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문경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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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부터 제목이 너무 좋았다. 지켜야 할 세계. 뭔가 크고 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읽고 나니 거기에선 아픔도 느껴지고 회한도, 절망도, 한계도, 체념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처럼 한 줌 남은 결심이 느껴진다. 젊은 날을 한참 지나고 보니 인생이 지켜낼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죽을둥살둥 몸부림치며 살아봤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어찌보면 인생만큼 가성비 떨어지는 것도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애쓴 이들에겐 한 줌일지라도 남는 것이 있으리라. 그것이 바로 그들이 '지켜낸 세계'가 아닐까. 그러니 대단한 일을 할 것처럼 치기 넘치게 덤비는 것도, 결국 아무것도 없을 거라며 허무한 냉소를 보내는 것도 옳지 않다. 소중한 것은 분명 있다. 그것이 각자가 ‘지켜야 할 세계’일 것이다.

정윤옥 선생님. 꼿꼿한 성품으로 정년까지 교직을 지켰던 그의 죽음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끝을 닫고 시작하는 이야기. 그의 끝을 열어놨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작가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것이 인생이기도 하고, 꼭 나쁜 것은 아니기도 하다.

윤옥의 60년에 담긴 인생과 시대의 질곡이 이 소설의 소재고 배경이다. 윤옥 10살 때 화약사고로 건축일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매를 키워야 하는 윤옥의 어머니는 독하게 살아야 했다. 첫째인 윤옥은 남달리 총명했지만 동생 지호는 중증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었다. 생업전선에 나가야 하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 수발은 윤옥의 차지였고, 보다못한 엄마는 장애인들을 돌본다는 사기꾼 목사에게 아들을 넘긴다. 지금도 장애인들과 그 가족의 고통은 해결되려면 멀었지만 그 옛날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렇게 포기된 목숨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선택은 어머니와 윤옥이 평생 짊어질 굴레가 되었다. 끝났는가 싶어도 끝이 아니었다. 이런 서사를 완성해 간 작가님의 필력에 감탄하는 건 두 번째고 그 서사 자체를 따라가기에도 감정이 벅찰 정도였다.

윤옥은 63년생. 교직에 나온지 몇년 되지 않아 87 민주항쟁의 해를 맞이했고, 교원노조 가입으로 고초를 겪었고, 끝내 탈퇴하지 않아 해직교사 신분이 되었다. 천 명이 넘는 유례없는 해직사태였기에 이 해직 동료들은 아직도 주변에 많다. 내가 교대 들어가기 전과 바로 직후의 일들이지만 내게도 기억이 생생한 사건이다. 몇 년 후 그분들은 복직되었지만 해직 당시에는 낙관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일생을 건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들 또한 그것이 ‘지켜야 할 세계’였을 것이다.

당시 윤옥은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제자들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중 수연이라는 제자와는 평생의 인연을 유지한다. 악연이라기엔 너무 사랑하지만, 또 아니라기엔 너무 아프게 얽힌 그런 인연..... 그 사이엔 윤옥의 사범대 동기 정훈이 있다. 함께 야학 교사를 하며 교육, 새로운 세상, 정의, 프레이리... 등을 부르짖던 정훈. 그는 그러다가 유학을 갔고, 윤옥이 평교사로 늙어가는 동안 승승장구하여 교육감까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일로....?ㅠㅠ

비슷한 길을 간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한때 정의를 부르짖었다고 그의 본성까지 정의인 것은 아니다. 진영에 선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저 함부로 까불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한걸음 한걸음을 성찰해야 한다고. 안그러면 말로를 보장 못한다. 많은 이들이 골로 갔듯이, 그 전철을 밟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수업에 온 마음을 다하고, 자신감과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윤옥의 모습이 내게 가장 큰 도전이 되었다. 부럽다. 정년을 앞두고 중증장애인 시영이 있는 2학년 반의 담임을 달라고 싸우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물론 동생 지호가 그 마음의 배경에 있는 줄은 알고 있지만.... 교장감이 편한 자리를 주겠다는데도 그 험난한 반을 굳이 맡는 그 사명감은 존경스럽다. 그리고 결국 윤옥은 그 아이들의 단단한 껍질을 조금씩 벗겨갔다. 교사로서 최대치의 역량과, 온 마음과 열정과 시간을 다해야만 겨우 꿈쩍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걸 60세에 했다는 것 자체가 존경스럽다. 나는 못해....ㅠ 윤옥은 초임때부터 내게는 넘사벽 교사였다. 첫째는 그가 엄청나게 공부하는 교사였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절대 굽히지 않는 교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 훌륭함 때문에 오히려 더 고초를 겪었다. 수업과 평가에 대한 교권침해성 민원도 많았다. 학부모들은 별걸 다 참견하며 요구했고 비굴한 학교는 또 그것을 들어주었다. 학부모들은 윤옥의 수업 동영상을 요구했고 보고나서 되지도 않는 안목으로 이런저런 비난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교사 정윤옥 국어수업 관찰 분석 보고서’라는 꼴같잖은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윤옥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이게 가장 놀라웠다. 그리고 그가 교감 앞에서 삼킨 말, “내가 지켜야 할 세계란 말입니다.”(218쪽) 이 말에 전율이 일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그건 지킬 자신이 있단 말이잖아. 나의 문제는, 그럴 자신이 없다.ㅠㅠ

꼿꼿하고 외로웠던, 파란만장하면서도 단조로웠던 윤옥의 삶은 60년의 짧다면 짧은 마감을 했다. 그는 억울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못 지켜낸 것도 많았지만 애써 지킨 것들도 있으니까. 그리고, 적어도 비겁하진 않았으니까. “정 선생님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정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나쁜 사람으로 태어났겠어요? 아닙니다. 다들 사느라 그러는 거예요.” 라는 말을 젊은 날 교감한테 들었듯이. 모두가 이런 타협을 했다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그러나 그 태도를 평생에 걸쳐 유지한다는 것 또한 얼마나 어려운가. 쓸데없는 똥고집도 아니고 꼰대질도 아니게. 물론 외로움은 숙명이었지만. 윤옥이 뭐 대단히 세상을 바꾼 것도 아니지만 한 인생 꼿꼿하게 유지하는 것 하나도 이렇게 놀랍도록 어렵다.

독자는 무심코 내가 읽은 순서와 흐름대로 작가가 쓱쓱 써나갔을 것을 상상하지만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이 책은 수년에 걸쳐 곳곳에서 반려되며 몇 번이나 뒤집었다 엎었다를 반복한 작품이었다. 끝내 이렇게 고갱이가 남아 혼불문학상이라는 좋은 결실을 얻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다. 덕분에 감정과 생각이 조금 일렁였고 좋은 재가 한 줌, 까진 아니고 반의 반 줌?쯤 남았다고 생각한다. 매우 오랜만에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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