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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 속의 여우
에프라임 키숀 지음, 정범구 옮김 / 삼인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여름부터 읽던 에프라임 키숀의 <닭장 속의 여우>를 드디어 다 읽었다. 국민들의 선량을 뽑는다는 스무번째 총선이 이제 한달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이스라엘에 위치한 킴멜크벨이라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촌마을에서 벌어지는 정치활극이 전혀 색다르지 않게 다가왔다. 유머 넘치는 이스라엘 출신 작가는 화해와 조정이라는 정치의 본분에서 벗어나 분열을 넘어 난투극에 달하는 정치희극을 연출했지만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정치는 소설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의 막장드라마다. 향후 4년간 우리의 삶을 규정할 국회의원선거를 견주어 볼 때,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을 지경이다.
에프라임 키숀은 우선 아미츠 둘니커라는 50년 정치경력을 자랑하는 화려한 정치가-킴멜크벨 마을에서는 ‘엔지니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정치공학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적절한 별명도 없을 것 같다-를 전면에 배치한다. 그리고 그의 수석보좌관으로 언젠가 자신의 상전의 뒤를 이어 정치가의 길을 걷겠다는 야심을 키우고 있는 브레인이자 비서 체프가 차례로 등장한다. 대중을 상대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엔지니어 양반은 연설하기를 무럭 즐기지만, 어쩔 수 없는 건강상의 이유(과다한 흥분으로 인한 잦은 심장 발작)로 당분간 중앙정치계에서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요양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에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의 마을 킴멜크벨은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문제는 아무런 정치색이 없던 평화로운 마을 킴멜크벨에 취미삼아 정치를 도입한 것이 엔지니어의 치명적 실수였다. 이발장이 살만 하시도프와 구두장이 체마크 구레비치 패거리로 나뉘어 이권을 쥐고 마을을 좌지우지할 읍장선거에 모든 마을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어 이전투구를 벌이는 과정을 에프라임 키숀은 정말 재밌게 그려냈다. 동시에 신정국가를 추구하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의 나라답게 백정 야콥 스파라디가 랍비 행세를 하며 매사에 사사건건 개입하면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고대 로마에서는 공직이 사회지도층의 명예로 받아 들여져 심지어 보수도 받지 않고 자기 돈을 들여가며 다리를 보수하고 도로를 까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료제의 도입으로 공무에 전념하는 직업이 발생하고,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다수의 권리를 위임받아 통치행위를 담당하게 되면서 권력의 집중에 따른 특권과 이권다툼이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일 것인데, ‘엔지니어’들은 자신의 본업에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본말전도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에프라임 키숀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소설에서 예리하게 저격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엔지니어 둘니커의 훌륭한 가르침에 따라 치열한 읍장선거에 돌입하게 된 이발장이와 구두장이는 조금씩 엔지니어화 되가면서, 마을 사람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선거전에 이용한다. 작은 마을 킴멜크벨 마을의 예산을 고려해 볼 때 전혀 가능하지 않은 공짜여행을 남발하고, 건조한 땅에서 우물을 파겠다고 수선을 피우고 심지어 텔아비브에 유력자에게 줄을 대서 전기까지 끌어 오겠다는 선거공약들이 난무한다. 어떤가? 우리가 지금 거리와 매스컴을 통해 보고 있는 현실과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 세태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엔지니어들의 공약(公約)은 그렇기 때문에 공약(空約)일 따름이다. 어떻게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지킬 수 없는 공허한 약속만 외쳐 대다가 한 달 남짓한 선거기간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질 뿐이다. 이런 희극은 4년마다 혹은 5년마다 되풀이된다. 헤겔은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인물은 두 번씩 등장한다고 했는데(아마도 희극과 비극의 방식으로?), 우리는 주기적으로 이런 쇼를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여겨 본 점 중의 하나는 역자가 한때 실재로 엔니지어링(정치)을 담당했던 정범구 전 의원이라는 사실이다. 역자가 밝혔듯이, 히브리어로 쓰인 작품의 독일어판을 역본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현실정치에서 한발 물러선 타자의 시선에서 번역한 작품이라 그런 진 몰라도 신뢰감이 갔다. <개를 위한 스테이크>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 등의 작품에서 발군의 유머 실력을 보여준 에프라임 키숀은 이 작품에서도 독자의 허를 찌르는 설정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엔지니어는 자신이 저지른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와 접촉할 수 있는 트럭운전사를 매수해서 마을을 탈출하려다 이발장이의 포로가 되는가 하면, 체프 역시 구두장이의 딸과 불장난 끝에 샷건 매리지(속도위반결혼)를 치르게 되는 장면도 압권이었다. 백정이 자신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문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책을 재밌게 읽으면서도 끝까지 입맛이 씁쓸했던 건 너무나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해낸 작가의 통찰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총선이 29일 남았다. 이번에는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