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사랑이다 - 로마.피렌체 In the Blue 18
백승선 지음 / 쉼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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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백승선 작가의 인 더 블루 시리즈를 재밌게 보고 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순간, 시리즈를 놓쳐 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시리즈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무려 18번째!). 다시 만난 인 더 블루 시리즈의 최신판은 로마 그리고 피렌체, 꽃의 도시 플로렌스라는 이름의 두 도시 이야기였다. 역시 한 번이라도 가본 곳에 대한 감상은 이런 것일까. 전자는 가봤지만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리고 후자는 기차표만 끊어 놓고 가보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을 다스리며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유럽의 어느 한 도시에 한 달 정도 머무르면서 그곳의 향취를 잔뜩 머금고 싶지만,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느 여행객처럼 나 역시 마찬가지로 수박겉핡기식 여행을 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고백한다. 명소를 찾아 부리나케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 이동. 그렇기에 백승선 작가의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을 보며, 아 맞아 나도 포로 로마노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었지 하고 공감하기도 했다. 콜로세움 기둥에 서서 저 멀리 보이는 개선문과 팔라티노 언덕이 아마 저쯤인가 더듬어 보기도 했었지. 현재의 순간에 과거를 회상해 보는 기분은 정말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감동이었다. 베르니니의 수작, 아폴론과 다프네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왠 일인지 로마에 근 일주일간이나 머무르는 동안 가보지 못해 아쉬웠다. 정말 대리석 속에 숨겨 놓은 캐릭터들을 찾아내는 것이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들의 사명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었던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상은 사진으로 봐도 여전히 감동으로 다가왔다.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은 마리아의 얼굴이 너무 앳되다는 말이나 인체 비율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들을 모두 뒤로 하고 비탄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 대리석상을 고작 25세의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는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난 500년 동안 입어온 스위스용병의 제복을 디자인한 것도 미켈란젤로였다니 스타일은 정말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바티칸 뮤지엄에서는 영어로 진행되는 어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라오콘>상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트로이 전쟁까지 올라가는 이야기(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당시 트로이의 제관이었던 라오콘이 신기누설로 신이 보낸 두 마리의 뱀에게 자신과 두 명의 아들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오랫동안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1506년 로마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역동적인 장면은 지금 다시 사진으로 봐도 여전했다.

 

여행의 첫 번째 재미가 볼거리에 우선한다면 두 번째 볼거리는 아마도 먹거리가 아닐까. 사실 여행하면서 그 나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 보니, 맛집에 가서 제대로 된 주문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요즘엔 해외여행 블로그들이 워낙 많아져서 그럴 일도 없었지만 내가 로마에 다녀온 십년 전만 해도 그런 고급정보들은 거의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로마 수도원에서 유학하던 사촌형 덕분에 판테온 근처의 로마에서 제일 간다는 젤라또 맛은 보았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싶다.

 

로마에 이은 다음 코스는 못가봐서 아쉬운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순전히 <열정과 냉정 사이>의 아오이와 준세이의 재회로 널리 알려진 두오모를 빼고는 아마도 말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으로 널리 알려진 우피치 미술관을 가보지 못한 게 너무 아쉽게 다가왔다. 백승선 작가의 지상(紙上) 투어로 대신 만족할 수밖에.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던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예술가들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비롯해서, 시뇨리아 광장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죽음으로 비롯된 근대 민족주의 운동과 종교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고향답게 그의 걸작 중의 하나인 거대한 다비드상을 비롯해서 수많은 조각가들이 남긴 아름다운 조각들을 책으로 보니, 꼭 피렌체에 가봐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최근에 콜린 맥컬로의 <로마의 일인자>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로마를 여행했던 그 무더운 시절이 떠올랐다. 유홍준 교수의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한편으로는 좋아하면서도(얼마나 더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행의 참맛은 ‘우연’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으로 다시 한 번 저자가 말하는 사랑의 도시 로마 그리고 조각의 도시 피렌체를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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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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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로마사의 향취에 흠뻑 빠졌었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 음모 그리고 전쟁을 배경으로 한 로마의 역사는 하나의 텍스트로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한때 역사학도였던 독자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책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나는 12년 전에 “SPQR”의 도시 로마를 방문했다. 시오노 나나미와 <마스터 오브 로마>의 저자 콜린 매컬로 모두가 찬양해 마지않는 진정한 로마의 일인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열변을 토하던 포로 로마노를 둘러보고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 이천년 전의 치열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뜨거운 오후를 보냈었다.

 

우리에게는 <가시나무새>로 더 알려진 콜린 매컬로 작가의 <마스터 오브 로마> 시리즈는 자그마치 사반세기에 걸쳐 출간된 역작이다. 400백년 가까이 진행된 공화국 로마 말기에서 내전기를 거쳐 제정 초기에 이르는 백여 년간의 격동의 시기가 <마스터 오브 로마>에서 다뤄지고 있다. 원로원이라는 과두정 시스템으로 지속돼온 공화정은 지속적인 팍스 로마나 정책으로 로마의 영역이 전 지중해를 거쳐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까지 도달하게 되면서, 좀 더 효과적이면서 능률적인 통치 시스템으로 탈바꿈할 시대적 요청에 직면하게 됐다. 하지만 전통과 법률을 중시하는 공화정 로마의 유력한 네 개의 가문을 중심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보수적인 인사들은 일련의 진보개혁적인 시도에 생래적 거부감을 표시해왔다. <로마의 일인자>의 전 시대에 그라쿠스 형제에 의해 시도된 일단의 개혁들은 그렇게 좌절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가장 먼저 로마의 일인자에 도전하는 로마인이라기보다 이탈리아인에 더 가까운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바로 개혁전도사의 입장에서 로마의 구원투수로 나서게 된다.

 

군 출신으로 산전수전 모두 경험한 라티움 출신의 마리우스는 재무관을 역임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로마의 일인자가 되기 위해 집정관(consul)의 대좌에 도전하고 싶지만, 공화정 로마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집정관에 도전할 수 있는 충분한 지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출에 도전하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다. 그의 부족한 점을 메워줄 수 있는 강력한 자원을 가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해서 정략결혼을 통해 상부상조하기로 합의한다. 고위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장녀 율리아와 사십이 훨씬 넘은 마리우스를 결혼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 결정이 훗날 로마의 진정한 프린켑스가 되는 손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미래를 결정했을 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콜린 매컬로는 마리우스와는 반대로 유력한 코르넬리우스 집안의 술라를 등장시킨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술라는 파락호 뺨치는 캐릭터로 등장해서 의붓어머니와 그녀의 정부 그리고 동성애까지도 서슴지 않는 그야말로 에피쿠로스 철학의 철저한 신봉자로 살아온 경력을 자랑한다. 나이 삼십에 되어서야 비로소 로마 정계의 발을 들이게 된 이 정치신인은 행운아(felix)라는 별명답게 부유한 두 명의 여인에게서 물려받은 상속재산과 마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카이사르 집안의 사위가 되면서 로마의 일인자 자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2,000년 로마 역사를 기술했다면, 콜린 매컬로는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로마 역사상 가장 멋진 영웅들이 등장해서 패권경쟁을 벌이는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으로 이행되는 기원전 1세기에 관심의 방점을 찍고 있다. 전자가 좀 더 주관적인 관점에서 서술을 했다면, 콜린 매컬로는 시력을 잃을 정도로 방대한 독서와 자료 조사를 통해 정밀하면서도 개연성 짙은 팩션을 만들어 내는데 정성을 다했다. 신자유주의 광풍이 불던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마스터 오브 로마>와 <로마인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가가 의도한 서사 구조와 내러티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온전하게 독자의 몫일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을 읽을 적에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던 수동적 관점에서 벗어나, 이천년 전 역사의 빈 공간을 채우는 상상력이라는 멋진 요소를 가미해서 새롭게 탄생한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 오브 로마>는 몇 가지 면에서 비교우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로, 시오노 나나미가 정치적 관점에서 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면 콜린 매컬로는 로마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그런 정치사적 사건들을 뛰어 넘어 로마 민중들의 삶에 자체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있다. 가령 예를 들어, 라티움 출신의 무장 마리우스가 카이사르 저택에 초대되어 만찬을 즐기는 장면을 보자. 콜린 매컬로의 묘사는 바로 우리 앞에 차려진 검소하면서도 정성껏 준비된 진수성찬을 직접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글쓰기로 독자를 현혹한다. 그 장면을 읽는 순간,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의 이부형제 보밀카르가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로마의 서민 아파트 지역인 수부라에 잠입해서 자객을 구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뉴욕 대표적인 우범지대 할렘의 바에서 킬러를 찾는 격이라고나 할까. 콜린 매컬로가 직접 당대 로마의 지도를 그릴 정도로 미로 같은 로마의 뒷골목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할 정도가 아닌가. 무시로 등장하는 팩션 속 로마 여인네들의 복식은 물론이고, 원로원 의원의 토가 자락에 대한 묘사에도 작가의 내공이 담뿍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작가의 역사의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미 알려진 역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노라고 사후에 선언하는 방식이라면, 콜린 매컬로는 주요 인물간의 유의미한 대화라는 소설 특유의 방법을 동원해서 독자를 설득한다. 누미디아 전쟁에 나선 똥돼지 메텔루스의 무능함과 이기심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면서 동시에 한 때 유구르타와 전우였던 마리우스의 전쟁판을 읽는 판세분석과 정치적 감각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뛰어난 식견을 칭송한다. 마리우스가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법과 17세 미만 청년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법안 그리고 언제나 로마군단과 함께 참전하면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되는 속주병들에 대한 처우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명확하게 지적한다. 이런 식으로 보통의 로마 인민과 동맹인 이탈리아 사람들을 계속해서 차별대우하게 되면, 로마가 지금까지 이룩한 팍스 로마나라는 공동운명체 개념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경고는 향후 전개될 로마의 정치 시스템 선택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책의 말미에 마리우스의 미래 정치구상을 본 술라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유능한 지도자가 기득권 세력의 토대를 흔들 수 있다는 작가의 서술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콜린 매컬로가 공들여 설계한 개연성을 뛰어넘는 핍진성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역사만으로는 팩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무슨 수로 이천년 전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수반한 개연성 넘치는, 그야말로 생선회처럼 팔팔 뛰는 스토리가 필요한 것이다. 가공된 것으로 보이는 술라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율릴라와의 러브스토리, 그리고 역시 시중에 떠돌던 소문을 픽업해서 창조된 것으로 보이는 술라의 미소년 애인 메트로비오스에 대한 이야기, 술라가 펠릭스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음의 천사’와 자해까지 무릅써 가면서 의붓어머니 죽음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부분들은 기존의 미스터리물들의 성과를 뛰어넘는 설정으로 보인다(정통 역사가의 기준에서 본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한 땀 한 땀 공들이는 술라의 치밀한 음모에 대한 핍진함이야말로 콜린 매컬로의 장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외에도 이부형제 유구르타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결국 배신하게 되는 보밀카르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권력은 그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다는 정치학 원론의 소설적 해석에 해당하는 스토리가 아닌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누미디아 전쟁을 질질 끌고 있는 메텔루스를 낙마시키기 위해, 수많은 클리엔테스(피호민)들을 동원해서 원로원에 메텔루스를 비방하는 청원 편지 공략을 성공시켜, 마침내 꿈에 그리던 집정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군인 마리우스가 아닌 정치가 마리우스의 작전도 일품이었다.

 

텍스트로서 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다양한 독법이 가능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로마의 일인자>를 로맨스 소설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정치학 입문서로, 혹자는 고대 전쟁사로, 혹자는 비교문화사로, 또 혹자는 배신과 음모 그리고 정략결혼을 매개로 한 스릴러 드라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이천년이 지나도 로마의 역사와 그 시대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드라마가 여전히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어질 <마스터 오브 로마> 대원정의 순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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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피
강희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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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으로 뽑은 ‘사설을 시작할게요’는 소설 <포피>의 화자이자 자신을 이주 여성(migrated female)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하는 혜진이 청자인 소설가에게 쓴 표현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쓰는 글 역시 사설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예의 선택이 오묘하기 짝이 없구나 싶다. 또 다른 사설이긴 하지만, 이 책의 저자 강희진 작가의 전작을 모두 읽었다. 이러다 이 작가의 팬이 되는 건 아닐까.

 

소재가 언제나 필요한 소설가는 키스방에서 “포피”라는 이름의 매니저로 활동하는 화자를 찾아 그녀가 들려주는 고달픈 과거와 현재를 사냥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 중의 하나는, 독자는 청자인 소설가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전혀 모르면서도 오로지 포피의 구술에만 의존해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유추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이고,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불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심리학 석사 과정에 있는 그녀지만 생래의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매매특별법(소설에서는 흘레금지법이라고 조롱한다)의 치외법권에 위치한 키스방 매니저로 일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혹자는 그녀에게 왜 과외 같은 비교적 건전한 아르바이트를 하면 안되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던 그녀에게 이 질문은 가혹하기만 하다. 과외를 받는 아이들이 첫 번째 과외를 받은 뒤에 바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뒤엣말로 그것을 들은 우리의 포피는 또 하나의 생채기를 가슴에 추가한다.

 

어지간히 평범한 이야깃거리로는 만족할 수 없던 소설가에게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해서, 중국에서 공안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대한민국에 안착해서 정규대학 교육을 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키스방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는 포피야말로 안성맞춤의 타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탈인간화된 관계는 화자(포피)와 청자(소설가)의 관계뿐만 아니라 키스방을 찾은 손님과 매니저라는 관계로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간다. 서사의 초장부터 이럴진대 과연 강희진 작가는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지 자못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기근과 그에 따른 아사가 북한을 휩쓸던 시절, 죽음의 공포는 늘 주인공 포피에 근처에 서식하고 있었고, 중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안착하고 나서도 예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노라고 그녀는 소설가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가 넘쳐흐르는 자본주의 천국이라 불릴 만한 공간에서의 삶은 과연 축복이었을까. 한국에서 갈고 닦은 심리학 전공과 타고난 말발로 엘리트 워너비들을 격파할 만한 실력이지만,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부끄러움과 초라함을 극복하기란 난망하기만 하다. 그리고 포피(책을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양귀비/아편을 뜻하는 poppy란 단어다)는 구순기 시절부터 진행된 어머니의 편애에 기인한 결핍과 이루어질 수 없는 막내삼촌과의 사랑 때문에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는 상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포피는 엘리트 여성답게 키스방에 장식되어 있는 명화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선보인다. 키스방과 왠지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의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키스>가 의미하는 남성성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살바도르 달리의 늘어지는 이미지가 주는 죽음의 공포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에곤 실레 도발적인 그림에 이르기까지 순결하면서 퇴폐적인 이미지의 조합을 곁들인다. 자신의 닉네임이 의미하는 포피(양귀비)라는 소재 역시, 포피 가족이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탈출해서 한국에 정착하기까지 절대적인 도움을 준 기표에 해당한다. 그리고 닉네임이 가진 또 다른 사전적 의미도 되새겨 볼 만하다.

 

소설 <포피>에서 강희진 작가는 마치 요즘 대세인 쿡방에 출연하는 마스터 쉐프처럼 이주 여성, 북한의 아사, 키스방 매니저, 구순기 시절의 결핍, 명화에 등장하는 상징들이라는 맛깔스러워 보이는 구비된 소설 재료를 가지고 현란한 요리 솜씨를 보여준다. 그런데 결말로 향하는 어느 순간, 음식의 맛(결정적 서사)이 실종되어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소설의 특성상 무언가 획기적인 결말이나 반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모한 독자의 심리는 쉽게 그동안 목도한 흥미진진하고 쫄깃한 전개에 따른 기대의 방향전환에 실패한 걸까. 어떤 점에선 작가가 제시한 이슈들에 대해 당신(독자)의 입장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다른 것들은 모르겠고 오로지 리니지 서버의 내복단 투쟁만 기억에 남은 <유령>으로 출발해서, 시대물이었던 <이신>을 거쳐 다시 현재로 귀환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 그 중에서도 이주 여성이라는 소수에 대한 예민하면서도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강희진의 작가의 소설적 진화를 기대하며 소설 <포피>에 대한 부족한 감상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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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식스 카운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글 그림,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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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신문 기사의 추천을 보고 지난 주에 읽게 됐다. 그런데 책의 실물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그냥 그런 그래픽 노블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너스 자료까지 해서 자그마치 500쪽이 넘는 분량의 대작이었다. <농장 이야기>, <유령 이야기> 그리고 <시골 간호사>라는 기본 세 가지 스토리라인에 그래픽 노블의 번외편에 해당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더해 모두 5개의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건 마치 대하소설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모두 과거와 현재를 매개로 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나처럼 좀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먼저 책의 447페이지에 나온 가계도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제프 르미어 작가의 의도대로 순서대로 읽으면서 등장인물을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래픽 노블은 어머니 클레어가 죽은 뒤, 켄 삼촌의 농장에 얹혀사는 레스터 파피노의 상상으로 시작된다. 문득 왜 <에식스 카운티>에 나오는 이들은 하나 같이 상처 입은 영혼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레스터는 병상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우리 영웅’이라는 말에 슈퍼히어로 코스튬을 포기하지 못한다. 죽어가는 누이동생이 유언으로 부탁한 레스터를 돌봐 달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한 삼촌 케니 역시 마찬가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달리고 있는 레스터를 다룰 줄 몰라 쩔쩔 매는 중년 남자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 있다.

 

그리고 한 세대를 뛰어 넘어 <유령 이야기>에서 비로소 그들 삶의 비밀이 조근조근하게 소개된다. 아이스하키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스하키에 대한 캐나다 사람들의 사랑이 바로 루와 빈스 르뵈프 형제 간의 이야기에서 재현(representation)된다. 후기에서 제프 르미어 작가가 썼듯이 형제애, 배신 그리고 아이스하키가 루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두 번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소재다. 한 때 도시에서 날리던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루와 빈스 형제의 부침을 제프 르미어는 잔잔하게 그려냈다. 그들은 한때 죽고 못 살 정도로 우애가 깊은 형제였지만 루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형제간에 의절하고 사반세기를 떨어져 지냈게 되었다. 촉망 받는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빈스는 고향 에식스 카운티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루는 부상으로 아이스하키에서 은퇴하고 전차 기사로 살아왔다. 다시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끔찍한 교통사고였다(삶의 반전을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을 교통사고라는 클리셰이로 처리한 것이 좀 아쉬웠다).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동생 빈스와 조카 손주 지미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루. 르뵈프 형제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의미에서 가족은 세상의 풍파를 헤쳐가게 만들어주는 울타리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애증이 교차하는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시골 간호사>에서는 독자는 몰랐지만, <에식스 카운티>의 병들었거나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킨 시골 간호사 앤 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간호사 앤은 루 르뵈프를 돌보고 있으며, 그의 조카 손주 지미 르뵈프를 알고 있으며, 레스터의 어머니 클레어를 간호하기도 했었다.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는 레스터를 위로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렇게 이타적인 삶을 사는 그녀이지만, 남편 더글라스 켄빌을 잃고 하나 있는 아들 제이슨과도 소원하다. 그녀를 지탱해주는 건 할머니 마거릿 앤 수녀가 전해준 신앙심 정도가 아닐까. 그녀가 에식스 카운티에서 최고령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할머니를 찾아가 나누는 대화에서 다시 두 세대를 점프해서 이야기의 시원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정도로 시공을 초월한 정밀한 이야기 서사 구조와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가공해낸 제프 르미어 작가의 내공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밀하다기 보다 조금은 거친 톤의 제프 르미어 작가의 그림과 서사에는 울림이 배어 있다. 삶의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보통의 삶 속에도 그렇게 깊은 비밀이 자리 잡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긴 여정 끝에 만나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내 삶에서 어느 순간 놓쳐 버린 시간과 다시 재회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언제나 그렇듯 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와의 대면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랑으로도 덮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우리네 삶이 품은 내면의 이야기를 제프 르미어 작가는 <에식스 카운티>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처음에 등장하는 <농장 이야기>에서 하늘을 나는 레스터의 모습을 보고 흔해 빠진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마벨 코믹 스토리가 아닌가 하는 나의 우려는 서사에 얽힌 주인공들이 차례로 나오면서 저절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검은색과 흰색의 여백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제프 르미어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밀도 높은 서사로 이루어진 에피소드들이 차례로 채워지면서 <에식스 카운티>는 비상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삶의 진실들과 마주하게 됐을 때, 과연 우리는 그 사실을 선뜻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역시 고수 답게 작가는 사전에 그런 떡밥들을 모처에 조심스럽게 심어 두었다. 그리고 수확기에 농부가 그동안 정성 들여 키운 작물을 거둬들이듯, 작가는 아름답게 영근 이야기들로 대미를 장식한다.

 

<에식스 카운티>가 보여주듯, 우리네 삶은 마치 비포장도로를 운전하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울퉁불퉁한 그런 길을 가듯, 살다 보면 우리네 삶에는 예상치 못했던 상처도 있을 수 있고 배신과 모략을 비롯해서 상상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생전 아이라고는 보지도 못한 중년의 남자가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십대 소년을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듯이 말이다. 바로 그런 순간에 짜증을 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일탈과 예상하지 못한 삶의 변수야말로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삶의 진실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재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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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었던 모든 것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변선희 옮김 / 박하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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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의 표절문제로 문학판이 어수선하다. 답답한 심정에 블로그에 글을 쓰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타고난 게으름 탓에 미루다가 결국 쓰지 못했다. 나 같은 보통의 독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역시나 독서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이라는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작가의 짧은 소설 <사랑이었던 모든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목에서 들어나는 사랑은 과거 시제이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소설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제 막 13년을 만난 여자 친구와 극적인 이별을 앞두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아마도 40) 다니는 이제 막 자신이 아니면 안되는,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도 그 일보다 여자 친구와의 관계 개선이 우선이 아닐까 하는 독자의 노파심은 다니의 과거를 들여다 보며, 자연스레 관심사에세 멀어진다. 왜소증을 앓는 주인공의 핸디캡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다니의 어머니가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 의식적으로 불렀지만, 세상은 그의 외모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자신을 돌볼 생각이 전혀 없던 형 때문에 가출을 결심하는 열세 살의 다니. , 그전에 더 극적인 만남이 하나 더 있었구나.

 

열 살 때 편도선 수술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다니는 향후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마르틴과의 숙명적 만남을 갖는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을 가지고 3년 뒤, 카프리 섬으로 가는 페리에서 이번에는 조지라는 자신보다 딱 반세기를 더 산 남자와 만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에서 진주 같은 아니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소년이 자라 실종된 아이들을 찾는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과연 삶에서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그런 만남과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르틴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다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나의 행복의 현재 좌표에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다니가 마주한 연인과의 이별 문제 그리고 당장 자신에게 맡겨진 실종된 아이를 찾아야 하는 긴박감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교차되며 독자를 사유의 미로 속으로 인도한다.

 

다니에게 왜 사랑은 모두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일로 간주되는 걸까 하는 생각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궁금했다. 오래 전에 어른이 되었지만, 박탈당한 유년 시절의 추억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싶었던 일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았고, 먹고 싶었던 것도 많았던 그 시절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부재 탓은 아니었을까. 그래 사랑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일들이 있을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다니에게 얼치기 심리 분석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친 이유들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타인의 삶에 견주어 나의 그것을 반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어느 정도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

 

십 수 년 전에 들렀던 카프리 여행에서 고생도 단단히 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카프리 섬에 갔었지 하며 미소를 지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다니처럼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촘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여전히 그 때 시간이 너무 없어서 사지 못한 수제 샌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곱씹어 봤다. 그 때 만약에 그 수제 샌들을 샀다면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으려나. 소설처럼 세상만사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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