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모의 여름 방학 - 2000년 프랑스 크로노 상, 트리올로 상, 발렝시엔 상, 피티비에 상 수상작, 2026 행복한아침독서 추천, 2025 학교도서관저널 추천, 2026 어린이도서연구회 추천
야엘 아쌍 지음, 박재연 옮김 / 불광출판사 / 2025년 6월
평점 :
프랑스 작가 야엘 아쌍의 이 동화는 20년 전에 국내에서 <수레국화마을의 어린왕자 모모> 라는 제목으로 이미 출간된 적이 있다고 한다. 최근 재출간한 이 책이 눈에 띄어 읽게 되었다. 작가의 이름이 낯설지는 않아 검색해보니 2007년 <색깔 전쟁>이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났다. 이 책은 <색깔 전쟁>이 보여준 강렬하고 무거운 메시지와는 또 다른 결의 따뜻한 감동을 준다. '어린왕자'라는 정체성을 강조한 이전의 제목도, 평이하게 작품의 배경을 담아낸 이번 제목도 모두 괜찮은 것 같다. 모모라는 소년이 겪은 초등 시절 마지막 여름을 그려내고 있다. 매우 중요한 만남이 있었다. 첫째는 책, 둘째는 사람.
그 사람이 또래가 아닌 어른이라는 점, 그리고 모모네 부모님이 모모를 살뜰히 보살필 여력이 없어 주로 외로운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다는 점, 형은 다소 심술궂고 누나가 모모를 감싸준다는 점 등에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가 떠올랐다. 제제와 모모. 어딘가 비슷하고도 다르다.
이주민 노동자용 공동주택에 사는 모모에게 학교에 가지 않는 여름방학은 자유가 아닌 무료함과 쓸쓸함의 시간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모모의 가능성을 알아본 교장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 독서 목록을 건넨다. 모모는 처음으로 마을의 도서관에 등록하고 대출카드를 받는다. 책과의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질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갈수록 좋아지는 공간과 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이용자는 딱 한정되어 있다. 특히 젊거나 어린 사람들을 보기 힘든 점이 가장 아쉽다. 그런 의미에서 모모의 도서관 등록은 환영할 일이고 소외된 아이가 세상과 연결되는 의미있는 출발점이다.
교장 선생님이 추천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야생의 삶>, 그리고 이동도서관 직원 수아드가 선물한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모두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들이다. 이처럼 '책 속의 책'을 활용하는 구도는 서사의 입체감을 더해준다.
첫 번째 책 <어린 왕자>는 에드와르 할아버지와의 만남과 나란히 진행되는 서사로서 의미있다. 두 사람은 모모가 책을 읽는 장소, 언덕 위의 벤치에서 만났다. 할아버지는 모모가 읽은 책의 목록을 듣고는 크게 기뻐한다. 자신을 은퇴 교사라고 소개한 할아버지는 "어린왕자와 너를 동일시했니?" 라는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모모는 머리 색깔부터 다르다며 손을 내젓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모모도 충분히 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모모를 왕자로 모시겠다고 한다. '수레국화마을의 어린왕자'로. 국내 초판본의 제목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주는 할아버지는 알고보니 근처 요양원에 살고 계시며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분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할아버지와 진심으로 대화하고 안보이면 걱정하며 끝까지 진정한 친구로 여긴다. 이 대목이 가장 놀라웠다. 12살 아이가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끝까지 가져간다는 것이.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모모는 할아버지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자기를 방어할 가시가 네 개밖에 없는 장미에 대해 어린 왕자가 책임감을 느낀 것처럼요." (113쪽)
조금만 부담되는 관계가 될라치면 미리 손절하라는 충고가 만연한 세상에서 어린 모모의 이런 책임감은 참 별스럽고도 숭고하다. 저절로 나를 돌아보게 된다. 이와같이 원작의 텍스트가 인물의 상황에 맞게 유기적으로 변주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두번째 책 <방드르디, 야생의 삶>은 "무인도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지요." 정도로 잠깐 언급되고 지나가긴 했지만 작가가 굳이 고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작가는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 이 작품의 메시지를 모모의 이야기 속에도 넣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주류 인간들이 '우월한 문명'이라 착각하는 것들에 대한 허상. 다르게 말하면 편견으로 타자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담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세번째 책 <자기 앞의 삶>은 어린왕자 못지않게 모모와의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책이 아닐까 짐작한다. 일단 주인공 이름부터 같다. 게다가 이민자라는 배경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맹 가리는 결국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 사실은 모모의 꿈과 지향점을 보여준다.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 언덕 위에서의 만남도 어려워진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마음을 쓰는 모모를 보며 할아버지의 마지막은 그래도 괜찮았다는 생각을 한다. 자식이나 친구들이 많아도 철저히 외롭게 떠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세대를 훌쩍 넘은 두 사람의 우정이 정말 흔치 않고 소중하다. 할아버지가 남긴 책 선물을 받은 모모, 국어시간에 '우정'이라는 글을 쓰는 모모를 보며 독자들은 편견을 넘어선 또다른 작가의 탄생을 예감한다.
130쪽 정도의 짧은 책이지만 그렇게 빨리 읽히지는 않는다. '책 속의 책'들이 어린이용 책들은 아니어서, 고학년은 되어야 권해줄 만하겠다. 청소년이나 어른이 읽어도 좋을 만한 책이다. 텍스트에 내포된 수많은 상징과 메시지를 세세히 파악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우정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