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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평점 :
내가 이 책이 퓰리처상 수상작이 아니었다면 과연 읽게 되었을까? 최근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를 비롯해서 우수한 해외서적들이 이번 여름을 장악해 버린 느낌이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 이후, 국내 소설들의 출간이 주춤한 틈에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 않은가. 켄 폴릿의 새로 나온 책도 읽어야 하는데, 짬이 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일단 사두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보자는 심산으로 앤소니 도어의 책을 샀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날 책을 펴들었다. 업무와 육아 그리고 각종 집안일로 바쁜 와중에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첫 번째 권을 읽었다. 결과는 명불허전이라는 느낌이었다. 왜 단권으로 책을 내지 않고 분권해서 출간했는지 불만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너무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미국 출신의 작가 앤소니 도어가 자그마치 10년 간 동안의 철저한 고증과 노고 끝에 발표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1944년 8월 7일, 영미연합군과 독일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생말로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소설을 접하면서 바로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작가가 사전에 영화 시나리오를 염두에 쓰고 저술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분화된 컷 단위의 구성이다. 소설의 주인공 프랑스 파리 출신의 장님 소녀 마리로르 르블랑과 독일의 탄광마을 졸페라인 출신의 천재 엔지니어 베르너 페닝에 대한 교차 서술은 가독성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소재 중의 하나인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책에 대한 몰입은 지그시 가속페달을 밟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앤소니 도어 작가는 가공할만한 전화의 화염에 휩싸인 생말로에 자리 잡은 두 명의 주인공 마리로르와 베르너의 삶을 플래시백으로 과거로 되돌린다. 살면서 전혀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주인공 두 명의 운명이 어떻게 해서 이어지게 되었는가는 작가가 준비한 첫 번째 미스터리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은 마리로르는 파리 박물관의 자물쇠 장인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자라지만, ‘불꽃의 바다’라는 이름을 가진 희귀한 다이아몬드의 저주 때문인지 시력을 잃게 된다. 두 가지 별 개의 사건이 어떤 개연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아버지 다니엘은 어린 소녀 마리로르가 불편함 없이 지내게 하기 위해, 모형 거리를 만들어 보지 못해도 다닐 수 있는 훈련을 시킨다(작가의 소설의 전개를 위해 준비한 또 하나의 장치다). 그는 딸의 생일마다 마리로르를 위한 미스터리 퀴즈와 점자책을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는 자상한 아빠다.
다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탄광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 소년 베르너다. 그 역시 15세가 되면 탄광으로 내려가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퓌러가 권력을 잡은 조국의 영광을 위해 강철을 만들기 위한 코크스 생산에 동원되어야할 운명이다. 소년은 어렴풋이 자신이 가진 특출한 기술인 엔지니어링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고 있다. 그랬던 베르너가 어떻게 해서 생말로 전선에 투입된 베어마흐트의 일원으로 트랜시버를 조작하게 되었는지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조근조근만 목소리로 독자를 유혹한다. 아, 여기서 작가가 대비한 또 하나의 장치는 베르너가 고아원 원장인 알자스 출신 엘레나 아줌마를 통해 프랑스어를 배웠다는 점이다. 베르너의 바일링걸 능력은 아마도 생말로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자, 이렇게 멋진 무대가 만들어졌으니 이야기가 달릴 차례다.
1930년대 프랑스에 사는 소녀의 삶과 나치가 권력을 잡고 국가를 전쟁과 정복을 위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 시작하던 독일 소년의 삶은 천양지차였다. 물론, 전쟁은 두 사람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 놓긴 했지만, 1944년 8월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앤소니 도어의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아직 어린 소녀긴 하지만, 아버지에게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는 마리로르의 삶과 전체주의 국가에서 히틀러 유겐트 소속으로 훗날 북구 신화에 등장하는 광전사(베르세르크)가 되어 미영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의 성공으로 제2전선이 열리면서, 전세가 기울어 패전이 명확한 상황에서도 히틀러의 명령으로 초개 같이 목숨을 버리게 될 전쟁기계 훈련을 받게 된 베르너의 그것은 비극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한 편의 서사가 목가적인 여유로움에 근거해 있다면, 다른 한 편의 서사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에 내몰린 절박함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렇게 두 소년소녀의 상이한 삶의 궤적과 더불어 ‘불꽃의 바다’를 찾는 보석사냥꾼이자 본부원사 라인홀트 폰 룸펠이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또 하나의 위기를 증폭시킨다. 아울러 나치 부역자이자 암시장에서 밀거래를 통해 폭리를 취한 장사꾼 클로드 르비트의 생각을 빌어, 프랑스를 개전 6주 만에 정복한 보슈들에 대한 당시 보통 프랑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독일군의 우수한 능력과, 태도 그리고 효율에 대한 사고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앤소니 도어는 마리로르의 작은할아버지 에티엔을 등장시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1차 세계대전)의 승자였던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사가 여전히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비극에 대해 말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에티엔의 모습에서 보여지듯, 전쟁의 승리가 승자에게도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에티엔이 자신의 형 앙리와 같이 만든 방송을 오래 전에 꼬마 베르너가 감명 깊게 들었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자. 반대로 패전국 독일은 베르사유 강화 조약을 국가적 수치로 받아 들여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국가사회주의 시스템이 지배하는 체제 아래서 자란 베르너 또래의 독일 십대 소년들이 나치가 날조해낸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속아, 장차 청년 전쟁기계가 되어 1944년 노르망디 전역에서 히틀러 유겐트 사단의 일원으로 잔학 행위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승자에게도, 역시 패자에게도 비극인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작가의 문학적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뱀다리] 역자가 2차 세계대전 전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듯, 루프트바페 소속의 팔쉬름예거(공수부대)를 ‘대공 부대원’이나 급강하 폭격기 스투카/슈투카의 통일되지 못한 표현으로 번역한 점은 옥의 티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