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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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 리쿠의 작품을 펼칠 때는 언제나 마음이 편하다. 

그녀는 사람들을 참 좋아하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긍정이 묻어나고, 작품 안에는 그 어떤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마저 단어로 감싸안는다. 문장으로 포옹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동안 일본 미스테리 문학계에서 손꼽히는 장인이다.

살인도, 납치도 없이 순수하게 '미스테리' 만으로 강렬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에는 허망한 허무주의도, 죽음에 대한 자기파괴적인 동경도 없다. 

삶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지혜, 충실한 즐거움.  

'인간의 상상력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는 명제에 충실한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는 상상력으로 인한 오해와 거짓말, 추측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이 온통 미스테리와 수수깨끼 투성이인 이유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모든 미스테리와 수수깨끼가 풀리는 이유 역시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온다 리쿠는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활용하는 작가이다.

물론 그녀가 장르소설 작가인 것은 확실하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범인, 형사처럼 쫓는자와 쫓기는 자가 만들어진다. 비밀을 숨기려는 자와 파헤치는 자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명백한 장르적 장치들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들을 활용하는 방법은 여타 미스테리 스릴러들과 전혀 다르다. 


 온다 리쿠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는 "대화" 와 "추억(기억)" 그리고 "성장" 이다. 

일정한 수의 인물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는 설정 역시 장르적 장치이지만, 등장인물들이 모여있는 공간 안에서는 어떠한 살인도, 폭력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오손도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화제는 굉장히 다양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얽혀 있는 질기고도 진득한 과거의 기억에 관한 내용으로 수렴된다. 이 과정 안에 심리적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등장하고, 비밀을 갖고 있는 자와 그것을 파헤치는 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여 힌트를 찾아내듯이, 서로가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고, 대화 안에 일종의 함정들을 만들고, 때로는 과거의 단초를 찾아 비밀들을 끄집어낸다. 

'그때,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리고 그 때 나의 행동이 그녀에게 어떤 결과를 미쳤나?'

마치 나비효과처럼, 내가 과거에 했던 사소한 선택이 현재의 그를 엄청나게 바꾸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등줄기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에, 내가 했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선택. 

온다 리쿠가 일본 팬들 사이에서 "노스탤지어의 전령사" 라고 불리우는 이유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을 읽으면 여지없이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당시에 했던 선택들과, 내게 미쳤던 여러 결과들. 

그것들을 생각하면, 금새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고, 곧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시절에 대한 깊은 향수에 젖는다.

그래서 그녀는 노스탤지어의 전령사인 것이다. 국내에선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고 번역되지만, 그 명칭만큼은 일본식이 좋다.  


[꿀벌과 천둥]은 온다 리쿠의 이러한 특징들이 모두 녹아있는 작품이지만, 한가지, '무서운 상상력' 은 빠져있다.

이 작품은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라는 피아노 경연대회(?)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룬 이야기이다.

미스테리의 여왕이, 미스테리를 버렸다. 그 사실만으로 깜짝 놀랐더랬다.

판타지나 미스테리 잡지가 아니라, 음악 잡지에 기고되었던 소설이 묶여 나왔더랬다.

신박한 음주 이야기나 여행 이야기가 에세이로 묶여 나온 적은 있었지만, 소설은 언제나 미스테리와 판타지의 대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는데. 음악소설이라니.


이야기는 이미 저명한 피아니스트인 미에코로부터 시작된다.

역사는 짧지만, 수상자가 일약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성장하면서 함께 명성을 얻은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 에 참여할 경연자들을 뽑는 오디션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자리였다.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의 오디션은 모스크바, 파리, 밀라노, 뉴욕 그리고 일본 요시가에에서 열리고 있었고, 서류 심사를 통과한 연주자들이 각지에서 펼쳐지는 오디션을 거쳐야 콩쿠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파리 심사를 맡은 미에코와 오랜 동료들은 그 자리에서 깜짝 놀랄만한 재능을 만나게 된다.


"엄청난 재능을 목격한다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p.37

 

 각지에서 오디션을 통과한 피아니스트들이 일본 요시가에로 모여들어 국제 콩쿠르의 예심이 시작된다.

이야기가 주목하는 인물은 총 네명.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는 천재 피아니스트였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난 뒤 연주에 대한 흥미를 잃고 무대를 무단으로 이탈하고 수년 째 평범한 학창생활을 해나가던 소녀 에이덴 아야.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프로 솔로 연주자로서 시니어 무대에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피아노를 너무 사랑했지만, 생업으로 삼지 못하고 악기점 매니저로 평범한 삶을 이어가는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음악의 신이 내려보낸 것과 같은 천재소년 가자마 진.

이 네명의 인물이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에서 수많은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서로의 음악을 겨룬다.

  

온다 리쿠의 소설답게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서로에게 얽혀 풍성한 드라마를 펼쳐내는데, 그들의 이야기도 정말 너무 재미있지만,  작품 전반에 펼쳐지는 장대한 음악과 연주에 대한 묘사가 정말이지 '끝내준다'!!!  

다시 말하지만, 온다 리쿠는 인간의 "상상력" 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상력" 으로 인한 사건을 겪고, "상상력" 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690여 페이지가 넘는 볼륨 안에 수많은 피아노 곡과 연주가 묘사되어 있는데, 당연하게도 음악과 연주는 모두 '텍스트' 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

이번 작품에서도 온다 리쿠는 인간의 "상상력" 을 가장 큰 무기로 삼았다.

바로 우리들. 독자들의 상상력이다. 


 음악과 연주에 관한 수많은 묘사들 중 진부하거나 중복되는 표현이 거의 없다.

음악에 대한 묘사를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오감을 자극하는' 문장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장문과 단문, 은유와 직유, 비교와 비유. 그야말로 수사법의 백과사전이다. 그리고, 상상력의 보고이다.

문장들이 상상력을 엄청나게 자극한다!!   

그래선지, 오히려 음악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감동을 준다.(정작 음악을 찾아 들으면 졸립....쿨럭.)

독자들의 머릿속을 열고, 상상의 피아노를 연주한다. 

텍스트가 움직이는대로 머리속에 빛이 팡팡 터지며, 들어본 적 없는, 들을 수 없는 음악들이 연주된다.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책 전체를 옮기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지금 막 넘기면서 눈에 띄는 구절을 몇구절만 옮겨보겠다. 


"베토벤의 곡이 가진 독특한 벡터가 소년의 손가락 끝에서 화살처럼 홀을 향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p.37


"객석 전체가 하나의 귀가 되고 눈이 되어 달아오르고 있다. 무대 위의 청년은 그 열기에 지거나 눌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관객의 추파를 받아들이며 그에 응하고 있다. (...)

 한 음, 한 음이 깊고 풍부하다. 그대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벨벳으로 감싼 것 같다. 그런데 간결하면서도 조금 냉소적인 바로크읭 ㅜㄹ림이 뚜렷이 드러난다.

음, 장식음이 아름답네. 아야는 혀를 내둘렀다."  p.188


"뭐야, 이 소리는. 어떻게 내고 있는 거지?

마치 빗방울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내리는 듯한....(...)

조율만으로 소리가 이렇게 달라질 리 없다. 이 아이 전에 나온 참가자도 같은 피아노로 연주했다.

어째서 이런, 하늘에서 소리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멀리서, 또 가까이서, 마치 피아노가 혼자 노래하는 것처럼 주선율이 차례로 떠올라 여러 연주자가 연주하는 음악을 스테레오 사운드로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렇다. 소리가 기가 막힐 정도로 입체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p218-219


"모차르트 본연의 시원스러운 지고한 멜로디. 진흙 속에서 순백의 꽃망울을 틔운 탐스러운 연꽃처럼, 아무런 주저도 의심도 없다.

쏟아지는 빛을 당연하게 두 손 가득 받아들일 뿐이다.

이 아이, 앉았을 때부터 계속 웃고 있다.

아카시는 눈치채고 있었다. 건반을 전혀 쳐다보지 않는다. 소년이 피아노를 연주한다기보다 피아노가 소년을 연주로 이끄는 것 같았다.

그가 피아노를 부르면 피아노가 기거이 그에게 화답하는 듯한."

p. 220


"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 음악을 드넓은 곳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요? 

소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가만히 선생님에게 속삭였다.

언젠가 반드시 선생님과 약속한 대로, 음악을 데리고 나가겠어요."

p.310




 결국 이 작품은 '기프트'; 재능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이야기이다.

아니, 재능을 받은 자들 중에서, 좀 더 좋은 행운을 만난 자들의 이야기랄까. 

안타깝게도, 예술적 재능은 사람마다 크나큰 격차가 존재한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루브르 미술관 문턱에서 좌절하며 돌아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 옛날 사람들의 기예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 책에는 정확한 타이밍에,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찾아내, 그것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붓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심사위원, 경연에 참여한 피아니스트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피아노 조율사는 물론 주인공들의 가족, 친구들까지 대충 보아 넘길 사람들이 없다. 한명한명이 다 다정하고, 상냥하다.

 하지만, 상냥하고 다정하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작품의 중심 소재는 "콩쿠르". 인생과 자존심을 건 경연인 것이다.

인물들은 상냥할지언정, 평가는 날카롭고 매정하다. 연주가 끝날 때 마다 연주는 냉철하게 평가되고, 반응은 그 즉시 나타난다. 

그렇기에 음악에 대한 묘사를 읽는 즐거움도 상당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카자마 진, 마사루, 아야, 아카시 중 누가 우승하게 될지, 그 결과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네명의 뜨거운 각축전이 [꿀벌과 천둥]의 가장 강력한 서스펜스 요소인 것이다.

온다 리쿠는 무척 노련하게 독자들과 밀당하며 이 네 명의 대결을 무척 흥미롭게 펼쳐놓는다.

끈끈하게 이어진 인물들의 드라마만큼 승부의 결과에 대한 긴장감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인물들에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승부가 심장 쫄깃하게 펼쳐진다.  


 그와 동시에,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카르텔에 새로운 세대들이 비집고 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젊은 세대를 착취하고 기만하기에 바쁜 기성세대에게 날리는 통렬한 일침이고, 위대한 재능을 눈 앞에 두고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까봐 노심초사하는 어른들을 향한 일갈이다.


"말 그대로 그는 '기프트' 이다.

아마도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시험받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이자 여러분이다.

그를 '체험' 하면 알겠지만, 그는 결코 달콤한 은총이 아니다.

그는 극약이다.

(...)

그를 진정한 '기프트' 로 삶을 것인지, 아니면 '재앙' 으로 삼을 것인지는 여러분, 아니 우리에게 달려있다."

p.41



 클래식. 

이 얼마나 고루한 단어일까.

하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예술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는 너무나 중요한 그 일부이다.

수백년 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삶답게 만들어준 단어인 것이다.

인터넷 세상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축복은 누구나 많은 클래식들을 집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일터다.

물론, 직접 가서 듣는 것 보다는 떨어지고, 엄청난 가격을 호가하는 장비들과 싸구려 스피커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클래식은 불과 200여년 전만 해도 선택받은 소수의 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으나, 아무나 다다를 수 없는 경지.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아무나 알아볼 수 없는 능력.

누구나 꿀 수 있으나,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꿈.

누구나 받았지만, 아무나 일깨울 수 없는 재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선사하는 이들의 이야기.

[꿀벌과 천둥] 

참 좋았다. 



*참고로 작품에 등장하는 연주곡들의 선집 음반이 발매되었다.

http://music.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5686825

노다메 칸타빌레 앨범도 여러장 있는 걸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귀로 즐기는 것보다 온다 리쿠의 텍스트만으로 즐기는 것도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음악 듣고 온다 리쿠의 텍스트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궁...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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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차무진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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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릭시르의 한국 작가 장르문학 라인은 정말 최고인 것 같다.

[궁극의 아이], [불로의 인형], 그리고 [해인]에 이르기까지. 

아주 신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익숙한 개념들과 중심 스토리의 조화가 무척 뛰어나다.

세련된 문체와 유려한 필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관과 설정을 억지로 현실 세계에 가지고 들어오면 자기 파괴적인 오류가 일어나곤 한다. 팬들은 흔히 "설정 오류" 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장르적 완성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이야기의 흥미마저 떨어뜨린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을 키워 나가는 '팩션' 이라는 하위 장르의 경우는 더 위험하다.

상상력을 덧대 실제 역사적 사건의 인과를 재조합하는 작업은 '역사소설'은 물론 '역사서'에도 필요한 일이다.

'팩션' 은 그러한 인과에 완전히 세계관이 다른, 생경한 개념을 집어넣는 일이다.

주술이나, 마법, 특별한 능력을 지닌 초인이나 불사인 등 말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을 직접 다룰 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오류를 가늠한 '눈' 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해인]은 '아기장수 설화' 를 모티프로 아기장수를 잉태할 '성모' 와 성모를 수호하는 '박마' 라는 존재를 만들어 역사의 이면에 녹아들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자칫 세계관을 설명하다가 끝날 수도 있는 복잡하고도 장대한 설정이 세밀하게 정립되어 있다. 

시점상 현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조선시대로 훌쩍 거슬러올라가며 성모와 박마, 아기장수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아기장수는 현실을 뒤엎을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사람이다. 아기장수가 무사히 태어나, 자라나면 세상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제대로 정기를 물려받지 못한 아기장수의 혁명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혁명에 실패한 사람들은 거의가 '쭉정이' 아기장수였다.

성모는 아기장수를 수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여성이고, 남자의 씨와 관계없이 아기장수를 가질 수 있다. 박마는 성모가 아기장수를 잉태하면 아기장수가 무사히 태어날 때 까지 성모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 특수 요원이다. 성모가 아기장수를 무사히 낳지 못하면 박마는 죽거나 승려가 되야 한다. 새로운 성모가 태어나면, 새로운 박마가 그 역할을 물려받는다. 지역마다 비밀리에 양성되는 박마들이 있다. 소수지만, 천문, 지리, 무술에 능통한 박마들은 성모가 태어나면 자신의 임무를 시작한다. 

 하지만, 백한은 벌써 몇번이나 눈 앞에서 성모와 아기장수를 잃었음에도 이 땅 위에 살아있다. 죽기는 커녕, 불사의 몸이다. 그가 지켜야 할 성모 '숙지' 가 영원히 성모로 다시 태어나는 저주와도 같은 윤회에 갇혔기 때문이다. 아기장수를 잉태할 숙지가 영원한 윤회를 되풀이하게 된 계기는 한때는 친구이자 연인, 형과도 같았던 '만인' 이라는 박마였다. 만인은 백한과 함께 영원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숙지를 살해한다. 백한은 만인을 막고 숙지를 지켜내야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항상 한 발씩 늦고 만다. 

만인은 고려시절, 여진족이었던 백한을 박마 스승인 '백지' 에게 소개해준 인물이기도 했다. 백한은 백지로 인해 불사의 몸을 얻었고, 박마의 칭호까지 얻었다. 그 사이에 '숙지' 라는 성모가 나타났다. 

백한은 숙지를 사랑하지만, 숙지는 백지를 사랑했고, 만인은 숙지에게서 태어날 아기장수를 보필해 혁명의 한 축을 담당할 계획을 세운다.

영원한 술래잡기의 시작이었다. 


작품의 서사는 널을 뛰듯 시간축을 평행으로 옮겨다니지만, 읽기는 쉬운 편이다.

저자가 친절하게 연도를 알려주고, 이자춘(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순신(충무공), 전봉준(동학농민운동), 윤심덕(사의 찬미)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내세우기에 시대가 헷갈릴 이유는 없다. 설사, 헷갈린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중심 흐름에서 벗어날 일은 없다. 

작가가 애초에 시간의 흐름을 뒤섞은 이유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조금 헷갈리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메인 혼란' 에 지장을 줘선 안된다. 시간축은 양념이자 미장센일 뿐, 진정한 혼란은 클라이맥스 부분에 느닷없이 달려든다. 

시간축을 흐트러뜨린 것은 오롯하게 엔딩을 위한 것으로, 세심히 읽어보면 반전의 단초들이 섬세하게 자리잡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인 백한과,  안타고니스트랄 수 있는 인물, 만인이다. 

백한은 만인으로 인해 박마가 되었지만, 끊임없이 그를 옭아매는 그림자다. 언제나 '한 발 빠른' 그림자. 이것이 반전의 힌트.

이 두 인물의 독특한 설정이 이야기에 강력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해인]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고려시대 에피소드는 역시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데, 특히 만인과 백한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만인과 백한은 수직적인 관계다. 군인인 이들은 실제 지위상으로도 그렇고, 실력면에서도 그렇다. 거침없는 폭력과 동성애적 행위들이 공존하는 이 둘의 관계는 정립된 직후부터 최후의 그 순간까지 변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폭력과 섹스는 특정 인물들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치였지만, 이 작품이 활용한 방식은 꽤나 흥미로웠다. 어쩌면,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 - 특히 섹스라는 장치를 사용함에 있어 품고 있던 낭만주의나 나이브함이 확 깨지는 느낌이었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눅진하고 질퍽한 불쾌감이 녹아있다.

임신, 낙태, 태아살해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필연적으로 사람을 가르고, 베고, 피를 쏟아내는 장면들 또한 끊임없이 등장하는데다가, 끊임없이 실패하는 백한에 대한 정서적인 피로감이 중첩되고, 사실은 결말조차도 개운하기는 커녕 더 진창속으로 잡아 끄는 내용이어서 템포조절에는 다소 실패한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정서적으로 안도감을 줬으면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그럴만한 대목에서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 드러나는 바람에 카타르시스나 위안보다는 혼란과 충격이 강했다.

그 뒤에라도 다소 정신적인 여유를 줬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주구장창 괴롭기만 한 이야기는, 다음이 기대되지 않으니까...

투비 컨티뉴?? 영원히 고통받는 백한!!! 읽기싫어!!!! ㅜㅜㅋㅋㅋ 


그래도 소재 발굴부터, 여러 장치들까지. 장르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술들을 골고루 맛본 느낌이었다.

여러모로 공부할 가치가 있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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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더 Vol. 2 : 기계 달 시공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지음, 더스틴 웬 그림, 임태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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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소년 아톰의 스페이스 오페라 버전.
이렇게 표현하면 이 작품 팬들이 들고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주인공 팀-21은 분명 아톰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단지 유사하다고 언급해도 상관없다. 나는 이 유사성을 결코 이 작품을 깎아내리기 위해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다. 감정을 느끼고, 부모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소년 형태의 로봇은 아톰 이후로 명백한 전형성을 갖게 되었으며, 수많은 작품들이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더 과거의 작품들을 파헤쳐보면, 소년형태의 인공물이 사람의 마음을 갖는다는 아이디어는 여기저기 널려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이 작품은 '만화' 이고, 나는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고 자란 한국남성으로서 '팀-21'을 보는 순간 아톰을 떠올렸다.
다시 말하지만, 팀-21과 아톰의 유사성은 단지 캐릭터 뿐으로, 이 작품의 평가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고, 혹시나 이 글을 보게 될 다른 분들의 감상과 평가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기 바란다. 

이 작품은 SF의 팬들에게는 "대단히 신선한" 아이디어로 시작하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많이 본 아이디어들을 설정화 해서 시작하는데, 특히 "지구가 멈추는 날" 이나 "우주전쟁" 같은 고전 SF의 아이디어들을 한층 세련되게 꾸미고, '터미네이터' 의 설정을 가져와 우주적인 스케일로 펼쳐놓는다.
아직 2권까지밖에 보지 못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순 없지만,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작화가 더스틴 응우옌의 유려한 수채화다. 그림체 자체도 명확하고, 뎃셍도 아주아주 적확한 것은 물론, 연출과 색감도 아주 인상적이다.
요새는 디지털 툴이 워낙에 잘 나와있음에도, 수작업으로 작업한 것 같다. 
물감이 번지는 느낌과 종이의 질감이 잘 드러나 있어서 참 좋았다.
수많은 필터들이 난무하는 요새의 그래픽 노블과 확연하게 느껴지는 따뜻함과, 기술력이 돋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로봇에 인격이 부여되는 소재의 작품들은 많다.
이제는 일종의 레퍼런스로서 공공의 재화처럼 사용되므로, 결국은 그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 것이냐의 문제다.
그리고 만화의 경우, 연출과 컬러, 디자인을 포함한 작화까지 더해지면, 응용범위는 무궁무진해진다. 
인격을 가진 소년 로봇이 자신을 구입했던, 처음으로 사랑해줬던 인간을 찾아나선다. '엄마' 라는 그 인간은 이미 죽었고, 자신과 친구로 어린시절을 보냈던 소년은 로봇 사냥꾼으로 자라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인간과 로봇이 서로를 증오하며, 거대한 전쟁이 막 시작된 장대한 우주에서, 나이를 먹지 않은 소년 로봇이, 이제는 성인이 된 인간을 찾아나선다. 
프랑스 작가의 이야기와 베트남 작가의 그림이 만나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를 아날로그 기술로 그려낸다.
이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음권 언제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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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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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속죄] 이후 두번째였다.

영미문학에서는 이미 지울 수 없는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고, [속죄] 역시 굉장히 푹 빠져 읽었었는데, 왠지 그의 전작들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엄청 하드코어하다는 소문도 알고 있었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아함과 고상함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넛셸]은 솔직히 다 읽은 뒤,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물론 훌륭한 작품이고, 보기드문 소재를 대가다운 빼어난 능숙함으로 잘 버무렸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폐부를 파고드는 느낌은 없었다. 

'햄릿' 을 모티프로 했다지만, 나는 비교비평의 '교' 자로 모르는 사람이기에, 굳이 견주어 보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직전에 '햄릿' 을 읽었기에, 조금 의식한 정도.

전지적 '태아'시점이라는 스토리 텔링의 접근방식은 대단히 신선하고 흥미로웠지만, 정작 스토리 자체가 새로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진부한 스토리를 바라보는 접근법은 사실 국내외의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시도하는 것들이고, [넛셸] 이 보여준 그것도 크게 신선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북쉐어링 모임에서 들었던 이언 매큐언의 토크쇼 동영상이 떠올랐고, 유튜브를 찾아 들어가봤다.

이언 매큐언의 풀네임을 영어로 검색하니 수많은 동영상이 떴다. 영어 일자무식자이지만, 유튜브 번역 자막을 켜서 단어들을 유추해가며 영상들을 몇 편 찾아봤다. 

물론, 전작을 고작 한편 읽고, 유튜브로 영상 몇 편 찾아보고, 씨알도 안먹힐 작가주의비평의 흉내를 내려는 것은 아니다.

역시 나는 비평의 '평' 자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단지 그의 눈빛과, 목소리, 인터뷰어를 대하는 태도 등을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얼마전, 나는 [넛셸]을 읽는 새로운 키워드가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공 태아는 기본적으로 모든 등장인물들을 얕잡아 보고 있다.

태아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볼 수가 없다. 양수를 통해 전달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어머니가 듣는 소리들, 뱃가죽을 뚫고 들어오는 소리들을 통해 단지 '추측' 할 뿐이다. 그는 실재하는 것들을 그 어떤방식으로도 실증할 수 없는 상태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잣대로 가치 판단을 하고 평가한다. 심지어 팟캐스트나 뉴스 등의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인류와 문명의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는데, 태아가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의 일부 '지배층'과 대부분의 '지식층'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탁상공론만 늘어놓는 지도자들, 실천하지 않는 지식층,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다지 인과관계가 없는 낙관론들, 대안 없는 비판과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이론들.  끝 모를 데 없는 오만과 교만, 편견으로 가득 찬 시각.

그리고, 결코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주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한 수 아래' 로 보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존재가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독한 아이러니를 이야기 전체에 관통시키자 [넛셸]의 문장들에서 새로운 느낌들이 생겨났다.


어쩌면, 이언 매큐언은 인류 전체에 대해 영국식 유머를 가득 담은 블랙 코미디 한편을 선사한게 아닐까.

풍자의 대상은 인류 문명 그 자체이자, 지독한 낙관론, 그 자체인 것이다.

엄마 뱃속에서 풀어내는 철학이나 예측, 낙관론에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 태아는 '태어나지 못할 수' 도 있다. 실제로 이 주인공은 유산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공포스러워한다.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보다 절망적인 쪽으로 이끌어가는데, 어쩌면 이것은 이언 매큐언이 생각하는, '1%의 양심'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결단으로 바닥에 고인 피와 양수 안에서 태아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어머니의 외모' 이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 비하나 외모 비하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성,심지어 어머니의 '외모'에 관심을 빼앗기는 인간 남성-특히 엘리트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젊고 예쁜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올려보면ㅋㅋ- 에 대한 풍자이자 조롱이다. 

주인공 태아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집단에 대한 메타포로 읽었더니, 이 엔딩이 [넛셸] 이라는 한편의 우화가 갖는 엄청난 완성도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물론 내 해석들이 모두 곡해이고, 지나친 독법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책은 독자들의 것이고, 독서의 열매는 각자 알아서 따먹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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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4모 - 박근혜 4년 모음집, 본격 시사인 만화 2013~2017
굽시니스트 지음 / 시사IN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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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고 보니, 짧았던 것 같은데. 박근혜 정부도 무려 4년이었다. 

2017년 5월 29일 공판때 박근혜는 혼잣말로 '다 조작이야' 라고 궁시렁 거렸고, 급기야는 문에 발가락을 찧었다며 MRI까지 찍는 희안한 일을 벌이고 있다. 정유라의 결정적 증언에도 이재용은 사실 삼성의 실세가 아니었다는 말로 최악의 사태를 피해가려 하고, 최순실과 변호인측은 여전히 사법부를 농락하는 듯 고성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그네들의 정신세계를 알 것 같다.

이 책은 이제는 시사만화계의 거두로 자리잡은 '굽본좌' 굽시니스트가 시사인에 장기 연재중인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박근혜의 집권기간동안 연재된 분량을 묶은 책이다.

본격 시사인 만화가 2권까지 나왔으니 3권인 셈이다. 

아무래도 박근혜 집권기는 기존의 대한민국 정치사와 사뭇 다른 부분이 있어설까, 기존의 시리즈를 이어가기보다 '박4모'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편집부의 의도가 좀 궁금하긴 한데.... 문재인 정부는 어쩔라구???? @,@

아마 박근혜 정부를 우리나라의 '정부' 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보이는 듯도 하고.

 

 굽작가 책의 트레이드마크인 각 편마다 달려있는 해설도 역시 그대로다.

패러디로 사용된 작품들과 책이 묶이기 직전 소회를 풀어내듯 몇줄씩 코멘트가 달려있는데, 탄핵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라 당시에는 어처구니 없었던 몇몇 결정들이 지금 보니 '그랬구나' 싶은 부분들이 많다.


2012년 10월,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와 박근혜 당선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2017년 4월, 문재인과 안철수의 양강구도로 막을 내린다.

윤창중의 발탁과 낙마, 문창극 총리 후보 지명,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의 미스테리한 마무리와 무시무시한 크래킹 프로그램을 통한 도감청 의혹 등등. 빨간 마티즈 안에서 사망하신 국정원 직원분은 제대로 눈이나 감으셨을까... 세월호 아이들에 비할수는 없겠지만, 원통한 죽음도 꽤 많았던 4년이었구나, 싶다.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지난해 촛불혁명부터 문재인 정권의 출범까지, 고작 1년 남짓이었다.

최순실의 태블릿이 발견된 지도 이제 1년 넘어, 2년째인거고.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엄청나게 많다. 박근혜, 최순실, 이재용의 공판은 끝나지 않았고, 블랙리스트의 김기춘, 조윤선도 마찬가지.

심지어 조윤선은 무죄 선고를 받고 호화로운 집으로 돌아갔다. 

최순실의 은닉 자금은 세계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규모로 발견되고 있으나 환수법은 지지부진하고, 동네 건달들의 강령 같은 혁신안을 발표한 박근혜 정부의 일등공신 자한당은 사사건건 적폐청산의 앞길을 막고 있다. 

박근혜 탄핵도 쉽지 않았으나, 앞으로의 길도 험난하다.

미국은 여전히 우리 정부를 따 시키고, 중국은 여전히 민간 기업들을 내몰면서 압박 하고, 그 와중에 북한은 미사일을 펑펑 쏴댄다.

일본은 스스로 정한 평화헌법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며 우리의 영토와 역사를 걸고 넘어지며 분쟁을 조장하고. 

동아시아의 지형은 북,중,미 대 한,미,일의 대결구도가 선명해진 가운데, 한국에서 먼저 정치적인 환난이 잘 극복됐고, 일본에서도 극우 정권을 향한 의미있는 움직임이 포착되는 중이란다. 


우리의 역사는 언제나 위기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위기 끝에 문민정부를 세우고 평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더니, 이명박근혜 10년이 민주주의를 엄청나게 후퇴 시켰다.

하지만, 역시 수많은 위기로 단련된 시민들이어서 기회가 주어지자 잃어버린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되돌아갔다.

어쩌면 우리는 10년쯤 뒤에 또,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니까.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곱씹어야 한다.

박정희를 잊지 말고, 전두환을 잊지 말고, 노태우와 김영삼, 김대중과 노무현, 이명박과 박근혜를 끊임없이 되살려야 하는 이유다. 

광주 민주화운동과 남북정상회담, 보건복지부와 삼성, 삼풍 백화점과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와 촛불 혁명을 끊임없이 돌이켜야 하는 이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난 10년은 그 증거였다. 

당장 다음 해에 총선. 그리고 그 뒤에 또 찾아올 대선. 아마 그 중간 어디선가 개헌이 있을수도.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먼지로 돌아갈 만한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외계인이 침략한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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