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너무 지루한 지룽이 북멘토 그림책 34
베티나 오브레히트 지음, 율리 푈크 그림, 김서정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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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의 이름은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말로는 '지룽이'라고 번역했다. 적당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너무 지루해서 지룽이다. 얘는 말하자면 '지루함'을 형상화한 존재다.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함께 이 형상화를 아주 잘해내신 것 같다. 아주 느낌이 쏙쏙 온다. 길쭉하고 회색인 이 존재는 팔도 없고 표정도 없다. (아 지루한 표정이 있는건가)

에밀이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던 순간 이 지룽이가 찾아왔다. 에밀은 지룽이에게 말을 걸며 이것저것 제안하기 시작했다. 지룽이는 다 싫다고 한다. 하지만 에밀의 상상력은 계속 뻗쳐나간다. 악어장난감은 프린츠가 되고 여자아이인형은 펠린느가 되었다. 지룽이는 말도 안된다며 툴툴댄다. 인형이랑 장난감은 말을 못한다며. 음 그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에밀도 가만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 프리츠랑 펠린느한테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 보물을 찾아낼 수도 있어."

이렇게 말하는 에밀의 주변이 침대에서 뻗어나가 점점 확대된다. 언덕이 생기고, 하늘에 여러가지가 날고, 강아지와 호랑이 인형은 보물상자를 지키는 용이 된다. 성이 지어지고 멋진 정원도 펼쳐진다. 에밀의 세상이 펼쳐질수록, 지룽이는 작아진다. 어느 순간, 들어왔던 창문으로 스륵 빠져나가 버렸다. 그걸 붙잡을 겨를이 없다. 지금 에밀은 신나는 모험에 푹 빠졌으니까!

아이들에게 텅 빈 시간, 심심한 시간은 결코 해롭지 않은 시간이며 오히려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많이들 얘기한다. 이 책은 그 메시지에 대한 최고의 형상화라고 평가하고 싶다. 글과 그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지루함이 다가온 순간과 물러난 순간, 그 사이에 구축된 아이의 상상의 세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작가들 본인이 어린 시절을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틀림없이 그럴 것 같다.

나도 어린 시절 텅빈 시간들을 많이 보냈다. 부모님들은 그걸 내버려 두셨고. 그때는 다들 그랬으니 어떤 조바심도 없었다. 지금은 크게 다르다. 부모들은 텅빈 시간에 아이들이 머무르는 걸 아까워하고 분노하게 되었다. 물론 바쁘거나 무관심해서 방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지룽이가 찾아오진 않는다. 아이들 손에 스마트폰을 쥐어줬기 때문이다. 아이들 또한 조금의 틈이라도 불안하다는 듯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뭐라도 들여다본다. 이러면 어떤 순간에도 지룽이는 올 수가 없다.

사실 이 모습이 내 모습이기도 해서 할 말이 없다. 지금 이 글도 폰으로 쓰고 있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내가 폰을 한번도 잃어버리지 않은 건 늘 지니고 다니기 때문이지.... 하지만 아이들에게 평생 지룽이를 한번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건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이것을 위해 사회와 부모가 고민하고 뭔가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편안함의 습격>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그 내용과 관련지어 생각할 부분도 있어 보인다. 완벽한 보호를 받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그건 약간의 위험성, 시련이 있는 상황에 아이들을 놓아둘 필요가 있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요즘의 인식은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만드는 것 자체가 책임의 소재를 따질 일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한가지 기억을 말해본다. 어느 반이 체육시간에 줄넘기를 하다가 한 아이가 혼자 넘어지며 무릎을 찧었다. 세게 찧었는지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담임은 즉시 보건실로 업어서 옮겼고 보건실도 응급처치 및 보호자 연락 등 해야 할 일들을 했다. 근데 그 보호자들은 "어떻게 학교에서! 아이가 다칠 수 있냐!'고 분노하면서 관련자들을 오랫동안 괴롭게 했다.

결국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 지위, 즉 부모의 지위 아니고는 모험이나 '도전 상황'은 해줄 수가 없는 일이 되었다. 부모들이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행할 일이 더욱 많아졌다는 뜻이 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부모님이 읽어주시면 가장 좋을 것 같다.

무겁고 심각하게 리뷰를 썼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밝고 예쁘고 미소가 지어지는 느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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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원샷, 매일이 맑음 - 시각장애인 유튜버 원샷한솔의 유쾌한 반전 라이프
김한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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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처음 본것은 '천재견 토리' 라는 쇼츠 영상에서다. 강아지가 우리집 개와 똑같이 생겨서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던 거다. ('말티푸'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 다만 우리집 개보다 훨씬 작고, 우리 개도 똑똑한 편인데 훨씬 더 똑똑했다. (그러니까 천재견이라는 영상을 찍었겠지?) 개의 재롱에 웃다가 그제서야 개아빠 한솔씨한테 눈길이 갔다. 그가 개와 대화중 지나가듯 자신의 눈이 안보인다고 말했을 때 깜짝 놀랐다. 아 시각장애인이구나. 근데 엄청 밝고 유쾌하시며 움직임도 자연스러우시네. 그런 생각을 했다. 이후로도 토리 쇼츠는 종종 떴고 재미있게 봤다. 그러다가 페이스북에서 이분의 책 소개를 보게 됐다. 아 책도 쓰신 분이구나!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최근작과 이 책까지 두 권의 저서가 있다. 먼저 나온 이 책부터 읽어보았다.

이 책에는 그의 어린시절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과정, 극복하며 맹학교와 대학생활을 한 과정, 유튜버가 된 과정까지 담겨있다. 내가 처음 관심을 갖게된 계기인 토리 이야기는 아마도 다음 권에 나오는 것 같다. 그 책도 재미있을 것 같다.

한솔씨의 성장과정을 보면 흔한 말로 불우했다. 9살부터 13살까지 그는 3명의 어머니와 헤어져야 했는데 친어머니와 새어머니들 모두 어린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 과정만 가지고도 평생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세번째 어머니는 말도없이 떠나갔다. 한솔이 혼자만 남겨진 거다.

이때, 지금 돌아보면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아찔해지는 손길이 있었다. 바로 큰엄마 큰아빠가 맡아주신 것이다. 조카를 거두는 것, 옛날 시대엔 당연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절대 그렇지 않다. 얘길 들어보니 방도 모자랐고 그래서 큰엄마, 큰아빠와 거실서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이건 아무리 칭송해도 모자랄 만큼 큰엄마가 대단하신 거다. 아마도 주변에서 반대도 많았을걸? 자신 하나만 봐서는 어리석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선택이 가져온 선한 물결은 지금까지도 퍼져나가고 있다.

고마운 손길도 있었으니 어린 한솔의 고난이 거기까지였으면 얼마나 좋아. 고2때 눈에 이상이 감지되었는데 그건 실명에 이르는 불치병이었다. 한솔과 큰엄마 가족이 얼마나 슬퍼하고 염려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책의 한구절에서 한솔씨는 "복지카드를 받았을 때 잠깐이었지만 '이젠 끝이야' 라고 생각했다." 라고 썼다. 그 감정에 너무나 공감한다. 시각을 잃은 세상을 나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솔 씨의 장점이 있었으니 그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무엇이든 했고, 거기서 성취감을 얻어내고 그걸 동력으로 또 나아갔다. 그 시작은 점자였다. 그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에게 학습능력과 집요한 성취욕이 있었던 것에 나는 감사한다.

맹학교 재학기간 중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며 그게 그에게 희망이 되었던 것도 참 다행이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라는 그의 장점은 볼수록 다행스러웠다.우울질이 약간 스며 있는 내 성격으로는 도저히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그 두 성격은 출발이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천지차이의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 한솔 씨의 행보를 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한솔씨에게 그 긍정에너지를 형성해 준 곳이 큰엄마네 가정이었다는 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솔 씨는 그 전에 바닥을 헤매던 학업성적이 큰엄마네 가정에 편입되고부터 수직상승했다고 밝히고 있다.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하루를 얘기할 수 있는 일상이 신기할 정도로 행복하고 좋았다고 한다. 이건 모든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한솔 씨의 천성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따뜻함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천성도 발휘되기 어렵지 않았을까.

한솔 씨의 도전은 계속된다. 시각장애인이 주로 가는 학과들을 마다하고 어렵다는 경영학과에 진학했으며, 장애 학생들과 동아리도 결성해서 활동했고 소수자들에 무심했던 학교의 여러 모습을 바꾸어 나갔다. 가장 큰 도전은 역시 유튜브라 하겠는데, 이 도전을 통해 그의 삶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한조각인 토리 쇼츠를 보고 그를 알게 되었으니. 이 책을 읽고 그의 정식 채널을 구독했다. 이 책의 제목에도 들어있는 '원샷한솔'이다. 이게 끝은 아닐 터이다. 그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고 나는 그가 영상으로 공개되는 부분, 보여지지 않는 모습 모두에서 평안하고 즐겁기를 바란다.

그는 이제 시력을 잃었던 처음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을 혼자서 해내고 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분도 있을거라 생각한다. 한솔 씨도 나처럼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했던 걸 보면.
"다른 사람들 입장에선 저랑 뭘 하든 제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 상대가 힘들지 않을까요?" (101쪽)
하지만 이걸 넘어서야 한다. 장애 당사자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회가 넘어서야 한다.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걸 보여주는 한솔 씨와 친구들이 정말 고맙다. 서로 고마워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까지 제거할 필요는 없다. 내미는 손길은 흔쾌히 잡고, 고마워하고, 나도 내밀 수 있는 곳에 손을 내밀고, 또 고마워하고. 이렇게 고마운 마음이 퍼져나가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 아닐까. 한솔 씨는 처음의 미안함과 주춤거림을 극복했다. 너무 다행이다. 지금은 한솔 씨한테 용기를 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 자식 또래의 한솔 씨한테 나는 또 이렇게 배운다.

어린시절의 상처에 대해서도 지금의 한솔씨는 파도타기의 경험이라고 말하고 있다. 파도타기에 익숙해지고 새로 오는 파도를 넘을 수 있는 힘이 생긴 과정. 또 이렇게도 말한다.
"같은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것과 기대감으로 맞이하는 것은 크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240쪽)
앞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이 있을까. 난 앞이 보이지만 한솔 씨보다 두려움은 훨씬 크고 기대감은 훨씬 작다. 젊지만 나보다 훨씬 단기간에 큰 파도를 많이 넘은 한솔 씨는 이제 웃으며 여유있게 파도를 타고 있다. 닮고 싶은 모습이다. 그의 파도타기를 계속 응원하겠다. 그리고 천재견 토리의 이야기가 담긴 두번째 책도 꼭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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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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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표 작가의 책을 두 번째 읽었다. 쓴 순서로는 이 책이 첫 번째라 할 수 있다. 2009년에 <잘가요 언덕>이라는 책으로 먼저 나왔다. 이야기의 씨앗을 마음속에서 품고 굴리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10년도 더 전이니 이 책은 정말 오래 걸려 나온 책이다. 나는 차인표 씨가 작가라는 걸 겨우 재작년에 알았는데, 그가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지는 거의 30년이 되어가는 셈이다. 알게 된 계기는 이 책이다. 외국의 어느 대학에서 필수도서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역주행이 시작된 때. 얼마전 드디어 그의 책 한 권을 읽어봤다. 한 권 읽으니 자동적으로 다음 책으로 손이 뻗어갔다. 아마도 <인어 사냥>까지 쭉 이어갈 듯하다. 그것까지 읽으면 끝인데, 작가님은 차기작을 집필 중이시려나.^^

일제강점기라는 참혹한 시대와 위안부 징용이라는 만행을 다룬 책인데도 너무나 결이 고운 느낌이다. 조심조심 예쁘게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그 안에 백성들의 고달픈 삶과 참혹한 죽음과 고통스러운 부상과 비극으로 끝난 사랑이 들어있음에도 그렇다. 인간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굳게 믿는 사람이 괴롭고 힘든 이야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심조심 들려주는 것 같다. 이 또한 차인표 스타일일까. 나는 이런 느낌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느낌도 좋았다. 접근 방법은 다양한 것이 좋으니까. 이 책은 어린이들도 고학년 정도면 충분히 읽을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역사동화가 많이 출간되었는데, 그중에 어떤 작품은 이 책보다 더 두껍고 어렵다. 그러니 이 책은 역사동화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어도 무리가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가 더 좋긴 하다. 동화로 나왔으면 훨씬 덜 읽혔을 지도 모르니까....

제목을 말하자면 구판 제목인 <잘가요 언덕>도 좋다. 책을 읽어보면 그것이 이 책의 중요한 배경인 것을 알 수 있다. 개정판 제목인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도 좀 길긴 하지만 좋다. 순이와 용이의 사랑의 대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고뇌하는 일본군 장교 가즈오가 나오는 것도 이 책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준 요인 중 하나다. 그가 자원하여 입대하고 조선에 투입되어 몇 년이 흐르는 동안 처음의 공명심과 의지가 점점 회의와 곤혹스러움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중간중간 삽입된 그의 편지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어머니께 보내는 그 편지에는 군인으로서 발설하기 어려운 그의 인간적인 고뇌가 점점 스며들고 있으며 편지의 끝에는 꼭 그림이 한 점씩 그려져 있는데 이것도 작품에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잘가요 언덕>이 있는 이 마을은 백두산의 ‘호랑이 마을’이다. 쉬지 않고 땀흘려 일구어야 먹고 살 수 있는 곳이지만 그들을 품어주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아름답다. 거기에 촌장님의 손녀 순이가 살고 있었고, 백호를 잡기 위해 마을로 들어온 황포수와 그의 아들 용이가 있었다. 둘의 애틋한 사랑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리고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위안부로 징용되는 소녀가 바로 순이다. 순이는 이야기 안에서 할아버지를 잘 모시며 밥을 짓고 나무를 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떠서 건네고, 마을에 머무는 사람에게 밥을 지어주는 따뜻한 존재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중국으로 도피하는 부부가 떨구고 간 아기 ‘샘물이’를 업어 키우며 보살펴주는 모습이다. 특히 눈물샘이 막힌 샘물이를 위해 날마다 눈을 꾹꾹 눌러주는 것을 잊지 않는 모습.

중반쯤 가즈오가 인력 동원 명령 공문을 받으면서 이야기는 비극으로 휘몰아친다. 순이를 구해내기 위한 가즈오의 전략, 그걸 꿈에도 모르는 용이의 전략. 두 전략이 엉키면서 숨을 멈추고 보게 되는 활극들이 펼쳐진다. 이런 부분을 읽을 때는 드라마로 만들어도 몰입감이 대단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을 누비는 포수들이 아니면 접근하기도 어려운 그 대자연의 모습을 잘 구현하는 게 관건이겠다.

용이와 순이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볼 때, 순이는 엄마별을 얘기했었다. 호랑이에게 엄마를 잃은 용이는 그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만난 그들은 또 별을 이야기한다.
“난 네가 백호를 용서해 주면, 엄마별을 볼 수 있게 될 것 같아.”
“모르겠어. 용서를..... 어떻게 하는 건지.”
“상대가 빌지도 않은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195쪽)

총을 맞아가며 그들은 또 눈으로 별을 이야기한다.
‘용이야, 우리, 다시 만나자.’
‘그래, 꼭 다시 만나자.’
‘엄마별에서 기다릴게.’
‘그래, 꼭 찾아갈게.’ (223쪽)

순이를 구하려던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 실패했고 책은 이제 몇 장 남지 않았다. 순이가 징용된 이후의 일은 책에서 다루지 않았다. 아주 먼.... 훗날 고향 찾아 필리핀에서 온 ‘쑤니 할머니’가 뒷이야기에 나올 뿐이다. 어떤 사람들의 삶과 사랑은 이렇게 기구하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한 별을 바라보고 있다는 믿음만으로 그 사랑을 평생 지키며 산다. 그래서 더 애틋한 사랑. 개정판의 제목은 이렇게해서 나온 것 같다.

아픈 역사를 그만의 느낌으로 색다르게 다룬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용서든 응징이든 그 안에 담긴 작가의 가치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 아픔을 이렇게 오래 품고 다듬어 작품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가 닿지 않을까. 그것을 위해 고민한 마음이 느껴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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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하루
차인표 지음 / 사유와공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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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차인표 님은 진정 작가가 맞구나 생각했다. 배우로 각인된 분이어서 본업은 아닌 걸로 생각했던 걸까. 스토리와 문장들에 좀 놀라면서 읽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로 유명한 분이고 나의 20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윙크를 날린 그를 에세이도 아닌 장편소설로 만난다는게 상상이 잘 안 갔기 때문인 것 같다.

이분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언젠가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이라는 작품이 유명해져 역주행을 할 때부터다. 궁금해서 도서관에 가면 한번씩 찾아보곤 했었는데 항상 대출중이었고 나도 다른 읽을거리에 밀려 잊어버렸다. 이번에도 역시 대출중이었지만 타관에 이 책이 한 권 남아있어서 상호대차로 대출해 읽어봤다. 읽고나서 <언젠가 우리가...> 책에 당장 대출예약을 눌러놓았다. 차인표 소설의 독서가 앞으로 몇권 이어질 듯하다.^^

이 책은 <오늘예보> 의 개정판이다. 3인의 인물들 이야기가 따로 또 같이 얽힌 책이었고 개정판에선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추가되어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고 완성도도 높아진 것 같다.

각각의 이야기는 웃기면서도 무척 비극적이다. '코믹 감동 소설' 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물론 대사 등이 무척 웃기니까 코믹 맞지만 이렇게 비참한 스토리에 '코믹'자를 붙이는 게 맞나 읽는 내내 생각했다. 하지만 후기 성격의 마지막 장, [20년 후 그들의 하루]를 보고는 푸하하 웃고 완전 인정하고 말았다. 비참한 인생들은 어떤 선택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었다. 어쩌면 이 후기는 없어야 현실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있어 좋았다. 한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이걸 '차인표식 이야기'라고 부르면 안될까. 이런 이야기도 있길 나는 바라니까.

각 편의 구성은 꿈-오전-오후-해 질 무렵으로 모두 동일하다. 이런 면에서도 상당히 짜임새 있다고 느꼈다. 각 인물들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 다른 인물의 이야기에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그 등장시점이 절묘한 것도 웃음포인트 중 하나다. 차인표식 작명도 코믹하다.

첫 인물은 '나고단' 씨다. 그는 키가 작아 1번을 벗어나지 못했던 어린시절부터 한번도 기를 펴보지 못하고 살다 기껏 벌인 일들은 다 말아먹고 40대인 현재 노숙자다. 그가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 동료(?) 노숙자들을 보며 느낀 마음에 너무 공감이 갔다. 내 마음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섬뜩한 마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체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이미 배고픔이 먹어 버렸다. 그런데 인간에개는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있다. 억울함이다. 무엇이 억울하냐고? 자신이 여기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동급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죽도록 억울한 것이다." (27쪽)
고단 씨는 자신이 이걸 잘 아는 이유가 초딩 시절 선생님과 친구들이 심어놓은 '독 가시' 때문이라고 말한다. 느닷없이 민주적 방법이라며 자유 짝짓기 방식이 도입된 학교. 키 1번 고단 씨를 고르는 여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반에는 코흘리개나 코딱지 같은 녀석들도 있었기 때문에 고단 씨의 마음에는 일말의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결국 끝까지 남은 건 고단 씨였다. 그 억울과 수치의 독 가시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이 대목을 읽으며 찔리고 염려가 되었다. 저렇게 사람이 사람을 지명해 고르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지만, 가끔씩 학생들이 강력하게 원할 때 버스 좌석이나 모둠구성을 하며 자유방식을 사용해본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해야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이런 상처가 남지 않았기를....

그는 결국 많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다는 한강 다리로 갔는데, 거기서 만난 공익들, 드라마 엑스트라 포졸과 만나 실랑이한다. 이들이 다음 편 인물로 등장할 때 너무 재밌었다.^^

두번째 인물은 이보출 씨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직업이 엑스트라, 즉 보조출연이다. 이 편에선 보조출연자들의 고충과 애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보출이 아닌 정식 연기자, 그것도 톱 주연을 주로 해온 차인표 씨가 이런 이야기를 쓰다니. 그래도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일종의 동료여서인지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쪽 계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쓸 수 없는 내용이니까.

보출 씨의 역경은 단지 보출이어서가 아니고, 그가 빚을 지고 쫒기며 아들을 누나 집에 맡겨놓고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빚쟁이 또한 인생이 괴로운 사람이다. 그가 세번째 인물인 박대수 씨다.

박대수 씨는 조폭 출신이고 전과도 있다. 뒤늦게 딸을 낳고 착하게 살아보려 하지만 딸이 난치병에 걸려 위독하다. 골수 기증자가 필요한데 희귀 혈액형이다. 그는 최후까지 남은 부하, 충성심은 끝내주지만 눈치와 센스는 디럽게 없는 김부장을 대동하고서 돈떼먹고 날른 보출 씨를 찾아다닌다. 정말 싫은 종류의 사람들이지만 아픈 딸 봉봉이 얘기가 나오면 너무 슬퍼....ㅠㅠ 그는 돈을 찾겠다고 눈이 벌게서 다니는데 병원에선 마지막을 예감한듯 "아이 옆에 있어주세요" 라고 전화가 와....ㅠ

마지막, 개정판에서 추가된 인물은 별명이 독자(독구은둔자)인 정유일 씨다. 지금은 공익이라 초소 근무를 하는데, 제대 후에 아무 대책이 없다. 한달에 두번씩 꼬박꼬박 헌혈을 하시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비명횡사하시고 유일 씨는 더 안으로 웅크러들고 식욕만 비정상적으로 폭발하여 100키로 거구가 되었다. 거구인데 안쓰러.... 아들 가진 엄마 마음인지...ㅠ 유일 씨는 꿈에서 아버지를 자주 만나는데 아버진 참 좋은 사람인거 같다. 마지막 꿈에 아버지는 기차 같은 것을 타고 떠나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슬픈 날, 힘든 날, 고통스럽거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에는 여러 생각 말고 오늘 하루에만 집중해. 딱 하루 동안만 오늘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잘 살아 보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술이나 담배를 끊고 싶다면 여러 생각 말고 오늘 하루만 끊어봐... (중략) ... 신에게 내일까지 보장해 달라고 매달리지 마. 내일은 내일 살면 돼. 오늘은 오늘을 살아." (280쪽)

눈물이 핑 돌았던 장면은 나고단 씨와 정유일 씨가 연결된 장면이었다. 나고단 씨가 죽으려고 하던 순간 "하늘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라고 작가는 표현했다. 물론 신의 음성이 그렇게 들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소설적 표현으로는 좀 안맞다고 생각하며 넘긴 장면이었는데, 마지막 편에서 보니 그건 하늘이 아닌 정유일 씨의 목소리였던 거다. 둘다 모른 채로 고단 씨의 귀에 들린 그 소리. 신은 그렇게 일하실 수도 있는 거다.

웃기면서도 애절했던 장면은 카메라 앵글에서 알짱대는 고단씨가 안비키고 고집부리자 "놔둬, CG로 지우게." 하자 고단 씨가 열폭하는 장면이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지운다'는 말에 열폭하는 것, 이거 코믹 장면일 수도 있지만 엄청 현실적이라고 난 생각했다. 나의 존재는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나의 존재로 기뻐하고, 누군가는 나의 부재로 슬퍼하고. 그러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죽겠다고 나선 길에서 말이다.
"지우지 마, CG로 지우지 말라고. 난 아직 살아있어. 너희들이랑 똑같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고. 엉엉. 니들이 뭔데 날 지워. 엄연히 살아 있는데 왜 지워... (중략)... 지우지 말라고, 이 개새끼들아." (89쪽)

이렇게 돈없고 친구없고 가족없고 (혹은 아프고) 비참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중 네 장면을 작가는 잘도 포착했고 그것을 참 절묘하게도 잘 엮었다. 그러나 마지막 후기, 여기서 어떤 독자들은 홀딱 깰 수도 있겠다. 역시 배우라선가 참 드라마스러운 결말이네 할 수도 있겠다. (진짜로 분위기가 딱 드라마적^^)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난 이게 좋았다. 하나의 기회와 실행에서 번져간 도미노가 행운과 행복의 도미노가 된 이 이야기가 좀 허황하긴 해도 마음에 든다. 이렇게 절묘하게 얽히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들 삶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며칠전 청춘을 같이 보낸 친구를 만나고 왔다. 바빠서 못만난 세월이 길지만 아직도 "아이그 이것아" 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친구. 차가운 밤의 거리에서 헤어지며 친구가 내 얼굴을 장갑으로 감싸며 인사를 해주었다.
"행복해라 이것아.^^"
대화 중 딱히 이유 없는 내 마음의 불안을 캐치한 친구가, 차인표 작가님과 똑같은 인사를 해준 것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인 내가 "당신은 소중해요."라는 인사를 많이 하며 살아왔던가 돌아보게 된다. 이 인사가 많은 독자들에게 전해지길 빈다. 이 인사를 또 듣고 싶은 마음에, 차인표 작가님의 창작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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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우주가 들린다면 창비청소년문학 139
최양선 지음 / 창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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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싱(fixing)이라는 존재가 보이는 주인공'이라는 설정이 <보건교사 안은영>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내용은 완전 다르다. 안은영이 보는 것이 주로 젤리 모양의 흉칙한 것이고 물리쳐야 하는 악한 존재라면, 이 책의 주인공들이 보는 픽싱은 고양이, 새, 돌, 물고기, 호랑이 등 모습이 다양하며 무조건 악한 존재도 아니다. 안은영에서처럼 물리치는 게 아니고 '잘 다스리고 품어야 하는' 존재라고 할까.

창비 청소년문고로 나온 책이고 주인공들은 고등학생이다. 화자인 수온이는 열한 살 때부터 타인의 픽싱을 보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의 조건은 '마음을 주고받으면 보인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픽싱은 있고 특별한 사람 눈에만 그게 보인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안은영이 그랬듯이 그걸 본다는 것은 보통 사람과 다른 일이고 괴로운 일이었기에 수온이는 되도록 보지 않으려 스스로 조용히 고립된다. 상황마저 마침 그랬다. 아빠와 단둘인데 아빠마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떠도느라 수온이는 혼자 사는 거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다. 고딩이지만 학원도 안 다니고 생활을 위해 국수집에서 알바를 한다. 이 국수집은 중요한 배경이다.

홀로이던 수온에게 친구가 생기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웃사이더인 도경이다. 수행평가 팀을 짤 때, 아웃사이더는 서로를 알아보는 건지 도경이가 다가와 짝을 청했고 과제를 해나가며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특별한 친구가 된다. 둘의 발표 주제와 내용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심었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매 순간 감정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기쁨, 슬픔, 불안, 환희, 미움 등의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우리는 감정에 의해 변화합니다. 감정의 에너지와 파동으로 우리는 다른 존재로 분열되거나 변신할 수 있지 않을까요?" (95쪽)

우주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을 늘 읽고 있는 도경이의 이런 말에서도 작가의 생각이 엿보인다.
"우주와 인간은 연결되어 있어. 인간은 우주의 일부이면서 하나의 작은 우주인 셈이지." (77쪽)

그들이 보는 픽싱을 통해서 국수집 아저씨와 딸, 수온이의 옛 친구 다미와 엄마, 도경의 수영선수 시절 친구 은표, 수온이 아빠 등 인물들의 내면 문제와 그 해결이 보여지는 구성으로 되어있는 이야기다. 꽤 흥미롭고 잘 읽히는 책이며 다양한 상황과 마음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어떤 상태에 대해서는 경고의 빨간불도 감지하는 책이 될 수도 있겠다.

내게는 다미와 다미 엄마 스토리가 가장 관심사였는데, 다미 엄마를 이해하기에는 심리묘사나 배경 설명이 좀 부족했던 것 같아 그 부분은 살짝 아쉽다. 다미가 엄마를 극복한 것은 다행이지만 나는 그 엄마도 좀 이해해보고 싶었나보다. 약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현실에서 수온이나 도경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고립되었지만 무너지거나 매몰되지 않고 외로움의 힘으로 세상의 근본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맛있는 밥이라도 사주고 싶다. 아마 그런 접점을 찾을 기회와 주변머리가 내게 없겠지만.... 아이들이 이런 책도 읽으며 서로 마음을 연결하고 자신의, 타인의 우주를 귀하게 여긴다면.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면 좋은 세상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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