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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이즈
제임스 설터 지음, 김영준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작가 중의 작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즐거움일까? 제임스 설터의 책 <어젯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그 즐거움에 도달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설터의 대표작이라는 <가벼운 나날>을 샀지만, 아직도 못 읽고 있다. 그리고 다시 올해 나온 <스포츠와 여가>도 샀지만 지지부진하다. 그러던 중에 제임스 설터 작가가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설터 작가의 마지막 작품인 <올 댓 이즈>가 인터넷 연재로 독자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때마침 원서를 아마존을 통해 구매해 가지고 있던 차라, 번역서와 원작을 교차해서 읽는 즐거움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한 권의 책을 앉은 자리에서 몰아 읽는 재미도 있지만, 이렇게 매일 매일 읽는 재미도 쏠쏠치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올 댓 이즈>(그런데 왜 이 제목은 원서 그대로 가져갔을까? 번역한다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 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양장의 표지는 물살을 헤치고 수영하는 사람의 이미지다. 그것은 마치 소설의 주인공 필립 보먼의 인생유전을 상징하는 시니피에처럼 다가온다.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작정하고 제임스 설터의 책의 표지로 삼고 있는 던컨 한나의 이미지들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일개 독자로서 어찌하겠냐만서도. 일찍이 해군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을 누빈 베테랑 군인이었던 필립은 전역하고 나서 하바드 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의 전형이다. 자신과 어머니 비어트리스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낸 아버지의 부재는 보먼의 성장과 더불어 극복되었다고나 할까. 남부 출신의 사랑스러운 아내 비비언을 만나지만, 둘의 결혼은 비비언의 아버지와 필립의 어머니가 예언한 대로 지속되지 않는다.
평범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실제 모습을 그 누구보다 꿰뚫고 있다는 제임스 설터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군인에서 잘 나가는 출판사의 편집자(물론 자신은 작가였다)로 변신한 필립 보먼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에서 살짝 지면의 연출가로 변신한 설터는 필립 보먼이 관계하고 있는 주변인물을 요소마다 투입시키고, 이런저런 관계들을 꾸준하게 설정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캐릭터들을 각 챕터마다 등장시키는 기법으로 매끄러운 내러티브 전개를 선보인다. 낯선 이들이 계속해서 등장함에도 이질감이 들지 않게 하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리라. 소설의 2/3가 진행될 때까지 작가는 소설의 선도를 이런 방식으로 유지한다.
변이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해야 할까? 뉴저지 출신의 보먼은 무미건조한 비비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돌싱으로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에서의 생활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니드와 크리스틴 같은 매력적인 여인들과의 연이은 만남은 인생이라는 이름의 낯선 바다를 헤쳐 나가는 남자가 만나게 되는, 소설 표지의 남자가 물결을 가르는 왼손으로 지향하는 목표처럼 다가왔다. 결국 인생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의 총합이 이루는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구순의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더불어 노년의 설터가 그리는 에로티시즘의 정수는 <스포츠와 여가>에서 나온 젊은 날의 청춘들이 추구하는 그것과는 다른 농밀함이 뚝뚝 묻어난다. 간결하면서도 관계의 핵심을 찌르는 예리한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되새김질하듯 읽게 만들어준다. 제임스 설터의 글은 죽을 때까지 아름다웠노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과언일까 싶을 정도로.
소설의 가독성을 높이는 유려한 번역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 싶다. 때로는 번역이 원작의 그것보다 뛰어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성을 들인 부분도 눈에 띈다. “바로 이때 잊지 못할 순간이 찾아왔다 (he never forgot this moment)”이나 “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stars appeared in the black sky)” 같은 표현들은 정말 대단했다. 물론 반대로 ‘후리다’란 가치중립적이지 못하고 주인공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할 수 있는 한 표현이나, 원문에는 있지만 번역에서는 생략된 부분들도 눈에 띄지만 옥의 티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인생에서 만남과 헤어짐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올 댓 이즈>와 만나면서 인생의 그런 통과의례에 대한 진실과 예의 진실이 드러나기까지의 미묘하면서도 섬세한 전조들을 문학적으로 다루는 데 일가를 이룬 제임스 설터의 작가의 필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됐다. 원서를 손에 넣은 뒤, 오랫동안 기대한 만큼 즐거움도 그 못지않은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