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마이어 : 셀프 포트레이트 비비안 마이어 시리즈
비비안 마이어 사진, 존 말루프 외 글, 박여진 옮김 / 윌북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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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왜 사진을 찍는가? 특정한 시점의 기록을 위해 혹은 과거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재미로? 오래 전에 사진 찍기를 즐겼다. 그저 사진 찍기만 하고 현상과 인화는 디피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하는 법까지 배우고 나니 사진 찍기가 또 다르게 다가왔다. 로버트 카파처럼 결정적 순간을 담을 시간과 공간에 가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미션이다. 그저 선인들이 남긴 결정적 순간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사진 찍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찍기 이유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에 미국 출신의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가 남긴 대량의 미현상 롤필름들이 발견되면서, 그녀의 사진들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이 책의 저자인 존 말루프가 그녀의 미현상 필름들을 사들이면서 세상에 그녀가 남긴 사진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현상하지 못한 네거티브들이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그렇게 오랫 동안 현상을 하지 않아도 사진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아날로그 시대의 필름들을 하나하나 현상하고 인화해서 다시 디지털화 하는 작업이 아날로그 필름의 아우라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 지도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이번에 윌북에서 출간된 <비비안 마이어 셀프포트레이트>는 비비안 마이어가 남긴 말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사진들은 거울이나 유리창에 비친 비비안 마이어 자신을 피사체로 삼아, 그녀가 아끼는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로 찍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왠지 그녀의 셀프포트레이트들은 하나 같이 표정이 없고, 뚱한 표정이다. 어떤 사진들은 심지어 자신의 그림자를 찍은 것도 있다. 후대에 존 말루프가 아니었다면, 비비안 마이어가 사후에 지금 세간의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의 입소문을 탈 수 있었을까. 전설은 당대에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세대를 건너 뛰어 창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비비안 마이어의 케이스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거시사가 유행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미시사가 역사 서술 분야에서 대유행인 것처럼, 예전에는 결정적 순간을 담은 사진들이야말로 좋은 사진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에 담긴 정보들을 보노라면 소소하지만 일상의 풍경을 담은 그녀의 사진 속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때때로 장소 불명, 시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진들도 많이 있지만 시카고와 뉴욕의 거리에서 찍은 사진들은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당대의 찰나들을 매혹적으로 잡아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바로 그 지점이 비비안 마이어 사진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머리에 롤을 말고 바닷가에서 선탠을 하는 어느 여성의 사진, 자동차 윈도우가 올라가고 있는데 그 사이로 코가 꿰어서 더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연출된 고양이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보니 고양이가 코가 꿴 자동차 유리창에도 비비안 마이어의 반사된 모습이 보인다. 아무 생각 없이 사진첩을 넘겼는데 다시 보니, 편집자의 그런 묘수가 숨어 있었다.

 

비비안 마이어에게는 모든 공간이 그리고 순간들이 포획의 대상이었나 보다. 코믹 북스토어의 거울에서도(요즘은 가게마다 사진 찍지 마시오 정책이 일반화되서, 사진 찍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예전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공공장소에 놓인 재떨이의 둥근 부분도 모두모두 그녀에겐 좋은 피사체였다. 요즘처럼 자동초점 카메라로 순간 포착이 쉽지 않았을 텐데 비비안 마이어는 용케도 그런 순간들을 잘도 짚어냈다.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사진에 담긴 "Here's a real eye opener"란 표현이야말로 다시 재평가를 받게된 비비안 마이어 작품에 대한 편집자 존 말루프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유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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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불면의 밤을 넘어
조슈아 페리스 지음, 이원경 옮김 / 박하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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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때 야구 관람과 바다낚시하는 재미에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 나도 <일어나라 불면의 밤을 넘어>의 주인공 폴 오로르크처럼 열혈 레드삭스 팬이다. 하지만, 200486년 간의 숙원을 푼 다음에는 야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져 버렸다. 레드삭스가 2007년 그리고 2013년에도 우승을 했지만, 야구 보는 재미가 그전처럼 절박한 심정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치유와 동시에 정의할 수 없는 허전함을 처음 만난 조슈아 페리스는 정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그렇게 글로 재현해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뉴잉글랜드 메인 주 출신의 오로르크는 그 지방 전통대로 당연히 레드삭스 팬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뉴욕 어퍼이스트 파크 애비뉴에서 잘나가는 치과의사로 활동 중인 닥터 폴 오로르크의 일상은 야구 이야기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자살로 비롯된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개인적 성취를 통해 극복해냈지만, 여자친구에게 목매기와 레드삭스 팬으로서의 절박함은 그 유산으로 남았다. 작가 조슈아 페리스는 마치 우디 앨런의 뉴욕 영화에 등장하는 감독의 페르소나 주인공처럼, 그렇게 폴 오로르크를 형상화시켜 나간다. 전 세계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뉴욕 맨해튼이라는 배경 역시 글로벌 시대의 필수요소일지도 모르겠다.

 

레드삭스 팬에게 잊을 수 없는 또다른 실패의 장()2011년이 시간적 배경이다. 사소한 마찰들이 상존해 오긴 했지만 비교적(?) 평온했던 오로르크의 삶은 어느날 갑자기, 신원미상의 인물이 자신이 운영하는 치과의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빌어 SNS에 다양한 글들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파열 모드로 돌입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는 고대 유대신화에 등장하는 아말렉 부족의 왕 아각 혹은 선지자 사펙이라는 인물을 소설에 투입시키면서, 주인공 오로르크가 유대 민족의 고의적인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고대 부족의 후손(울름)일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빚어낸다. 시기적절하게 월가의 갑부 피트 머서와 온갖 현학적이면서 반유대주의자로 몰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글들을 올린 그랜트 아서라는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흥미를 더해간다. 조슈아 페리스는 확실히 소설을 멋지게 전개시키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야구와 치과 치료에 대한 사전 조사가 완벽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레드삭스 트레이드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제프 배그웰에 대한 짧은 언급은 정말 멋졌다.

 

현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선수로 주인공 폴 오로르크를 타자로 준비시키고, 그에 맞서는 투수로 그랜트 아서를 등판시켜서 가공의 미스터리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슬라이더를 마구 뿌려대는 방식이다. 작가는 무지막지한 패스트볼만으로 승부를 걸지 않는다. 폴 오로르크 치과 클리닉 주변에 포진한 애비와 벳시 그리고 전 애인이자 경리과장으로 활약 중인 코니라는 스플리터 혹은 커브도 준비되어 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존재의 본질적인 질문에 마주하게 된 주인공은 클리닉을 찾은 환자들에게 치료 중에 난 누군가, 또 여긴가 하는 황당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자신의 본업인 치과 치료보다는 스마트폰에 영혼을 빼앗긴 삼십대 후반의 외로움에 지친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자신도 가족을 버릴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를 위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포터리 반이나 브룩스톤에서 필요도 없는 갖가지 물건들을 소비하며 정신적 안정을 갈구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언뜻 우디 앨런 영화에 등장하는 수다쟁이 주인공의 모습이 연상됐다. 이제는 한물간 감독이 되었지만, 우디 앨런도 한때 잘 나가는 뉴욕의 스타일 넘치는 감독이 아니었던가.

 

조슈아 페리스는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일어나라 불면의 밤을 넘어>를 꾸미고 있지만, 역시 소설의 핵심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개인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주변과 소통하고 의심하면서 자아를 확립해 나가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를 치유해 것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이 아닐까. 또 한편으론 삶에서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진 피트 머서도 결국 폴 오로르크의 아버지처럼 쓸쓸한 죽음을 맞았고,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제패가 피해의식에 젖어 살던 이들의 절대구원이 될 수 없었노라고 작가는 증언하고 있다. 구도를 하는 이들에겐 무책임해 보이긴 해도, 결국 각자도생이 답이라는 걸까. 한 발짝 더 나가면 일체유심조에 도달할 지도 모르겠다.

 

한창 재밌게 진행되던 소설은 그랜트 아서의 실체를 벗겨내는 결말로 가면서 기운이 빠진 느낌이다. 7회까지 전력투구한 페드로가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시타를 허용한 2003년 레드삭스의 마지막 경기가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조슈아 페리스가 소설에서 기술한 2011년의 마지막 경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난 이 소설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요소인 야구, 특히 레드삭스 이야기와 종교라는 두 가지 테마를 통해 내가 살아온 그간의 삶의 궤적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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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2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드 삭스 마니아`를 줄여서 지금의 닉네임이 나온 것이군요. `레삭매냐`의 의미를 처음 알았습니다. ^^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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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이 퓰리처상 수상작이 아니었다면 과연 읽게 되었을까? 최근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를 비롯해서 우수한 해외서적들이 이번 여름을 장악해 버린 느낌이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 이후, 국내 소설들의 출간이 주춤한 틈에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 않은가. 켄 폴릿의 새로 나온 책도 읽어야 하는데, 짬이 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일단 사두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보자는 심산으로 앤소니 도어의 책을 샀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날 책을 펴들었다. 업무와 육아 그리고 각종 집안일로 바쁜 와중에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첫 번째 권을 읽었다. 결과는 명불허전이라는 느낌이었다. 왜 단권으로 책을 내지 않고 분권해서 출간했는지 불만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너무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미국 출신의 작가 앤소니 도어가 자그마치 10년 간 동안의 철저한 고증과 노고 끝에 발표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194487, 영미연합군과 독일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생말로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소설을 접하면서 바로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작가가 사전에 영화 시나리오를 염두에 쓰고 저술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분화된 컷 단위의 구성이다. 소설의 주인공 프랑스 파리 출신의 장님 소녀 마리로르 르블랑과 독일의 탄광마을 졸페라인 출신의 천재 엔지니어 베르너 페닝에 대한 교차 서술은 가독성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소재 중의 하나인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책에 대한 몰입은 지그시 가속페달을 밟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앤소니 도어 작가는 가공할만한 전화의 화염에 휩싸인 생말로에 자리 잡은 두 명의 주인공 마리로르와 베르너의 삶을 플래시백으로 과거로 되돌린다. 살면서 전혀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주인공 두 명의 운명이 어떻게 해서 이어지게 되었는가는 작가가 준비한 첫 번째 미스터리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은 마리로르는 파리 박물관의 자물쇠 장인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자라지만, ‘불꽃의 바다라는 이름을 가진 희귀한 다이아몬드의 저주 때문인지 시력을 잃게 된다. 두 가지 별 개의 사건이 어떤 개연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아버지 다니엘은 어린 소녀 마리로르가 불편함 없이 지내게 하기 위해, 모형 거리를 만들어 보지 못해도 다닐 수 있는 훈련을 시킨다(작가의 소설의 전개를 위해 준비한 또 하나의 장치다). 그는 딸의 생일마다 마리로르를 위한 미스터리 퀴즈와 점자책을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는 자상한 아빠다.

 

다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탄광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 소년 베르너다. 그 역시 15세가 되면 탄광으로 내려가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퓌러가 권력을 잡은 조국의 영광을 위해 강철을 만들기 위한 코크스 생산에 동원되어야할 운명이다. 소년은 어렴풋이 자신이 가진 특출한 기술인 엔지니어링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고 있다. 그랬던 베르너가 어떻게 해서 생말로 전선에 투입된 베어마흐트의 일원으로 트랜시버를 조작하게 되었는지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조근조근만 목소리로 독자를 유혹한다. , 여기서 작가가 대비한 또 하나의 장치는 베르너가 고아원 원장인 알자스 출신 엘레나 아줌마를 통해 프랑스어를 배웠다는 점이다. 베르너의 바일링걸 능력은 아마도 생말로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 이렇게 멋진 무대가 만들어졌으니 이야기가 달릴 차례다.

 

1930년대 프랑스에 사는 소녀의 삶과 나치가 권력을 잡고 국가를 전쟁과 정복을 위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 시작하던 독일 소년의 삶은 천양지차였다. 물론, 전쟁은 두 사람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 놓긴 했지만, 19448월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앤소니 도어의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아직 어린 소녀긴 하지만, 아버지에게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는 마리로르의 삶과 전체주의 국가에서 히틀러 유겐트 소속으로 훗날 북구 신화에 등장하는 광전사(베르세르크)가 되어 미영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의 성공으로 제2전선이 열리면서, 전세가 기울어 패전이 명확한 상황에서도 히틀러의 명령으로 초개 같이 목숨을 버리게 될 전쟁기계 훈련을 받게 된 베르너의 그것은 비극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한 편의 서사가 목가적인 여유로움에 근거해 있다면, 다른 한 편의 서사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에 내몰린 절박함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렇게 두 소년소녀의 상이한 삶의 궤적과 더불어 불꽃의 바다를 찾는 보석사냥꾼이자 본부원사 라인홀트 폰 룸펠이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또 하나의 위기를 증폭시킨다. 아울러 나치 부역자이자 암시장에서 밀거래를 통해 폭리를 취한 장사꾼 클로드 르비트의 생각을 빌어, 프랑스를 개전 6주 만에 정복한 보슈들에 대한 당시 보통 프랑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독일군의 우수한 능력과, 태도 그리고 효율에 대한 사고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앤소니 도어는 마리로르의 작은할아버지 에티엔을 등장시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1차 세계대전)의 승자였던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사가 여전히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비극에 대해 말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에티엔의 모습에서 보여지듯, 전쟁의 승리가 승자에게도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에티엔이 자신의 형 앙리와 같이 만든 방송을 오래 전에 꼬마 베르너가 감명 깊게 들었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자. 반대로 패전국 독일은 베르사유 강화 조약을 국가적 수치로 받아 들여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국가사회주의 시스템이 지배하는 체제 아래서 자란 베르너 또래의 독일 십대 소년들이 나치가 날조해낸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속아, 장차 청년 전쟁기계가 되어 1944년 노르망디 전역에서 히틀러 유겐트 사단의 일원으로 잔학 행위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승자에게도, 역시 패자에게도 비극인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작가의 문학적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뱀다리] 역자가 2차 세계대전 전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듯, 루프트바페 소속의 팔쉬름예거(공수부대)대공 부대원이나 급강하 폭격기 스투카/슈투카의 통일되지 못한 표현으로 번역한 점은 옥의 티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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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이즈
제임스 설터 지음, 김영준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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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중의 작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즐거움일까? 제임스 설터의 책 <어젯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그 즐거움에 도달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설터의 대표작이라는 <가벼운 나날>을 샀지만, 아직도 못 읽고 있다. 그리고 다시 올해 나온 <스포츠와 여가>도 샀지만 지지부진하다. 그러던 중에 제임스 설터 작가가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설터 작가의 마지막 작품인 <올 댓 이즈>가 인터넷 연재로 독자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때마침 원서를 아마존을 통해 구매해 가지고 있던 차라, 번역서와 원작을 교차해서 읽는 즐거움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한 권의 책을 앉은 자리에서 몰아 읽는 재미도 있지만, 이렇게 매일 매일 읽는 재미도 쏠쏠치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올 댓 이즈>(그런데 왜 이 제목은 원서 그대로 가져갔을까? 번역한다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 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양장의 표지는 물살을 헤치고 수영하는 사람의 이미지다. 그것은 마치 소설의 주인공 필립 보먼의 인생유전을 상징하는 시니피에처럼 다가온다.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작정하고 제임스 설터의 책의 표지로 삼고 있는 던컨 한나의 이미지들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일개 독자로서 어찌하겠냐만서도. 일찍이 해군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을 누빈 베테랑 군인이었던 필립은 전역하고 나서 하바드 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의 전형이다. 자신과 어머니 비어트리스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낸 아버지의 부재는 보먼의 성장과 더불어 극복되었다고나 할까. 남부 출신의 사랑스러운 아내 비비언을 만나지만, 둘의 결혼은 비비언의 아버지와 필립의 어머니가 예언한 대로 지속되지 않는다.

 

평범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실제 모습을 그 누구보다 꿰뚫고 있다는 제임스 설터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군인에서 잘 나가는 출판사의 편집자(물론 자신은 작가였다)로 변신한 필립 보먼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에서 살짝 지면의 연출가로 변신한 설터는 필립 보먼이 관계하고 있는 주변인물을 요소마다 투입시키고, 이런저런 관계들을 꾸준하게 설정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캐릭터들을 각 챕터마다 등장시키는 기법으로 매끄러운 내러티브 전개를 선보인다. 낯선 이들이 계속해서 등장함에도 이질감이 들지 않게 하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리라. 소설의 2/3가 진행될 때까지 작가는 소설의 선도를 이런 방식으로 유지한다.

 

변이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해야 할까? 뉴저지 출신의 보먼은 무미건조한 비비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돌싱으로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에서의 생활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니드와 크리스틴 같은 매력적인 여인들과의 연이은 만남은 인생이라는 이름의 낯선 바다를 헤쳐 나가는 남자가 만나게 되는, 소설 표지의 남자가 물결을 가르는 왼손으로 지향하는 목표처럼 다가왔다. 결국 인생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의 총합이 이루는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구순의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더불어 노년의 설터가 그리는 에로티시즘의 정수는 <스포츠와 여가>에서 나온 젊은 날의 청춘들이 추구하는 그것과는 다른 농밀함이 뚝뚝 묻어난다. 간결하면서도 관계의 핵심을 찌르는 예리한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되새김질하듯 읽게 만들어준다. 제임스 설터의 글은 죽을 때까지 아름다웠노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과언일까 싶을 정도로.

 

소설의 가독성을 높이는 유려한 번역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 싶다. 때로는 번역이 원작의 그것보다 뛰어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성을 들인 부분도 눈에 띈다. “바로 이때 잊지 못할 순간이 찾아왔다 (he never forgot this moment)”이나 “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stars appeared in the black sky)” 같은 표현들은 정말 대단했다. 물론 반대로 ‘후리다’란 가치중립적이지 못하고 주인공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할 수 있는 한 표현이나, 원문에는 있지만 번역에서는 생략된 부분들도 눈에 띄지만 옥의 티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인생에서 만남과 헤어짐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올 댓 이즈>와 만나면서 인생의 그런 통과의례에 대한 진실과 예의 진실이 드러나기까지의 미묘하면서도 섬세한 전조들을 문학적으로 다루는 데 일가를 이룬 제임스 설터의 작가의 필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됐다. 원서를 손에 넣은 뒤, 오랫동안 기대한 만큼 즐거움도 그 못지않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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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08-09 0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레삭매냐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 원서로도 읽으시다니@_@; 부럽고 존경스러워요. 저도 보관함에 넣어둔 책인데 어서 읽고 싶네요.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로맨스 푸어 소담 한국 현대 소설 5
이혜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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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푸어 시대에 나는 <로맨스 푸어>라는 소설의 제목을 보고, 달달한 로맨스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기대를 품었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예상한 그 달달한 로맨스 대신 아이볼을 모으기 위해 골프채를 휘둘러 대는 유다영이라는 32살 먹은 앙칼진 처녀의 생존투쟁기를 목도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로맨스 푸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합정역으로 대변되는 장소만큼이나 이혜린 작가의 소설은 현실적이다 못해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에 나오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이 강북을 휩쓸고(불과 메르스가 우리나라를 강타한 것이 몇 달 전의 이야기다), 그 여파로 좀비(아니 소설에서는 파지티브라는 아주 고상한 명칭으로 불리운다)와의 사투가 시작된다. 제도 교육을 참하게 받고, 사회에 편입된 주인공 다영은 열심히 연애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지만 별무소용이다. 비타민 주사를 맞고, 사회봉사 명령을 수행하던 중에 우연히 만난 훈남 우현과 엮이는 통에 자신의 본거지인 강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강북에 남아 지긋지긋한 좀비와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소설에서 주인공 다영은 꾸준하게 강남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시뮬라크르에 집착한다. 게다가 그녀는 때마침 이성욱이라는 강남 120아파트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또다른 남자와의 관계도 이미 친절하게 설정되어 있다. 그러니 갈등구조는 완벽하게 이뤄진 셈이다. 현실세계에서 바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것 같은 남자 우현(그런데 이 남자 드럽게 눈치가 없다)과 딱히 땡기지는 않지만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조건과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남자 이성욱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주인공 다영은 갈팡질팡하게 되어 있다. 좀 더 입체적인 캐릭터로 성장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되었다고야 할까. 하긴 우리가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 같은 여주인공을 원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스스로를 나쁜 년이라고 부르며, 강북의 유일한 생존 공간인 팰리스 시민이 되기 위해서라면, 아니 흰쌀밥에 죽죽 찢은 김치를 먹기 위해서라면 죽은 좀비의 아이볼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까지도 팔 준비가 된 다영이라면 충분히 입체적인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좀 더 좀비와 인간의 대결이라는 사회경제적 구조가 지닌 부조리에 전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좀비가 살벌하게 판치는 강북의 모습은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에 내몰린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치솟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주거비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된 이들의 모습이 팰리스에 입주하기 위해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주인공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주인공들이 수집하기에 혈안이 된 아이볼은 그대로 금전, 다시 말해 돈으로 치환된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하다. 그렇게 살기 좋다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조금의 파렴치한 행동도 묵인되는 작금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지적은 예리하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마무리가 조금 아쉬운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너무 멀리 와서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스스로도 실종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요즘 유행하는 썸타는 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종결로 치닫는 작가의 기법은 마음에 들었다. 주변 인물들이 모두 좀비와의 싸움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 마음을 다잡고 살아남은 주인공들의 결말은 어떻게 보면 허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도 작가가 고른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타인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당사자들은 당시에 모름지기 자신의 판단 아래 항상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기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내 한여름 밤의 독서는 그래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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