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주택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1
유은실 지음 / 비룡소 / 2021년 3월
평점 :
예약주문


이 책을 식탁에 앉아서 단 한 번의 이동도 없이 한번에 다 읽었다. 집에서 내 작업 공간이 따로 없는 나에게 식탁이 주로 독서장소라고는 하지만, 엉덩이가 무겁지 않은 나는 읽다가 덮었다가 폰 보다가 누웠다가 하느라고 한 장소에서 한 권을 다 읽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여기가 식탁인지 어디인지도 잊었다. 책을 폈나 했더니 어느새 다 읽었다.

 

너무 멋진 사람들을 만났다. 동시에 너무 한심한 사람들도. 멋지다고 세상을 구한 사람들도 아니고 한심하다고 인간 말종인 것까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주변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범위 안에서 가장 친해보고 싶은 사람과 가장 짜증날 것 같은 사람. 호감과 비호감의 인간군을 경험했다고 할까. 작가는 어떻게 이런 실제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냈을까. 밀착 카메라를 곳곳에 달아놓고 모니터링이라도 하시는 걸까.ㅎㅎ

 

김순례 씨는 변두리 빌라촌의 한 빌라 건물주다. 그 빌라를 순례 주택이라고 부른다. 순례 씨는 뼈빠지게 세신사로 번 돈으로 주택을 하나 샀고 그게 어찌어찌 되어서 지금의 4층 빌라가 됐다. 각 호의 입주민들을 소개하는 대목부터가 완전 흥미진진했다. 여기에 주인공인 순례씨와 수림이가 있다. 수림이는 화자이고 16세 중학생이다. 201호 입주민이자 순례씨의 남친이던 할아버지의 외손녀다. 수림이 집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좋은 아파트지만, 주로 순례주택에서 지낸다. 딸 부부에게 집을 내주고 밀려난 외할아버지는 둘째 손녀인 수림이까지 맡아주게 되었다. 그리고 순례씨와 함께 수림이를 살뜰하게 키웠다.

 

순례주택에 뿌리를 박고 자라난 수림이는 공부는 중간쯤 해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 반면 엄마 아빠가 끼고 키운 연년생 언니 미림이는 공부만 잘했지 세상 쓸모없는 인종이다. 언젠가 교사 모임에서 아이들에게 자취능력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요즘 제손으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아이들, 아니 인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언니가 바로 그런 아이였다. 반면 수림이는....

 

아버지 집에 머리 디밀고 들어와 결국 아버지를 빌라촌으로 밀어내고 아파트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수림이 엄마 또한 한심한 인종이다. “우리 아빠꺼니까 내꺼라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그렇다. 그런 주제에 빌라촌 사람들을 어찌나 무시하는지.... 이들에게도 인생의 실전이 닥치게 되었는데, 순례주택의 입주자이자 아파트의 주인이신 외할아버지가 작업중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즈음 사기를 당했고, 아파트를 날리게 되었고, 수림이 엄마는 우리 아빠꺼였던 아파트에서 땡전 한 푼 없이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다. 그들의 인생이 사상누각이었음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상황이다. 갈곳 없는 끔찍한 현실을 깨달은 그들은 결국 순례 씨의 호의로 할아버지가 살던 201호 주민이 되는데.....

 

수림이는 걱정이다. 자신의 가족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서다. 이들의 처신에 신뢰감이 1도 없으니, 이들이 순례주택의 민폐가 되는 것은 아닐지, 순례 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 좌불안석이다. 순례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글쎄.”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이어 그들은 누가 누가 더 어린가내기하는 듯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했는데, 완전 공감되었다. 철든 걸로 나이를 매긴다면 평생 걸음마하는 인간들 얼마나 많게? 뭐 나도 나이값 다하고 있진 않아 목소리 높일 주제는 못되지만.... 하여간 이 집에서 그래도 가장 어른인 수림이는 이렇게 하여 망해가는 경기의 구원투수가 되었다. 감독은 순례 씨?^^

 

201호 수림이네부터 시작해서 402호 순례 씨까지 모든 입주자들의 캐릭터와 삶이 제각각 흥미진진하여 인기있는 생활드라마 한 편 충분히 나올 것 같다. , 러브라인이 없어서 좀 그렇나? 그건 순례 씨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그리고 러브라인이 살짝 부족하더라도 찰진 재미와 메시지가 충분히 메꿔줄 것이다. 캐스팅이 중요한데, 주연인 순례 씨와 수림이보다도 조연 쪽을 더 신경써야 한다. 주연들이 ‘1이라고 부르는, 수림이네 가족. 고학력이지만 10여년 째 시간강사만 하고 있는 아빠, 역시 고학력이지만 전업주부면서 남들을 무시하기로 악명 높은 엄마, 부모 닮아 공부는 잘하지만 싹퉁머리 없는 언니, 이들을 맡아서 욕 제대로 먹어줄 배우들을 골라야 한다. 이들에게 현타가 오는 장면들을 제대로 연기해야 한다.^^

 

요즘 학급 아이들과 유은실 작가의 멀쩡한 이유정을 읽고 있다. 이 책을 선정하는 데 약간 고민이 있었지만, 일단 뚜껑을 열어보니 잘한 선택이었다. 작가님을 가을 작가초청행사 때 모시기로 되어있다. 특별한 느낌은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보니 갑자기 설렌다. 젊은 시절의 화제작들을 봐도, 중년이 된 지금의 원숙한 작품을 봐도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자기 분야에서 이렇게 존재감과 퀄리티를 유지하며 나이들어가기가 어디 쉬운가. 대단하고 부럽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작명, 주인공 이름이자 공간적 배경인 순례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말에 담겨있다. 순례자. 아마도 나그네비슷한 뜻이 아닐지. 이생을 나그네의 길이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아득바득 할 것은 무엇인가. 남을 밟고 올라서고, 남의 것을 뺏고, 남을 무시하며 나의 존재감을 확인할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2021-06-2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례씨는 진정한 어른이에요. 저도 순례씨처럼 멋지게 나이들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