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동 명탐정 바다로 간 달팽이 21
정명섭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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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동.... 30년 전 추억이 돋는 동네 이름이라 눈길이 갔다. 그 옆의 광명시 철산동에 살았는데 그때는 광명시에 지하철이 없을 때라 개봉역까지 걸어가야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지금 가보면 다른 동네 같겠지?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동네 아닐지. 주인공들은 이 동네에 사는 백수(나 다름없는) 추리작가를 꿈꾸는 탐정 민준혁 씨와 그의 조수 중딩 안상태 군.

나는 처음 보는 작가인데 그동안 나온 작품들이 아주 많고(목록을 보니 제목을 들어본 작품은 꽤 있다) 이 주인공 콤비가 나오는 전작들도 있는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작품의 세계는 끝이 없구나. 이 책은 흥미진진했다. 청소년은 나의 관심 의무 대상이 아닌지라 청소년 소설은 자주 읽지 않는데, 막상 읽어보면 재미난 작품들이 많다. 더구나 이 책은 추리물이니.

탐정이 그 이름에 걸맞게 지적이고 샤프하며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에 자기관리도 철저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를 풍기는 경우와, 백수에 허풍에 속이 빤히 보이는 허접한 처신을 하는 허당인 경우 중 어느 주인공이 더 매력적일까? 실존인물이라면 전자를 높이 사겠지만 소설 속 인물로는 후자를 선택하겠다.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준혁 씨 같은. 평상시에는 몇몇 잡기 빼고는 잘하는 것도 없고 헛다리 짚기 일쑤며 인격도 고매하지 못한 모습에 친근한 이웃(약간 한심한) 같은 느낌을 갖다가, 결정적인 순간 발휘되는 그의 기지와 살신성인에 박수를 보낼 때 짜릿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ㅎㅎ

이 책에선 세 편에서 다른 사건을 다루는데 1,3편은 조수 안상태가, 2편은 탐정 준혁 씨가 화자로 나온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내겐 사건들이 모두 새롭고 강렬했다. 1편 [지켜주는 자의 목소리]의 사건은 정식으로 의뢰받은 사건이다. 늦둥이 고3 아들이 뭔가에 빠져 이상해졌는데 무엇인지 알아봐 달라는 의뢰였다. 중딩 안상태의 특기인 해킹 짓으로 비번을 따고 들어가 본 까페는 '사령 까페'라나? 초보 미신 같은 신념에 어른들도 빠지고 그 꼬임에 멀쩡한 고등학생까지 빠지는.... 마음 둘 데 없는 방황기의 학생들을 포섭해 이용해먹는 파렴치한 놈들은 다 콩밥을 먹여야된다. 한편으로 심리적인 면에서 위태로운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보면(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훨씬 많다.) 이런 범죄의 가능성이 얼마나 활짝 열려있는가 탄식할 일이다.

두번째 사건 [불타는 교실]에선 상태가 화자가 될 수 없었다. 상태 본인이 피의자가 되어 도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건들은 조수 상태의 활약상이 큰데 이 사건은 오롯이 민준혁 탐정 홀로 해결해야 되는 일. 탐정은 조수의 누명을 벗길 뿐 아니라 고질적인 학교폭력, 학생들간 권력관계의 실상까지 까발린다. 속이 시원할 일이다. 하지만 마음이 몹시 찜찜했다. 착하지만 마음 약한 담임선생의 모습이 꼭 내 모습 같아서. 악 앞에서는 착함이 선이 아니다. 오히려 강함이 선이 될 수 있다. 냉철한 강함을 갖고 있고 싶다. 즉, 갖고만 있고 써먹을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에고 무거운 이마음.ㅠ

마지막 [리얼리티 쇼]에서 사건은 살인사건....ㄷㄷㄷ 방송국 리얼리티 쇼에 지원한 두 사람 외 몇 명은 고립된 섬에서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그것도 피의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말이다. "범인은 이 안에" 으으으 오싹하다. 실제로 그 안에서 제 2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탐정 조수 콤비는 사건해결과 동시에 악의 수장인 '진모태'의 정체까지 밝혀낸다. 그러나 자축 팥빙수를 먹는 그들의 눈앞에 진모태가 다시 나타남으로써 둘의 활약 이야기는 to be continued 임을 예고하며 책은 끝난다.

어릴때 홈즈 시리즈에 열광했었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축약본이었고 어른이 되어선 추리소설을 거의 읽지 않아서, 추리소설로서의 이 책의 위치랄까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작은 데 잘 꽂히는 나는 '이 상황에서 이런게 가능해?' 라고 고개를 갸웃하며 읽은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가능성만으로 사건 과정이 이루어지진 않겠지. 어쨌든 심장 쫀쫀한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중딩 상태를 통해 이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그늘을 보여준다는 것. 하지만 그늘 속에서도 한줄기 햇빛을 받으려 가지를 뻗는 상태의 모습은 짠하고도 기특하다. 부모도 없고 할머니마저 술주정뱅이에 동생까지 챙겨야 하는 상태는 '돈 되는 일을 하려고' 준혁 씨 옆에 붙었지만 둘의 콤비는 서로에게 윈윈이다. 유능감은 자존감으로 자존감은 건강함으로 이들을 이끌 것이다. 그늘에 처한 많은 청소년들이 이런 기회를 찾기를, 찾았을 때 그 길이 보이는 사회이길 제발, 바란다.

이 책을 읽고 작가님의 다른 책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아라>를 빌려왔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 준혁 씨와 상태를 또 만나면 몹시 반가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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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준녕의 빵점 도전기 중학년을 위한 한뼘도서관 53
정연철 지음, 최보윤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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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년을 위한 한뼘도서관' 문고 중 신간이다. 4학년 정도에 딱 적당할 듯한 내용으로 단편 3편이 들어있다. 물론 3학년도 좋고, 5학년도 부담없이 읽고 이야기 나누기에 좋겠다.

각 편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이들은 각기 다르지만 다 읽고 나면 뭔가는 통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먼저 다른 점을 말한다면,
[공기의 여왕]의 미지는 교실에서 존재감이 없다. 아니 그정도가 아니라 기피 대상이다. 잘하는 건 없고 못생기고 몸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루하루 벌어먹기도 바쁘고 피곤한 엄마는 미지를 깨끗이 씻겨주지도 살뜰히 보살피지도 못한다. 미지 또한 스스로 자기를 챙길 만큼 야무진 성격은 못 된다. 나 어릴 적 우리 엄마가 이랬다면 난 딱 미지와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엄만 날마다 삼남매를 비누냄새 나도록 빡빡 씻기고 기계로 깎은 듯 고르게 연필을 깎아주고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주셨다. 공부는 잘했지만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젬병이었던 나는 그럭저럭 구박은 받지 않으며 지냈다. 미지의 상황이었다면 난 회복불능이었을 것. 환경은 이리도 중요하다. 난 운이 좋았던 거지.

[암호명 땅콩]의 예준이도 부모님이 바쁘다는 건 미지와 같지만 과보호 아래 있다는 점이 좀 다르다.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가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준다. 지친 할머니가 예고없이 며칠 시골에 내려가시자 엄마는 그 며칠도 불안해 도우미를 구하는데, 여의치 않아 결국 여고생 예슬이 이 일을 맡게 된다. 이 이야기의 재미는 예슬이 예준에게 전수하는 적당한 일탈에 있다.

[백준녕의 빵점 도전기]의 준녕이는 완전 다른 캐릭터다. 이 아이한테 젤 쉬운 건 공부다. 책 읽는 것, 문제 푸는 것, 영어 외우는 것, 이런 건 준녕이한테 '그냥 되는 것'이다. 고무된 엄마는 아이에게 영재교육을 시키고 싶어한다. 과한 기대에 짓눌린 준녕이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바로 '독한 방귀'다. '방귀쟁이 며느리'에서 착안하신 것일까?^^

이처럼 다른 세 아이에게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자존감과 자기주도성의 필요' 라고 할까? 표면적으로는 미지의 경우가 가장 어려운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냄새난다고 따돌림당하며 움츠러든 미지에게 반전의 기회가 오기는 참 어렵다. 다행히 적당히 따뜻하고 적절히 관심을 보여주시는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너무 들이대는 관심은 내가 참 싫어해서) 미지의 머리에서 이가 떨어진 날, 선생님은 미지를 상담실로 데려가 찬찬히 살펴보시고는 집에 먼저 가라고 하시는데, 그때 기어들어가듯 "급식..."이라고 하는 말에 "아 맞다. 선생님이 그 생각을 못 했구나." 하며 미안해 하시다가 "여기 좀 있다가 종치면 급식 먹고 가." 라고 하신다. 그리고 엄마에게 연락하셔서 미지는 그날 엄마랑 미용실에도 가고 머리도 감을 수 있었다.

부모의 여력이 없는 경우에 주변인의 조력은 숨쉴 구멍이 되어준다. 교사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교사가 그것을 하는 과정에 난관이 높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심하게 예의없거나 공격적인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마음을 내어주기는 어렵다. 위의 미지 선생님처럼 했을 때, 같은 행동을 두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학부모도, 희한한 논리로 교사 숨통을 조이는 학부모도 있다. 성인군자 같은 훌륭한 선생님도 계시긴 하지만 나같은 평범한 교사는 상처받고 꺾인다. 미지 선생님 정도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냥 평범한 교사다. 다행히 미지는 마음이 참 예쁜 아이였고 '공기의 여왕'이 된 미지에게 부러움과 환호를 보내는 반 아이들도 단순하고(^^) 예쁘다. 판을 깔아준 선생님의 배려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모든게 맞아떨어진 해피엔딩이다. 실제는 좀더.... 아니 훨씬 어렵다. 교사의 조력이 아이들 간의 격차를 얼마나 좁혀줄 수 있을까. 이건 교사들의 고민이자 화두이면서 도전해본 교사들의 트라우마이기도 하니까.... 말하자면 길다.ㅠㅠ 어찌됐든 포기해서는 안 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예준이 이야기가 제일 유쾌했다. 도우미로 온 여고생 예슬이 때문이다. (아무리 급했다지만 이걸 그냥 맡긴 예준이 엄마도 허당) "그건 몸에 해로운데" "그건 나쁜 건데" 하는 예준이에게 라면, 햄버거, 만화, 노래방 등등 일탈의 맛을 체험시킨다. 마지막에 할머니가 돌아오셔서 푸짐하고 따뜻한 식탁의 해피엔딩. 예준이는 이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 거다. 비례하여 일탈의 횟수도.ㅎㅎㅎ

준녕이는 말하자면 엄친아라서 친구들이 보기엔 밥맛일 수도 있지만 본인은 억울할 것이다. 그냥 나는 그게 잘되는 것 뿐이라고! 너네들도 잘되는 게 있잖아. 서로 다른 것 뿐이지. 그런데 이나라에선 공부가 잘되는게 최우선이라 나머지 재능들을 압도할 뿐 아니라 '방귀'로 상징되는 압박을 가하기까지 하니 문제인 것이다. 어쨌거나 준녕이는 표지 그림처럼 시원한 방귀를 뀌고도 모자라 빵점 시위까지 했으니, 앞날이 기대된다 하겠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재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세상은 왜이리 불공평한가요." 울부짖고 싶게 만드는 다재다능 팔방미인들도 있다. 갈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교실에서도 못하는 게 없어보이는 아이와 재능을 찾아보기 어려운 아이들이 공존하며 그 간격은 더 커지는 느낌이다. 그 사이에 자존감이 존재한다.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라고 했던 이효리 씨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재능에 관계없이 본인의 존재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남이 가진 재능에 의미를 크게 두는 사람이라면 평생 나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살겠지....^^;;;; 이 책이 아이들의 자존감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크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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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과 나 사계절 아동문고 96
송미경 지음, 모예진 그림 / 사계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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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돌 씹어먹는 아이>를 시작으로 송미경 작가님의 책들을 다 읽고 서평도 대부분 썼다. 이분의 작품에는 늘 감탄하는데, 다루기 힘든 소재라든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취재가 대단해서 등의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나도 접해본, 나도 익히 아는 주변의 익숙한 배경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이런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감탄이 나오는 건 왜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눈에 크게 보이는 건 두 가지다. 시선과 문체.

어떻게 이런 내면을 들여다보았지? 어떻게 이 작은 것을 흘리지 않고 포착했지?라는 감탄을 하게 만드는 작가의 시선. 그리고 화려한 문장도 없이 평범한 것 같지만 느낌이 각별한 그 문체. 이 책에서도 그 두 가지를 다 느꼈다.

표지엔 커다란 동물에 기대어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제 크기 비례와는 맞지 않는 그림이다. 왜냐하면 그 동물은 햄스터이기 때문. 햄릿은 주인 미유가 붙여준 이름이다.

반려동물과의 애틋한 사랑은 자주 다뤄지는 소재다. 개나 고양이라면 나도 충분히 공감한다. 근데 햄스터는 좀.... 나도 예전에 고슴도치 세 마리를 키워 본 경험이 있다. 첫 녀석이 죽었을 때는 아들딸이 눈이 빨개지도록 울고, 묻어주고 했었는데.... 둘째, 셋째 때는 그냥 그랬다. 이후 개를 키우면서 느꼈다. 다 같은 반려동물이 아니구나. 공감능력(어떻게 보면 지능?) 여부에 따라 천지차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햄스터란 그닥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번식력이 너무 왕성한 것도, 서로를 잡아먹는 것도 커다란 비호감 요소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이 책에는 공감되었다. 위에 언급한 작가의 능력이다.

햄스터 이야기와 함께 얽혀 나가는 또 한 줄기의 이야기는 '가족'이다. 미유와 친구들의 혈액형 이야기는 복선이었다.(바로 눈치챌 수 있지만) 미유는 자신이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입양되었던 것이다. 이모와의 애정이 각별해서 나는 이모가 미혼모인가 추측했는데 그건 너무 넘겨짚은 거였다.^^;;; 하여간 미유는 마음의 풍랑을 겪는다. 격렬하진 않지만 아프게. 햄스터의 병과 치료, 죽음의 과정과 미유의 정체성에 대한 아픔은 얽혀 나아가며 커다란 진동을 이룬다. 미유가 햄릿을 보내는 과정은 성장통이었다고 하겠다. 인생을 배웠다고 할까. 독자들도 잔잔히 따라 배운다. 인생은 만남이며 또 헤어짐이라는 것을. 하필 할머니 생신날에 세상을 떠난 햄릿. 할머니가 생신상 앞에서 가족들에게 주신 말씀이 진리다.
"만나면 헤어지고, 태어나면 죽는 게 당연한 거지. 헤어지지 않는 만남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그래도 사랑하며 살았으면 되는 거야."

문학작품을 통해서 난 주로 인간의 찌질한 본성을 많이 접해왔는데, 이 책은 그 반대다. 입양가족의 흔들림 없는 사랑. 솔직히 내가 가늠하기엔 어려운 사랑이다. 그래도 현실성이 없다는 둥 그런 말은 하지 않겠다. 이런 분들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니까. 미유 친엄마(미혼모)일 거라 내가 오해했던 이모의 사랑은 참 특별하다. 어찌 그리 정이 많고 깊을 수 있을까. 또 침착하고 단단한 엄마의 사랑도 그렇다. 엄마는 미유에게 가족의 의미를 알려준다.
"가짜 딸이 어디 있니? 너는 햄릿도 우리 가족이라고 하잖아. 햄릿이 가짜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 없잖아. 우리와 생김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하고, 심지어 조금밖에 같이 안 살았는데도."

사랑의 그릇이 달라 나는 이분들을 흉내내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이들이 알려준 가족의 의미, 그리고 만남과 헤어짐의 순리는 꼭 기억하겠다. 아니다, 순서를 바꾸겠다. 헤어짐과 만남이라고.

미유는 햄릿을 보내는 편지에 '나중에 만나서 모든 걸 이야기하자'고 적었다고 했다. 조그만 한 생명을 보내며 정성을 다하고 손을 맞잡는 미유와 친구들에 모습에 마음이 먹먹하고,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감정을 차단하고 살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게 나와 작가님의 차이 아니겠어. 작가님은 아마도 많이 힘드실 거야.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렇게 살아야 글이 나온다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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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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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교육도서를 비롯한 비문학을 주로 읽던 독서모임에서 이번엔 소설을 읽어보자는 제안이 나왔고 박완서가 어떨까 하는 얘기도 나왔다. 학교도서관 교사용 서가에는 소설책이 별로 없다. 그중 용케 박완서가 한 권 있었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었다.

박완서 소설은 몇 권 읽었지만 모두 인생이 뭔지도 모르는 젊을 때여서 그 맛을 몰랐던 것 같다. 특히 <휘청거리는 오후>라는 책은 초등학교 때 집에 있어서 읽었다가 어린 마음에 '무슨 이런 저질 책이 있담' 했던 기억이 난다.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다시 보면 어떻게 보일까? 묻어두었던 옛 사진을 보는 느낌일까? 한 번 찾아 읽어봐야겠다.

소설에 썩 관심이 있지는 않아서 박완서 님의 글에 대해 특별히 생각한 것은 없었다. 명성만큼 대단한 작가라는 정도.... 그런데 나이들어 새로운 맘으로 읽어보니 그의 필력은 정말 대단하다. 이 책은 작가 나이 70에 쓰신 책....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싱싱하고 쫀쫀하고 재치있고 설득된다. 간결한 문장은 속도감 있고, 비유는 감칠맛 난다.

물론 이 책의 인물이나 서사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문장 자체의 느낌과는 별개다. 이 책에서 맘에 드는 인물도, 응원하고 싶은 인물도 없다. 그건 어쩌면 현실적인 캐릭터란 뜻도 되겠다. 박완서 님 책의 인물들이 거의 그렇지 않나 싶다. 너무나 현실적인, 너무나 속물적인. 누구나 뱃속에 똥을 품고 사는 게 인간인 것처럼 속세를 초월한 천상의 인간은 없다. 그 정신세계를 까발리면 얼굴 들 수 있는 자 몇이나 될 것인가. 박완서 님 소설에선 이렇게 속물들의 민낯을 보여주길 예사로 한다. 이 책에선 막내여동생 영묘의 시집 식구들이 가장 그렇다. 재벌가의 위세와 그 이면의 구질구질함까지. 주인공 둘째아들 의사 영빈도 일면 멋져보이지만 30년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과 외도를... 뭐 그게 사랑이라면 할 말 없지만.

서사는 빈틈이 없이 흥미롭고 디테일에 보여주는 상황묘사도 겪어봤거나 취재 혹은 조사하지 않았으면 어찌 쓸까 싶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TV드라마스러운 흔한 설정이나 한방에 해결되는 전개들도 있다. 재벌가와의 혼인도 그렇고, 그 안에서 속박되는 며느리의 삶도 그렇고, 마지막에 거기서 놓여나는 방법이 성공한 큰오빠(미국에 갔다고만 하고 그동안 등장하지 않던)라는 점도 그렇다. 그런가하면 기막힌 우연도 등장한다. 초등 동창 산부인과 의사에게 아내인 수경, 외도 파트너인 현금이 함께 다녀서 친구가 됐다는 설정, 수경이 오랜 노력 끝에 아들을 가지게 되고, 그녀가 영빈의 아내인 걸 알게 된 현금은 쿨하고도 단호하게 외도 관계를 청산한다는 내용이 그러하다. (캐릭터로만 봤을 땐 등장인물 중 현금이 그나마 제일 매력있다.)

그러나 그리 단순하게 보기에는 여러가지 줄기의 이야기들이, 그에 따른 작가의 메시지들이 얽혀있다. 내가 가장 주목해서 본 것은 영교 남편 송경호의 폐암 투병 과정이다. 재벌가의 젊은 후계자인 그의 발병에 집안에선 폐결핵을 예상하지만(집안 병력) 영빈이 진찰해본 경과 폐암임이 밝혀진다. 그가 죽어가는 과정이 영빈에게도 그랬지만 나에게도 너무나 분노스러운 일이었다. 얼마전 읽었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과 맞물려서 더욱 그랬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다. 조사를 해보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240쪽)

그런데 이 재벌가에선 이중의 어떤 것도 환자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병명을 비밀에 붙이고 미신적인 주술과 민간요법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영묘의 마음 속에 메아리친 소리, 작가의 육성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얼마 남지 않은 금쪽같은 시간을 저렇게 등신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 단 며칠을 살아도 살맛을 온전하게 느끼며 살아야 할 게 아닌가. 암이 어때서? 암 아니라도 죽음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없다. 결국은 죽을 줄 아는 게 생을 아름답고 살맛나게 한다. 안다는 건 그렇게 좋은 것이다. 생전 안 죽을 것처럼 여기고 무진장 욕심을 부리는 것도 결국은 속아 사는 것이다." (214쪽)

결국 젊고 빛나던 한 남자는 무기력하게 집안에서 정해준 치료에 몸을 내맡기다 유언도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그의 비참함은 자기결정권이 없었다는 점이다. 새삼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죽음을 앞둔 나에게 어떻게 하는게 맞는가에 대한 생각이 몰려왔다. 그런데 마지막에 또 뒤통수. 영빈이 애착을 느낀 환자 '치킨박'은 송경호와 같은 폐암, 그러나 초기여서 충분히 회복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아내와 자식들에게 치킨집이라도 남기려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것도 자기결정권이라고 봐야 하는가?ㅠㅠ 세상엔 왜 이리 무 자르듯 확실한 것이 없단 말인가? 작가가 보여주는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그게 다 '돈의 힘'이라는 것. 우와 엄청나게 우울하다.

제목이 왜 '오래된 농담'인지 나는 파악을 못했다. 환자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영빈에게 현금이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한테는 농담하지 마. 난 농담 안 좋아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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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어린이가 100명이라면 - 2021 독일청소년문학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
크리스토프 드뢰서 지음, 노라 코에넨베르크 그림, 강민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청어람아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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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이라는 책이 나온지 꽤 되었다. 꾸준히 읽히고 있고 활용이나 인용도 많이 되고 있는 줄로 안다. 이번에는 어린이만 대상으로 한 이런 책이 나왔다.

전 세계 어린이의 인구는 20억이라고 한다. 상상이 안되는 큰 숫자다. 그래서 감을 잡기 편하도록 100명으로 줄여 여러가지 통계적 비율들을 보여준다. 100명이라는 단순한 숫자 속에는 여러 사람의 자료 조사와 복잡한 계산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비율의 개념은 저학년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원 숫자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큰 숫자 자체가 아이들의 사고를 넘어서니까.

30여쪽의 그림책 분량인 <지구가 100명...>에 비해 이 책은 100쪽이나 된다. 각 꼭지마다 꽤 자세한 설명이 붙어있다. 어떤 설명들은 꽤 흥미롭기도 하고 저자의 시각에서 본 해석이 들어있기도 하다.

대한민국에 대한 설명이 강조된 부분이 있는데 이건 번역 과정에서 추가된 것이겠지? 예를 들면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은 어린이 100명 중 대한민국에서 온 어린이는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이랍니다."(7쪽) "한국은 전쟁의 아픔을 겪은 나라예요. 어르신 중에도 지난 전쟁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28쪽) 같은 부분이다.

그림이 많지는 않지만 지도 위에 표현된 아이들 그림이 그대로 그림그래프의 역할을 해서 가시적인 효과를 주는 점이 좋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세계지도 위에 대륙별로 아이들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한눈에 보아도 아시아에 가장 많고 다음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는 밀도가 낮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5명은 레고를 가지고 놀아요]에 나오는 지도가 내겐 인상적이었는데, 어린이 숫자와 그들이 1년간 받은 장난감 숫자가 대비되어 그려져 있다. 아프리카는 어린이 25에 장난감 10인데 비해 북아메리카는 어린이 4에 장난감 101이다. 지구상의 불평등을 아이들 눈높이로 이해하기에 아주 효과적인 자료가 아닐까 싶다. 저자가 덧붙인 이런 말도 신뢰가 갔다. "장난감이 많다고 해서 놀이시간이 길거나 더 행복한 건 아니에요. 여러분의 방에도 몇 년 동안이나 사용하지 않은 장난감이 있지 않나요? 과학자가 3살 이하 어린이에게 장난감을 4개 또는 16개 주는 실험을 진행했어요. 그 결과 장난감을 4개 이하로 받은 어린이가 더 오래, 그리고 더 창의적으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답니다."

<지구가 100명...>책을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설명이 추가된 책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고 뒤에 나온 책에 대한 기대가 더 높아지기 마련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5명은 길거리에서 살아요, 16명은 신발이 없어요, 54명은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요(즉 46명은 못가요) 등을 보며 이야, 나는 정말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거구나 행복한 줄 알아야겠다 말고 더 할 수 있는 생각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끝에서 두번째 꼭지는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나요?]이다. 여기선 세상 어린이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그간의 노력과 실제로 개선된 수치를 간단하게나마 보여준다. 이를 통해 지금의 어려움은 개선의 필요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모두의 관심과 실천이 있어야 함을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좋겠다. 관심은 보고 아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니 아이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겠지.

마지막 꼭지 [이 숫자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에서는 "솔직히 말할게요. 이 숫자가 매우 정확한 것은 아니에요. 그 누구도 명확히 알 수 없지요." 라는 저자의 고백을 볼 수 있다.^^ 당연한 것이다. 내용에 따라서 비교적 정확한 통계치를 얻을 수도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도 있다. 그런 설명이 오히려 내용의 신뢰도를 높여주었다. [5명은 장애를 가졌어요]라는 꼭지에서 "이 숫자는 곧 잊어버리는 편이 좋아요. 확실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에요."라고 되어 있어서 '뭐냐... 그럼 왜 다루지...'라는 생각을 첫눈에 했지만, 더 읽어보니 고개를 끄덕일만한 내용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이 무의미하다. "이렇게 각기 다른 어린이들을 그저 장애 어린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알았겠지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가능한 한 많이 배우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에요." 이처럼 이 책에는 저자의 주관이 확실히 드러난 해석이 많이 들어가 있다.

가벼운 얘기로 마치자면, 이 책에 100명이 모두 해당하는 주제가 딱 한 가지 나온다. 그것은 음악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정말 음악은 신이 주신 선물, 공짜로 받는 선물이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난 어릴 때 악기를 배우지 못했나 한탄하다가도 그저 노래를 듣고 부르는 일이 즐거운 나처럼. 아이들도 여기 나온 많은 주제들 중 자신에게 다가오는 주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을 넓혀주는 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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