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이 해피엔딩 - 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김연수.김중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장만한 지 얼마 안 되던 컬러 TV에선 주말마다 프로야구를 했는데 그때 난 서울에 살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MBC 청룡의 팬이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참..) 나는 당시 이 책의 저자들처럼 야구기록을 하진 않았지만 대신 그보다 유치한 야구게임(서로의 한손을 세워 가리고 동그라미에 색칠된 표식으로 스트라이크와 볼을 맞추던)은 빈번하게 했던 것 같다. 6학년을 떠올리면 나는 하늘색 나이키 런닝화와 청 플레어 스커트, 그리고 흰 블라우스만 생각난다. 거의 우리 반 여자아이들의 교복이나 다름 없었던 그 복장을 지독히도 혐오한(몰개성의 몰지각한 행동이라 비난시작) 나는 당시 나이키와 필적할 수 있었던 프로-스펙스 테니스화와 조다쉬 청바지(1개월 투쟁과 설득끝에)를 시위하듯 입은 채로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고추잠자리를 낮이나 밤이나 불러대던 '어린 아이'였었다. 이 책을 읽고 내 기억은 그때 그곳으로 마구 달려가는 걸 막지 못했다. 그때 나와 같이 프로-스펙스를 신었던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이들처럼 같은 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두 명의 작가 중 한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대책없는 생각에 잠시 잠겨본 시간이었다.

그렇다. 나는 김연수 작가가 6학년일 때 같은 학년이었고, 그가 89학번일 때도 같은 학번이었으므로 그와 나는 갑장의 관계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작년까지 인생사가 무척이나 바쁘던 사람이었기에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김연수'와 '김언수', 혹은 '김중혁'과 김경욱'을 명확히 구분하는 독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김연수 작가와 김중혁 작가가 김천 출신의 30년 지기 친구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이 젊은 날 자취방에서 밤을 새며 이 시대의 문학과 그 시대의 부조리에 번민하고 계실 때 나는 남녀평등이 아닌 우리사회를 뼈저리게 실감하며 산업전선에서 날밤을 새고 있었다. 하지만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일로 밤을 새었을 지언정 그 격동의(?) 시기를 이 맨몸 하나로 헤쳐(?) 나왔다는 그 질펀한 동질감은 솔직히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래 우린 그랬지, 그 마음 내가 알지...짜식들...요즘 애들은 모르지...이렇게 박수쳐줄 수 있는 독자는 얼마든지 되고도 남음이다.

핑퐁에세이라 했다. 한명이 '핑'하고 공을 던지면 한명이 '퐁'하고 받아주는, 잘하면 박빙의 탁구경기지만 어설프면 지들끼리 '잘 노는'꼴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서브는 김연수가 맡는 것으로 보였다. 스파이크 역시 김연수가 강약조절을 하면 김중혁이 장단에 맞추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할 일이 전혀 없었던 나로선 본의 아니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들의 글을 넘기다보니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른 점을 알게 되어 자연스레 그들의 매력을 도마 위에 올려 놓게 되었다. 그러기에 누가 동네 친구들끼리 책을 내라고 했나. 만약 저들 중 한명하고 황석영 혹은 이문열 작가가 합심하여 공동집필을 했다하면 내 이렇게까지 할 일은 없을 터. 하필 같은 세대라는 이 필연적인 우연을 이용해서라도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다시없을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나는 그들을 내 맘대로 비교분석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무려 쉰다섯꼭지나 되는 두 사람의 글은「씨네21」에 '나의 친구 그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번갈아 쓴 칼럼을 묶은 것이라 했다. 그들이 '영화'를 보고 쓴 칼럼인지 미처 몰랐기에 순수한 에세인줄 알았던 나로서는 처음 적잖이 실망을 했었다. 몇 년 전에 김영하 작가가 같은 잡지에 칼럼을 기고한 글을 묶어버린 책을 우연히 접했는데 솔직히 영화전문가가 아닌 소설가들한테 영화평 하라고 원고주면 삼분의 이는 자신의 인생평으로 채운다는 걸 그때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영화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인생도 아닌 뭔가 2% 부족함을 역시 그의 소설로 밖에 채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적이 있었기에 에고...결국 이들의 소설을 봐야하나 이런 생각으로 책을 들추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번 件은 기획이 신선했다. 허물없는(어 보이는) 친구관계인 두 남자가 서로 상대친구와 영화에 대해 1년 동안 격주로 한번 씩 정리 한 글이니 요즘 유행하는 프로젝트 그룹 창민과 이현의 '밥만 잘 먹더라'가 퍼뜩 생각이 날 정도로 각자 잘나간다고 생각되는 작가를 (소속사에서) 한데 묶어 잘 프로듀싱한 반짝 앨범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먹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기본적으로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였었고, 이들도 피튀기는 글빨을 무기로 갈고 닦은 실력파였기에 읽는 재미 또한 쏠쏠했음이다.

거기다가 두 사람이 글을 연재한 기간이 딱 2009년(우린 작년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 났었는지 우리조차 이해가 안되는)의 일 년이었기에 이야기의 흐름은 자신들이 본 영화 - 떠오른 옛날일화 - 작금의 현실 순으로 이어지며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식의 넋두리성 글들이 많아 핑퐁게임이라고만 하기엔 던지는 공의 무게가 진중해 보였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툭하면 그놈의 '마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잊을만 하면 현재 내 나이를 인식하게끔 하여 웃다가도 입을 다물게 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나처럼 마흔의 감기나 불혹의 체증을 꽤 오랫동안 겪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 마음이 짠한 구절이 많았던 것도 부인치 않겠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엔 글 시작 페이지에 그려진 인물 아이콘이 없어도 누가 썼는지 자동적으로 알아졌는데 김연수 작가의 글에서 어린 시절 내 모습과 대학시절 고민, 과거에 대한 우수한(?) 기억력, 정치적인 견해가 일치해서 였는지 나와는 성향이 많이 다른 김중혁 작가가 참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몇 개의 단편에서 김중혁이라는 사람은 꽤 매니아적인 기질이 있는 아웃사이더로 인식되었기에 자신이 관심가는 분야에는 철저하고 그렇지 않은 분야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기질에 충분한 공감이 되었고 (김연수의 표현에 의하면)예술가 성향이 강하다는 김중혁의 유머는 두어 번 배꼽을 잡고 뒹굴 정도로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당했다.

굳이 온도를 재보자면 김연수는 1도가 뜨겁고 김중혁은 1도가 차가운 것으로 느껴졌다. 목소리로 보자면 김연수가 아나운서 톤이라면 김중혁은 성우톤이었다. 기타로 치면 김연수는 C나 F, 김중혁은 D나 E코드...직업으로 보자면 김연수는 기자가 쓴 글 김중혁은 건축가가 쓴 글....이상하게도 그랬다. 똑같은 영화를 이야기 하고 같은 추억을 떠올리고 어느 한사람 웃기지 않은 구절이 없었음에도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슬픔에 대해서라면 김연수는 울컥하기 까지를, 김중혁은 울컥 한 후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연수는 이렇게 된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고, 김중혁은 지금 이후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더 걱정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허물과 장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들로서 나로 하여금 친구가, 글쓰기가...친구와 글쓰기가 사무치게 그립도록 만들었다. 작가들끼리 친구가 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이들은 작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친구였기에 오늘날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었고, 재능이라는 것이 얼마간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늘 비슷한 재능을 가진 상대의 재능이 부럽고 더 커 보이는 열등감을 부르기 쉬운 문단에서 적어도 그러한 질투와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의 편을 태어날 때부터 배정받은 사람들로 느껴져 나는 그들의 관계가 너무나 질투나고 부러웠다.

김연수의 글에선 미키루크를 보고 인생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꼭 작년의 나와 같아 이 사람이 나와 같이 영화를 보았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신촌의 동시개봉 영화관에서 보았다는 <나인하프 위크>, <투문 정션>, <카프리의 깊은 밤>은 나 역시도 모조리 본 영화였고 그중에 킴 베이싱어와 미키루크가 보여준 신기의 과일정사신은 우리시대 베드신의 고전으로 남지 않았던가. 그 꽃미남 미키루크가 <더 레슬러>에서 이마에 호치키스를 박는 레슬러로 변신할 줄, 아니 망가질 줄 나는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 영화를 보고 그날 화장실에서 나는 내 얼굴을 꽤 오래 쳐다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전원일기>의 등장인물을 일일이 열거해 가며 원고의 80%를 (영화가 아닌 전원일기의)드라마의 배경과 전체줄거리로 정리할 땐 그만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특별한 조연이었던 노인 삼총사를 기억하고 있다니...갑자기 전원일기의 주제곡이 귓전에 들려오던 순간이었다. 그는 필히 혜은이를 첫사랑으로 짝사랑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을 연도별로 기억하는 내 기억속의 혜은이는 1979년도 가수왕이었다. 강물은 흘러만 간다던 그대와 나의 꿈을 싣고서 흘러만 간다던...그때 우린 열 살이었다.


<전원일기와 김연수...>

웃다가 울면 어디가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김중혁의 글은 키득키득 웃다가도 방심한 그 순간 처절한 한방에 무너지는 격이다. <김씨 표류기>에서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이 그만 샐비어를 따먹고 달작지근한 딱 그만큼의 희망으로 다시 일어난 장면을 떠올리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뛰어 내린 부엉이 바위 주변에 샐비어라도 있었다면 혹시라도 그를 붙잡을 수 있었을까 하던 그의 안타까운 심정은 지난 일년간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꾹꾹 눌러버리는 것 같아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마더>의 마지막 장면인 김혜자가 춤을 추는 모습에서도 자신의 부모님이 관광버스에서 넋놓고 춤을 추시던 모습을 회상하며 그때 춤사위를 부끄러워 하던 자신이 부끄러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제시하는 관람 그래프 분석과 모기향 인생론은 그의 단편에서도 자주 확인하던 아이디어 스케치의 한 페이지를 들쳐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무엇이든 기발하게 단순화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으로 보였고 김연수는 그런 그를 무척이나 즐거워 하는(자랑스러워서) 듯 했다.



<마더, 김혜자 그리고 김중혁...>

두 명 다 작가이다 보니 간혹 가다 뼈있는(그래서 뼈아픈)문구들을 물 흐르듯 잘 위치시켜 역시나 키득키득하던 내 가슴을 서늘하게 할 때도 있었다. 주로 은근하게 배수진을 치는 김중혁은 총제적으로 견해를 밝히고 김연수쪽은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툭 던지는 한마디의 김연수는(이때는 기자필이 예리하다) 대 여섯 번 15년차 작가의 내공을 올곧게 느낄 수 있는 구절들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논리도 자신있게 밝히고 있었다. 그중에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나는 참았던 밑줄을 기어이 긋고 만 구절이 있는데, '치졸하게 느껴질 때, 그건 진실일 가능성이 많다.' 아...나는 비교적 내 삶에서 우아하지 않았던 지난 일년 간을 떠올리며 그것은 현재 마흔,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지금까지의 중간결론임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포괄적이고 우아하고 잘난 것은 진실이 아닐 확률이 높은 것...그래,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 치졸한 서로의 구석까지 알고 있기에 진실한 친구 일 수 있겠지 싶었다. 치졸하기 까지 하면서 진실하지도 않다면 인생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두 남자의 영화를 빙자한 1년간의 수다가 말처럼 가볍지만은 않은 독서였다. 순간 그들이 여자들이었다면 어떠한 글이었을 지 궁금했고, 대책없이 해피엔딩의 시리즈 격으로 그렇게 친구인 작가들이 주거니 받으니 글을 쓴다면 우리로선 재미난 구경이 될 것 같았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우연인지 내 앞엔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술이든 차 한잔이든 마시며 요즘 화두인 '공정'이나 '정의' 같은 이야기를 나누어 볼 듯이 만나서 요즘 컴백한 F.T 아일랜드의 새 노래 들어봤냐며 농담이나 주고받을 친구가 너무도 그리워진 시간들이었다.

이 책은 영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친구와 사소한 것들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교환하는 이미 친구인 사람들이 나누어 가진 우정에 대한 이야기 였다. 그들의 방식은 치사하게 부러울만큼 근사했고, 그들이 나눈 우정은 김천의 세월만큼 퍽이나 질겼다. 소재가 된 영화는 노래방에서 새우깡이냐 양파깡이냐의 차이일 뿐 무엇이 되었든 동일하게 근사하고 질겼을 것이다. 김연수와 김중혁이 각자의 톤으로 돌아와 자신들만의 무기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다음의 솔로앨범을 기다려 봐야겠다. 그러는 와중에 난 혹시나 바뀌었을 지 모를 친구들의 전화번호나 뒤적여 볼 생각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꼭!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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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3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1-0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구입한 책이네요. 이 책 재미가 좋아요~

님의 블로그 구경 잘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