 읽다보니, 얼핏 맥거핀처럼 사용된 "스바루의 남자" 가 "나" 에게는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사실이 읽혔다.
마리에의 감상이었던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다' 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을 터. "나"는 스바루의 남자를 그리면서 창작자로서의 '벽' 을 인지한다. 자신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한 '이데아' 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어쩌면, "나" 가 홋카이도를 여행했던 그 남자는 아직 그리지 않은 '스바루의 남자' 에서 튀어나온 이데아일수도 있다. 과격한 방식으로 성관계를 맺었던 여인은 역시, 아직 그리지 않은 그림에서 나온 '메타포' 였을수도 있고. 

자신의 창작물이, 생명을 얻고 형체를 얻는다는 것. 그림을 그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은 생명을 얻는다. 
"나"가 이혼중인 아내 유즈와 꿈속에서 관계를 맺었던 것 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아이가 잉태된 것 처럼.
 창작자들에게 창작물은 자식과도 같다.
애정과 정성을 쏟는 대상이고, 산고의 고통에 비한다는 창작의 고통도 있지만, 완성되어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순간이야말로 자식의 탄생과도 같다. 창작물들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순간, 아이가 부모의 의도와 상관 없이 독립된 인격체로 자라나듯이, 작품 역시 창작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으로 나름의 생명력을 얻기도 한다.

 어쩌면 도모히코에게 [기사단장 죽이기]는 '원치 않았던 자식' 같은 작품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지 말았어야 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나' 가 마리에의 조언으로 '스바루의 남자' 그리기를 멈춘 것 처럼, 도모히코도 '기사단장 죽이기' 그리기를 멈췄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도모히코가 [기사단장 죽이기] 를 그린 정확한 시점이 작품 속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일본화로 완전히 전향한 후가 아닌, 전향을 고려하던 '도중' 에 그렸을 것 같다.
 충분한 수련을 거치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전. 서양화가에서 일본화가로 전향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작품 발표를 하지 않는다고 화가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췄을 리는 없다.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 여러 이유로 일본화로 화풍을 바꾸는 동안 많은 습작을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사단장 죽이기] 는 마지막 습작이 아니었을까?
 도모히코가 공백기동안 몰두했던 그림은 온전히 자신의 치유를 위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도모히코는 일본화로부터 작은 치유를 경험했고, 전향의 계기가 마련됐을 것이다. 어쩌면 서양화의 본고장이나 다름없는 오스트리아에서 얻은 상처였으니, 서양화 자체가 상처를 들쑤시는 것이었을수도 있고.
여하튼, 도모히코는 과거의 것들을 떨쳐버리기 위한 그림을 그렸을터다. 그리고 그 와중에 과거의 기억을 은유하는 상징으로 가득찬 그림을 그려버린 것이다.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에 녹아든 심상(이데아)는 "죽음" 이다. 
  "나" 가 "얼굴 긴 남자; 메타포' 를 따라 방문했던 공간에 있던 거대한 강은 사후 세계로 건너가는 레테의 강이 연상된다. 도모히코는 그림 안에 "죽음" 이라는 이데아를 메타포로 투영했다. '기사단장'의 형태를 한 이데아의 죽음을 통해 메타포가 등장하고, 그 뒤의 일들이 벌어진 이유이다.
죽음이 죽는 역설.
어쩌면 그것이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여는 키였을지도 모른다.
이데아, 메타포, 그리고, 역설.  

 어쩌면 도모히코와 "나" 가 나누는 관계는 일본의 전쟁세대와 전후세대의 단절이나 소통, 뭐 그런 평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갈등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는 수많은 작품들에 넘치고 넘쳤으니, 특히나 사람 관계를 잘 그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굳이 중증 치매로 인해 말도 안통하는 노인을 전쟁세대의 메타포로 활용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예술 작품이 품고 있는 의미와 해석, 그것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과 가치는 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후대로 전달된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오히려 예술에 몰두한 예술가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예술가, 즉, 과거시대의 예술가와 현대시대의 예술가의 차이를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확실한 건, "나" 는 도모히코와 다른 아버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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