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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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교육도서를 비롯한 비문학을 주로 읽던 독서모임에서 이번엔 소설을 읽어보자는 제안이 나왔고 박완서가 어떨까 하는 얘기도 나왔다. 학교도서관 교사용 서가에는 소설책이 별로 없다. 그중 용케 박완서가 한 권 있었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었다.

박완서 소설은 몇 권 읽었지만 모두 인생이 뭔지도 모르는 젊을 때여서 그 맛을 몰랐던 것 같다. 특히 <휘청거리는 오후>라는 책은 초등학교 때 집에 있어서 읽었다가 어린 마음에 '무슨 이런 저질 책이 있담' 했던 기억이 난다.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다시 보면 어떻게 보일까? 묻어두었던 옛 사진을 보는 느낌일까? 한 번 찾아 읽어봐야겠다.

소설에 썩 관심이 있지는 않아서 박완서 님의 글에 대해 특별히 생각한 것은 없었다. 명성만큼 대단한 작가라는 정도.... 그런데 나이들어 새로운 맘으로 읽어보니 그의 필력은 정말 대단하다. 이 책은 작가 나이 70에 쓰신 책....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싱싱하고 쫀쫀하고 재치있고 설득된다. 간결한 문장은 속도감 있고, 비유는 감칠맛 난다.

물론 이 책의 인물이나 서사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문장 자체의 느낌과는 별개다. 이 책에서 맘에 드는 인물도, 응원하고 싶은 인물도 없다. 그건 어쩌면 현실적인 캐릭터란 뜻도 되겠다. 박완서 님 책의 인물들이 거의 그렇지 않나 싶다. 너무나 현실적인, 너무나 속물적인. 누구나 뱃속에 똥을 품고 사는 게 인간인 것처럼 속세를 초월한 천상의 인간은 없다. 그 정신세계를 까발리면 얼굴 들 수 있는 자 몇이나 될 것인가. 박완서 님 소설에선 이렇게 속물들의 민낯을 보여주길 예사로 한다. 이 책에선 막내여동생 영묘의 시집 식구들이 가장 그렇다. 재벌가의 위세와 그 이면의 구질구질함까지. 주인공 둘째아들 의사 영빈도 일면 멋져보이지만 30년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과 외도를... 뭐 그게 사랑이라면 할 말 없지만.

서사는 빈틈이 없이 흥미롭고 디테일에 보여주는 상황묘사도 겪어봤거나 취재 혹은 조사하지 않았으면 어찌 쓸까 싶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TV드라마스러운 흔한 설정이나 한방에 해결되는 전개들도 있다. 재벌가와의 혼인도 그렇고, 그 안에서 속박되는 며느리의 삶도 그렇고, 마지막에 거기서 놓여나는 방법이 성공한 큰오빠(미국에 갔다고만 하고 그동안 등장하지 않던)라는 점도 그렇다. 그런가하면 기막힌 우연도 등장한다. 초등 동창 산부인과 의사에게 아내인 수경, 외도 파트너인 현금이 함께 다녀서 친구가 됐다는 설정, 수경이 오랜 노력 끝에 아들을 가지게 되고, 그녀가 영빈의 아내인 걸 알게 된 현금은 쿨하고도 단호하게 외도 관계를 청산한다는 내용이 그러하다. (캐릭터로만 봤을 땐 등장인물 중 현금이 그나마 제일 매력있다.)

그러나 그리 단순하게 보기에는 여러가지 줄기의 이야기들이, 그에 따른 작가의 메시지들이 얽혀있다. 내가 가장 주목해서 본 것은 영교 남편 송경호의 폐암 투병 과정이다. 재벌가의 젊은 후계자인 그의 발병에 집안에선 폐결핵을 예상하지만(집안 병력) 영빈이 진찰해본 경과 폐암임이 밝혀진다. 그가 죽어가는 과정이 영빈에게도 그랬지만 나에게도 너무나 분노스러운 일이었다. 얼마전 읽었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과 맞물려서 더욱 그랬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다. 조사를 해보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240쪽)

그런데 이 재벌가에선 이중의 어떤 것도 환자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병명을 비밀에 붙이고 미신적인 주술과 민간요법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영묘의 마음 속에 메아리친 소리, 작가의 육성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얼마 남지 않은 금쪽같은 시간을 저렇게 등신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 단 며칠을 살아도 살맛을 온전하게 느끼며 살아야 할 게 아닌가. 암이 어때서? 암 아니라도 죽음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없다. 결국은 죽을 줄 아는 게 생을 아름답고 살맛나게 한다. 안다는 건 그렇게 좋은 것이다. 생전 안 죽을 것처럼 여기고 무진장 욕심을 부리는 것도 결국은 속아 사는 것이다." (214쪽)

결국 젊고 빛나던 한 남자는 무기력하게 집안에서 정해준 치료에 몸을 내맡기다 유언도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그의 비참함은 자기결정권이 없었다는 점이다. 새삼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죽음을 앞둔 나에게 어떻게 하는게 맞는가에 대한 생각이 몰려왔다. 그런데 마지막에 또 뒤통수. 영빈이 애착을 느낀 환자 '치킨박'은 송경호와 같은 폐암, 그러나 초기여서 충분히 회복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아내와 자식들에게 치킨집이라도 남기려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것도 자기결정권이라고 봐야 하는가?ㅠㅠ 세상엔 왜 이리 무 자르듯 확실한 것이 없단 말인가? 작가가 보여주는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그게 다 '돈의 힘'이라는 것. 우와 엄청나게 우울하다.

제목이 왜 '오래된 농담'인지 나는 파악을 못했다. 환자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영빈에게 현금이 "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한테는 농담하지 마. 난 농담 안 좋아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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