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금주
우리들은 그랬다. 봉급쟁이들의 희망사항은 퇴직하고 나서 술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라고.
이 말은 아주 함축적인 의미가 있는데, 우선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약간의 경제적인 여유도 따라야 한다는 것 등이다. 말이야 쉽
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쉽게 되는 일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은퇴 후, 용감한 노병의 ‘봉급쟁이의 희망사항’은, 맥아더장군의 명언에도 불구하고,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고향 떠난 지가 수십 년, 고향 친구도 가까이 없고, 비슷한 환경의 친구도 찾기가 힘들고, 또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것도 탐탁하지 않고, 그래서 혼자서 술을
즐긴다.
그것도 딱 한 잔. 점심때 소화제 반주, 밤에 수면제로 자기 전에 한 잔이다. 현직에 있고 젊었을 때는 스트레스 해소를 핑계 삼아 술자리도 자주했고 또 폭음을 하는 스타일이라 가끔은 필름이 끊길 정도로 한꺼번에 많이 마시기도 했다. 사람도 좋아하고 술 마시는 분위기도 좋고. 핑계를 대려면 오만 가지는 못 댈까?
그런데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고 술꾼(?)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면서 술자리도 드문드문해졌고 아울러 나이 먹으면서 체력도 옛날 같지 못하니 회사의 회식이나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술자리를 피하려 하게 되었고 마시는 술도 도수가 약한 맥주 등으로 바꿨다.
그래서 막걸리와 맥주를 소화제와 수면제로 사용하는데, 술이 기호식품이다 보니 특히 막걸리는, 내 입에 딱 맞는 종류 한 가지만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술이 우리집 앞에 있는 대형 마트에서만 판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마트의 갑질인지 아니면 공급자의 농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외 없이 연말만 되면 품절이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인상된 가격으로 진열대에 ‘짠’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으이그 나쁜 시키들 값을 올리려면 공급이나 제대로 해 주든가.
빈정상해 술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물론 손수레 끌고 막걸리 사러 마트 다니기도 슬슬 싫증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메뉴를 막걸리 대신 ‘소토닉’으로 결정했다. 새 술이라 그런지 헌 부대(?)에 들어가도, 캬∽∽좋다. 기분도 좋고 머리 회전도 잘 된다.
30도 소주를 토닉워터와 1:1로 블렌딩하면 와인 기분을 낼 수 있고, 1:2로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을 만들 수 있다. 잔머리도 쓰면 쓸수록 발전한다. ‘그렇지! 내가 좋아하는 칵테일에 풍미를 더하자. 골라 먹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담금주다.
지난 추석 때 아이들이 가져온 사과와 배, 단감으로 시작한 것이 새로운 취미가 되었고,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자꾸자꾸 만들다 보니 종류도 가지가지, 더덕, 도라지, 석류, 국화, 장미, 겨우살이 등등 거실 한 켠을 차지한 수량이 30통을 넘었다. 조석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나이 50이 넘어 다시 시작한 취미가 낚시였는데, 낚시의 재미는 낚고, 먹는 것뿐만 아니라 낚시를 가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장비들을 챙겨 갯바위에 도착할 때까지의 즐거움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금주를 담그는 재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과 담금주를 노리는 복병들이 나타났다. 설날 집에 온 며느리가 넌지시 묻는다. “아버님, 담금주 만드시기 힘들지 않으세요?”하고, ‘이크, 큰일났다. 그걸 왜 묻지? 지가 담가 주면서 나의 즐거움을 훔치려는가?’ “아니다, 아니다.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치를 쓱 살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더 강력한 복병은 사위 녀석인데 딸을 통해서 입질을 보내왔다. “장인이 왜 담금주를 담그는고? 나 줄려고 그러는가?”한다더니, 명절날 세배를 와서는 아예 거실의 담금주 앞에 앉아서 한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입맛을 다시는 듯하다. 틀림없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폼이다.
하이고∽, 이렇게 해서 내 담금주 취미생활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웃자고 하는 얘기이고, 술이 숙성되면 아이들에게도 나눠줄 것이다. 오늘 거실에 있던 담금주들이 할매에게 퇴출당해 모두 내 방으로 쫓겨왔다. 이제 더 가까이서 보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볼수록 더 즐겁고 흐뭇하다,)
※ 담금주 담글 때 특히 주의하실 점 : 꽃은 재배, 유통 과정에서 병충해 방제와 신선도 유지를 위해서 독한 약을 쓰는 경우가 많으므로 직접 재배하지 않은 관상용의 생화는 꽃 담금주 재료로 사용하기가 적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