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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책,
죽어도 좋을 여행지
생각해보니 나는 올 한해 아무 곳도 여행하지 않았다. 아버지 기일이 이맘 때이다 보니 연말을 핑계삼아 늘 여행을 떠났었는데 올해는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전혀 아쉽다거나 후회스럽지 않은 이유가 있다. 바로 '책'이라는 시공을 초월한 나만의 여행지로 그 어느 때보다 세상 일주를 많이 했기 때문에 물리적인 여행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어쩌면 보이는 세상을 피해 안 보이는 책 속으로 들어간 내 자신을 괜찮다고 위로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은둔을 택한 내게 이보다 더 좋은 마약과 오락은 없었다. 책 한권을 읽고 나면 포탄이 난무하는 전쟁터도 눈물로 헤어지던 바닷가도 다녀올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학생때 흠모하던 한 교수님은 우연히 금붕어 어항과 팔각 성냥이 놓여진 어느 시골다방에서 흘러간 노래를 들으시곤 '나도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은 때가 있었지'하며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책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그냥 그대로 죽어도 후회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인간이 무언가에 빠져든다 함은 어쩌면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죽어도 좋다는 건 아무런 고통도 그 어떤 걱정도 내일의 두려움도 고독한 슬픔도 없는 절대평안의 마취상태가 아닐까.
그 순간을 지속시키고 싶어 다시 느껴보고 싶어 나는 끊이지 않고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의식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 책은 내게 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결과는 내가 책에 잡힌 꼴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어느 한순간이 아닌 읽는 내내 책속에 빠져 있는 한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은 도취상태를 유지시키며 책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판타지를 선사했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한 해 동안 내가 저질러온(?) 다소 무책임한 책 여행은 피상적인 것이었구나, 싶었다. 이토록 입체적으로 빠져든다는 것, 마치 거대한 입을 벌린 '책'이라는 괴물이 나를 삼켜버리자 '문장'이라는 끝없는 내장 속에 오래 잡혀있다 겨우 탈출한 사람처럼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나이들어 독서의 취향이 단단히 굳어진 나로선 여간해선 얻어질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이었다. 이것 저것 놀이기구가 한가득인 테마파크라도 몇 바퀴 돌고 나온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이 책은 책이 보여주는, 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오락이자 휴식이었다.
나는 사실 유년기, 학창시절, 사회생활을 통털어 독서의 재미를 일찍부터 체감한 쪽은 아니었다. 늘 필요와 계획에 따라 지식의 축적이나 교양의 목적, 혹은 업무의 방편으로 책을 소비해온 독자였다. 그래서 지금도 자발적 동기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친구삼아온 동료나 지인들이 참 부럽고 대단해 보인다. 그들의 감수성은 아주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사안에 대한 문제접근 방법이 언제나 진지하고 속깊다. 물론 나 역시 진지한 성향의 사람이긴 하나 머리만 뜨겁고 가슴은 차가운 쪽이었달까. 책을 친구나 연인, 선생님삼지 않고 오로지 책으로써만 대했기에 내 머리 속에 책을 집어 넣는 쪽이었지 절대 책속으로 들어가 보는 쪽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다시 내 유년을 시작하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렇게, 입체적으로 빠져보는 독서를 하고 싶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만났다면 그 다음부턴 책속으로 들어가는 환상의 마법을 꽤 일찍 깨우칠 수 있었을텐데, 하고 말이다. 새삼 독서의 재미를 알게 하는 책, 내게 『영웅의 서』는 새 친구를 사귀고 막 연인을 알아가던 그 설레임과도 같이 마음이 간지럽고 두근거리는 시간이었다. 장르나 판타지 분야라고 큰 기대하지 않았던 마음 한구석 오해도 살짝 부끄러워지는 홍조의 추억이 될 것 같다.
책,
끝간데 없는 무한지대
이 책은 평소 단짝이었던 열한 살 소녀 유리코와 열네 살 소년 히로키 남매가 벌이는 어드벤처 서사시이다. 표면상으로는 이 세계의 유리코가 저 세상의 히로키를 찾아 떠나는 구출작전이자 탐험여행인 것이다. 무난하고 평범한 유리코는 모범생에 스포츠 만능인 오빠 히로키가 반 친구 두 명을 잔인하게 공격하고 실종되었다는 그날부터 현실적인 감각을 잃게 되며 비로소 여행의 본격적인 계기를 얻게 된다. 주변에 죽은 사람은 있으나 실종된 사람이 없어 찾아야겠다는 심정을 뼈저리게 경험한 적은 없지만 '실종'은 '죽음'보다 더 비현실적인 사건인 듯하다. 아니, 비현실로 인도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내 눈으로 현실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찾는 삶도 중단하기 힘들고 그렇기에 지금 삶도 포기하기 힘들며 실종된 그날부터 실종된 사람과의 현실은 잠시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정이 나지 않은 오늘은 언제든 비현실의 입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열한 살 소녀의 현실을 모험이라는 비현실로 인도하는 장치로 사용하며 '실종'과 '모험'을 끝까지 병행시키는 수사를 진행한다. 모험은 그 떠나는 원인이 아무리 암울하여도 자체로서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장르가 아니던가. 나는 작가가 연출하는 유리코의 모험이 현실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하나의 '에너지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험은 결과의 성패와 상관없이 살아있다는 에너지를 스스로 느끼고 결국 살아가야 할 에너지를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중에 살인자가 있고 그가 실종되었다는 것과 학교에서 살인자의 동생으로 손가락질 받는 유리코의 현실은 내게 그다지 놀랄만한 조건이 되지는 않았다. 늘 정의에 차있던 오빠 히로키가 왕따를 당하던 여자친구의 부당한 피해에 분노하여 일을 저질렀다는 우발적인 사고 역시 충격적이진 않았다. 내가 놀라웠던 건 이들의 현실이 아니라 이들이 떠나서 겪게 되는 비현실의 끝간데 없는 그 초현실됨에 있었다. 작가의 상상력이 최대한 발휘된 가상의 현실세계를 밀고나가는 추진력, 그 이야기의 거침없음, 그리고 글로써 그려지던 고집스런 모험의 디테일이 너무나 정력적(energetic)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내게 에너자이저(energizer)로 충분했다.
소녀 유리코의 여행 목적이 오빠라는 이야기를 찾는 것이라면 그 찾기 위한 과정 자체는 바로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를 이룬다. 마치 <엄마찾아 삼만리>나 <은하철도 999>처럼 찾아야 하는 분명한 대상이 있긴 하지만 찾아가는 여정상에서 벌어지는 슬프고 기쁘고 두려운 여러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서사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형식이다. 사실, 이 여정의 과정이 의미하는 것은 궁극에 여정 주체의 성장이겠지만 책에 빠져든 내 입장에서는 좀처럼 여행의 목적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다이나믹했다고 할까. 여느 허리우드 블록버스터급의 환타지 영화가 전혀 부럽지 않을 정도의 화려하고 장대한 필력은 무엇보다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요즘같이 현란한 특수효과와 4D의 영상시대에 이렇게 글로써만 세밀하고도 풍부하게 표현되는 환상의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책을 덮고 나서는 소녀의 성장이 내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간단치 않았기에 이는 영상으로만은 얻을 수 없는 통찰의 견지임이 분명하다. 종교와 철학이 근간이된 판타지안에서도 이토록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은 보이는 견지(見地)가 아니라 안보이는 견지(堅持)일 것이다. 만약 같은 컨텐츠를 영화로 보았다면 눈앞의 시각효과에만 매혹되어 '책의 비밀'과 '이야기의 힘'이나 '문장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텍스트가 제공하는 영적인 감동은 얻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다.
책,
살리고 죽이는 중개소
유리코는 오빠가 실종된 후 꿈속에서 무릎꿇은 오빠 앞에 커다랗고 검은 사람의 형체를 목격하게 되는데 머리를 조아리고 읊조리던 오빠의 노래를 자신도 모르게 부르게 되면서 여행의 순간이 시작된다. 그 순간 오빠의 책꽂이에 살아 숨쉬던 책의 정령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빨강 가죽표지의 낡은 책은 촉감과 체온, 파동은 물론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마법의 메신져였다. 빨강 책은 유리코가 학교에서 친구들의 외면하던 시선에 상처받은 마음을 털어놓자 노래하듯 그녀를 위로한다. 단지 책을 가슴에 꽉 껴안았을 뿐인데 세상 없어도 내편이 되어 준 것이다. 한순간 세상이 따스해지던 그 느낌, 나 역시 유달리 감명받은 책을 덮고 나서 두 손에 그러잡고 껴안았던 적이 있었다. 내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음을 책에 전달하려고 당신으로 뜨거워진 내 체온을 말하려고 어루만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굳이 책을 읽었다는 증표로 심장의 도장이라도 찍으려는 나만의 의식이었을까. 누구에게 말하기 창피하지만 나는 그 순간 내 심장과 입맞춤한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내편이 된 것이라 믿었다. 유리코 역시 내 편이라는 믿음이 책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한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은 책을 의인화, 신격화하여 책과 소통하는 인간이 어떻게 삶이라는 이야기를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책이라는 세상에서 체험하는 현장학습에 동참할 것인지가 중요했다. 나는 유리코가 빨강의 책을 껴안을 때 흘렸던 눈물을 책이 되어 안아주고 싶은 같은 편의 마음으로 마법여행을 따라가 보았다.
유리코는 빨강 책으로부터 책의 출처와 함께 오빠가 '테두리' 안의 인간들의 세계를 벗어난 세상으로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오빠가 가져온 빨강 책이 원래 꽂혀 있던 장소는 작은 할아버지의 오래된 별장이었고 작은 할아버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고서점을 방문하다가 결국 책더미에 쓰러져 기이한 죽음을 맞이한 의문의 인물이었다. 고독한 자만이 책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슬퍼지던 은둔자의 최후였다. 이 책에서는 책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골동품이나 유산에만 눈독을 들이는 어른들이나 학교에서도 진실을 외면하는 선생님들은 결코 책에서 감동을 받지 않을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책으로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거리감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일본의 학교현실에서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소재로 이지메를 표면에 내세워 그 이면에는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교사들과 학교행정,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학부모들을 고발하는 내용은 이해할만했으나 그 표현방법과 형식이 진짜 주인공들이 열광하는 판타지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이 새롭기만 했다. 유일하게 책과 밀접하게 묘사된 어른으로서 죽은 자를 되살리는 방법을 찾아 전세계 헌책을 수집했다는 작은 할아버지는 그런면에서 아마 책속으로 들어가 기어이 이야기속에서 부활이나 환생을 맞아야 마땅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책에 매달리고 그 속에서 나머지 삶을 온전하게 하려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별장 서재의 주인인 할아버지에게 책은 거짓말의 세상이 아니라 가장 극명하게 살아있는 진짜 세상이 아니었을까.
책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로 부정보단 긍정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영웅도 마찬가지다. 대개 악당과 대적하여 그를 물리치는 영웅에게 '나쁜 영웅'의 수식을 붙이기는 미안하다. 책에는 진리가 있고 지식이 있을 것이기에 책을 탐하거나 책에 중독되는 것조차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범죄와 폭력을 유발하는 불온서적이나 주의를 선동하는 이념서적도 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책을 읽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독자의 수준으로 치부되는 분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이라는 것은 그것을 손에든 독자가 어떤 현실의 바닥위에서 그것을 취하였는지에 따라 그를 영웅이 되게도 혹은 죄인이 되게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치게 된다. 히로키의 경우 불의를 넘기지 못한 그의 현실 때문에 책을 통해 죄업을 만들게 된 부정의 사례라 할 수 있고 유리코의 경우 오빠의 진실을 찾겠다는 의지로 똑같은 책을 통해 성장을 하게 되는 긍정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청소년 소설임을 감안하면 작가는 이 교훈을 중요한 사실로 주지시키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이 든다. '책'이 이렇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듯 작가는 '영웅'도 정의와 불의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하여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책,
죄업을 치루는 교도소
하지만 평범한 진리를 추적하는 과정은 그 누구보다도 편협하고 극적이었다. 나는 빨강책 아쥬와 서재의 현자가 유리코와 나누는 대화를 시작으로 이번 독서만을 위한 이야기 사전을 따로 마련해야했다. '이름없는 땅', '최후의 그릇', '황의를 입은 왕', '인을 받은 자', '자아내는 자', '죄업의 대륜', '재의 남자'등... 많은 이름들이 의미하는 형용의 문구와 '테두리', '올 캐스터', '늑대', '무명승'등의 단어를 새롭게 잘 저장해야만 했다. 이 과정은 마치 복잡한 신제품의 매뉴얼을 반복의 조작을 통해 이해하거나 아마존, 툰드라같이 생활문화가 다른 지역에 동떨어져 얼마간 그들이 지시하는 이름들을 다시 내 언어로 기억하는 과정과도 같았음이다. 판타지 게임이나 소설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나였기에 캐스터가 뉴스캐스터가 아닌 마법의 주문을 거는 마법사라는 사실도 한참 뒤에 깨달았다. 때문에 이들 모두를 따라가는 일은 신선의 재미만큼이나 힘이 부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매순간 몰입의 덕으로 2권이 지나면서는 유리코의 마법여행을 통해 작가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순간순간 알아채는 재미속에서 비로소 이야기의 힘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실은 내 아이가 읽어야 할 성장소설이었지만 한참지난 내가 몰래 읽는 미스테리의 느낌도 들었다. 모르는 게 창피했고 그래서 알아진 게 더 신기했기 때문이다.
신기함이 내 몸처럼 익숙해질 즈음 나는 어느새 내 분신을 현실에 만들어 놓고 유리가 되어 생쥐같이 앙증맞은 메신져와 보라색 눈의 시종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떠돌기 시작했다. 유리코가 '이름없는 땅'을 시작으로 미노치의 서재로 자신의 집으로 경찰서로 학교 도서실로 자유자재의 공간이동을 해낸 것처럼. 수도원이나 중세풍의 예쁜 마을, 괴물의 병사들이 출몰하는 지옥, 끝이 보이지 않는 돌터널, 통로를 연결해 만든 미로... 가보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곳이 해당장소였다. 유리코는 수호의 법의를 입고 마법의 효과로 투명인간이 되기도 하고 경찰이나 작가처럼 실재하는 인물로 변신도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마의 인을 사용해 문장으로 위기를 탈출하기도 한다. 눈알로 분한 괴물을 비롯해 신비의 인물들을 만나 그들이 우리 사는 인간들처럼 멀쩡히 살아가고 죽어왔던 모습을 보게 된다. 오빠를 찾아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공포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찌보면 만화같기도한 황당무계의 서사를 몰입하게 하는 힘이야말로 이야기가 가진 마법이요, 작가의 마력이겠지만 무엇보다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이야기로 자아내지만 않았지 언젠가 한번은 나 역시 상상해본 적이 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일까. 언젠가 나도 이 세상에 나를 대신할 내 분신을 만들어 놓고 저 세상 어딘가로 탈출하고자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놓고 사람들은 내 분신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마법이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신약이나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마약이 하버드대 지하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된 사람은 이 쪽 세상의 죄를 저쪽 세상에서 갚으려고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가끔 난세를 짊어지는 영웅이 탄생하는 것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소망에 주어지는 '감사한 이야기'의 선물로도 생각했고 책을 통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귀신이나 죽은 자의 영혼에 빙의되어 그 대리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다만, 이렇듯 내가 무심코 생각해 본 이야기들을 작가는 놀라운 디테일로 꼼꼼히 자아냈다는 것, 작가는 이 세상에 이야기를 '자아내는 자'는 모두 거짓말로 죄업을 쌓는 사람이라 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자아내는 이야기'로 세상에 그 죄값을 갚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번에 그 죄값을 그야말로 톡톡히 치룬 것이 아닐까.
책,
정화하고 순환하는 대기(大氣)
또 하나 이 작품이 흥미로서만 그치지 않은 이유는 치밀한 이야기의 논리와 그것이 지향하는 메세지에 있었다. CG와 특수효과로 치장된 판타지 영화들을 보고나면 그 순간엔 자극적이고 신났었지만 지나고 나면 정작 무엇 때문에 주인공이 마법을 펼친 것인지, 마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때뿐인 이미지들이, 그냥 그러고 마는 아쉬움이, 늘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도 주제의 정점에는 가닿지 못한다는 하나의 습관이자 장르적 특성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텍스트라는 문장의 상징이 극중에서 산발적으로 일종의 암호처럼 제시되다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비밀의 문서처럼 문장이 빛을 발하며 한데 모여 이야기라는 논리를 충분히 증명해 내고 있었다.
작가는 이야기에도 생명성을 부여하였으므로 그를 이루는 문장에도 당연히 같은 힘을 불어 넣었다. 이 책에서 '문장'은 오빠인 '최후의 그릇'과 같은 피를 가진 '인을 받은 자' 유리코가 <공허의 서>를 <영웅의 서>로 돌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신적인 표식으로 이해되었다. '최후의 그릇'이 된 오빠가 자신의 죄를 깊게 후회하여 미숙한 무명승이 되었지만 불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 인간의 마음 한 조각을 정화하는 것도 유리코가 지닌 '문장'의 힘이었다. '인을 받은 자' 유리코는 결국 '문장'의 마법을 수여받아 '문장'의 힘을 행사하는 존재라 보았을 때 이야기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문장'은 각기 자신이 속해야 할 이야기로 제 위치를 자리 잡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유리코가 보여준 마법의 힘은 실은 '문장'의 역할이었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완벽하게 텍스트로서 '문장'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상징화할 수는 없겠지 싶었다. 그래서 '문장'이 미숙한 무명승을 진짜 무명승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수행치 못한다면 이 세상은 전쟁과 싸움이 난무하는 괴물의 현장이 될 것이라 한 문장은 작가로서 이야기를 '자아내는 자'가 명심해야 할 강령이라도 선언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문자와 문장이 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테두리 안을 떠돌고 있는 것들을 '분리물'이라고 한 것 역시 문장으로 이 세상을 정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대 의미있는 그 어떤 이야기도 될 수 없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의미심장한 충고로도 들렸다. 작가인 자신에게 스스로 걸어온 주문일 수도 있겠지, 하면서도 나는 순간 멈칫거렸다. 나는, 일개 독자이면서 서평자인 나의 '문장'은 단 한 줄이라도 누구를 무엇을 정화할 수 있을까. 혹시 단 한 번도 생명성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정처없이 허공을 맴도는 '분리물'이 되지나 않을까.
책의 정령으로 유리코를 모험의 세계로 인도한 아쥬, '최후의 그릇'으로 소환자가 된 히로키, 별장 서재의 책임자격인 현자, 지하감옥에서 썩어가는 괴물이 된 작은 할아버지, '이름없는 땅'의 지킴이 무명승, 되살아난 괴물의 독을 받은 용수철 다리의 우즈...많은 인물들이 바로 문장의 힘을 통해 태어난 캐릭터들이었다. 이들 중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 인물은 위험한 사본을 사냥하는 사람, '늑대'라 불리는 장의사 '재의 남자'였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헤이틀랜드 연대기> 속의 등장인물, 그는 테두리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존재하는 아니 그 두 경계를 통과하는 인물로 보고 싶었다. 한번 읽고 느끼기만 하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영웅의 사본을 찾아서 그것을 숨기려 하는 사람들, 사악한 힘으로부터 테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 시대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해서이다. 분노만으로 영웅이 될 수 없는 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도덕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암흑의 왕이 분노에만 휩싸인 인간을 매번 유혹하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를 구하고자 백마탄 기사를 자청한 히로키는 영웅이 가지는 정의의 빛만 흡수한 것이 아니라 불의의 그림자까지도 드리워진 비운의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유리코는 '아침에 한 아이가 아이를 죽이는 세계는 저녁에 만명의 군사가 살육을 하기 위해 내닫는 세계와 같다'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한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모험후 나쁜 이야기의 사본을 사냥하는 '늑대'로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유리코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또 다른 누구를 죽이는 영웅이 아니라 그렇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미연에 방지하는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오빠를 추적하는 과정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추적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다른 인간의 아픔을 위로 해줄 수 있는 살아있는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었을지. 오빠를 찾는 일이 결국 오빠같은 사람을 막는 일이 된 유리코는 불치병으로 죽은 가족을 보고 같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된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잔인한 범죄로 비참한 희생자가된 가족을 위해 정의의 경찰이 된 사연이 생각난다. '늑대'로 살아갈 유리코는 같은 방법으로 양산되는 희생자를 막기 위한 개인적 정화행위이면서 순환하는 이야기의 운명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더불어 속세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의미의 음흉한 인간도 세상끝까지 나쁜 것을 추적해 사냥한다면 얼마든지 영웅이 되는 것이 앞과 뒤가 공존하는 동전같은 삶의 진리가 아닐까. 백성을 위해 반란을 주도한 키리크가 '영웅'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왕에게는 반역자의 낙인이 찍혀 '황의를 입은 왕'이 되기도 한 것처럼.
허나, 이 책에서의 가장 큰 반전은 아마도 유리의 시종으로 분한 소라, 미숙한 무명승의 운명으로 인간의 마음을 쉬이 놓지 못했던 그의 최후였을 것이다. 소라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곧 오빠를 용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유리코가 오빠를 찾는 일은 결국 오빠를 잘 돌려 보내는 일이 아니었을까. 오빠를 되찾는 다는 것은 일상을 되찾는 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이야기라는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 살면서 내의지는 물론이고 나로부터 발생하지 않은 타자와의 이별, 뜻하지 않은 죽음, 확인되지 않은 실종을 세상에 속한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변함없이 내 이야기를 살아가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특히나 가족이나 연인의 죽음은 내 눈으로 확인하고 그들의 뼈를 묻고 돌아와도 분명한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남의 이야기, 남들에게만 일어나는 이야기 인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도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결국, 인생인 것이다. 인생이란 이렇듯 끝없이 새로운 나의 이야기를 죽는 날까지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 그렇게 쌓여진 그동안의 이야기가 결국 나라는 인생의 이야기였음을 깨닫는 일이 아닐까. 작가는 이 숭고한 진리를 모든 이야기가 태어나고 회수된다는 '이름없는 땅'을 빌려와 대서사시를 집필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야기는 마치 숨쉬고 내뱉는 우리 사는 거대한 대기大氣와도 마찬가지 였던 것이다.
책,
인印을 받아 인引을 하는 인仁자의 서書
이 책을 덮고 탐험과 신비의 마법이 가라앉을 때즈음, 나는 뜻하지 않게 여정의 후유증이 찾아 들었다. 바로 내게 질문을 남기고 자취를 감춘 인물이 있었으니 그들은 '인을 받은 자'와 '자아내는 자'였다. 책에서는 히로키의 동생 유리코가 '인을 받은 자'로서 문장의 힘을 행사하고 '자아내는 자'는 언급만 될 뿐 역할로 등장하진 않았다. '자아내는 자'는 바로 소설바깥 작가 자신이었기 때문일까. 인을 받은 유리코가 <영웅의 서>의 주인공이었다면 자아내는 작가는 또 다른 꿈을 가진 자들의 영웅일 것이다. 유리코의 인과 작가의 자아냄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언젠가는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인을 받아 이야기를 자아내는 자가 되고 싶다하면 너무 과한 욕심일까. 인간에게 어떤 감정이나 생각, 눈물과 웃음, 그리움과 연민을 인引하여(끌어내어) 이야기를 자아내는 사람이야말로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인仁의 영웅'이 아닐까. 문장의 인印을 받아 인人의 감성을 인引하는 인仁자야 말로 <영웅의 서>의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까. 이 책을 읽고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곧 누군가의 영웅이 되는 일임을 벅차게 실감한다.
나에겐 꼭 언젠가 책을 한번 내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었다. 문학하는 자가 되지 않아도 그것은 언제나 유효했다. 대략 '문학'을 통하지 않아도 '책'은 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변질된 일종의 보험같은 꿈이었다. 작가가 아닌 보통사람들도 책 한권 내는 일이 예전처럼 어렵기만 한 시대는 지나갔고 일단 유명인이 된 다음 유명세로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출간하는 경우도 보아왔고 일반 블로거들도 출판이 수월해진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잘 알게 된 까닭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원한 것은, 내가 내고 싶었던 책은 단 한명의 독자라도 자신의 유일한 심장으로 껴안아줄 수 있는 한권의 책이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건 그냥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평생의 소원이나 숙제처럼 여기고 말 무책임한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봉인될 내안의 영웅일 수도 있었지만 이처럼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의 힘으로 나는 봉인된 내 영웅이 파옥하고자 함을 똑바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그동안 내가 읽어온 책과 내가 내고 싶은 책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게 하는 쉽지 않은 문학이었다.
문학이라는 인을 받는 것은 타자의 슬픔과 상처를 내 것처럼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상처의 증거라 생각했다. 내가 흘린 눈물의 양만큼이 곧 인증의 증표라 생각했다. 문학은 고통과 상처의 축적이지 기쁨과 행복의 축적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상처가 많아질수록 눈물이 많아지는 것처럼 그리고 그 눈물로 다시 상처를 위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타인의 아픔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마음이야말로 인을 받을 만한 자격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생긴 자격으로 나는 눈물을 자아내는 문학을 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슬픈 상태가 기쁜 상태보다 더 편했고 더 좋았다. 지금 더없이 슬프기 때문에 앞으로는 슬프지 않을 것이고 지금 이만큼 슬프다면 다음엔 이보다는 적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중의 슬픔으로 그전의 슬픔을 치유하면서 나는 눈물이야말로 인간이 자아낼 수 있는 가장 고결한 가치라 생각했다. 이야기로 울어본 사람만이 이야기로 울릴 수 있다고 그럼으로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독자와 눈물로 약속한 관계가 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 눈물 한 방울로 현실로는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집착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대의 변절도 이해불가능한 잔혹한 범죄도 따스하게 씻겨주고 안아드리고 싶었다. 한번 일어난 일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이야기로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죽어도 주인공은 살아남아 또 다음 세대의 슬픔을 자아내며 그들의 눈물에 내가 감사하듯 내가 흘린 눈물만은 기억되고 싶었다.
하지만 왕이나 장군, 예언자나 종교인으로서의 영웅이 아닌 작가로서의 영웅은 언제나 두렵고 무섭기만 했다. 이야기를 만들고 언급하는 것은 인간뿐이라 했던가. 이야기에 살려고 한자는 거짓말에 살고 거짓말을 구현하려는 대죄를 짓는 것이라 했다. 그렇담 이 땅의 모든 작가들은 죄업을 지고 '이름없는 땅'의 무명승이 되어 '죄업의 대륜'으로 쪼갠 보리언덕에서 한쌍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할 운명인 것이다. 나는 그 운명의 수레바퀴가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마땅히 '있어야 할 이야기'를 자아내지 못하고 수없는 '분실물'들만 잉태할지 몰라 '문장'의 힘을 불신했던 것은 아닐까. 미노치의 고서들을 매수한 서점주인 마저 최후에는 '솟아나는 샘' 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던가. 이야기라는 세상 속에서는 누구도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인 것을, 돌고 돌아 서점 주인도 독자도 각자 다른 위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아내는 사람에 다름 아니었건만.
그러므로 나도, 자아내고 싶다. 영웅을 기다리는 인간들에게 '자아내는 자'도 영웅이 되는 이야기를 자아내고 싶다. 이야기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필수적인 거짓말이 아닌가. 필사적인 거짓말로 진실한 인간이 되고 싶다. 오늘 아침 지난 일년 간 우리 책의 제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나'가 1위이고, 다음은 '이야기', 그 다음은 '무엇인가'라는 출판계의 통계기사를 보았다.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의 힘이 나를 손짓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전광석화처럼 뇌리에 스쳐가던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나는 울면서 웃었다. 이것이야 말로 내 가슴을 벅차게 뛰도록 하는 제목의 힘이 아니겠는가. 그래 누구보다 가장먼저 내가 알고 싶고, 그리하여 당신에게 알리고 싶다. 나의 이야기가 부디 당신이 궁금했던 그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순간 죽어도 좋을 나이기에 언젠가는 내가 자아낸 책 한권에 눈물흘리고말 그를 기다린다. 기어이 그의 두손으로 나의 이야기를 가슴에 꼭 끌어안을 그 순간을 상상해본다. 그때라면 나는 부디 빨강책의 정령이 되어 지금 울어도 되지만 절망만은 하지 말라고 다시 내가 웃게 할 이야기에 우리 같이 떠나보자고 사력을 다해 그를 유혹하고 싶다.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책은 나의 영웅이고 나는 영웅에 파옥하나니 이것은 나의 죄업이다. 이제 그 죄값을 치루는 방식은 나만의 이야기가 될 지어다.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하나의 '있어야 할 이야기'를 위해 나는 오늘도 한쌍의 수레바퀴를 침묵으로 돌려본다. 나의 영웅이여 깨어나라. 문장이여 빛을 발하라. 그 빛으로 이야기를 숨쉬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