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디 - 사랑의 연대기
미즈바야시 아키라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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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견인도, 애묘인도 아니다. 그리고 개도 먹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개를 먹는 사람들을 폄훼할 생각도 없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도 그리고 동물을 먹는 사람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보면, 가끔 엄동설한에 꽁꽁 무장하고 고양이밥을 챙겨 주러 나온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우리와 함께 사는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참 이뻐 보인다.

 

이 책 <멜로디>는 일본 출신의 18세기 프랑스문학 전문가이자 일본의 프랑스 문학 선생님 미즈바야시 아키라가 자신의 생에서 12년을 함께한 가족 멜로디에 대한 추억을 담은 사랑의 연대기다. 보통의 이야기들은 시간의 연대순을 따라 가기 마련인데, 작가는 마지막을 맨 앞에 배치했다. 어린 나이에 프랑스 문학과 언어에 매료가 되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프랑스로 떠나 경계인의 삶을 산 인문학자가 남긴 사랑의 연대기다.

 

저자는 근대 철학의 시조라 불리는 데카르트의 기계적 동물론에 반대한다. 그의 이러한 반대는 자신의 가족이었던 골든레트리버 멜로디와 함께 하는 삶에서 체득한 것으로 데카르트는 물론이고 그의 계승자였던 말브랑슈가 말한 동물에게는 지성도, 영혼도 없다는 견해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인간의 천성을 넘어 동물의 자연권을 주창한 루소의 편에서 동물들이 인간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 가야한다는 미즈바야시 선생의 주장이 내게는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멜로디의 입양, 성장, 출산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통해 저자가 진심으로 멜로디를 동물이 아닌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8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을 함께 하지 못했듯, 미즈바야시 선생 역시 사랑하는 멜로디의 임종을 함께 하지 못했다. 나카노 거리를 활보하길 즐기고, 주인의 귀가를 진심으로 반기며, 그 좋아하는 먹이도 주인과 함께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극도의 절제력을 발휘해서 참아낸 기다림의 미학이 미즈바야시 선생과 멜로디의 관계를 통해 이 에세이에서 멋지게 재현되었다. 인간 세계의 일로 바쁜 와중에서도, 멜로디의 마지막 가는 길을 준비해 과정은 개인적으로 읽기가 쉽지 않았다. 간접 체험을 하는 독자도 이럴진대 하물며 멜로디를 가족으로 받아 들이고 12년을 함께한 미즈바야시 선생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에세이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 중의 하나는 프랑스 어를 하는 지인들과 함께 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멜로디를 초대해서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기록이었다. 즐거움으로 가득한 공간에 한동안 소외된 자신의 또 다른 가족을 초대한 미즈바야시 선생의 용기야말로 진정 함께하는 삶을 위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또 멜로디를 마지막으로 보내며, 사랑하는 미셸에게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이야기들을 글의 힘을 빌어 하는 장면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부국어인 프랑스 어를 사랑하고, 가족이었던 멜로디를 가슴에 묻은 인문학자가 남긴 사랑의 연대기는 그래서 더 절절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이 책은 미즈바야시 아키라 선생이 프랑스 어로 쓴 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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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그랜타>라는 문예잡지가 있는 모양이다. 보통의 경우 온라인 무료 서비스를 하는데 여기는 철저하게 유료 사이트로 운영 중에 있는 모양이다. 온라인 기사를 보려면 회원 가입하고 12파운드인가를 내라고 하는데 그 돈이면 책을 한 권 더 사겠다. 그래도 구글의 도움을 받아 십년 주기로 발표하는 “영국 최고의 젊은 작가들” 목록을 참조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선정된 작가들이 모여 찍은 사진을 봤는데 그런 기획이 참신했다. 왜 우리나라는 이런 기획조차 못하는 걸까. 한국 문학이 맨날 위기라고 하는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단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랜타>에서는 1983년 이래 매 십년 주기로 40세 이하 20명의 신진 작가들을 선발해서 소개해 오고 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인터넷 현대영국작가사전을 참조해서 나만의 목록을 만들어봤다. 그동안 모두 7명의 작가의 책 8권이 소개되었는데 그중에 세 권은 또 절판되어 구할 수도 없게 됐다. 이들은 모두 영어로 작가 수준의 책을 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인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국인 영국은 물론이고, 호주와 역시 세계 최고의 시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미국도 아우를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이번에는 모두 20명 중 12명의 여성작가들이 대거 포진하면서 다수를 차지한 점이 눈에 띈다. 그 외에도 중국, 나이지리아, 가나, 미국, 방글라데시 그리고 파키스탄이라는 전 세계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국적군의 형세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십년 전인 2003년에 이름을 올렸던 제이디 스미스와 애덤 써웰이 다시 등장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이번 심사위원으로는 그랜타 리스트에 두 번 올랐던 애덤 마스-존스, 가즈오 이시구로 그리고 앨 케네디가 심사를 맡았다. 그 외에도 비평가 스튜어트 켈리와 소설가 로메시 구네세케라가 포함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명단이 발표되고 나서 말들이 많았지만, 다음의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 40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제외된 점도 아쉽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차이나 미에빌(China Miéville), 모신 하미드(Mohsin Hamid), 레이나 다스굽타(Rana Dasgupta), 히샴 마타르(Hisham Matar), 스칼렛 토마스(Scarlett Thomas).

 

이 중에서 내가 사서 읽은 책은 샤오루 궈의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이고, 어제 헬렌 오이예미의 <이카루스 소녀>를 사들였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적게 찍은 책들이 잘 팔리지 않으면 바로 바로 절판시켜 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책은 나왔을 때 바로 사야 하나. 이제 도서정가제 때문에 구간이라고 해도 할인율이 없기 때문에 천상 중고서점을 이용하는 수밖에. 하긴 새책도 중고서점으로 사지.

 

다음은 그랜타 리스트에 오른 작가 중에 최근에 나온 작가 애덤 써웰의 신간에 대한 이야기다. 제니 페이건의 책 <파놉티콘>은 알고 있었지만, 애덤 써웰이 책 <나의 포르노그래픽 어페어>란 희한한 제목을 달고 출간됐다고 한다. 원제는 <Politics>인데 어쩌나 이런 제목을 가지게 되었을까. 원서의 표지도 양파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사진인데 반해 국내 출간작의 표지는 상당히 도발적이다. 게다가 성인인증까지 받아야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야하길래!

 

자그마치 2003년에 나온 책이라고 하는데 13년이 지나도 아직 우리가 소화해 내기란 역부족인 모양이다. 나는 지금 미즈바야시 아키라의 <멜로디>를 읽고 있는데 아무래도 애덤 써웰의 책부터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오늘 중으로 주문장을 날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숲에올빼미란 출판사에서 거진 2년만에 나온 신간인데 정말 소개가 안된 모양이다. 세일즈 포인트를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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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싱싱한 정보 아주 좋습니다. 이 글 찜합니다. ^^

레삭매냐 2016-03-18 17:57   좋아요 0 | URL
싱싱하다니요 ㅋㅋㅋ
자그마치 3년 전의 정보랍니다.

제가 요즘 새로 관심을 튼 부분에 대해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거지요.

오늘 결국 애덤 써웰의 소설 질렀습니다.
421원 들여서 샀습니다.
 
불새 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이야
바티스트 보리유 지음, 이승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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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니 페이건의 <파놉티콘>과 오스카 로메로 주교의 전기를 필두로 해서 아르테에서 요즘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반갑다. 이 책 역시 저자인 바티스트 보리유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게 된 책이다. 내가 무척 애정하는 중고서점에 이 책이 있다는 걸 알고서는 바로 달려가서 사서 읽기 시작했다. 첫날 절반가량 읽어서 이틀이면 다 읽을 줄 알았는데 변수 덕분에 열흘이나 걸려서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저자는 책읽기 좋아하고 마이클 잭슨의 춤을 멋지게 출 줄 아는 방년 27세의 의사 선생 바티스트 보리유로, 그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모아모아 만든 책이 바로 <불새 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이야>의 형태로 세상에 그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주로 응급실에 서식하는 젊디젊은 인턴 선생은 어린 시절 퐁디셰리에서 우연히 만난 백작부인의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될 결정을 내렸노라고 회고한다. 어릴 적 결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데, 이런 책을 낼 정도의 뛰어난 문장력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라면 역시나 어린 시절부터 비범했던 모양이다.

 

죽음과의 최전선에 싸우는 바티스트 선생은 어느날 호스피스 병동의 불새 여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아마 비슷하게 1년 전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낸 체험에서였을까? 급박한 시한부 인생을 맞이하게 된 불새 여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먼저 환자에게 죽음과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슈퍼인턴 아멜리와 애정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중인 블랑슈, 간병인, 간호사 그리고 동료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갖가지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수집하기에 이른다.

 

표지에도 당당하게 나와 있는 것처럼 레개 사자머리 인턴은 어머니가 남겨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유언을 당당하게 집행하는 투사다. 저자는 호스피스 병동과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갖가지 질병과 사건사고로 응급실을 찾는 인내심 없는 환자들을 미소라는 치명적 무기와 빼어난 유머감각으로 환대하는 멋쟁이다. 도대체 의사의 말이라고는 들어 먹지 않는 고집불통 환자들에게는 나름대로 강경하게 대처하고, 동료 슈퍼인턴 아멜리의 인종차별을 묵과하지 않다가도 병실에서 자지러지게 울어제끼는 아이들을 상대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남자로 변신하기도 한다. 과연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상대하면서 저자와 같은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저자는 죽음과 싸우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의사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연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속삭여준다, 아주 부드럽게. 겉으로 보기에 냉정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이들도 사실은 그 누구보다 죽음이 두려워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렇게 위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정말 어이없는 사고로 죽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한편,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사람의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일 역시 돈에 좌지우지된다는 부조리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금전으로 환산되어지는 것이야말로 비극의 원천이 아닐까. 너무 현실적이어서 슬픈 이야기들이 응급실에 쇄도하는 환자들처럼 바티스트 보리유 작가의 손끝에서 피어난다.

 

또한 보리유 작가의 슈퍼인턴 동료 아멜리처럼 아무런 죽음의 징후가 보이지 않던 사람도 돌연사라는 이유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기도 했다.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죽은 이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야기에도 공감이 갔다. 짐작은 했지만, 아이슬란드 화산사건으로 레이캬비크에 묶여 있다는 불새 여인의 아들 토마 역시 비슷한 케이스였다.

 

불새 여인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보리유 작가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셰에라자드가 살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우리의 보리유 작가는 순전히 이타적인 이유에서 불새 여인들에게 비극을 성공적인 생존기로 바꾸는 주술을 선사한다. 죽어가는 불새 여인에게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엿보아서였을까? 불새 여인 역시 죽은 아들의 환영을 보리유 작가에게 투영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 좀 살아본 대선배로서 인생을 즐기면서 살라고 충고한다. 오늘 당장 죽을 지도 모르는 불새 여인의 조언은 그래서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숱한 죽음을 체험하면서 피폐해지는 영혼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는 막대사탕을 줄기차게 빨아 대고, 동료와 함께 럼주를 곁들인 ‘위장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 신나는 레이브 파티를 즐기기도 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것을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 인류는 하나라고, 모든 것은 하나이며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보리유 작가의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에 남겨 주신 말이야말로 <불새 여인>의 핵심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자식을 통해 계속 살아 있다는 그 표현의 울림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참 오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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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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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전쟁으로 태어난 도시다. 아편전쟁이라는 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전쟁으로 잉태된 도시다. 그런데 그전에도 홍콩이라는 도시가 존재했던가? 모르겠다. 대영제국이 전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 싱가폴과 더불어 영국이 가진 아시아의 두 개의 진주라 불리던 홍콩이 소설 <피아노 교사>의 공간적 배경이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라는 재니스 윤경 리의 첫 번째 소설인데, 미국에서 반응이 좋았나 보다. 최근 두 번째 작품인 <국외거류자들>이라는 소설도 나왔다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창래 선생에게 사사받았다고도 하지 아마.

 

<피아노 교사>는 클레어라는 영국 출신 여성이 남편 마틴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해 오면서 생기는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홍콩에서도 아주 부유한 상류층 빅터와 멜로디 첸의 딸 로켓의 피아노 교사가 되면서 소설은 가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클레어에게 홍콩 사교계는 별세계 같이 느껴질 따름이다. 영국과는 차원이 다른 아마라 불리는 하인들을 거느리고 빨래나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 대신 우아한 분위기의 클럽에서 차와 다과를 즐기는 유한유인들의 모습이 클레어에겐 낯설기만 하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외지에 둥지를 튼 이들은 자기들끼리 문화를 즐기는 모양이다. 수없이 벌어지는 디너파티를 비롯해서 각종 티파티 등에서 부지런히 정보를 교환하고 만남을 지속한다. 클레어는 빅터의 집에서 운전사로 일하는 윌 트루스데일을 만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윌과 불확실한 사랑에 빠지면서 홍콩의 터주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윌이 전쟁 중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하나씩 알게 된다.

 

시간은 십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41년 9월, 유럽대륙은 이미 전쟁 중에 있었고 아시아에서도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홍콩의 유력자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연일 파티를 열고 산해진미와 칵테일을 즐기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혼혈 트루디 리앙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존재했다. 소설의 윌과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사랑에 빠지게 된 트루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에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교모임에서 이뤄지는 온갖 가십과 쾌락을 즐기기에도 시간이 없을 지경이다. 어쩌면 그런 그녀에게 영국 출신의 도덕주의로 철저하게 무장된 신사 윌은 새로운 도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트루디의 연인으로 홍콩 사교계에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윌과 트루디의 사랑놀음은 곧이은 전쟁으로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참혹했던 전쟁기간에 대한 서사는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으로 기선을 제압한 일본군이 노도와 같이 홍콩으로 몰려들면서 스러져 가는 제국의 진주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정복되었다. 흥청망청 식민지 생활을 즐기던 지배층 외국인들은 적성 국가의 시민이자 일본군의 포로로 간주되어 엄격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주인공 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와중에 캐나다군 출신의 네드 영이라는 젊은이까지 거두게 된 윌은 잠시 홍콩의 호텔에 억류되었다가 스탠리 포로수용소로 이송된다. 이타주의에 불타는 이 영국 신사는 일본군의 폭압적인 통치에 순응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애쓰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재니스 리 작가가 소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 인격의 본질은 평소가 아닌 그런 절박한 위기상황에서 빛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런 시절에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인 것 다름 아닌 선교사들이었노라고 작가는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포로수용소 생활은 윌과 트루디에게 연단의 시간이었다. 포로수용소 밖에 남기를 선택했던 트루디는 일본군 헌병대 사령관 오츠보의 언어 교사이지 정부가 되어 윌에게 갖가지 편리를 제공한다. 고결한 도덕심을 가진 윌은 자신의 연인 트루디가 자신 삶의 방식을 비난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에 고뇌하기 시작한다. 그가 오츠보와 트루디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어쩌면 그들의 관계는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언제나 핵심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분위기를 바꾸는데 있어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던 트루디 역시 숙명을 피해갈 순 없었던 모양이다. 여덟살 때 자신을 버리고 종적을 감춘 자신의 어머니처럼 임신 중이던 트루디 역시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야기는 다시 전쟁이 끝나고 8년이 지난 1953년의 홍콩으로 돌아와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윌을 만나 비로소 사랑에 눈뜬 클레어의 삶을 조명한다. 윌과 클레어는 함께 하지만 윌은 자신이 사랑했던 ‘이국적 전갈’ 여인 트루디를 잊지 못한다. 바로 옆에 있는 ‘영국 장미’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걸까. 부유한 멜로디 첸의 집 피아노 교사로 일하면서 주인의 스카프와 값비싼 장신구를 좀도둑질하던 클레어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누군가에게는 인습일 수도 있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당당한 여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윌이 전쟁 중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면서 모든 일이 끝난 뒤 영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홍콩에서 토착민화된 삶을 선택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재니스 리는 좀처럼 잘 다뤄지지 않는 주제인 태평양 전쟁 중의 홍콩 라이프를 발굴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서구인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솜씨 있게 채색하고 교정하는 실력도 대단하다. 한편으로는 서민계급의 애환 보다는 엘리트계급주의적인 색깔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첫 작품이 가진 한계로 생각해 본다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전쟁 중에 모두가 눈이 벌게져서 찾던 중국이 보유한 미지의 보물 크라운 컬렉션이라는 가상의 설정(진짜 있었던 이야기였던가)도 소설의 미스터리한 요소를 극대화 시키는 점에 있어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 중 부역자라 불릴 정도로 오츠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상유지를 넘어 오히려 거부를 쌓은 빅터 첸의 인생유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역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에 옥스퍼드 유학으로 훌륭한 영어실력을 발휘하면서 그때 그때마다 카멜레온 같은 적응력으로 난세를 헤쳐온 입지전적 인물로 등장하는 빅터 첸의 사연이 흥미롭다. 트루디의 사촌이자 절친으로 역시 전쟁 중에 죽은 도미닉 웡의 존재도 동서양의 중심에 선 홍콩의 정체성 만큼이나 이채롭다. 중국인이면서 서구식 사고방식으로 생활하지만 정작 서구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진 도미닉은 호시절에는 트루디와 함께 사교계의 쌍두마차로 활약하지만 전쟁 중에 오츠보와 맺게 된 불행한 인연으로 파멸에 도달하게 된다.

 

소설을 읽던 중에 트루디가 윌에게 말한 “빛이 오면 모든 것이 바뀌잖아”라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빛 속에 있다고 생각했던 트루디의 삶은 전쟁 동안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늘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도덕적 양심주의자 윌은 자신과 함께 포로수용소로 들어오라고 권하지만, 트루디의 선택을 달랐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빛 속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걸까.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나서 보이는 트루디의 행보를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홀로 남은 윌 트루스데일은 전쟁 통에 살아남아 옛 애인을 잊지 못한 채, 홍콩을 떠날 수도 그렇다고 남을 수도 없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노 교사>의 진정한 매력은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절이 개인에게 강요한 변신과 그 와중에 보여주는 고결한 영혼의 아름다움, 그리고 동시에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가는 삶에 대한 조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주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금세 다 읽을 수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선순위 독서 때문에 좀 밀리긴 했지만,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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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 속의 여우
에프라임 키숀 지음, 정범구 옮김 / 삼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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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부터 읽던 에프라임 키숀의 <닭장 속의 여우>를 드디어 다 읽었다. 국민들의 선량을 뽑는다는 스무번째 총선이 이제 한달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이스라엘에 위치한 킴멜크벨이라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촌마을에서 벌어지는 정치활극이 전혀 색다르지 않게 다가왔다. 유머 넘치는 이스라엘 출신 작가는 화해와 조정이라는 정치의 본분에서 벗어나 분열을 넘어 난투극에 달하는 정치희극을 연출했지만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정치는 소설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의 막장드라마다. 향후 4년간 우리의 삶을 규정할 국회의원선거를 견주어 볼 때,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을 지경이다.

 

에프라임 키숀은 우선 아미츠 둘니커라는 50년 정치경력을 자랑하는 화려한 정치가-킴멜크벨 마을에서는 ‘엔지니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정치공학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적절한 별명도 없을 것 같다-를 전면에 배치한다. 그리고 그의 수석보좌관으로 언젠가 자신의 상전의 뒤를 이어 정치가의 길을 걷겠다는 야심을 키우고 있는 브레인이자 비서 체프가 차례로 등장한다. 대중을 상대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엔지니어 양반은 연설하기를 무럭 즐기지만, 어쩔 수 없는 건강상의 이유(과다한 흥분으로 인한 잦은 심장 발작)로 당분간 중앙정치계에서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요양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에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의 마을 킴멜크벨은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문제는 아무런 정치색이 없던 평화로운 마을 킴멜크벨에 취미삼아 정치를 도입한 것이 엔지니어의 치명적 실수였다. 이발장이 살만 하시도프와 구두장이 체마크 구레비치 패거리로 나뉘어 이권을 쥐고 마을을 좌지우지할 읍장선거에 모든 마을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어 이전투구를 벌이는 과정을 에프라임 키숀은 정말 재밌게 그려냈다. 동시에 신정국가를 추구하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의 나라답게 백정 야콥 스파라디가 랍비 행세를 하며 매사에 사사건건 개입하면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고대 로마에서는 공직이 사회지도층의 명예로 받아 들여져 심지어 보수도 받지 않고 자기 돈을 들여가며 다리를 보수하고 도로를 까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료제의 도입으로 공무에 전념하는 직업이 발생하고,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다수의 권리를 위임받아 통치행위를 담당하게 되면서 권력의 집중에 따른 특권과 이권다툼이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일 것인데, ‘엔지니어’들은 자신의 본업에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본말전도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에프라임 키숀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소설에서 예리하게 저격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엔지니어 둘니커의 훌륭한 가르침에 따라 치열한 읍장선거에 돌입하게 된 이발장이와 구두장이는 조금씩 엔지니어화 되가면서, 마을 사람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선거전에 이용한다. 작은 마을 킴멜크벨 마을의 예산을 고려해 볼 때 전혀 가능하지 않은 공짜여행을 남발하고, 건조한 땅에서 우물을 파겠다고 수선을 피우고 심지어 텔아비브에 유력자에게 줄을 대서 전기까지 끌어 오겠다는 선거공약들이 난무한다. 어떤가? 우리가 지금 거리와 매스컴을 통해 보고 있는 현실과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 세태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엔지니어들의 공약(公約)은 그렇기 때문에 공약(空約)일 따름이다. 어떻게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지킬 수 없는 공허한 약속만 외쳐 대다가 한 달 남짓한 선거기간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질 뿐이다. 이런 희극은 4년마다 혹은 5년마다 되풀이된다. 헤겔은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인물은 두 번씩 등장한다고 했는데(아마도 희극과 비극의 방식으로?), 우리는 주기적으로 이런 쇼를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여겨 본 점 중의 하나는 역자가 한때 실재로 엔니지어링(정치)을 담당했던 정범구 전 의원이라는 사실이다. 역자가 밝혔듯이, 히브리어로 쓰인 작품의 독일어판을 역본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현실정치에서 한발 물러선 타자의 시선에서 번역한 작품이라 그런 진 몰라도 신뢰감이 갔다. <개를 위한 스테이크>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 등의 작품에서 발군의 유머 실력을 보여준 에프라임 키숀은 이 작품에서도 독자의 허를 찌르는 설정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엔지니어는 자신이 저지른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와 접촉할 수 있는 트럭운전사를 매수해서 마을을 탈출하려다 이발장이의 포로가 되는가 하면, 체프 역시 구두장이의 딸과 불장난 끝에 샷건 매리지(속도위반결혼)를 치르게 되는 장면도 압권이었다. 백정이 자신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문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책을 재밌게 읽으면서도 끝까지 입맛이 씁쓸했던 건 너무나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해낸 작가의 통찰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총선이 29일 남았다. 이번에는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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