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45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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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나 버렸다. 네브래스카/버지니아 출신 작가 윌라 캐더의 <나의 안토니아>를 읽던 중에 주문한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도착했고, 도중에 갈아타 버렸다. 아직 <나의 안토니아>도 읽지 못했는데. 책을 주문하기 전에 이미 나는 미리보기로 30 몇쪽을 읽었다. 책은 너무 재밌었다. 자다가도 일어나 읽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싶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은 1848년의 뉴멕시코다. 이제 미국 땅이 얼마 되지 않은 올드 멕시코 시절의 향수를 지닌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안토니아>의 배경이 프레리독과 방울뱀이 노니는 광활한 평원이라고 한다면,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뉴멕시코 땅의 사막이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 뉴멕시코 땅에 대해 생각해 보았겠는가. 이 한 가지 점에서라도 나에게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책이었다. 모래사막은 나에게 이십대에 이루지 못한 로망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두 명의 신부들이다. 한 명은 주교 신부인 장 마리 라투르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주교 대리 요셉 바일랑 신부다.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 퓌드돔 출신이라고 했던가. 아니 구대륙의 프랑스 신부들이 새롭게 미국령이 된 뉴멕시코에 어떻게 오게 되었단 말인가. 로마의 바티칸에서 페랑 신부와 몇 명의 추기경들이 선교를 위해 선택한 개척자들이 바로 라투르와 바일랑이었다. 이미 오하이오에서 선교 중이던 그들은 목적지를 바꾸어 산타페로 이동하게 된다.

 

라투르 신부는 주교답게 진중하면서 사려가 깊은 그런 구시대에 어울리는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반면, 못생기고 작달막하며 허약 체질의 바일랑 신부는 쾌활하면서도 눙치는 데 선수며, 질 좋은 포도주에 탐닉한 그런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예상을 깨고 이 콤비들은 미신을 믿는 인디언들로 넘실거리는 이국땅에 성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임지인 산타페로 가는 길도 쉽지 않았으며, 현지의 멕시코 사제들은 바티칸에서 파견한 그들의 주교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라투르 신부는 정식으로 인가를 받기 위해 엄청난 길을 다시 떠나야 했다. 그리고 친화력과 추진력에 있어 누구보다 탁월한 바일랑 신부의 조력으로 적폐를 타파하고,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개혁에 나선다.

 

예나지금이나 적폐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는데 전력을 다하기 마련이다. , 사제 콤비는 그전에 시리얼 킬러 같은 작가에게 살해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던가. 그의 부인이었던 막달레나 발데즈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말만 뉴멕시코이지 올드 멕시코에 가까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상상을 초월했다. 현지 멕시코 사제들은 인디언들의 노동력을 아낌없이 착취했고, 심지어 사제로서 지켜야 하는 순결 서약 대신 부인을 두기도 했다. 반란에 나선 인디언들을 살려 준다고 꼬셔서 그들의 토지를 빼앗는 건 양반이었다. 사제들은 지주계급 못지 않은 기득권층으로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선교 의지에 불타는 라투르와 바일랑의 눈앞에 그런 이들이야말로 척결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신대륙에 구대륙에서 갈고 닦은 신앙을 수호하는 사제들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파하겠노라고 마음먹은 사제 콤비에게 온갖 사이비 신앙인들이 어떻게 보였을지 상상이 가는가. 복음의 전파는 단숨에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 쯤은 노련한 수도자들은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들은 절대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개혁을 시도한다. 서두른다고 해서 적폐들이 단박에 바로 잡히지 않는다는 것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현지인들에게 무시로 적응해 가는 두 사제들의 모습을 윌라 캐더 작가는 마치 바로 옆에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중계하듯 그렇게 놀라운 솜씨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마 작가가 요즘 살았더라면, 현장에서 뛰어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 젖기도 했을 정도다.

 

라투르와 바일랑은 때때로 자신이 원주민 선교에 있어 원하는 바가 달라서 갈등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지로서 사반세기를 함께 한 그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사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인디언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기 위해 허약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선교여행에 나서는 바일랑 신부를 라투르는 마뜩치 않은 눈길로 쳐다본다. 뉴멕시코 교구가 대교구로 확대 편성되면서 자질구레한 행정업무부터 시작해서, 법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니 종교가 해결해야 하는 부분들이 엄청 늘어났는데 말라리아에 걸려 해롱대면서도 어린 양들을 돌보겠다고 나서는 바일랑 신부가 라투르로서는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신앙인들에게 신에게 봉사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른 법이다. 인디언 천막과 산타페의 주교 관저에서 라투르 신부는 과거를 회상하며 바일랑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동지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소설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읽으면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만난 2020년의 최고의 책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노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외에도 소설을 아름답고 빛나는 만드는 이야기들은 차고 넘친다. 자신의 나이를 어떻게 해서라도 감추려는 부유한 미망인 도나 이사벨라는 올리바레스 씨가 남긴 막대한 재산(당시 돈으로 20만 달러)을 그놈의 허영심에 날리 위기에 처한다. 이 때 등장한 바일랑 신부가 미래의 성당 건립을 위한 종잣돈을 그렇게 허공에 날리고 싶냐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물질주의자 신부는 선교여행을 위해 꼭 필요한 노새 두 마리인 콘텐토와 안젤리카를 확보하기 위해 그 녀석들을 내놓지 않으려는 불쌍한 농장주 협박을 마다하지 않는다. 바일랑 신부의 이런 행동은 물론 신부라기 보다 악당에 가까운 마티네즈(타오스의 늙은 망나니라고 표현된다)나 구두쇠 루체로 신부의 축재(2만 달러를 남겼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윌라 캐더 작가는 신대륙의 가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신랄하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신, 개혁적인 두 명의 사제를 대리인으로 삼아 서서히 고쳐 나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종교와 사제들을 핍박하는 악당들이 처벌받는 방식도 아무래도 구식이다. 사제들을 죽이고 그들의 물건을 강탈하려던 노상강도 버크 스케일스는 살인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라투르 주교의 징계에 불복하고 독립한 마티네즈 신부와 루체로 신부의 말로를 보라. 좀 빤했지만 이런 결말이 난 좋더라. 현실에서 그러지 못하니, 소설에서라도 못된 놈들은 벌을 받아야지.


대주교가 된 라투르 신부에게 죽음이 다가오는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눈물샘을 자극하는 갬성은 폭발한다. 나이가 드니 주책없게도 눈물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금광에 미친 죄인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산타페 교구를 떠나는 클레르몽 신학교 시절 이래 동지이자 친구였던 바일랑 신부를 콜로라도 체리크리크로 떠나보내며 서로의 앞날을 위해 축복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우리의 바일랑 신부는 콜로라도의 주님의 집인 성당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악당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빚에 허덕이다가 바티칸의 소환을 당하기도 했다. 노다지를 얻은 부유한 이들은 바일랑 신부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지만, 가난한 멕시코 사람들은 바일랑 신부의 절절한 구걸에 가까운 읍소에 자신의 장화 속에 감춰둔 돈을 서슴지 않고 꺼냈다. 가난한 자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 선교여행에 나섰다가 절름발이가 된 신부를 후원했다.

 

그랬던 죽음을 야유하는 자라는 별명을 가진 흰둥이 바일랑 신부가 결국 세상에서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난다. 그를 기리기 위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산 밑으로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는 바일랑 신부의 인품을 설명해 주는 장면이었다. 바일랑 신부의 동지였던 르바르디 신부는 프랑스에 파견되었다가 자신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상사에게 보고 하고 나서 죽기 위해 콜로라도로 달려간다. 빈사의 상태로 장례식에 도착해서 선종하신 바일랑 신부에 관에 머리를 맞대는 장면... 감정이 벅차서 더 이상 쓰지 못하겠다. 먹먹하구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뉴멕시코의 오지에서 빛도 없이, 영광도 없이 선교에 전념하던 사제들의 이야기에 이렇게 몰입했을까. 자신의 신념에 따라 누에바 메히코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의 삶을 읽으면서 그들에게 내 자신의 삶을 투영했기 때문이 아닐까. 더디지만 내 존재에 대한 깨달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문학을 읽는 진짜 이유다. 별점 천 개를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그런 작품이었다.


오늘 어느 신문을 보니 <힐링팔이 스님>이란 제목의 칼럼이 다 등장했더라. 이제 더 이상 종교가 그리고 종교인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이 마음의 힐링이 되지 못하게 되어 버린 시절에,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에서 만난 라투르와 바일랑 사제의 잔잔한 이야기들은 누구에게도 물질적 보상을 바라지 않는 참 힐링의 전범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 생각해 봐도, 보기에 참으로 아름다웠다.

 

[뱀다리] 소설의 제목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한스 홀바인의 판화 그림에서 따왔다고 한다. 홀바인의 판화는 살벌해서 패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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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1-23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힐링팔이 스님 ㅋㅋ최상위 01% 캐더작품은 셜리작품 만큼 미국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질리도록 읽혀요. 학교 밖에서는 텍스트에 숨겨진 동성애를 찾는걸로 장난치기도 ㅎㅎ 레삭매냐님 율리체에서 캐더로 열정이 옮겨졌어요. ^.^

레삭매냐 2020-11-23 21:09   좋아요 1 | URL
동성애 코드를 언급해 주시니...
문득 영화 <카사블랑카>를 동성애
영화의 클래식으로 본다는 글이
생각나네요.

역시나 고전은 고전인가 봅니다.

chika 2020-11-23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겠습니다. 천주교신자라 더 관심이 갑니다요 ^^
홀바인의 판화가 얼마나 살벌하길래?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레삭매냐 2020-11-24 09:25   좋아요 1 | URL
소설은 정말 후반으로 갈수록
감동의 도가니탕이었습니다...

지인들에게 꼭 한 번 추천해
주고픈 그런 책이네요.

han22598 2020-11-24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소설이라고까지 지칭하시다니...! 나바호 원주민을 만나러 뉴멕시코에 두번 간적이 있어요. 쉽게 잊혀지지 않은 그 땅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뉴멕시코 땅을 배경으로 한다니...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겠네요. ㅠ

레삭매냐 2020-11-24 09:26   좋아요 1 | URL
정말 별점을 천 개를 주어도
모자랄 만한 그런 책이었습니다.

인생책으로 꼽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네요.

저라도 책을 읽고 나면 벌떡
일어나서 나바호 인디언들을
만나러 가지 않을까 싶네요.

blanca 2021-01-10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저 지금 <나의 안토니아> 아껴 읽는 중인데... 당장 주문해야겠네요.

레삭매냐 2021-01-10 12:31   좋아요 2 | URL
<나의 안토니아>도 좋지만,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훨씬 더 좋았습니다.
<안토니아>가 마음에 드신다면
이 책 역시 후회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박건웅 지음, 님 웨일즈 외 원작 / 동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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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김산이라는 혁명가의 삶을 다룬 <아리랑>이란 책을 알게 됐다. 되짚어 보니 정말 오래 전의 일이다. 그런데 책은 다 읽지 못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전에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호기롭게 다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그렇게 <아리랑><중국의 붉은 별>과 더불어 나의 숙제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미국 출신의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 여사가 저술한 <아리랑>의 그래픽노블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는지 차 안에서 50쪽을 훌쩍 넘겨 버렸다.

 

202011월의 을씨년스러운 날에 내가 만난 님 웨일즈가 기술한 조선 출신의 비운의 혁명가 김산, 아니 장지락에 대한 전기는 제목만큼이나 슬픈 그런 이야기였다. 책을 읽다 말고 잠시 동안의 휴지기에 과연 서구 출신 저널리스트로 님 웨일즈가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저자는 편견이나 왜곡 없이 일제의 프로파간다가 배제된 진실에 과연 얼마나 도달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아리랑>1937년 중국의 옌안에서 저자가 조선공산당에서 파견한 극비 대표 김산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비밀에 쌓인 조선 출신의 혁명가를 음모가라고 처음에는 판단한 모양이다. 아니 장명이라는 가명으로 숱한 책들을 빌린 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출발했던가. 님 웨일즈가 저술한 <Song of Arirang>1941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신천지라는 잡지를 통해 소개됐다당시 부제는 '조선인 반항자의 일대기'였다. 그후, 1984년에 다시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5, 평북 용천에서 빈농의 세 번째 아들로 출생한 장지락은 유년 시절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193·1운동을 체험하면서 비폭력 평화운동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조선 민중이 하나님에게 죄의 보상을 치르고 있다는 외국 선교사의 말은 어이가 없었다. 죄의 보상이 치러지고 나면 독립하게 될 거라는 말에 소년 장지락은 아연실색한다.

 

소년 장지락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 민족이 겪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민족주의자로 출발한다. 하지만 3·1운동의 실패를 보고서,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것은 정교한 운동 이론과 방향성이 제시되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다음 단계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이후 둘째 형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문배달과 인력거꾼으로 고학을 하면서 도쿄 제국대학 진학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내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운동이 활발했던 모양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장지락은 미래의 혁명가로서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700리 길을 걸어 어린 나이에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최연소 입학한 장지락의 일화는 거의 전설이 되었다. 그 다음 단계인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교정을 맡기도 했다. 이 시절에 만난 안창호 선생과 독립신문의 편집을 맡았던 이광수와도 교류한 것으로 알려진다. 의열단 출신의 김약산과 오성륜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스트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곧 테러에 의한 항일운동이 이상적이라는 사실과 그 한계를 느끼고, 대중혁명운동인 마르크시즘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921년 중국 베이징으로 간 장지락은 당대 중국 최고의 의료기관이었던 베이징 협화의학원에서 의사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5·4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마르크스 학술활동이 활발하던 베이징에서 그는 공산주의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공산청년동맹에도 가입했으며, 무엇보다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승려 출신 김충창(김성숙)과 만나 본격적인 마르크시즘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1차 국공합작과 쑨원의 사망 그리고 국민당이 주도한 북벌의 소용돌이 속에 장지락은 당시 중국 최고의 대학이었던 중산대학의 의대 본과생(나중에 정치학 전공으로 바꾸었다)으로 김충창과 함께 활발한 정치활동에 나섰다.

 

장지락은 조선 출신으로 광둥 코뮌이나 하이루펑 소비에트 활동에 참가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기도 하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목표는 조국 조선의 독립이었다. 하지만 임정에 도움을 주었던 장제스 정권이나 중국공산당 모두 자국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싸우느라 타국의 독립까지 후원할 여력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조선의 혁명가들은 그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것이 결국 훗날 장지락의 운명에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조선 출신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이런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단 장제스의 국민당이나 공산당에 일단 협력한 다음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1927412, 장제스의 주도로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것은 국민당 우파에 의한 혁명세력과 노동자 학살로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호기롭게 시작한 광둥 코뮌마저 백군에게 격파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상부로부터 후퇴 명령을 전달받지 못하고 적군과 맞서 싸운 박진 부대 최후에 대한 증언은 광둥 코뮌의 실체를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광둥 코뮌이 분쇄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퇴각에 성공한 장지락을 비롯한 혁명 세력들은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이동한다.

 

그 다음 무대였던 홍군이 장악한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장지락을 비롯한 혁명 동지들에게 미래의 조국의 희망찬 모습을 엿보기도 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집요한 국민당군의 공격 앞에 패퇴한 장지락과 혁명 동지들은 사경을 헤매면서 적군의 추격을 피해 도주했다. 굶주림과 말라리아 같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수많은 동지들이 노상에서 죽어갔다. 이런 잇달은 실패의 체험과 혁명 과정에서 벌어진 반동 계급에 대한 숙청에 대해 장지락은 인간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계급투쟁과 인간해방이라는 거대한 대의를 위해 싸웠지만, 그에 따른 부차적 피해와 피에 피를 부르는 복수는 피할 수가 없는 숙명이라는 사실이었다. 휴머니스트로서 실패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박건웅 저자가 밝힌 대로, 혁명 와중에 피어나는 연애 스토리도 빼놓을 수가 없다. 혁명가 장지락은 철저하게 조국 독립과 혁명에 모든 것을 바쳤노라고 수없이 천명했다. 그러나 혁명가에도 덧없는 사랑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혁명 동지 류링의 적극적 구애와 결혼까지 한 역시 다른 혁명 동지와의 사랑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혁명가의 삶을 비춘 한 줄기 빛이 아니었을까.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으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지기도 했지만, 혁명 열사의 의기는 꺾을 수가 없었다. 중국 혁명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옌안에 조선혁명가 극비대표로 파견되어 님 웨일즈를 만나면서, 서구의 저널리스트가 남긴 기록을 통해 잊혀진 혁명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숱한 투쟁의 사선을 뛰어 넘은 이 걸출한 혁명가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이 아닌, 리리산주의자 혹은 트로츠키주의자 그리고 일본 특무(스파이)라는 모함을 받아 19381019일 처형된 점은 비극의 전형이다.

 

박건웅 저자가 아무래도 장지락이라는 개인에 집중하다 보니, 어떻게 해서 조선 출신의 독립운동가가 남의 나라인 중국혁명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1920-30년대 한국 독립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인 중국혁명사를 동일선상에서 고찰해야 하는 어려운 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중국혁명 참여는 어쩌면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와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이 충돌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냉전적 사고로 본다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부분이겠지만 말이다.

 

아울러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사회주의자로 계속해서 변신을 거듭하는 혁명가들의 정체성 문제도 생각해 볼 문제다. 조국의 광복이라는 대의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민족주의 계열 운동가들과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의 운동의 방법과 각론에서 차이를 보였다. 이런 디테일들이 조금 아쉬웠다.

 

오늘 읽은 그래픽노블 <아리랑>으로 일부분이나마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를 마친 것 같이 조금이나마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도 중국의 1920-30년대 혁명운동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혁명가 장지락이 중국에서 투쟁한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상당 부분 해소된 기분이다. 아무래도 그래픽노블로는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는다. 님 웨일즈의 원작에 다시 도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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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0-11-22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두 부부가 쓴 <아리랑>과 <중국의 붉은별> 만만치 않은 책이었어요.
중국의 붉은 별은 3분의 2정도에서 대장정을 끝내지 못했고 아리랑도 읽다 말았네요^^
숙제로 여겨진 2권의 책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 책이 엄청 반가웠네요.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반공의 이데올로기속에서 아예 존재조차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가 시대가 변해 우리에게 다가오니 넘 뿌듯합니다^^;

레삭매냐 2020-11-23 11:40   좋아요 0 | URL
저도 계속해서 읽다 말다를 거듭하고
있네요...

이참에 다시 한 번 도전에 나설까
봅니다.

아무래도 냉전시대에는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
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선 <아리랑>부터 읽는 것으로.

페넬로페 2020-11-23 0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시대가 시대인 만큼 ‘중국의 붉은 별‘과 ‘아리랑‘ 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혁명의 꽃이 만발하길 기대했지만
나중에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 그들의 행동들이 실망만을 안겨줬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리랑‘ 은 사실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네요~~
기회되면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레삭매냐 2020-11-23 11:42   좋아요 0 | URL
장지락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 보다
보니 서구 저널리스트가 쓴 <아리랑>
보다 이원규 선생이 썼다는 <김산
평전>에 눈길이 가더라구요.

다만 책이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는
게 흠이네요.

작고하신 김준엽 선생의 <장정>도
다시 만나야지 싶습니다. 읽을 책들
이 너무 많네요 증맬루.
 
침묵
돈 드릴로 지음, 송은주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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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완벽하게 디지털 네트워크에 종속되었다. 인별그램에 들어가 보면, 회사에서 구입한 커블 체어 광고가 뜬다. 아니 나는 주로 책에 대한 콘텐츠를 인별그램에 올리는데 왜 회사에서 산 커블 체어 광고가 나의 인별그램에 침입한단 말인가. 어디 그 뿐이랴. 커블 체어는 단적인 하나의 예일 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모바일폰에서 빠져 나간 정보들이, 아니 허상의 무언가가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의 실존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걸까. 내가 아닌 내가 검색한 정보로 이루어진 것이 나를 역으로 규정하는 건 아닐까.

 

돈 드릴로의 신작 <침묵>에서 다루고 있는 디지털 네트워크 블랙아웃에 대한 단상을 생각하다 또 엄한 데까지 사유가 흘러간 모양이다. 앞으로 2년 뒤인 20222월의 첫 번째 주, 일요일이 시간적 배경이다. 파리에서 떠나 뉴어크로 향하는 짐 크립스와 테사 베런스가 탄 비행기 속에서 <침묵>은 시작한다.

 

거의 미국인들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볼 선데이다. 일 년에 달랑 16번만 하는 정규시즌의 미식축구가 끝나고, 플레이오프를 거쳐 AFCNFC 리그에서 각각 올라온 두 팀이 맞붙는 슈퍼볼 경기의 희귀성만큼이나 세계 광고회사들의 각축이 벌어지는 디지털 공간이기도 하다.

 

예의 슈퍼볼 경기를 보기 위해 맨해튼 어느 아파트에 5명의 지인들이 모이기로 했다. 짐과 테사는 추락하는 비행기에 타고 있고, 나머지 3명인 맥스와 다이앤 그리고 마틴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짧은 분량만큼이나 돈 드릴로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역시 심플하다. 거대한 세계적(아니 어쩌면 미국인들만의) 이벤트를 앞두고 디지털 네트워크가 먹통이 된다. 어쩔 것인가?

 

게다가 한 팀은 지금 이런 소동 속에서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 갇혀 있다. 화끈한 설정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심정적으로 추락하는 비행기보다 먹거리며 판돈까지 모든 걸 준비한 상태에서 킥오프를 앞두고 대형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대기하던 수천만명의 허탈함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슈퍼볼이라는 이벤트는 전기로 바뀐 신호를 타고 위성이나 케이블을 타고 전 미국의 가정으로 배달된다. , 슈퍼볼은 공중파에서 방송을 했던가? 어쨌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의 관심이 없는, 잘쳐 줘봐야 고작 땅따먹기 게임에 불과한 단판승부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홀리는 건 연구의 대상이 아닐까. 오랜 세월을 거쳐 쌓아온 업셋과 치명적 실수들 그리고 명승부들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었고, 예의 관심은 곧 돈으로 연결되었다.

 

하긴 그런 신나는 경기를 앞두고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혹은 괴델 같은 이들이 등장해서 상대성 이론에 대해 운운하는 건 아무래도 쌩뚱 맞지 않았을까. 이런 거에 비하면, 셀시우스나 패런하이트는 양반이지 싶다.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살아 남은 짐과 테사는 자신들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부상 치료도 미룬 채 화장실에서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놀랍군. 그리고 이어지는 타인을 배려하는 핀잔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런 위기상황은 그런 일탈의 발생에도 관대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처음에 맨해튼이 배경이라는 점에서 20년 전, 미국을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9-11 테러사건이 떠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공간적 배경이 같은 맨해튼이 아니던가. 다만 시간은 계절적으로 가을과 겨울이라는 점이 달랐지만. 예상하지 못한 가공할만한 테러는 물리적으로 쌍둥이 빌딩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거대한 심리적 타격을 가했었다. 그 때와 달리 소설 <침묵>에서는 모든 통신이 두절되고, 정보의 교류가 차단된 상황에서도 기이하게 침착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차단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인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가 먹통이 되더라도 곧바로 일상을 되찾는다. 추락한 비행기에서 생존하는데 성공한 짐과 테사는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걸어서 도착한다. 슈퍼볼 홈파티의 호스트인 맥스는 오크통에서 십년 동안 숙성시킨 버번을 들이킨다. 그리고 맥스가 꺼진 텔레비전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01로 이루어진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소설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점점 좀비가 되어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신문이나 뉴스 혹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정보를 취합해서 나만의 고유한 사고를 형성했다. 하지만 너튜브라는 동영상 매체가 모든 것을 잡아 삼키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는 선동으로 점철된 포스트트루스(post-truth)만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이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아니 이제 진실이 갖는 의미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도서관에서 막 빌린 따끈따끈한 책을 읽긴 했으나, 번잡스러운 속에서 과연 내가 읽은 게 맞는지 그리고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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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는 독일 출신의 작가 율리 체를 만났는데 이달에는 미국 버지니아/네브래스카 출신의 작가 윌라 캐더를 만나게 됐다. 세상은 참으로 넓고, 모르는 작가는 지천이며, 읽어야 하는 책들은 산더미라는 걸 새삼 느낀다.

 

1873년생으로 소설 <나의 안토니아>의 주인공 지미 버든처럼 동부 버지니아를 떠나 열 살 때, 서부의 황량한 네브래스카에 안착했다. 한 작가를 아는 방법은 역시나 그의 책을 읽는 게 최고다. 사실 예전에 미국의 주를 대표하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그림에서 윌리 캐더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하지만 그 때는 아직 때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 나는 윌라 캐더의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 달에 윌라 캐더 작가에게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우리 중 하나>가 나온다니 하니 더더욱 궁금하지 않을소냐. 그리하여 주문한 책이 나의 수중에 들어오기 전에 도서관으로 냉큼 달려가 일단 <나의 안토니아>를 빌렸다. 또다른 대표작인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이북 맛보기로 좀 읽었다. 내가 사는 곳 부근에 있는 도서관에는 <나의 안토니아>만 있더라.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의 주인공은 미국 땅으로 영입되지 얼마 되지 않은 뉴멕시코 선교지로 떠나게 되는 사제 장 마리 라투르다. 때는 바야흐로 1848, 바티칸에서 페랑 신부는 추기경들을 설득해서 온타리오에 있던 프랑스인 사제를 카우보이와 백인들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인디언들이 넘실대는 오지로 파견하는데 동의한다. 반건조 사막지대를 지나 부임지로 가는 모습까지 읽었나 어쨌나.


<나의 안토니아>를 한창 읽는 중에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도착했고, 두 책을 번갈아 가며 읽는 중이다. 전자도 읽는 재미가 상당했는데, 19세기 중반 미국령으로 편입된 뉴멕시코 선교에 나선 장 마리 라투르 주교와 그의 동료 요셉 바일랑 신부가 겪는 일단의 모험담도 대단했다.

 

신세계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바티칸에서 파견된 신부들은 기존의 가톨릭 교회가 현지에서 얼마나 토착화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우선 현지의 멕시코 사제들은 바티칸에서 파견한 교주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래서 라투르 교주는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고난의 선교여행에 나서야했다.

 


프랑스 오베르뉴 출신의 독실한 라투르 신부는 친화력 강한 바일랑 신부의 도움으로 현지에서 강단 있게 개혁을 시도한다. 왜 신대륙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주민들에게 외면을 받았던가? 스페인 정복자들을 대신한 지배계층 행세를 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대신 원주민들의 농장을 강탈하고, 그들의 노역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발타차 몬토야 신부의 전설 같은 죽음이며, 타오스의 파계신부 안토니오 호세 마티네즈 같은 인물이 구시대의 가톨릭을 대표하는 선수일 것이다.

 

현지인들의 반발을 고려하면서 점진적 개혁을 주도해 나가는 라투르 신부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었다. 두 사제가 불모의 땅 뉴멕시코에서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건 선교를 하는 장면들을 윌라 캐더 작가는 유려한 필치로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아무리 신의 대리인이지만, 뿌리까지 뽑아낼 수 없는 멕시코 인디언들이 토속신앙에 집착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지기도 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타오스의 타락한 마티네즈 신부는 그 점을 강조하면서, 금지된 가톨릭의 계율을 깬 자신을 옹호하는 논리의 비약도 마하다지 않았던가. 그는 아무리 봐도 철저하게 고인물이었고, 개혁의 대상이었다.


<나의 안토니아>도 마찬가지였지만, 왠지 윌라 캐더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당장에라도 그 황량함이 넘실거리는 네브래스카 평원이나 뉴멕시코의 반건조 사막에 달려가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나의 안토니아> 모두 지난 세기 미국의 실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특이할 만하다.

 

<나의 안토니아>는 명백하게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다. 열 살에 조실부모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는 네브래스카 블랙 호크로 떠난 지미 버든. 어린 소년은 어느덧 성장해서 철도회사의 법률 고문이 되었다. 그리고 수십년 전,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당시를 회고하는 책을 썼다. 그것이 바로 <안토니아>, 아니 제목을 바꾼 <나의 안토니아>의 시작이었다.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기차에서 산동네 사나이 제이크와 함께 만난 이들이 바로 이제 막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쉬메르다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집의 맏딸이 바로 지미 버든의 유년 시절 추억의 상당 부분 지분을 지닌 안토니아, 혹은 토니 쉬메르다였다. 자신들도 이민자였던 버든 가족은 신참내기 이민자인 쉬메르다 패밀리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고향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 유능한 직조업자이자 흥이 넘치는 바이얼리니스트였던 쉬메르다 씨에게 미국은 그저 낯선 땅이었을 뿐이다. 아내 등쌀을 이기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기 위해 꿈과 희망의 땅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결국 그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신천지에 둥지를 튼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사연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쉬메르다 패밀리의 신산한 삶 못지않게 우크라이나 출신 농부 파벨과 피터의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아니 떠들썩한 결혼식이 끝난 뒤, 귀갓길에 늑대 무리를 만나 살기 위해 결국 신랑 신부를 늑대들에게 내던진 파벨 역시 끝이 좋지 못했다. 쉬메르다 씨가 죽고 나서야, 블랙 호크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선다. 공동체의 선행을 목격하기도 한다.

 

<나의 안토니아>는 목가적인 윌라 캐더 저자의 자전적 소설인 동시에 지미 버든이란 소년이 이런저런 소동 끝에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보헤미아 출신의 가난한 쉬메르다 가족은 가장을 잃고, 억척스러운 모습으로 농삿일에 나선다. 학교에 가야 할 14살의 안토니아 역시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학교 대신 들판에 나가 남자들처럼 농사를 짓는다. 어쩌면 얼마간의 자본과 그 땅에 대한 지식의 유무가 미래 세대의 향방을 갈랐던 게 아닐까. 농부-하녀 그리고 미혼모의 삶을 살게 된 안토니아와 하버드 대학 졸업 로스쿨을 거치면서 신천지의 지배계급에 올라선 지미 버든의 삶의 양태를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네브래스카의 혹독한 계절의 변화에 대한 묘사는 일품이다. 여름에는 불타는 태양이 빚어내는 빛나는 옥수수 알갱이가 등장하고, 한겨울에는 이웃과의 왕래를 끊어 버리는 폭설은 기본이다. 1미터가 넘는 방울뱀을 토니 앞에서 빌린 부삽으로 요절내는 장면은 또 어떤가. 비로소 지미 버든은 소년에서 그런 과정을 통해 소위 싸나이로 변신해 가는 게 아닌가. 낯선 땅에서 반드시 필요한 언어인 영어를 하지 못하는 안토니아와 율카를 위해 영어 교사를 자처하는 내레이터의 모습도 아름답다. 그런 선행들이 모여 지난 세대의 팍스 아메리카나의 원동력이 되었던 게 아닐까. 지금은 새로운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자신의 뿌리를 잊어버린 그런 나라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기묘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를 잃은 안토니아에게 슬퍼할 시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쉬메르다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오빠 암브로쉬처럼 들판에 나가 쟁기를 끌어야 했다. 서부 개척시대에 남성 못지않게 거세고 억척스러운 새로운 여성의 전형이다. 지미의 할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은 그런 안토니아를 걱정하지만, 특유의 낙천스러운 성격으로 안토니아는 빈곤과 난관을 돌파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새로운 제국으로 도약을 시작한 시대에 걸맞는 미국적 여성상이 아닐까 싶다.

 

다음 무대는 지미가 학업과 연세가 드셔서 더 이상 농사가 무리라고 판단한 지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사한 블랙 호크다. 지미와 안토니아의 유년 시절은 이제 끝났다. 지미는 학업을 지속하고, 안토니아는 지미 할머니의 주선으로 지미네 이웃인 할링 부인네 하녀로 취업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캐릭터들인 레나 린가르드와 티니 소더볼 등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갈등을 예고한다. 더 이상 전통적 여성상을 거부하는 신세대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아마 갈등의 전조는 춤바람이지 않았나 어쨌나. 신세대의 반항이 보통 음악과 춤으로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윌라 캐더의 선택은 아마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열심히 읽고 있는 두 권 모두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어서 빨리 <나의 안토니아>를 읽고 난 뒤,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중 하나>에 도전할 계획이다. 한 작가에 대해 세 권 정도의 책을 읽으면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윌라 캐더의 다른 책들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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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1-19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탁월한 선택입니다. ^^

레삭매냐 2020-11-20 08:27   좋아요 0 | URL
늦바람이 무섭다고...
뒤늦게 알게 되어 열심입니다.

han22598 2020-11-20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믿고 보는 레샥메냐님의 추천작가! 윌라님의 책들도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었습니다.^^

레삭매냐 2020-11-20 08:28   좋아요 2 | URL
<나의 안토니아> 너무 재밌어서
다른 걸 못하겠네요 그래...
지금 절반 정도 돌파했습니다.

신간에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도 배송 출발했다고 하니 이번 주말
에는 느긋하게 즐겨 보렵니다.

감사합니다. 고정 코너로 하나... 쿨럭

han22598 2020-11-21 07:05   좋아요 1 | URL
그정인가요? 옴마야....ㅎㅎ

고정코너! 저는 적극 찬성입니다!!!

2020-11-20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1-23 17:40   좋아요 0 | URL
<나의 안토니아> 읽다가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도착해서
후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나의 안토
니아> 못지 않게 좋네요.

가히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하네요.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
뤼시앵 페브르 지음, 김중현 옮김 / 이른비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종교개혁에 대한 책을 읽어야지 싶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계획은 꼴랑 한 두어권의 관계 서적을 읽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다고 예의 프로젝트를 포기한 건 아니다. 계속해서 종교개혁의 선전포고를 맡았던 루터나 다른 저작들을 사 모으고 있으니깐.

 

오늘 새벽에 잠깐 일어나서 서가를 둘러보는데,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뤼시엥 페브르의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이 눈에 들어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첫 장을 넘겼다. 이건 뭐 거의 충격이었다.

 

뤼시앵 페브르는 알다시피 마르크 블르호와 함께 아날 학파의 창시자다. 그는 철저하게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문제적 인간 마르틴 루터를 분석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신학에 대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루터나 종교개혁 관계의 책들을 비종교인들이 본다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그 점이 나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다.

 

도대체 솔라 피데(sola fide)니 칭의론이니 하는 전문적인 신학 용어들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하긴 종교인 행세를 하는 이들도 거의 그 난해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지난 수백년간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지 않았던가.

 

페브르 저자는 티롤 출신의 데니플레 신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일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에서 출발해서 비텐베르크의 신학 교수 그리고 종교개혁가로 거듭나게 되는 인간 루터의 본질을 추적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마음의 평화, 구원을 원하는 수도사/연구자가 어떻게 해서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 교황주의자들과 타협을 원하던 루터에게 응답한 이들이 그가 원하던 교황주의자들이 아닌 독일 민중이었다는 점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페브르가 루터 신화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가감 없이 학자로서 진짜 루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가 어떻게 해서 시대정신의 상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정말 매혹적이다. 이러니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

 

지금 1/5 지점을 넘기고 있는데, 루터가 고행이나 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대단했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목숨을 걸고, 황제 앞에서 양심선언한 점도. 가히 근대의 출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에라스무스 못지 않은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발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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