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멜버른의 케어러 - 이민, 장애, 나이듦, 그리고 돌봄의 세계에서 내가 배운 것
루아나 지음 / 메멘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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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반납해야 하는 도서관책을 챙기다보니 3권 모두 노인, 퇴직, 돌봄에 관한 책이다. 아 이젠 정말 내가 현장을 떠나 뒷방의 세계로 들어가는구나, 읽는 책이 바로 내가 선 땅을 알려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장을 떠난다기보다는 제2의 현장을 만나는 이야기다. 이전보다 더욱 치열한. 그 현장이 바로 돌봄의 세계라서 다른 책들과 함께 늙음과 죽음을 좀더 가까이에서 보게된 것 뿐이다. 저자는 이민 전 중등교사였고 호주로 이민을 간 후에 그 사회에 익숙해지며 돌봄의 현장에 진입하게 되었다. 자격증을 따고 지금은 활발히 활동중이다.

이 책을 오늘 반납해야 하지만 한번 더 읽거나 모임에서 함께 읽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 책이 어려워서는 아니다. 오히려 아주 잘 읽히는 책에 속한다. 하지만 생각할 영역이 여러가지다. 누군가는 저자의 개인적 삶에서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저자는 한국에서의 삶이 매우 고달팠었다. 교사로서의 삶이 몹시 소모적이고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으며(자세한 이야기는 없지만 같은 교사로서 다 알 것 같은ㅠ) 그 와중에 표준의 경우와 너무 다른 육아는 개인을 한계로 몰고 갔다. 결국 아들은 자폐와 ADHD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 후 호주 이민, 적응 과정, 새로운 일에의 도전, 싱글맘으로 홀로서기 등의 과정이 이 책을 개인사로만 읽어도 충분히 의미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 줄기에 덧붙여진 것들이 매우 많아 그것도 놓칠 수가 없다.

그중 하나는 장애에 대한 인식이다. 저자가 호주의 현장에서 뛰며 알려주는 현실은 자연스럽게 두 나라를 비교하게 만든다. 그때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어느정도 흉내는 내고 있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아직 멀었구나.

올해 장애 학생이 많은 학년을 맡게 되었다. 반평균 2명씩 있다. 교사를 오래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학교의 모든 지원인력(특수교육 실무사 두명과 공익근무요원)을 총동원해도 턱도 없기 때문에 시간제 봉사자를 채용해서 지원에 보탠다. 우리 지원 선생님들은 정규 비정규 공익 할 것 없이 모두 마인드가 훌륭하셔서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초반에는 그분들이 고마운건 고마운거고 교실에 나말고 누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힘들었다. 이제 거기에 적응되자 이런 생각이 든다. 호주에선 장애인 비율이 20%가 넘는다고 한다. 반별 2명씩 있다고 놀라는 우리 학년 비율도 10%에 불과하다. 나의 체감으로는 장애학생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다. 특히 신경다양성 측면에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진단되지 않은 장애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 되겠다. 지원이 필요한 학생의 영역을 좀 넓히고 지원도 확대되면 좋겠다. 일반교사+특수교사의 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특수학급의 정원을 줄이고, 모든 학교에 특수학급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직도 일부 학교에만 특수학급이 있다는 것은 이 책을 읽고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도 있다. 특수교육이나 지원인력은 진단받은 특수교육대상자에게만 해당되고, 그 진단이란 부모의 동의 없이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니 대상자가 없는 학교도 존재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러고보면 우리나라는 전체적으로 인식부터 개선되어야 한다. 작년에 모 지역 특수학급에 살인적인 인원과 업무를 몰아놓고 인력충원의 호소를 무시하고 방치한 결과 슬픈 일이 일어났다. 이게 우리나라 현실의 한 단면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잠시 귀국할 때마다 신문물의 작동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 난 생각했다. 아 호주가 우리보다 훨씬 아날로그로 사는구나...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조급증에 쏟아붓는 그 예산들을 훨씬 사람에 투자해도 되는 것 아닌가.... 결국 그 아까운 젊은 특수교사의 죽음은 그 알량한 예산 안 쓰려고 버티다가 그렇게 만든거 아니야? 말만 꺼내도 화가 난다.ㅠㅠ

호주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장애 자체의 불편함을 제외하고는 괜찮을 것 같았다. 적어도 장애=불행의 공식은 절대 없었다. 신경다양성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이 다양함의 일부일 뿐이다. 어떤 곳이든 보편적 설계가 당연하게 적용되어 있었고, 번거로움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는 태도가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수영장 장면에서 입이 딱 벌어졌다. 배울 건 빨리 배웠으면 좋겠다.

다음으로는 직업에 대한 것이다. 직업의 안정성과 유연함이 공존하는 방식이 무척 좋아보였다. 우리나라처럼 '하려면 밤낮없이 죽어라고 하고 못하면 말고' 이런 식이 아니라 자신의 체력과 나이, 생활방식에 따라 다양한 시간선택이 가능한 일자리들이 많으면 좋겠다. 모두들 대학도 모자라 대학원까지 나와야 하는 학력 낭비의 한국은 곧 젊음과 세월 낭비이기도 한 것 같다. 직장의 유연함은 근무환경의 향상으로도 이어지고 그건 또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마인드로 이어진다.

다음은 노년에 대한 생각이다. 저자의 돌봄 일은 크게 두가지 분야이다. 장애인과 노인. 노인을 돌보면서 저자는 한국의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짓기도 했다. 돌봄은 정말 정신 육체 양면으로 고된 일이었다. 저자도 나처럼 작은 키에 저질체력이신 것 같은데도 이 일을 열심히 배워 해나가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호주의 노인 돌봄 환경은 우리보다 훨씬 좋았다. 특히 돌봄인들이 육체적으로 무리하지 않으면서 노인들의 기본적 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는 여러가지 기계들(기중기, 기립기 등)의 사용은 꼭 필요할 것 같다. 저런 걸 쓰기 전에 죽고 싶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겠지.ㅠ 이런 것을 포함해서 우리가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상황을 다양성의 범주에 넣는 인식이 인상적이었다. "저러느니 죽는게 낫겠다", "저러고 왜 살아" 따위의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되었다. 다른 편에서 생각해보면 너무 고통스러운 한계까지 몰아가지 않는 치료, 그러니까 연명치료가 아닌 통증치료(최소한의 존엄사)에 집중하는 의료체계로의 전환을 간절히 원한다. 내가 죽을 때 되기 전에 부디.

기록 좀 남기고 반납하자 하고 생각한 리뷰가 중언부언 길어졌네.... 이 책은 그대로 덮고 잊어버리긴 아까워서 이어지는 대화나 독서가 더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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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봄을 건너는 법 우리학교 상상 도서관
정은주 지음, 김푸른 그림 / 우리학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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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과 연두의 조합이 이렇게 예뻤던가? 표지와 책등의 색채가 내게 없던 핑크 취향을 불러올 것 같은 예쁨이다. 귀엽고 따뜻한 이야기에 고픈 사람들이 이 책을 집어들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핑크핑크하지만도 않고 귀염귀염하지만도 않다. 왜냐. 우리 주변의 이야기라서. 인생의 이야기라서. 인생이 핑크핑크가 아닌 것은 주지의 사실.

그러나 그 색깔이 존재하듯 우리 인생에도 그런 순간은 있다. 벚꽃잎이 흩날리는 순간. 시린 계절을 지나 봄을 맞은 우리는 잠시 분홍의 따스함에 머물렀다가 이번엔 폭염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한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들도 살아내느라 힘들구나.

이 책의 주인공을 둘로 말한다면 화자인 김선아와 장애가 있는 강산에이다. 둘의 엄마가 절친이어서 어릴적에 사촌들처럼 자랐다. 산에 눈에는 선아밖에 없었고 선아만 따라다니며 동시에 선아를 든든하게 지켰다. 알고보니 산에한테는 '윌리엄스 증후군'이라는 장애가 있었다. 이후 산에의 특수학교 입학 등으로 두 집의 거리는 멀어진다. 5학년이 된 지금, 친구 관계가 쉽지 않은 선아는 고전중이다. 그 교실에 어느날 전학생이 왔다. 바로 산에였다.

몇년의 세월동안 산에의 마음은 변한게 없었으나 문제는 선아였다. 선아는 그러잖아도 마음처럼 되지않는 관계가 산에 때문에 더 어려워질까봐 전전긍긍한다. 그걸 꿈에도 모르는 엄마들은 선아에게 산에한테 잘해주라고, 도와주라고, 잘 부탁한다고 부담을 준다. 산에는 예전처럼 반갑게 다가가고, 선아는 매몰차게 벽을 친다.

여기에서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의 '무리 소속'에 대한 갈구를 들여다보게 된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성향인데 그건 아마도 내가 살면서 대충 아무곳에나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절실함을 몰라서 그런 걸까? 아이들은 학기초에 이것 때문에 엄청난 물밑 전투를 치느르라 소진된다고 한다. 마치 초반에 결과가 끝장나는 전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조급함이 이해되지 않는 나는 꼰대이겠지? 어쨌든 현실이 그러하니 나는 늘 아이들의 구도를 주시한다. 누가 누구랑 노는지를. 자유롭게 헤쳐모여의 유연함이 있는 반은 최고다. 어느정도의 고정성이 있지만 소외된 아이는 없고 서로에 대한 적의가 없다면 그럭저럭 괜찮다. 관계권력을 가진 아이가 있고 그 그룹에 들기를 갈구하며 탈락하면 마치 죽을 것처럼 구는 구도라면 최악이다. 나는 아직 최악까지 가보진 않았지만 이러한 이유로 학기초에 권력관계 관찰에 초집중한다. 이 권력이 발견되면 지혜로운 방법으로 무력화시켜야 한다. 안그러면 문제와 상처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아이들 일이라고 쉬운 게 아니다.

그래도 내가 봤던 아이들 중에는 그리 목매달지 않는 의연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는 또 그런 아이를 만나게 된다. 보석끼리의 조합이다. 조급함만 없애면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데, 당장 죽을 것처럼 울고 뒹굴고 보호자까지 여기에 가세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다.

이 책의 선아는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고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여기에 주인공 두 명을 더 추가한다면 햇살이랑 민준이다. 햇살이는 인지능력도 산에보다 더 부족해보이고 수업방해나 고집 등 교사를 곤란하게 하는 특성도 훨씬 심한데 장애인은 아니라고 한다. 특수교육대상자가 아니니 도움반에 가지 않고 지원인력도 당연히 없어서 담임선생님 혼자서 감당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부모님이 인정하지 않고 검사를 거부해서다. 여기서 또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현실을 보게된다. 부모의 동의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 동의가 없으면 속수무책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이또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시선과 그로인한 두려움이 부모의 마음을 닫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모두가 함께 힘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민준이로 말할 것 같으면 안좋은 소문이 따라붙은 (알고보면 억울한) 독립적인 남자애다. 특이하게도 민준이에겐 햇살이를 안정시킬 수 있는 면이 있다. 햇살이와 짝이 되기도 하고, 선아, 산에와 넷이서 모둠이 되기도 한다. 선아가 느끼기에 소문에 비해서 상당히 괜찮은 아이다. 담임선생님이 민준이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민준이에게 또 오해가 닥쳤다. 그것도 햇살이네 쪽에서...ㅠ 이렇게 꼬이는 일들이 내 문장으로 쓰니 매우 짜증나 보이는데 책은 그렇지만은 않다.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반영했지만 현실의 서늘함이 표지의 그 따뜻함을 압도하지는 못하는 이야기라고 할까.

되게 슬픈 대화도 있었다. 선아 엄마가 늦던 날, 산에 엄마가 와서 따뜻한 밥을 차려주었다.
"선아야,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긴데, 산에가 다른 애들한테 놀림당하거나 무시당해도.... 너 나서지 말고 모른 척해. 이모가 산에 키우며 살아 보니까... 사람들 시선이 제일 무섭더라. 사람들이 눈빛 하나로 정말 어마어마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더라고. 산에야 어차피 장애인이니까 감당하고 살아야 돼. 세상이 좀 바뀌어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하루아침에 되겠니? 그런데 너는 산에 때문에 그런 시선 받을 필요 없어. 그니까...."
어떤 마음을 거쳐 산에 엄마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지 과정을 짐작해보면 너무 슬프다. 특히 찔리는 말은 '눈빛'이다.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당할 수 있을까? '눈빛'에 이르니 나는 바로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어떤 폭력을 행사하며 살았는지 다 알 수도 없다.

선아와 산에, 햇살과 민준, 그리고 다양한 성향의 주변 친구들을 통해서 작가는 장애와 비장애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려 갈등하고 해결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 과정을 '봄을 건너는' 일로 표현했다. 실제로 학기초에 부딪친 일들이니 액면 그대로의 뜻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잔인한 봄을 지나 싱그러운 여름으로 진입하는 아이들.

저학년때는 그래도 가능했던 어울림이 고학년으로 가면서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이 내겐 여전한 고민이다. 놀이, 관심사 등에 격차가 점점 벌어지며 아이들은 의무감의 시간 외에는 단짝들과만 지내고 싶어한다. 강제할 수 없고 부작용도 우려되는 부분이라 아쉬운 마음이 남을 때가 많다. 무리없고 자연스러운 호의가 가득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눈빛에 칼날이 없는 세상.

고통없는 인생은 없고 누구에게나 아픔과 장벽이 있다. 산에도 햇살이도 딱 그만큼만 아플 수 있다면 좋겠다. 선아도 민준이도 다른 친구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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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올리브에게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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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작을 시도해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선 어딘가 동경이 자리잡고 있긴 한가보다.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무한대에 가까운 창작물이 이미 있음에도 사람들은 곡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든다.

그중 어떤 작품 앞에서는 '아, 이건 나에게 절대 해당없는 일이구나. 감상 만으로도 벅차. 난 절대 이런 걸 떠올릴 수조차 없어' 라는 마음이 된다. 그러니까 작품을 분류하는 기준은 아주 많지만 이런 분류도 있다는 것이다. 창작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게 만드는 작품 : 그렇지는 않은 작품.ㅎㅎ 긴긴밤이 바로 그랬었는데 이 작품도 그러네. 미술을 전공하셨다는 작가의 내면에 이런 이야기의 토양이 있고 전공에 따라 자신이 창작한 세상을 그려서 보여줄 수도 있다는 것이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런 이들이 소수라는 점에 위안을 느껴야 하나?^^ 그보다는 독자들에게 주어진 역할-감상에 기쁨을 느껴야 할 것이다.

루리 작가가 구축하는 것은 이야기의 얼개만은 아니다. 내가 감탄하는 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슬프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하면서 묘하게 희망이 차오르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분위기. 분위기를 창작하는 작가들이 있다. 외국 작가로 한명 예를 든다면 케이트 디카밀로 같은. 이들은 무엇으로 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문체일까? 표현일까? 그래서 그들의 문장에는 적어두고 싶은 것들이 많다.

어딘지 특정하지 않았고 우리나라는 분명히 아닌 배경. 하지만 이국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고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는 것 같으며 묘한 그리움까지 불러일으킨다. 그곳은, 전쟁의 포화속에 무너진 곳인데도.

파괴와 살상. 개인과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비명과 고통, 눈물만 남기는 전쟁을 왜 사람들은 멈추지 못할까?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와 나란히 왔으며 아직까지도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고등동물이 아니며 가장 어리석은 존재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이 순간 나는 분노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나를 위로한다. 거악의 지붕 아래에서도 서로 손내밀며 그리워하고 추억하며 살아가는 선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표지에서 보이는, 휘어지고 일부가 떨어져나간 올리브나무가 서 있고 개가 지키고 있는 집. 몇 세대를 지나는 동안 많은 사람이 머물고 지나갔었고 한결같이 그리워하는 곳. 주변에는 그저 소문으로만 떠도는 집. 그곳이 바로 '나나 올리브'가 사는 '올리브나무집'이다. 이집은 늘 문을 열어두었고, 개가 있다. 그 개(들)는 쓰러지거나 길 잃은 이들을 집으로 이끌어주기까지 한다. 그 집 또한 폭격이 피해가진 않았고 가족들은 떠나기도 하고 남기도 했는데, 사람이 없었던 기간에도 개는 남아 집을 지켰다. 이 책에 개가 나오는 이유는 개의 그런 성품 때문인것 같다. 지킴, 기다림. 개의 유전자에 새겨진 듯한 그 '기다림'은 가끔 내 가슴에 통증을 준다. 왜 그렇게 기다려.... 그런데 그들은 기다린다.ㅠㅠ

그집에 머물렀던 이들 중 두 명이 집을 찾으려고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때 그들은 젊은 군인과 소년이었지만 지금은 노인과 중년이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병 치료를 앞둔 군인을 놓고 소년이 먼저 길을 떠난다. 드디어 그 집을 발견하던 순간 미친듯이 뛰는 심장의 고동이 독자들에도 전해진다.

내려앉고 썩어가고 황폐해진 집에서 (과거에 소년이었던)중년은 오래된 노트를 한권 발견하고 치료중인 (과거에 군인이었던)노인에게 부친다. 노인은 그 노트를 읽기 시작했다. 그건 편지였다. '코흘리개'라고 자신을 칭한 누군가가 '나나에게' 보낸 편지 모음이었다. 부칠 수 없는 편지였고 다른 말로는 일기라고도, 생존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글들이었다. 이 편지가 액자 안의 그림처럼 가운데에 자리하고 주변에 이 소년(다리스)과 군인(윌터)를 비롯, 그 집과 인연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다. 퍼즐맞추기가 꽤 필요한 독서였다.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닌데 숨을 죽이고 끝까지 읽게 되는 건 이 퍼즐맞추기의 힘이 컸다. 감동은 작은 선의가 연결되고 이어져 흐르는 서사 속에 있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속에서 다 잃고 겨우 남은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슬픔을 안고 있어요. 그 사실이 니를 버티게 해요. 가끔은 슬픔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그만 잠겨버리고 말 것 같을 때, 내 옆에 나처럼 턱밑까지 차오른 슬픔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헤엄쳐 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아, 아직 괜찮구나, 하고 따라서 헤엄을 쳐요. 헤엄을 치는 나를 보고 또 다른 누군가 역시 헤엄을 치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시커먼 슬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지어 헤엄을 치고 있어요.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요."
(104~105쪽)

"가족은 떠나기 전 통조림 몇 개를 주고 갔어요. 곧 겨울이 오는데, 뒤이어 오는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면 좋겠다면서요. 불행한 사람들은 더 불행한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려요. 그러면 불행에서 한 발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가족이 남긴 통조림은 누군가를 잠시나마 불행에서 멀어지게 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그 누군가는 그 잠시 동안 또 누군가를 해아릴 수도 있겠죠.
불행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어요.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서로의 허리를 끈으로 묶고 가듯이요. 그래서 불행에서 한 발 멀어질 때마다, 다른 누군가를 한 발 더 끌어 올리는 거예요. 그 뒤에 있는 사람도, 그리고 또 그 뒤에 있는 사람도요."
(158~159쪽)

거대한 악의 지붕 아래에 웅크린 사람들이 이렇게 작고 거친 손을 이어 잡고 자신에게도 넉넉하지 않은 것을 나눠주는 모습은 슬픈가? 아름다운가? 둘 다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 또한 두 느낌을 모두 담았다. 눈물겹지만 폐허 사이로 비쳐드는 빛의 느낌은 따스하다.

오늘 예배 때 목사님이 읽어주신 말씀을 듣고 이 책의 이미지가 또 떠올랐다. 내가 그 주제를 엮을 통찰은 없으나 '아무 것도 없는 자' 라는 말씀이 마음에 특별히 다가온다. 이 책을 읽은 후라 특히 그런 것 같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폐허 속에서 이어진 연대는 그래서 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큰 작품 하나가 또 탄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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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의 거울 - 장애를 마주하며 사람을 다시 바라보다
김인규 지음 / 푸른칠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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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교사 김인규 선생님에 대해선 꽤 오래전 누드작품 논란 때 알게 되었다. 작품인데 뭐가 문제야, 이게 시끄러울 일이야? 정도로만 생각하고 금방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분을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책으로 만난 사람은 사건으로 접한 사람과는 완전 다르다. 책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 책의 제목이자 선생님의 셋째아들인 진우의 잉태 시점부터 시작된다. 그때 선생님은 화가로서의 삶에 중요한 과정으로 유학을 고려중이었기에,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이 기쁨으로 다가오기엔 너무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마음고생 끝에 유학은 포기했고 뒤늦게 다시 시작된 육아에 겨우 마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 육아가 보통 육아가 아니란 사실이 시시각각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발달장애를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은 독자에게도 쉽지 않다. 다른 분들의 책도 읽어보았지만 모든 사례들이 다 각각 별개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다행인 건 내가 아는 모든 분들은 진단 즉시 인정하고 부모의 삶을 발빠르게 전환했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식 일이라고 모두 그런 결단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부부는 진우가 성장할 수 있는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갔다. 서울같은 대도시에 살지 않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진우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여기에서 작가님과 같이 깨달아갔다. 정상의 개념은 무엇인가? 다른 인식의 세상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소위 '정상'의 범주로 들어오라고 끌어당기는 것은 합당한가?

그러나 모든 것을 머리와 마음이 이해했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어려움은 있다. 몸의 어려움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수고'라고 할까. 지원하고 돕는 수고 없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긴 힘들다. 이 수고를 누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가 그 사회의 수준을 말해준다 하겠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비한다면 많이 좋아졌다. 학교만 해도 충분하진 않아도 다양한 지원의 손길들이 있고 내가 본 바로만 얘기한다면 모두들 태도도 훌륭하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먼저 부모들이 자녀의 장애를 절망으로 여기지 말고 (남의 말이라고 쉽게 한다만ㅠ) 주변과 기관에서 좀더 허용적이고 환대하며 적절한 수고를 함께 해준다면 좋을 것이다. 함께 걸어가는데 짐을 나눠 지지 않는 건 참 이상한 모습이니까. 그래서 짐을 좀 덜어서 지고 걷지만 그것에 화내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당연하고 동등한 모습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 선생님이 진우와 함께한 30년의 세월에서 소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장부터는 작가님이 화가이자 미술교사인 장점을 살려 진우를 비롯한 발달장애 학생들과 미술 활동을 해온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하고 우리가 정해 놓은 어떤 기능에 도달시키려고 조바심을 냈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가 왔다. 하지만 그 일은 진우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그 가운에서 작가님의 시각과 생각이 바뀌어갔고, 그 생각은 장애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생각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 생각의 흐름을 담담하게 서술한 것이 이 책이다. 담담하나 그 안에는 그동안 겪었던 깊은 슬픔,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뇌, 자식에 대한 절절한 사랑, 하는 일에 대한 열정까지 참 많은 것이 담겼다.

작가님이 깨달은 것 중에는 ‘안 되는구나’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인간이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듯이 누군가의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영역. 그걸 인정하는 데는 많은 아픔이 따랐지만 어찌보면 정작 본인이 그러지 않는데 주변인들이 그리 슬퍼하고 있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미술활동만 가지고 보아도 발달장애인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 안의 즐거움에 몰두할 때, 비장애인들은 바깥에 놓인 타인의 시선 앞에서 즐거움을 향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정한다. 나도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정상값’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 걸까. 노력하면 해낼 수 있는 것과 닦달해봤자 상처만 남는 것은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나름의 한계가 있다. 그것이 장애라면 일종의 장애다. 나는 이런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참 불공평하게도 인간의 역량은 공평하진 않더라고. 신체의 기능도 마찬가지고. 거침이 없는 분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한계를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감추며 살금살금 살아온 나는 나의 ‘장애’를 많이 인식하며 살아간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분의 글에 더 많이 공감하는 것 같다.
“결국 장애의 문제란 모든 사람의 문제라는 사실, 아니 모든 사람의 문제가 결국 장애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내가 진우와 함께 애쓰며 살아온 종착점이었다.” (12쪽)
“생각해 보면 나의 영역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타인이 어떤지 세상이 어떤지와 상관없이 고유하고 독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는 더 낫고 못한 것이 없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런 자신의 영역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타인들의 모습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그 빛을 잃어가는지도 모른다.” (180쪽)

부디 이 사회가 지탱할만한 사회이길 바란다. 나 또한 남과 함께 하는 걸 꺼리고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이런 말 할 자격이 심히 부족하지만, 손잡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길, 그 파문이 번져가길 바란다.

(표지가 단순하면서도 특별하다. 손에 들기 좋은 판형과 적절한 글씨 크기 등도 가독성을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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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마지막 손님 보름달문고 101
임정자 지음, 이인아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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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50대가 좀 남았는데, 아니 요즘엔 60도 노인으로 치진 않는데 마음과 껍데기의 괴리에 다소 우울해진 나는 요즘 이런 책들을 보고 있다.
- 노년을 읽습니다 (서민선)
- 미리 슬슬 노후대책 (마녀체력)

닥친 후에는 늦는다는 점에서, 지금 읽어야 하는 책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어렵진 않지만 빨리 읽어치울 책은 아니라서 조금씩 읽고 있다. 그러던 중 무슨 우연인지 이 동화를 읽게 되었다. 넘기며, 어 이 책 읽은 거 같은데? 어 분명히 읽었는데? 하여 책정보를 확인해보니 개정판이었다. 구판은 10년 전에 나왔었다. 그때 내가 읽었나보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사무치는 것은 위에 쓴 이유로 당연한 일이겠다.

임정자 작가님은 내게 좀 특별하다. 작가님은 수많은 기억 중의 하나라 특정할 수 없으시겠지만 15년도 더 전에 내가 처음 주관했던 작가와의 만남에 강사로 모신 분이었다. 그때 우리반 아이들은 <무지무지 힘이 세고, 대단히 똑똑하고, 아주아주 용감한 당글공주>라는 책을 읽었고. 그때는 작가님이 멀지 않은 곳에 사셨던 기억인데, 작가의 말에 보니 지금은 전남 강진에 거주하신다고 한다. 그곳에서 할머니들의 생애 이야기를 듣고 채록하는 일을 하셨다고. 그 할머니들 또한 이 책의 할머니 못지않게 한많은 세월을 살아오셨다. 현대사의 비극들은 할머니들의 삶에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다. 온몸으로 그것을 받아내며 살아오신 할머니들.

이제 격변의 세월, 나와 가족의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운 그 시절은 지나갔으나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병든 육신과 외로움이다. 할머니는 딸이라고 자식 취급도 받지 못하고 자라다가 (이름도 그냥 가이나) 맞은편 섬으로 시집을 갔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남편을 만나 잠시 행복하게 사는 듯했으나.... 이념의 혼란 속에서 남편도, 시부모도, 아주버님도 다 잃고 자식들의 목숨이라도 부지하려고 깨져가는 배를 필사적으로 노저어 지금의 섬으로 도망쳐 왔다. 윗동서와 조카들까지. 여자들과 아이들만의 탈출이었다. 윗동서는 충격에 정신줄을 놓아 바닷가를 떠돌다 결국 바다에 빠져 죽었고, 배우지도 못한 할머니의 손에 자식들과 조카들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평생 죽어라 일만 하며 살았다.

살아남는 일이 끝나자 이제 떠남의 시절이 되었다. 든든하게 성장한 아들마저 바다에서 잃고 할머니는 어떻게 살았을까? 딸은 딸대로 떠나고, 큰조카도 죽고, 작은조카는 온갖 원망을 할머니한테 다 퍼부어놓고 떠났다. 독자가 보기엔 그런 배은망덕이 없는데 "다 내 죄랑께"만 되뇌이는 할머니.ㅠ 그래도 남은 손자를 키워야하기에 살아야 했다. 손자는 할머니를 사랑하며 잘 자랐지만 장성했으니 보낼 수밖에 없는 것. 그래서 지금 바닷가의 집엔 할머니 혼자다.

할머니는 '손님'을 기다린다. 각 장마다 시작에 할머니의 이 노래가 반복된다.
"오실랑가 오실랑가
우리 손님 오실랑가
기별 없이도 오는 손님
오늘은 오실랑가"
이 '손님'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반가운 손자와 증손주들일 수도 있지만 결국 할머니가 기다리는 손님은 '그것'이다.

그것을 이렇게 자면서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다면 그만한 복이 없다고들 한다. 결국 할머니는 일평생 복쪼라기라고는 없었지만 가는길은 복을 받았다고 해야 하려나. 비록 손자가 도착하여 하루만 더 일찍 올걸, 지난주에 올 걸 하며 대성통곡을 하더라도 (거기까진 책에 나오지 않음) 할머니로선 잘된 일이다.

요즘 존엄사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의 논의가 횔발하다. 어느나라는 된다는데 우리나라는 꿈쩍도 안하고 앞으로도 되기 힘들 거라고들 한다. 왜 그렇게들 다른지 모르겠다. 죽을 일밖에 남지 않은 극심한 통증 환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조금 편안하게 돕는 것이 그렇게 안될 일일까. 법을 세심하게 만들 수는 없는 걸까. 존엄사의 가능성만 열어둔다면 노후가 훨씬 덜 두렵고 노년의 삶을 조금더 안심하고 영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의료의 발전이 질병의 치료, 수명 연장에 이어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가는 건 좋은 일 같은데... 내가 뭔가 모르는 점도 있겠지만.

할머니의 모습을, 옆에 무심히 선 다정한 관찰자가 써나가듯 묘사한 이 작품에서 찡했던 표현이 몇군데 있다. 그중의 하나는 갯가에서 할머니가 갯돌을 만지며 예뻐하시는 장면이다.
- "사람은 늙으면 쭈그렁 망태기가 되는디, 갯돌은 갈수록 동글거린당께. 그래서 이쁘당께."
할머니는 오랜 세월 그토록 차가운 파도에 쓸리면서도 견뎌내어 마침내 동글동글해진 갯돌이 기특하고 예쁩니다.-

갯돌은 하나같이 이쁘지만 인간의 말로는 모두 그렇진 않다. 그 많던 고난 속에서도 갯돌처럼 살다가신 할머니. 나도 그저 누구의 가슴에도 못박지 않고 "애썼다." 로 마감을 할 수 있는 인생이면 좋겠다. 최고의 행복이라는 그것. 땅에서의 그 깨끗한 끝이 나의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큰 욕심인 건 알지만 그래도 워낙 간절하기에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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