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문경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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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부터 제목이 너무 좋았다. 지켜야 할 세계. 뭔가 크고 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읽고 나니 거기에선 아픔도 느껴지고 회한도, 절망도, 한계도, 체념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처럼 한 줌 남은 결심이 느껴진다. 젊은 날을 한참 지나고 보니 인생이 지켜낼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죽을둥살둥 몸부림치며 살아봤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어찌보면 인생만큼 가성비 떨어지는 것도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애쓴 이들에겐 한 줌일지라도 남는 것이 있으리라. 그것이 바로 그들이 '지켜낸 세계'가 아닐까. 그러니 대단한 일을 할 것처럼 치기 넘치게 덤비는 것도, 결국 아무것도 없을 거라며 허무한 냉소를 보내는 것도 옳지 않다. 소중한 것은 분명 있다. 그것이 각자가 ‘지켜야 할 세계’일 것이다.

정윤옥 선생님. 꼿꼿한 성품으로 정년까지 교직을 지켰던 그의 죽음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끝을 닫고 시작하는 이야기. 그의 끝을 열어놨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작가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것이 인생이기도 하고, 꼭 나쁜 것은 아니기도 하다.

윤옥의 60년에 담긴 인생과 시대의 질곡이 이 소설의 소재고 배경이다. 윤옥 10살 때 화약사고로 건축일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매를 키워야 하는 윤옥의 어머니는 독하게 살아야 했다. 첫째인 윤옥은 남달리 총명했지만 동생 지호는 중증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었다. 생업전선에 나가야 하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 수발은 윤옥의 차지였고, 보다못한 엄마는 장애인들을 돌본다는 사기꾼 목사에게 아들을 넘긴다. 지금도 장애인들과 그 가족의 고통은 해결되려면 멀었지만 그 옛날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렇게 포기된 목숨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선택은 어머니와 윤옥이 평생 짊어질 굴레가 되었다. 끝났는가 싶어도 끝이 아니었다. 이런 서사를 완성해 간 작가님의 필력에 감탄하는 건 두 번째고 그 서사 자체를 따라가기에도 감정이 벅찰 정도였다.

윤옥은 63년생. 교직에 나온지 몇년 되지 않아 87 민주항쟁의 해를 맞이했고, 교원노조 가입으로 고초를 겪었고, 끝내 탈퇴하지 않아 해직교사 신분이 되었다. 천 명이 넘는 유례없는 해직사태였기에 이 해직 동료들은 아직도 주변에 많다. 내가 교대 들어가기 전과 바로 직후의 일들이지만 내게도 기억이 생생한 사건이다. 몇 년 후 그분들은 복직되었지만 해직 당시에는 낙관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일생을 건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들 또한 그것이 ‘지켜야 할 세계’였을 것이다.

당시 윤옥은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제자들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중 수연이라는 제자와는 평생의 인연을 유지한다. 악연이라기엔 너무 사랑하지만, 또 아니라기엔 너무 아프게 얽힌 그런 인연..... 그 사이엔 윤옥의 사범대 동기 정훈이 있다. 함께 야학 교사를 하며 교육, 새로운 세상, 정의, 프레이리... 등을 부르짖던 정훈. 그는 그러다가 유학을 갔고, 윤옥이 평교사로 늙어가는 동안 승승장구하여 교육감까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일로....?ㅠㅠ

비슷한 길을 간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한때 정의를 부르짖었다고 그의 본성까지 정의인 것은 아니다. 진영에 선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저 함부로 까불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한걸음 한걸음을 성찰해야 한다고. 안그러면 말로를 보장 못한다. 많은 이들이 골로 갔듯이, 그 전철을 밟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수업에 온 마음을 다하고, 자신감과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윤옥의 모습이 내게 가장 큰 도전이 되었다. 부럽다. 정년을 앞두고 중증장애인 시영이 있는 2학년 반의 담임을 달라고 싸우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물론 동생 지호가 그 마음의 배경에 있는 줄은 알고 있지만.... 교장감이 편한 자리를 주겠다는데도 그 험난한 반을 굳이 맡는 그 사명감은 존경스럽다. 그리고 결국 윤옥은 그 아이들의 단단한 껍질을 조금씩 벗겨갔다. 교사로서 최대치의 역량과, 온 마음과 열정과 시간을 다해야만 겨우 꿈쩍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걸 60세에 했다는 것 자체가 존경스럽다. 나는 못해....ㅠ 윤옥은 초임때부터 내게는 넘사벽 교사였다. 첫째는 그가 엄청나게 공부하는 교사였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절대 굽히지 않는 교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 훌륭함 때문에 오히려 더 고초를 겪었다. 수업과 평가에 대한 교권침해성 민원도 많았다. 학부모들은 별걸 다 참견하며 요구했고 비굴한 학교는 또 그것을 들어주었다. 학부모들은 윤옥의 수업 동영상을 요구했고 보고나서 되지도 않는 안목으로 이런저런 비난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교사 정윤옥 국어수업 관찰 분석 보고서’라는 꼴같잖은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윤옥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이게 가장 놀라웠다. 그리고 그가 교감 앞에서 삼킨 말, “내가 지켜야 할 세계란 말입니다.”(218쪽) 이 말에 전율이 일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그건 지킬 자신이 있단 말이잖아. 나의 문제는, 그럴 자신이 없다.ㅠㅠ

꼿꼿하고 외로웠던, 파란만장하면서도 단조로웠던 윤옥의 삶은 60년의 짧다면 짧은 마감을 했다. 그는 억울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못 지켜낸 것도 많았지만 애써 지킨 것들도 있으니까. 그리고, 적어도 비겁하진 않았으니까. “정 선생님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정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나쁜 사람으로 태어났겠어요? 아닙니다. 다들 사느라 그러는 거예요.” 라는 말을 젊은 날 교감한테 들었듯이. 모두가 이런 타협을 했다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그러나 그 태도를 평생에 걸쳐 유지한다는 것 또한 얼마나 어려운가. 쓸데없는 똥고집도 아니고 꼰대질도 아니게. 물론 외로움은 숙명이었지만. 윤옥이 뭐 대단히 세상을 바꾼 것도 아니지만 한 인생 꼿꼿하게 유지하는 것 하나도 이렇게 놀랍도록 어렵다.

독자는 무심코 내가 읽은 순서와 흐름대로 작가가 쓱쓱 써나갔을 것을 상상하지만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이 책은 수년에 걸쳐 곳곳에서 반려되며 몇 번이나 뒤집었다 엎었다를 반복한 작품이었다. 끝내 이렇게 고갱이가 남아 혼불문학상이라는 좋은 결실을 얻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다. 덕분에 감정과 생각이 조금 일렁였고 좋은 재가 한 줌, 까진 아니고 반의 반 줌?쯤 남았다고 생각한다. 매우 오랜만에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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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굴을 찾고 있어 바일라 18
김혜진 지음 / 서유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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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편에 얼마나 많은 작가의 생각과 경험과 시간이 들어가 있는지 이 책을 보고서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고보면 소설을 쓰는 것만큼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도 없다. 그 시간에 무슨 알바를 하더라도 그보다는 많이 벌 것이다. 베스트셀러 쯤 된다면 예외겠지만....

박물관을 좋아하는 고1 여학생 이해솔. 이 아이가 화자다. 박물관이라니, 흔한 취향은 아닌데, 얘는 단순 취향만은 아니고 혼자 있을 수 있는 도피처로 활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곳이 국립중앙박물관이어서 배경으로 자주 나온다. 작가 또한 그곳에 자주 가셨구나 하는 걸 읽다보면 느끼게 된다. 나는 기억이 오래되어 희미해서 좀 아쉬웠다.

왜 붙어있는지 모르겠는 양극단의 두 아이. 서루아와 지태희. 루아는 때로 생각이란 게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무턱대고 덤비며, 요란스럽고 시끄러운 스타일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대책없는 스타일. 하지만 왠지 루아는 그렇게 밉진 않더라. 작가님의 애정이 들어간 탓이겠지.

빈틈없는 우등생 지태희.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이라는 분이 태희의 돌아가신 외가 친척 할아버지라고 한다. 실존했던 인물의 소설 속 등장!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그분이 바로 작가님의 친척이라고 한다. 소설의 최초 씨앗이 여기서 나왔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윤경렬이라는 분은 원래 함경도 태생이지만 일본에 갔다가 경주에 정착했다. 일본에서 토우 인형 제작을 배워왔는데, 그것으로는 우리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는 조언을 듣고 깨달은 후, 경주에서 신라문화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전파하는데 평생을 바치셨다고 한다. 태희는 할아버지가 찾던 그 '얼굴'을 찾으려 하고, 루아는 그 옆에 덤벙거리며 동행한다. 그러다 박물관에서 이해솔과 뜻밖의 만남을 하게된 것이다.

실존인물 윤경렬 님의 생애도 작품 속에서 비중이 높지만 아무래도 중요한 서사는 세 아이의 내면이다. 고학년 동화나 청소년 소설을 아주 많이는 아니지만 꽤 읽어본 편이라 갈등과 상처, 방황과 고민들도 이젠 거기서 거기로 보일 때도 있다. 겪는 개개인에겐 우주만한 크기의 고민이겠지만 무뎌진 주변인에겐 "그것도 한때야. 다 지나간다." 뭐 이런 느낌?

이 책의 아이들의 문제도 다른 책들에 비해 그렇게 강렬하다고 볼 순 없었다. 그렇다. 때가 되면 지나갈 문제일 수도 있고 아이들이 나름 잘 버티고 애쓰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벌어진 아이들의 일탈은 큰 사고는 아니어서 하루의 해프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학교에서의 처리도 원만했다. 하지만 이런 다행스러운 하루의 일탈 속에서 살짝 보여준 아이들의 진심, 혼자만 품고 있었던 아픔들을 느낄 때 이모심정(?)으로 아이들을 응원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잘 품고 있어서 그렇지 그 아픔들은 작은 게 아니었는데, 그걸 그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다시 일상을 챙기는 아이들이 너무 대견했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아이들도 있겠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을 파괴하는 아이들도 있고. 이 책은 교훈을 주려는 책이 절대 아니지만 또래 아이들이 읽고 자신들의 표현방식을 돌아봤으면 하는 마음도 생겼다. 부디 불의 크기를 조절하기를. 놓쳐버리면 모든걸 다 사르게 된다.

세 아이의 일탈은 무단결석과 경주행이었다. 목적지가 경주인 이유는 짐작할 것이다. 제목도 그걸 말해준다. <우리는 얼굴을 찾고 있어> 이게 한 가지 의미가 아니었다는 게 마지막에 좀 반전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느낀 건 어른들도 깨닫기 힘든 것들이었다. 사실 문제는 부모들한테 있는 건데, 그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아이들이 안타깝다. 이제는 부모 인생의 그늘에서 좀 벗어나면 안되나?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 이 아이들은 지금 진통을 겪으며 그걸 해내고 있는 중일수도.

"그곳에 뿌리가 있는 것도, 가족의 역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상자 속의 아기는 왕이 되고 외지인은 역사가 되었다. 나 역시 그럴 수 있을까. 세상의 벽은 내가 두려워했던 것보다 높지 않을지 모른다. 또 어떤 우연이 나를 우연한 각도의 시야로, 풍경으로 데리고 갈 수도 있다." (183쪽)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린 아직 헤매고 있다. 많이 헤맬 테니까 많은 답을 찾게 될 것이다. 동그라미나 빗금이 쳐지지 않을, 질문보다 길어질 답들을." (188쪽)

"얼굴을 본다는 건 결국 마주보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이 마음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오래 걸렸다."
(지태희의 반성문, 아니 여행소감문 중에서)

폭발하고 떼쓰는 아이들보다 삼키고 참는 아이들이 더 마음이 가고 안쓰럽다. 그 아이들에게 이 책이 선물이 되고 친구가 되면 좋겠다. 그 아이들의 부모님들도 읽어보시면 좋은데. 청소년소설을 읽는 부모님이 많이 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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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책을 ??하라 우리학교 그림책 읽는 시간
케리 스미스 지음, 김여진 옮김 / 우리학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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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뛰어넘고 형식과 관념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예술이 진화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의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소개만으로 볼 때 그런 류의 예술가인 듯하다. 이 그림책 한 권만 봐도 그러하다. ‘책’에 대한 고정관념을 신나게 부수는 책이다.
“어떤 어른들은
이 책이 좀 불편할지도 몰라.”
라고 첫장에 나오듯이, 나같이 꽉막힌 어른들은 거부감을 가질 책일 수도 있...........지만,

의외로 거부감이 거의 들지 않았다. 다만 전제가 있다면 공공기관의 책이 아닐 것?ㅎㅎ
남들도 봐야되는 책이 아니고 내돈내산이라면 책으로 뭘 하든 뭔 상관? 어차피 책이란 것도 영원히 꽂아두는 것은 아닌 바, 신나게 활용하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실제로 책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는 등의 행위에 거리낌이 없다. 도서관 책에는 그걸 할 수 없어서 좀 답답할 때도 있다.

물론 이 책에서 책으로 ??하라는 것은 그정도 수준이 아닌 파격이다. 책장을 접고, 던지고, 떨어트리고, 빙빙 돌려 봐! 등등의 말이 나오는데 액면 그대로의 뜻일 수도 있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만져보고, 소리를 들어보고, 냄새를 맡아보라는 권유는 더더욱 그러하다. 책을 깨끗이 보고 조심히 다루라는 규칙 때문에 아예 보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가장 나쁘다.
“하지만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게 진짜 책일까?”
그러게 말이다. 나도 적극 공감한다. 가장 열광하고 싶은 문장은 이런 문장이었다.
“책은 네가 읽을 때마다 다른 책이 돼.
너도 매번 달라지니까.”

그렇다. 책은 명백히 무생물이지만 생명력이 있다. 그러니 살아 숨쉬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성장하기도 한다. 그 생명력을 만끽하라는 메시지가 이 책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책의 용도나 읽기 방법에 대한 고정관념 파괴가 때로는 필요한 것이리라.

“낡은 책을 강아지 귀라고
부르기도 하는 거 알아?
많이 읽어서 나달나달해진
책 귀퉁이를 뜻하는 거래.
넌 책을 어떻게 사랑해 주었니?”

집의 거실에 TV를 치우고 책장으로 채우고 책으로 가득한 환경을 만든다 해도 책이 단지 꽂혀있는 것이라면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다. 애착을 갖는 책이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책과 교감할 수 있다면 그 책은 입체적으로 살아나 내 삶의 일부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접하고 흥미와 친근감을 갖게 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책은 읽기 자체로 충분히 그 안에 다양성이 있다. 유희, 배움의 기쁨,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여행의 즐거움, 진지한 사색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 말이다. 일단 책을 고이 모셔두지만 말고 꺼내기.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히기. 그래야 책도 기뻐한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지금 내 눈앞에도 가득한 저 책들. 저들 중 대다수는 콧바람도 못 쐬고 결국 묶여서 재활용으로 나갈 운명. 그 운명을 백퍼 거부할 수는 없지만 아끼면 똥 된다는 막말도 있듯이, 내게 다가온 책들을 아낌없이 거칠게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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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비 탐정 실룩 2 - 사라진 반짝 샴푸 비법서 변비 탐정 실룩 2
이나영 지음, 박소연 그림 / 북스그라운드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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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 작가님의 기존 작품 느낌에 익숙해 있다가 이 책의 1권을 접하고는 굉장히 낯설었다. 새로운 코믹추리물의 등장? 일단 그 장르가 별로 내 취향이 아니어서 큰 매력을 못 느꼈고 홈즈와 왓슨을 연상시키는 실룩과 소소의 캐릭터도 그렇게 확 끌리는 매력은 없었다. 코믹추리물을 위한 설정 변비도 그냥 그랬다. 그렇게 읽고 넘겼는데! 얼마 후 검색해보니 이 책의 판매지수와 순위가 엄청 높았다. 와우! 역시 나는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구나. 대박예감을 잘 못한다.ㅎㅎ 외국에까지 판권이 팔렸다고 하니 인기를 끌 만한 요소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2권이 나왔길래 궁금해서 읽어봤다. 팔랑팔랑 팔랑귀의 느낌일까? 훨씬 재밌게 느껴졌다. 어느 현장에서나 화장실부터 뛰어가는 붉은 토끼 실룩 탐정을 보면서 뭐냐...’ 하던 느낌이 , 또 시작이구나.^^’ 하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수다쟁이 참새 소소의 캐릭터는 더 친근하다. 익숙하다는 건 지루함의 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 기대와 흥미의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낀다. 그러니까 되는 작품은 후속편이 계속 나오는 거겠지. 실룩도 처음부터 시리즈로 계획된 책이다.

 

읽다보니 여러 장점들이 있었다. 첫째는 코믹 장르라고 하지만 언어가 저속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하나마나한 말장난이나 모욕적 언사나 가벼운 유행어로 끌어나가는 코믹물들 보면 짜증나는데, 정통 문학을 하시는 작가님의 자존심이 그걸 용납하지는 않겠지. 덕분에 어린이들에게 권해줄 만하다.

 

둘째는 추리적 재미가 괜찮다는 점. 다만 중학년 정도까지? 고급 추리물을 많이 읽어본 고학년 어린이들에게는 충족되지 않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의 독자연령으로 잡은 저학년에게 추리동화 입문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개인적으로 살짝 아쉬운 점은 내가 초반에 범인을 알아맞혀버렸다는 점. 그건 내가 추리를 잘해서라고 하자.ㅋㅋ 맞추든 못 맞추든 결말까지 가야 결과를 알 수 있으니 독서흥미를 유지하는 데 별 문제는 아니다.

 

세 번째는 사건의 해결이 작품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미있는 주제가 과하지 않게 들어있고 옛이야기(라푼젤)와의 연결도 재밌다. 1권은 사과도둑을 찾는 추리였고 2권은 샴푸기업 가문에 이어져 내려온 샴푸 비법서를 찾는 추리다. 샴푸와 라푼젤.ㅎㅎ 너무 어울리는 연결인데, 결국 아름다움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고 나이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결말이 몹시 마음에 든다. 하하하.... 어린이들이 여기에 주목하진 않겠지만 남에게 보이는 외모에 너무 집착하는 요즘 세대에 이런 메시지는 매우 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나영 작가님의 저력은, 이 새로운 시도가 쓸수록 정교해지고 자리를 잡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3권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외국에도 진출했다고 하니 거기서도 인기를 얻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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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 - 제5회 웅진주니어 그림책 공모전 우수작 웅진 모두의 그림책 47
길상효 지음, 조은정 그림 / 웅진주니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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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책의 글자는 딱 이것 뿐이다. 한 살, 두 살, 세 살.... 한 장에 하나씩.
그리고 모든 서사가 그림에 들어있다. 나이와 함께 달라지는 그림이 모든 걸 다 말해준다. 상세한 문장이 필요하지 않다.

한 여자아이와 개 한 마리는 비슷하게 태어났다. 동갑.
세 살부터 개는 이미 어른이다. 아이보다 더 크다. 집에서 키우기에는 무척 큰 개다. 잘은 모르지만 셰퍼트 종류인 것 같고.
남들에겐 무서워 보일 수 있겠지만 아이에게는 만만한 친구일 뿐이다. 바닷가에서 좋아라 함께 뛰놀고,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에게 날 듯이 돌진하며 반긴다. 아파서 물수건을 대고 누워있는 아이 곁을 애타는 표정으로 꼼짝않고 지키기도 한다.

커가면서 아이는 개 말고도 다른 친구들이 생긴다. 그 친구들과 노느라 개는 안중에도 없을 때도 있다. 책가방 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개를 원망하며 엉엉 울 때, 납작 엎드린 개의 표정에 웃음이 난다. 근데 이때가 여덟 살, 보통 저런 저지레는 한 살 때 많이 하는데...ㅎㅎㅎ

아홉 살에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라는 방이 붙었네! 다행히 찾았는지 열 살에는 산책하는 개가 나온다. 역시 큰 개는 산책도 만만치 않구나.

열한 살, 사춘기가 찾아온다. 개는 아기때 물던 인형을 여전히 물고 아이를 애타게 바라보지만 사춘기 소녀는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서 그 모습을 봐주지 않는다. 아이는 이제 공부가 바빠지고, 엄마와 대치하는 때가 온다. 어릴 때처럼 즐겁게 놀지는 않아도 소녀의 옆에는 항상 개가 있다.

열다섯 살.... 개가 이때까지 살면 그런대로 천수를 누린 거다. 더 이상 개는 등장하지 않는다. 예의 그 장난감이 무심하게 놓여있는 한 장면이 갑자기 흑백으로 바뀌어 개의 떠남을 알려준다.ㅠㅠ

개가 없어도 소녀의 일상들은 흘러간다. 어느새 소녀는 성인이 되었다. 어느날 버스를 타고 가던 소녀의 핸드폰 화면에서 그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동갑인 그 친구... 두 동갑 친구는 서로를 마주본다. 앞표지는 아기 때의 천진한 마주봄, 마지막장은 지나온 세월을 다 담은 조용한 마주봄이다.

개와 인간의 속도는 이렇게 달라서 아픈 이별을 각오하고 함께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거부하고 싶은 일들이다. 하지만 일단 시작한 만남은 야속한 마지막을 향해서 그저 달린다. 모든 세월이 그렇듯이 붙잡을 수 없다. 그저 오늘의 행복을 감사히 여기며 소중한 친구와 눈을 맞출 뿐이다. 내 눈앞에 누구보다 충직한 나의 친구가 있다.

충직이라고 쓰고보니 나는 조금 웃음이 난다. 우리집 개는 워낙 제멋대로라서.... 학교앞에서 자취를 하던 딸이 대책도 없이 어느날 강아지를 받아왔다. 집에 두고 가래도 기어이 자취방으로 데려가더니, 분리불안 강아지를 만들어 결국 집으로 데려왔다. 집에 와서 혼자 계신 할아버지의 위안이 된 것까진 좋았는데, 요즘 사람들이 강아지를 어떻게 키우는지 전혀 모르시는 할아버지는 아주 천방지축 날뛰는 강아지를 만들어 놓으셨다. 아니 사실은 개도 천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푸들의 피가 흘러 아주 영악하고 자기가 싫은 건 웬만해선 안한다. 낯선 이를 보면 짖어대서, 엄마(나)처럼 서열이 낮은 사람들은 산책도 시키기 어렵다. 원주인인 누나나 아빠가 시켜줘야 말을 듣는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 개를 견계의 금쪽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금쪽견도 똑같이 가진 게 있다. 그건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림과 반겨줌. 사람 올 시간을 어떻게 알고 현관 앞을 꼼짝 않고 지키는지. 안오면 올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개. 뭘 하든 내 발치에 자리잡는 개. 사람의 감정을 읽는 개. 공감하고 위로하는 개.

인생의 만남과 헤어짐은 숙명이고, 헤어짐이 두려워 만남을 피할 수는 없는 바, 우리 곁에 있는 친구들과 최대한 눈맞춤을 하리라 다짐해본다. 누군가는 나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고 나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겠지. 그 기억이 아름답도록 오늘 하루를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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