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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평점 :
눈, 속에 비친 아이 .... 雪鏡
"난 완전히 혼자야.
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책을 덮었을 때 어느 시골마을의 눈밭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어린 아이의 환영이 떠올랐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아이에게 가만히 다가가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 내 손이 차가운 눈보다 따뜻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내가 눈이 되어 잠시 아이의 바닥이 되어주고 싶었다. 한 줄 한 줄 눈처럼 쌓여버린 문장들로 나는 눈사람이 되어 아이에게 어깨를 내주고 싶었다. 그렇게 곁에 머무를 수 있다면 그 순간 내게 피같은 건 통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언젠가는 녹아 내릴 운명이지만 아이가 외롭지 않다면, 나로 인해 울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서 주고픈 꼬마 눈사람...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눈사람이 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곤 눈사람 또한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어진다. 한겨울 친구들과 만들어 놓고 두고 온 눈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 눈사람은 언제쯤 녹아 내렸을까. 아니 언제까지 살아 있었을까.
내 유년이 쌓은 눈사람을 맨발로 찾게 만드는 책, 호호 불며 입김을 내뿜던 친구들의 빨개진 코가 시큰해지던 책, 여기저기 헤매다 겨우 발견한 그 녀석이 녹아 사라진 걸 기어이 확인하게 만드는 책. 내게 있어 『렛미인』은 외로움이라는 눈송이를 조심스레 굴려 쌓아 올린 살아있는 인형, 그것을 어루만지는 일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린 시절에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영원한 유년이었기 때문에. 나는 지방에서 서울로 전학온 촌티나는 아이였고 청년이 되기까지 외톨이로 생활하는 방법을 꽤 일찍 터득한 대견한 학생이었다. 그 시절 내 어머니의 교육열은 맹모삼천지교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나는 거의 일년에 한번 씩 전학을 가야했고 부산시절을 포함해 초등학교 여섯 군데를 거쳐온 학생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중에 생애 최초의 학교생활 1년을 고향인 부산에서 보낸 것인데 나는 나머지 학교생활을 거의 그 일년을 그리워하며 버텨낸 거나 다름없었다. 내 소꿉친구들은 하나같이 바다와 함께하는 여름의 벌거숭이였고 시끄럽게 물장구치는 장난꾸러기였다. 눈이 바다보다 귀했던 그곳에서 나는 딱 한번 친구들과 그럴싸한 눈사람을 만들고는 하루종일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겨울날이 있었는데 지금 기억해보면 억지로 그 얕은 눈을 뭉쳐 어떻게 해서라도 눈사람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만큼은 실로 대단했던 것같다. 그땐 친구들과 영영 헤어지게 되는 앞날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할 나이였던 나... 그날 이후 서울의 겨울은 무섭도록 추웠고 지겹게도 눈이 많아 부산에서의 어설픈 눈사람에 비하면 훨씬 더 근사한 눈사람을 만들 수 있었을 터인데 나는 한번도 눈사람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때 그 눈사람은 내 유년의 마지막 인형이었다.
이 뼛속까지 허기지는 그리움은 책을 놓고도 한참을 마음잡지 못하게 하는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작가의 나이를 살펴보니 얼추 내 세대인 데다가 작품의 배경시점도 공교롭게 80년대초 내가 막 서울에 이사와 한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기였기에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작가의 숲속에서 빈번히도 마주쳤다. 그렇게도 소원하던 눈사람이라면 언제라도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던 서울의 겨울이었다. 지독히도 추웠던 한겨울 영하 18도(그땐 그렇게도 추웠다), 무릎까지 쑥쑥 파묻히던 학교앞 눈길, 친구를 사귀면 어짜피 또 헤어질 거라는 두려움마저 새하얗던 그때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12살 뱀파이어 소녀에게 그 소녀를 사랑하는 소년에게 나는 대체 무엇이 감염된 것일까.
물어 물어 영화를 보았다. 우선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 경우이다. '렛미인'이라는 영화를 들어보기는 했지만 겨울도 싫어하고 피를 부르는 영상을 유난히도 두려워 하는 내가 부러 선택할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또 하나 이미 소설로 감명받은 작품을 뒤늦게 다시 영화로 보았을 때 대략 <오페라의 유령>이나 <다빈치 코드>식의 실망을 하게 마련인지라 망설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스웨덴 영화에서는 원작자가 각본을 맡았다기에 어떻게 첨삭을 했는지도 궁금했고 이토록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을 시각으로도 느껴보고 싶었다. 영화로 본다면 허리우드식이 아닌 북유럽식이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다행히 영상은 아름다움이 슬픔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었고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이 허전하고 아프게만 남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영혼이 아름답던 두 친구로부터 소설의 트라우마를 위로받다니...단기간에 병주고 약주는 살아있는 체험이었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 과거의 상처를 오늘에 반추해 봄으로써 신기하게도 당시의 상처가 치유되는 체험학습이 아닐까. 소설에서 숲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면 영화에선 그 시절 내 어린 친구들을 찾아 어렵게 만나고 온 기분이 들어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소설이나 영화나 흡혈귀라는 주인공의 속성이 가지는 가장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피'에 대해서는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얀 눈밭에 얼룩지던 빨간색의 방울마저도 그것이 우리의 몸속을 흘러 다니는 '피'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분명하고도 단순한 시각적 정보를 차단하는 무언가가 철저히 버티고 있다는 느낌, 이 소설은 뱀파이어의 소설이 아니었다. 시각으로 증명되는 뱀파이어를 보고선 오히려 더욱 확신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뱀파이어라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빠지고 난 후라면 상대의 괴물같은 치명적인 결점도 상관없어 지듯이 말이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혹시 소녀의 결점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소년의 눈물에 감염된 것일까. 소년이 흘린 눈물은 혹시 소녀의 눈에서 흘러야 할 것의 대신이 아니었을까.
눈, 녹지 않는 허무 .... 雪無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추웠을까.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는 스웨덴의 블라케베리 마을의 하얀 숲 그 곳은. 이 소설의 중심 배경이 되는 숲속 무대는 흡사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사각의 회벽을 얼음처럼 투명한 강화유리가 덮어 씌우기라도 한 듯 탈출구는 하나도 없어 자유롭지 못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그 유리벽 속에 유순하고 포동포동하고 오줌공을 찬 소년, 이혼한 엄마와는 저녁마다 핫초코와 시나몬롤을 먹으며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열두살 오스카르가 겨울보다 시려운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공동주택의 아래 하수구처럼 연결된 지하 방공호엔 결손가정이라는 같은 처지의 비행소년 톰미형이 비밀의 아지트를 꾸며놓고 있었다. 학교에서 왕따를 주도하던 오스카르의 친구 욘니 역시 배다른 형제와 마리화나를 피우는 불량소년으로 등장했다. 이들 소년은 모두 부성의 부재로 헤어진 아빠와의 추억이나 남겨진 소품과 유품을 소중히 간직하는 아들이었지만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욕구불만은 각자 다른 형태로 표출되어 진다. 오스카르는 애꿎은 나무에 못을 박듯 칼로 분한 난도질을 하며 친구들에게 복수를 연출하고 톰미는 본드를 흡입하며 동생들에게 금전을 갈취하고 욘니는 친구의 약점을 잡아 습관적으로 폭력을 일삼는다. 서사에선 이들의 비행이 주가 된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전적 소설로 펼쳤다고 했기에 나는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소년시절의 외로움이 바로 환상을 좇는 계기가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오스카르는 아르바이트 비를 톰미에게 주고 소니 워크맨을 얻고자 하며 톰미는 '키스'라는 록밴드 그룹의 앨범을 빌려주겠다고 한다. 작가는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듯 이들 소년이 소비하는 물건과 책, 음악, TV프로그램을 통해 유년을 차곡히 정리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 역시 그 시절 유행하던 음악잡지에서 드라큐라 분장을 한 '키스'의 멤버를 어찌 잊을 수 있나. 같은 세대로서 같은 시기 같은 문화를 공유한 감정은 나이들수록 소중하기 마련인데 스웨덴의 고전부터 속담, 문학, 신문, 드라마등 아마 내가 스웨덴 국민이었다면 반가운 장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야기 하는 것인 지 작가의 속내를 더 빠르게 간파할 수 있었으련만 그저 내가 아는 몇 개의 컨텐츠들로 반가운 위로를 삼아야 했다.
80년대 비로소 컬러시대를 맞이한 우리에 비하면 이들이 대화하는 자본주의는 그 퇴폐마저도 어쩐지 더 성숙해 보인다는 열등감을 확인하기도 했다. 왜 아니겠는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를 완벽히 실천하고 있는 선진국의 나라,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차의 대명사 볼보의 스웨덴이었다. 그런 스웨덴이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오히려 동유럽의 공산주의를 연상시킬 정도로 미래가 없이 반복되는 노동의 각박한 현실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는 사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특히 어른들은 싸구려 중국술집에 모여앉아 니코틴과 알코올에 의존하며 서로를 질시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그들의 자식격인 학생들은 일상의 무료함을 달랠 수 없어 폭력과 비행을 일삼는 것으로 느껴졌다. 선생님과 학부모, 부모의 친구 할 것 없이 전혀 삶에 애착이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그들의 일상에 나는 문득 우리의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80년대 초반 우리 사횐 군부독재의 억압속에서도 서민들은 선진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운 희망만은 놓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여기서 조금만 더 박차를 가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고 삶이 근사해 질 것 같은 활기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누구보다 바쁘고 열성적이었다. 내 유년기, 청소년기는 그렇게 뒤처지는 나라 특유의 열정과 성실함, 그렇기에 미래를 기다리는 끈기가 있었다. 스웨덴까지는 아직 너무나 멀기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그들은 기존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잘 훈련된 평화가 되려 억압이 되고 있었다. 물론 또 그 시기의 위기를 잘 극복했을 터이지만 그들을 보며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살게 되는 것이 모두가 함께 못살게 되는 것보다 꼭 낫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이방인인 마약거래상도 사회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그다지 모범생의 위치가 부러울 것도 없는 작가의 무의식을 슬쩍 엿보는 기분도 들었음이다. 세월이 지나 나라의 위상은 드높아졌지만 희망을 잃은 지금 세대의 우리 젊은이들도 중첩되었다. 이유는 달랐지만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미래를 외면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닐까. 좋은 세상이라는 것이 어쩌면 더 외로와지는 세상을 말하는 게 아닐까. 이 책에서의 사람들 모두는 하얗게 안전한 겨울숲에 홀로이 남겨진 나무들처럼 공평하게 쓸쓸해 보였다. 눈이 오고 계절이 바뀌어 녹아 내리는 변화 하나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마저 눈속에 묻혀질 것 같았다. 만약 눈이 내리고 있다면 우리처럼 귀한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를 더 황망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겠다 싶어 눈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면 차라리 눈사람이라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이다.
눈, 보다 하얀 피 .... 雪皮
"시체의 피는 소용없어.
사실은 해롭다고 할 수 있지."
원하는 것에 애착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무감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나는 간절히 사랑을 갈구한 호칸의 태도가 차라리 가슴 아팠다. 호칸은 해직된 국어교사로서 일터를 잃고 집은 불탄 후 거리에 내몰린 新빈곤층이었다. 호칸은 이미 엘리를 만나기 전부터도 아동 강간미수라는 경력을 가진 반사회적 성향을 보였는데 나는 그의 소아기호증이 일반적으로 부끄럼을 많이 타고 수동적인 성격의 성인 남성에게 보여지는 증상으로 해석되지 않고 열 두살 같은 또래의 성장하지 못한 유년의 구애로 보고 싶었다. 즉, 육체적 행위나 쾌락으로서의 성적욕구가 아닌 정신적 보상이나 위로차원의 영적욕구로 이해하고 싶었다. 호칸은 엘리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엘리가 원하는 피를 채혈하는 인물이었지만 끝내 엘리의 진정한 사랑은 얻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 운명이란 죽기 싫어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보다 하등 나을게 없다는 교훈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비운의 호칸이 엘리에게 선택되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엘리의 곁을 지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는 호칸에게 위로를 주고 호칸은 엘리에게 봉사하는 방식의 거래의 시작은 서로를 향한 연민은 아니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으로 여실히 존재하는 또 한명의 열 두살 오스카르를 떠올리게 된다. 호칸은 오스카르의 미래일 것이기에 어느 시점엔 결국 오스카르도 영원한 사랑을 믿은 댓가로, 아니 영원치 않아야 할 사랑을 영원시키려한 벌로 자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것은 혹 인간에 대한 반칙의 결과는 아닐까. 호칸은 엘리의 나이인 열 두살의 눈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끈질긴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을지. 나는 작품속에서 마저 짝이 없는 호칸의 사랑이 갈기갈기 찢어지던 마지막이 많이도 쓰라렸다. 노동의 연장으로 보이던 살인의 현장도 중요한 실험처럼 행하던 채혈작업도 염산으로 불태워진 참혹한 얼굴도...죽음으로 피를 허락한 그의 목덜미도 모두 잊고 싶지 않았다. 살아있는 한 아니 죽어서까지 그 누구도 그를 따스하게 안아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보였기에 그의 잘못아닌 잘못을 오래오래 용서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부터 사랑하지 않은 이 세상 모든 호칸을, 혹시라도 부질없을 내 욕심의 호칸을 눈감아주는 일일지도 몰랐다. 오스카르에게 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랑의 종말일 지도 몰랐다.
또 하나 이 작품을 뱀파이어류의 호러소설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뱀파이어라는 존재조건을 성립시키는 '피'의 상징적 역할에 있다고 본다. 우리가 살면서 '피'라는 물질의 형태와 색채의 본질을 확인하려면 '피'는 자신의 주활동 공간인 인체바깥으로 나와야 하는 물리적 상황에 놓여진다. '피'는 철저히 내부 활동으로서 보이지 않을 때에만 그 생명성을 가지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피'가 생명성을 상실했을 때라야만 비로소 '피'의 생명감을 인지한다. 눈으로 색깔을 인식하고 동작으로 흘러 내리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피'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피'는 어쩐 일인지 흐르는 것, 즉 살아있는 것으로 인식이 되지 않는다. '피'를 이야기 하면서 '피'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하얀 문체, 투명한 작법이 놀라웠다. 이것은 기존의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소설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로 피해자의 목을 가해하는 공격행위의 결과로 증명되던 '피'의 서사와는 중요한 차이를 드러내는 깨끗한 연출이었다. 영화에서도 엘리가 대상의 피를 구할 때 공격이 가해지는 잔인한 순간은 대부분 원경의 장면으로 포착되었다. '피'가 선동하는 역동성을 배제한 대신 인위적인 상처로 인해 그 반응으로 뚝뚝 떨어지는 효과없이도 마치 엑스레이 사진이나 내시경을 통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몸의 일부가 일시적으로 투시되는 느낌이 들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정지하여 응고된 것도 아닌 다만 나타나는 것. 이 작품에서의 '피(혈액, 血)'는 드러난 결과인 외피로서의 '피(껍데기, 皮)'로 시각화되기에 그것은 붉게 물드는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하얗게 얼어 붙는 영혼의 고독인 것이다. 하지만 껍데기로 발견된 화석에는 수 천만년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듯 '피(皮)'의 내면엔 그들만의 사연이 흘러 내리는 것이다. 이는 몰랐던 사실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진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호칸이 숲속에서 소년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깔때기로 채취하던 '피'는 건강한 나무의 열매에서 신선한 액즙이라도 짜내는 신성한 노동으로 느껴졌다. 착실한 친구 요케가 엘리를 통해 흘리던 '피'는 노동자의 증거로서 땀이라는 따스한 체액이 아닐까. 오스카르를 괴롭히던 욘니의 귀에서 흐르던 피는 그동안 돼지새끼라고 놀리던 자신의 귀에 반사되어온 메아리의 파편들이 아닐까. 오스카르가 사랑의 맹세를 하자며 나이프로 자신의 손을 자해한 후 베어나오던 '피'는 미래를 향한 용기의 증표, 표식으로서의 흉터가 아닐까. 엘리에게 감염된 싱글맘 비르기니아의 목에서 굳어가던 '피'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불안과 고독이 열꽃으로 피어난 건 아닐까. 톰미의 팔뚝 안쪽에서 흘러 내리던 '피'는 환자인 엘리에게 헌혈하기 위한 희생이 아니었을까. 엘리가 잠겨있던 욕조속의 한가득한 '피'는 원통하게 헤어진 어머니 뱃속의 자궁에서 숨쉬던 양수가 아니었을까. 오스카르에게 초대받지 못한 말로 얼굴의 땀구멍에서 흘러 내리던 엘리의 '피'는 이 백년동안 삶과 죽음 모두에게 외면당한 온갖 슬픔의 문신이 아니었을까... 우린 이렇듯 실은 각자가 가진 피만큼의 열정과 상처와 외로움과 고독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상대가 되어 본다는 것은 상대의 상처를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일일 것이므로 상대가 흘린 피도 내 것처럼 핥을 수 있으며 그래서 내 피 역시 상대에게 고이 내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에서 피를 마주하는 일은 하나의 정신적인 노동이었다. 자신은 피로써 살아간다는 엘리의 대답이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라는 또렷한 한마디가 피처럼 벌겋게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엘리가, 내가 흘린 건 피로 염색된 눈물, 빨강으로 꽃핀 상처, 멈추지 말아야 할 심장에 다름아니었다. 내 생명을 위해 남의 피를 구하듯 우린 각혈하는 상대를 위해 내 피를 수혈함으로써 그의 지혈을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어진다. 이렇듯 사람들은 피로써 자신을 말하며 서로와 커뮤니케이션 했을 뿐 누가 누구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는 지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설속에선 서로를 알아본 오스카르와 엘리만이 유일하게 피가 아닌 그들만의 또다른 장치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을 한다. 이것은 피의 형질은 달라도 그 온도만큼은 같았던 어린 아이의 특권이며 어른된 그리움이다. 이들은 어떻게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나누면서 또 간직할 수 있었을까.
오스카르와 엘리가 나누던 교감은 이해타산이 배제된 순정한 동심이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외로움을 똑같이 상대에게서 발견해 내는 한쌍의 힘겨운 어린 새들이었다. 이들이 맨처음 조우한 곳은 미끄럼틀이 달린 정글짐, 사각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사방에 노출된 놀이터라는 장소적 특성은 그들만의 비밀을 공유하기엔 부족했던 것. 오스카르는 엘리에게 루빅스 큐브라는 퍼즐장난감을 건네고 엘리는 큐브의 색을 완벽하게 맞추어 나타난다. 오스카르는 자신의 눈과 큐브를 연결하는 끈 하나가 있다고 믿었고 자신은 풀지 못하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을 기다린 것이다. 마치 비밀의 열쇠를 찾아 그들만의 비밀숲으로 들어가듯 큐브는 신비의 약속을 상징하는 중요한 보석이었다. 이들은 하얀 벽을 사이에 두고 모르스 부호로 교신하며 서로의 안부와 의사를 전달한다. 서로를 선택한 것에 대한 반복되는 확인 행위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사랑을 전달할 때 세상속에서 유일하게 소중한 자신들과 사랑의 특별함에 쾌감을 느낀다. 서로를 제외한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은 한편으론 자유, 내 편이라는 믿음인 것이다. 오스카르는 이 신비의 큐브로 위기에 처한 엘리를 구하기도 한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현실로 나타난 결과였다. 오스카르는 교실에 불을 지르고 난 후 수천조각으로 이루어진 번쩍이는 금달걀 조형물을 앞에 두고 자축의 놀이를 벌이기도 한다. 오스카르의 큐브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이며 엘리의 계란은 내일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오스카르는 마지막에 이 모든 유년의 추억을 트렁크안에 집어 넣고 기차를 탄다. 이 세상에는 어느 정도 마법이라는 게 있다는 작가의 한마디가 울려오는 기적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닌 유치한 행위인 것 같지만 그 시절 퍼즐을 좋아하고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우정을 지키던 작가, 그리고 내 어린 시절과 다르지 않았던 동화같은 그림, 그림같은 우정, 우정보다 멋진 마법이었다.
눈, 사람처럼 따스한 .... 雪人
"왜냐하면 넌 살고 싶으니까.
마치 나처럼."
이 책을 읽고는 문득 피로써도 영혼이 감염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정신은 무엇에 감염되었을 지, 생각해 보았다. 몸으로 나타나는 현격한 전염상태가 아닌 사고의 체계, 의식의 흐름, 직관의 방향처럼 피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살기 위해 피를 먹고 사람을 죽인다는 엘리, 잠시만이라도 그런 내가 되어 달라는 영혼의 목소리가 자꾸만 내 굳어진 심장을 두드린 까닭일까. 왜 그래야 하는 지의 질문에 난 너와 같기 때문이라는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너야'라고 대답한 엘리의 마음이 내 거울이 되는 것만 같다. 몸을 섞는 것이 아니라 피를 섞어 하나가 되는 서약을 하려던 오스카르의 순심(純心)은 얼마나 깨끗하고 낭만적인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산소를 머금은 사람의 체온, 그것으로 완성된 피가 흐르는 그들의 심장이 내 영혼에 전염되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전염체야말로 고유의 생명성을 가지고 내가 죽어도 살아남기를 바란다. 엘리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던 오스카르처럼 그들의 피를 통해 내 심장의 온도를 높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사할 감염이 아니겠는가.
올해가 가는 시점에 이 겨울같은 소설을 여행하게 되어 참으로 고마운 독서였다. 오스카르와 엘리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내 유년과 지금의 장년이 만나는 재회의 스토리가 되었다. 내가 만약 더 피끓는 청춘이었다면 이 소설의 사랑이 더 예민하고 안타깝게 다가왔을거라는 슬픔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피가 식었기에 순수가 이렇게 더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스카르가 트렁크를 동반한 기차여행을 떠나는 장면에서야 겨우 어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희안하게도 그 기차를 타고 작가 역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로소 네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엘리의 희망이 더 온전하게 실현된 장면만 같아 그것으로 그 시절의 사랑이 그만 완성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시절의 하나됨의 기억으로 영원을 약속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 외롭게 서있던 전나무들의 숲에서 가슴을 짓누르던 영혼들에 인사하고 싶다.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스카르의 편이었던 톰미, 아빠가 죽고 경찰관과 사귀는 엄마를 둔, 키스의 노래를 좋아하던 그는 얼마나 씩씩한 어른으로 성장했을까. 오스카르와 엘리 못지 않게 나를 울게 만든 호칸, 자신의 최후를 알고서도 엘리와의 동행을 벗어날 수 없었던 그의 묘비에 꽃 한송이라도 놓고 떠나올 걸...
이제 곧 성탄인데 나는 이 책으로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아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이든 내게 더이상 누가 산타가 되어 줄 것인가. 내 마음속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다는 바램도 누군가에게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일도 잊고있던 설레임이다. 사랑이 아름답다는 말도, 영원하다는 생각도 너무 오래되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엔 하얀 나무로 트리를 꾸며볼 생각이다. 눈이 온다면 꼭 눈사람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아니 내 가슴에 눈사람을 초대해야지, 만약 기회가 없다면 누군가에게 그냥 눈사람이라도 되어 주고 싶다. 눈사람으로 마음에 들어가도 될 지 확인하는 나이고 싶다. 그러고보니 눈밭에 앉아 울고 있던 그 아이는 내 유년의 눈사람이었을까. 아니 그 시절의 나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를 어른 된 내가 안아주던 겨울여행...맑고 투명한 눈결정을 확인하고 온 기분으로 또 남은 겨울을 견뎌낼 기운을 얻는다. 이번에 눈사람을 만든다면 같은 눈사람이 되어 잠시 곁에 머물러 줌으로써 서로가 외롭지 않도록 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늙어버렸으니 눈사람은 얼마나 놀랄 것인가. 하지만 매번 녹아 사라진다는 역설이 결국 나를 위로할 것임을 안다. 어리니까 약하니까 그것으로 계속 살 수 있다는 게 어떠한 불행인지 그도 알 것이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추할 것이기에 눈사람 역시 녹지 않는다면 애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호불며 벙어리 장갑으로 완성해낸 그때 눈사람, 절대 녹지 않을 것 같던 동심을 그리워 하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쩌면 그토록 투명한 한 번의 동심(童心)으로 나머지 세월의 노심(老心)을 견뎌내는 존재들이 아니겠는가.
앞마당에 눈이 쌓이는 그리움으로 책을 덮어본다. 차갑지 않다.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참 오랜만이다. 다만 외롭지 않을 수 있어 그리운 눈사람, 잠시 서 있어도 되냐고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고 묻고 싶은 눈사람,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