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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불면의 밤을 넘어
조슈아 페리스 지음, 이원경 옮김 / 박하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한 때 야구 관람과 바다낚시하는 재미에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 나도 <일어나라 불면의 밤을 넘어>의 주인공 폴 오로르크처럼 열혈 레드삭스 팬이다. 하지만, 2004년 86년 간의 숙원을 푼 다음에는 야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져 버렸다. 레드삭스가 2007년 그리고 2013년에도 우승을 했지만, 야구 보는 재미가 그전처럼 절박한 심정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치유와 동시에 정의할 수 없는 허전함을 처음 만난 조슈아 페리스는 정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그렇게 글로 재현해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뉴잉글랜드 메인 주 출신의 오로르크는 그 지방 전통대로 당연히 레드삭스 팬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뉴욕 어퍼이스트 파크 애비뉴에서 잘나가는 치과의사로 활동 중인 닥터 폴 오로르크의 일상은 야구 이야기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자살로 비롯된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개인적 성취를 통해 극복해냈지만, 여자친구에게 목매기와 레드삭스 팬으로서의 절박함은 그 유산으로 남았다. 작가 조슈아 페리스는 마치 우디 앨런의 뉴욕 영화에 등장하는 감독의 페르소나 주인공처럼, 그렇게 폴 오로르크를 형상화시켜 나간다. 전 세계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뉴욕 맨해튼이라는 배경 역시 글로벌 시대의 필수요소일지도 모르겠다.
레드삭스 팬에게 잊을 수 없는 또다른 실패의 장(場)인 2011년이 시간적 배경이다. 사소한 마찰들이 상존해 오긴 했지만 비교적(?) 평온했던 오로르크의 삶은 어느날 갑자기, 신원미상의 인물이 자신이 운영하는 치과의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빌어 SNS에 다양한 글들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파열 모드로 돌입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는 고대 유대신화에 등장하는 아말렉 부족의 왕 아각 혹은 선지자 사펙이라는 인물을 소설에 투입시키면서, 주인공 오로르크가 유대 민족의 고의적인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고대 부족의 후손(울름)일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빚어낸다. 시기적절하게 월가의 갑부 피트 머서와 온갖 현학적이면서 반유대주의자로 몰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글들을 올린 그랜트 아서라는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흥미를 더해간다. 조슈아 페리스는 확실히 소설을 멋지게 전개시키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야구와 치과 치료에 대한 사전 조사가 완벽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레드삭스 트레이드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제프 배그웰에 대한 짧은 언급은 정말 멋졌다.
현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선수로 주인공 폴 오로르크를 타자로 준비시키고, 그에 맞서는 투수로 그랜트 아서를 등판시켜서 가공의 미스터리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슬라이더를 마구 뿌려대는 방식이다. 작가는 무지막지한 패스트볼만으로 승부를 걸지 않는다. 폴 오로르크 치과 클리닉 주변에 포진한 애비와 벳시 그리고 전 애인이자 경리과장으로 활약 중인 코니라는 스플리터 혹은 커브도 준비되어 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존재의 본질적인 질문에 마주하게 된 주인공은 클리닉을 찾은 환자들에게 치료 중에 난 누군가, 또 여긴가 하는 황당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자신의 본업인 치과 치료보다는 스마트폰에 영혼을 빼앗긴 삼십대 후반의 외로움에 지친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자신도 가족을 버릴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를 위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포터리 반이나 브룩스톤에서 필요도 없는 갖가지 물건들을 소비하며 정신적 안정을 갈구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언뜻 우디 앨런 영화에 등장하는 수다쟁이 주인공의 모습이 연상됐다. 이제는 한물간 감독이 되었지만, 우디 앨런도 한때 잘 나가는 뉴욕의 스타일 넘치는 감독이 아니었던가.
조슈아 페리스는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일어나라 불면의 밤을 넘어>를 꾸미고 있지만, 역시 소설의 핵심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개인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주변과 소통하고 의심하면서 자아를 확립해 나가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를 치유해 것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이 아닐까. 또 한편으론 삶에서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진 피트 머서도 결국 폴 오로르크의 아버지처럼 쓸쓸한 죽음을 맞았고,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제패가 피해의식에 젖어 살던 이들의 절대구원이 될 수 없었노라고 작가는 증언하고 있다. 구도를 하는 이들에겐 무책임해 보이긴 해도, 결국 각자도생이 답이라는 걸까. 한 발짝 더 나가면 일체유심조에 도달할 지도 모르겠다.
한창 재밌게 진행되던 소설은 그랜트 아서의 실체를 벗겨내는 결말로 가면서 기운이 빠진 느낌이다. 7회까지 전력투구한 페드로가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시타를 허용한 2003년 레드삭스의 마지막 경기가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조슈아 페리스가 소설에서 기술한 2011년의 마지막 경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난 이 소설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요소인 야구, 특히 레드삭스 이야기와 종교라는 두 가지 테마를 통해 내가 살아온 그간의 삶의 궤적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