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푸어 소담 한국 현대 소설 5
이혜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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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푸어 시대에 나는 <로맨스 푸어>라는 소설의 제목을 보고, 달달한 로맨스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기대를 품었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예상한 그 달달한 로맨스 대신 아이볼을 모으기 위해 골프채를 휘둘러 대는 유다영이라는 32살 먹은 앙칼진 처녀의 생존투쟁기를 목도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로맨스 푸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합정역으로 대변되는 장소만큼이나 이혜린 작가의 소설은 현실적이다 못해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에 나오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이 강북을 휩쓸고(불과 메르스가 우리나라를 강타한 것이 몇 달 전의 이야기다), 그 여파로 좀비(아니 소설에서는 파지티브라는 아주 고상한 명칭으로 불리운다)와의 사투가 시작된다. 제도 교육을 참하게 받고, 사회에 편입된 주인공 다영은 열심히 연애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지만 별무소용이다. 비타민 주사를 맞고, 사회봉사 명령을 수행하던 중에 우연히 만난 훈남 우현과 엮이는 통에 자신의 본거지인 강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강북에 남아 지긋지긋한 좀비와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소설에서 주인공 다영은 꾸준하게 강남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시뮬라크르에 집착한다. 게다가 그녀는 때마침 이성욱이라는 강남 120아파트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또다른 남자와의 관계도 이미 친절하게 설정되어 있다. 그러니 갈등구조는 완벽하게 이뤄진 셈이다. 현실세계에서 바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것 같은 남자 우현(그런데 이 남자 드럽게 눈치가 없다)과 딱히 땡기지는 않지만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조건과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남자 이성욱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주인공 다영은 갈팡질팡하게 되어 있다. 좀 더 입체적인 캐릭터로 성장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되었다고야 할까. 하긴 우리가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 같은 여주인공을 원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스스로를 나쁜 년이라고 부르며, 강북의 유일한 생존 공간인 팰리스 시민이 되기 위해서라면, 아니 흰쌀밥에 죽죽 찢은 김치를 먹기 위해서라면 죽은 좀비의 아이볼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까지도 팔 준비가 된 다영이라면 충분히 입체적인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좀 더 좀비와 인간의 대결이라는 사회경제적 구조가 지닌 부조리에 전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좀비가 살벌하게 판치는 강북의 모습은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에 내몰린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치솟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주거비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된 이들의 모습이 팰리스에 입주하기 위해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주인공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주인공들이 수집하기에 혈안이 된 아이볼은 그대로 금전, 다시 말해 돈으로 치환된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하다. 그렇게 살기 좋다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조금의 파렴치한 행동도 묵인되는 작금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지적은 예리하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마무리가 조금 아쉬운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너무 멀리 와서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스스로도 실종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요즘 유행하는 썸타는 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종결로 치닫는 작가의 기법은 마음에 들었다. 주변 인물들이 모두 좀비와의 싸움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 마음을 다잡고 살아남은 주인공들의 결말은 어떻게 보면 허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도 작가가 고른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타인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당사자들은 당시에 모름지기 자신의 판단 아래 항상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기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내 한여름 밤의 독서는 그래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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