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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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전쟁으로 태어난 도시다. 아편전쟁이라는 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전쟁으로 잉태된 도시다. 그런데 그전에도 홍콩이라는 도시가 존재했던가? 모르겠다. 대영제국이 전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 싱가폴과 더불어 영국이 가진 아시아의 두 개의 진주라 불리던 홍콩이 소설 <피아노 교사>의 공간적 배경이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라는 재니스 윤경 리의 첫 번째 소설인데, 미국에서 반응이 좋았나 보다. 최근 두 번째 작품인 <국외거류자들>이라는 소설도 나왔다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창래 선생에게 사사받았다고도 하지 아마.

 

<피아노 교사>는 클레어라는 영국 출신 여성이 남편 마틴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해 오면서 생기는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홍콩에서도 아주 부유한 상류층 빅터와 멜로디 첸의 딸 로켓의 피아노 교사가 되면서 소설은 가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클레어에게 홍콩 사교계는 별세계 같이 느껴질 따름이다. 영국과는 차원이 다른 아마라 불리는 하인들을 거느리고 빨래나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 대신 우아한 분위기의 클럽에서 차와 다과를 즐기는 유한유인들의 모습이 클레어에겐 낯설기만 하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외지에 둥지를 튼 이들은 자기들끼리 문화를 즐기는 모양이다. 수없이 벌어지는 디너파티를 비롯해서 각종 티파티 등에서 부지런히 정보를 교환하고 만남을 지속한다. 클레어는 빅터의 집에서 운전사로 일하는 윌 트루스데일을 만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윌과 불확실한 사랑에 빠지면서 홍콩의 터주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윌이 전쟁 중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하나씩 알게 된다.

 

시간은 십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41년 9월, 유럽대륙은 이미 전쟁 중에 있었고 아시아에서도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홍콩의 유력자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연일 파티를 열고 산해진미와 칵테일을 즐기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혼혈 트루디 리앙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존재했다. 소설의 윌과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사랑에 빠지게 된 트루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에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교모임에서 이뤄지는 온갖 가십과 쾌락을 즐기기에도 시간이 없을 지경이다. 어쩌면 그런 그녀에게 영국 출신의 도덕주의로 철저하게 무장된 신사 윌은 새로운 도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트루디의 연인으로 홍콩 사교계에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윌과 트루디의 사랑놀음은 곧이은 전쟁으로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참혹했던 전쟁기간에 대한 서사는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으로 기선을 제압한 일본군이 노도와 같이 홍콩으로 몰려들면서 스러져 가는 제국의 진주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정복되었다. 흥청망청 식민지 생활을 즐기던 지배층 외국인들은 적성 국가의 시민이자 일본군의 포로로 간주되어 엄격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주인공 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와중에 캐나다군 출신의 네드 영이라는 젊은이까지 거두게 된 윌은 잠시 홍콩의 호텔에 억류되었다가 스탠리 포로수용소로 이송된다. 이타주의에 불타는 이 영국 신사는 일본군의 폭압적인 통치에 순응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애쓰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재니스 리 작가가 소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 인격의 본질은 평소가 아닌 그런 절박한 위기상황에서 빛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런 시절에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인 것 다름 아닌 선교사들이었노라고 작가는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포로수용소 생활은 윌과 트루디에게 연단의 시간이었다. 포로수용소 밖에 남기를 선택했던 트루디는 일본군 헌병대 사령관 오츠보의 언어 교사이지 정부가 되어 윌에게 갖가지 편리를 제공한다. 고결한 도덕심을 가진 윌은 자신의 연인 트루디가 자신 삶의 방식을 비난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에 고뇌하기 시작한다. 그가 오츠보와 트루디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어쩌면 그들의 관계는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언제나 핵심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분위기를 바꾸는데 있어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던 트루디 역시 숙명을 피해갈 순 없었던 모양이다. 여덟살 때 자신을 버리고 종적을 감춘 자신의 어머니처럼 임신 중이던 트루디 역시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야기는 다시 전쟁이 끝나고 8년이 지난 1953년의 홍콩으로 돌아와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윌을 만나 비로소 사랑에 눈뜬 클레어의 삶을 조명한다. 윌과 클레어는 함께 하지만 윌은 자신이 사랑했던 ‘이국적 전갈’ 여인 트루디를 잊지 못한다. 바로 옆에 있는 ‘영국 장미’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걸까. 부유한 멜로디 첸의 집 피아노 교사로 일하면서 주인의 스카프와 값비싼 장신구를 좀도둑질하던 클레어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누군가에게는 인습일 수도 있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당당한 여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윌이 전쟁 중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면서 모든 일이 끝난 뒤 영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홍콩에서 토착민화된 삶을 선택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재니스 리는 좀처럼 잘 다뤄지지 않는 주제인 태평양 전쟁 중의 홍콩 라이프를 발굴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서구인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솜씨 있게 채색하고 교정하는 실력도 대단하다. 한편으로는 서민계급의 애환 보다는 엘리트계급주의적인 색깔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첫 작품이 가진 한계로 생각해 본다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전쟁 중에 모두가 눈이 벌게져서 찾던 중국이 보유한 미지의 보물 크라운 컬렉션이라는 가상의 설정(진짜 있었던 이야기였던가)도 소설의 미스터리한 요소를 극대화 시키는 점에 있어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 중 부역자라 불릴 정도로 오츠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상유지를 넘어 오히려 거부를 쌓은 빅터 첸의 인생유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역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에 옥스퍼드 유학으로 훌륭한 영어실력을 발휘하면서 그때 그때마다 카멜레온 같은 적응력으로 난세를 헤쳐온 입지전적 인물로 등장하는 빅터 첸의 사연이 흥미롭다. 트루디의 사촌이자 절친으로 역시 전쟁 중에 죽은 도미닉 웡의 존재도 동서양의 중심에 선 홍콩의 정체성 만큼이나 이채롭다. 중국인이면서 서구식 사고방식으로 생활하지만 정작 서구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진 도미닉은 호시절에는 트루디와 함께 사교계의 쌍두마차로 활약하지만 전쟁 중에 오츠보와 맺게 된 불행한 인연으로 파멸에 도달하게 된다.

 

소설을 읽던 중에 트루디가 윌에게 말한 “빛이 오면 모든 것이 바뀌잖아”라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빛 속에 있다고 생각했던 트루디의 삶은 전쟁 동안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늘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도덕적 양심주의자 윌은 자신과 함께 포로수용소로 들어오라고 권하지만, 트루디의 선택을 달랐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빛 속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걸까.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나서 보이는 트루디의 행보를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홀로 남은 윌 트루스데일은 전쟁 통에 살아남아 옛 애인을 잊지 못한 채, 홍콩을 떠날 수도 그렇다고 남을 수도 없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노 교사>의 진정한 매력은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절이 개인에게 강요한 변신과 그 와중에 보여주는 고결한 영혼의 아름다움, 그리고 동시에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가는 삶에 대한 조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주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금세 다 읽을 수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선순위 독서 때문에 좀 밀리긴 했지만,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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