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는 독일 출신의 작가 율리 체를 만났는데 이달에는 미국 버지니아/네브래스카 출신의 작가 윌라 캐더를 만나게 됐다. 세상은 참으로 넓고, 모르는 작가는 지천이며, 읽어야 하는 책들은 산더미라는 걸 새삼 느낀다.

 

1873년생으로 소설 <나의 안토니아>의 주인공 지미 버든처럼 동부 버지니아를 떠나 열 살 때, 서부의 황량한 네브래스카에 안착했다. 한 작가를 아는 방법은 역시나 그의 책을 읽는 게 최고다. 사실 예전에 미국의 주를 대표하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그림에서 윌리 캐더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하지만 그 때는 아직 때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 나는 윌라 캐더의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 달에 윌라 캐더 작가에게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우리 중 하나>가 나온다니 하니 더더욱 궁금하지 않을소냐. 그리하여 주문한 책이 나의 수중에 들어오기 전에 도서관으로 냉큼 달려가 일단 <나의 안토니아>를 빌렸다. 또다른 대표작인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이북 맛보기로 좀 읽었다. 내가 사는 곳 부근에 있는 도서관에는 <나의 안토니아>만 있더라.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의 주인공은 미국 땅으로 영입되지 얼마 되지 않은 뉴멕시코 선교지로 떠나게 되는 사제 장 마리 라투르다. 때는 바야흐로 1848, 바티칸에서 페랑 신부는 추기경들을 설득해서 온타리오에 있던 프랑스인 사제를 카우보이와 백인들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인디언들이 넘실대는 오지로 파견하는데 동의한다. 반건조 사막지대를 지나 부임지로 가는 모습까지 읽었나 어쨌나.


<나의 안토니아>를 한창 읽는 중에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도착했고, 두 책을 번갈아 가며 읽는 중이다. 전자도 읽는 재미가 상당했는데, 19세기 중반 미국령으로 편입된 뉴멕시코 선교에 나선 장 마리 라투르 주교와 그의 동료 요셉 바일랑 신부가 겪는 일단의 모험담도 대단했다.

 

신세계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바티칸에서 파견된 신부들은 기존의 가톨릭 교회가 현지에서 얼마나 토착화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우선 현지의 멕시코 사제들은 바티칸에서 파견한 교주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래서 라투르 교주는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고난의 선교여행에 나서야했다.

 


프랑스 오베르뉴 출신의 독실한 라투르 신부는 친화력 강한 바일랑 신부의 도움으로 현지에서 강단 있게 개혁을 시도한다. 왜 신대륙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주민들에게 외면을 받았던가? 스페인 정복자들을 대신한 지배계층 행세를 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대신 원주민들의 농장을 강탈하고, 그들의 노역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발타차 몬토야 신부의 전설 같은 죽음이며, 타오스의 파계신부 안토니오 호세 마티네즈 같은 인물이 구시대의 가톨릭을 대표하는 선수일 것이다.

 

현지인들의 반발을 고려하면서 점진적 개혁을 주도해 나가는 라투르 신부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었다. 두 사제가 불모의 땅 뉴멕시코에서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건 선교를 하는 장면들을 윌라 캐더 작가는 유려한 필치로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아무리 신의 대리인이지만, 뿌리까지 뽑아낼 수 없는 멕시코 인디언들이 토속신앙에 집착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지기도 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타오스의 타락한 마티네즈 신부는 그 점을 강조하면서, 금지된 가톨릭의 계율을 깬 자신을 옹호하는 논리의 비약도 마하다지 않았던가. 그는 아무리 봐도 철저하게 고인물이었고, 개혁의 대상이었다.


<나의 안토니아>도 마찬가지였지만, 왠지 윌라 캐더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당장에라도 그 황량함이 넘실거리는 네브래스카 평원이나 뉴멕시코의 반건조 사막에 달려가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나의 안토니아> 모두 지난 세기 미국의 실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특이할 만하다.

 

<나의 안토니아>는 명백하게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다. 열 살에 조실부모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는 네브래스카 블랙 호크로 떠난 지미 버든. 어린 소년은 어느덧 성장해서 철도회사의 법률 고문이 되었다. 그리고 수십년 전,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당시를 회고하는 책을 썼다. 그것이 바로 <안토니아>, 아니 제목을 바꾼 <나의 안토니아>의 시작이었다.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기차에서 산동네 사나이 제이크와 함께 만난 이들이 바로 이제 막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쉬메르다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집의 맏딸이 바로 지미 버든의 유년 시절 추억의 상당 부분 지분을 지닌 안토니아, 혹은 토니 쉬메르다였다. 자신들도 이민자였던 버든 가족은 신참내기 이민자인 쉬메르다 패밀리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고향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 유능한 직조업자이자 흥이 넘치는 바이얼리니스트였던 쉬메르다 씨에게 미국은 그저 낯선 땅이었을 뿐이다. 아내 등쌀을 이기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기 위해 꿈과 희망의 땅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결국 그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신천지에 둥지를 튼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사연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쉬메르다 패밀리의 신산한 삶 못지않게 우크라이나 출신 농부 파벨과 피터의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아니 떠들썩한 결혼식이 끝난 뒤, 귀갓길에 늑대 무리를 만나 살기 위해 결국 신랑 신부를 늑대들에게 내던진 파벨 역시 끝이 좋지 못했다. 쉬메르다 씨가 죽고 나서야, 블랙 호크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선다. 공동체의 선행을 목격하기도 한다.

 

<나의 안토니아>는 목가적인 윌라 캐더 저자의 자전적 소설인 동시에 지미 버든이란 소년이 이런저런 소동 끝에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보헤미아 출신의 가난한 쉬메르다 가족은 가장을 잃고, 억척스러운 모습으로 농삿일에 나선다. 학교에 가야 할 14살의 안토니아 역시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학교 대신 들판에 나가 남자들처럼 농사를 짓는다. 어쩌면 얼마간의 자본과 그 땅에 대한 지식의 유무가 미래 세대의 향방을 갈랐던 게 아닐까. 농부-하녀 그리고 미혼모의 삶을 살게 된 안토니아와 하버드 대학 졸업 로스쿨을 거치면서 신천지의 지배계급에 올라선 지미 버든의 삶의 양태를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네브래스카의 혹독한 계절의 변화에 대한 묘사는 일품이다. 여름에는 불타는 태양이 빚어내는 빛나는 옥수수 알갱이가 등장하고, 한겨울에는 이웃과의 왕래를 끊어 버리는 폭설은 기본이다. 1미터가 넘는 방울뱀을 토니 앞에서 빌린 부삽으로 요절내는 장면은 또 어떤가. 비로소 지미 버든은 소년에서 그런 과정을 통해 소위 싸나이로 변신해 가는 게 아닌가. 낯선 땅에서 반드시 필요한 언어인 영어를 하지 못하는 안토니아와 율카를 위해 영어 교사를 자처하는 내레이터의 모습도 아름답다. 그런 선행들이 모여 지난 세대의 팍스 아메리카나의 원동력이 되었던 게 아닐까. 지금은 새로운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자신의 뿌리를 잊어버린 그런 나라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기묘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를 잃은 안토니아에게 슬퍼할 시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쉬메르다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오빠 암브로쉬처럼 들판에 나가 쟁기를 끌어야 했다. 서부 개척시대에 남성 못지않게 거세고 억척스러운 새로운 여성의 전형이다. 지미의 할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은 그런 안토니아를 걱정하지만, 특유의 낙천스러운 성격으로 안토니아는 빈곤과 난관을 돌파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새로운 제국으로 도약을 시작한 시대에 걸맞는 미국적 여성상이 아닐까 싶다.

 

다음 무대는 지미가 학업과 연세가 드셔서 더 이상 농사가 무리라고 판단한 지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사한 블랙 호크다. 지미와 안토니아의 유년 시절은 이제 끝났다. 지미는 학업을 지속하고, 안토니아는 지미 할머니의 주선으로 지미네 이웃인 할링 부인네 하녀로 취업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캐릭터들인 레나 린가르드와 티니 소더볼 등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갈등을 예고한다. 더 이상 전통적 여성상을 거부하는 신세대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아마 갈등의 전조는 춤바람이지 않았나 어쨌나. 신세대의 반항이 보통 음악과 춤으로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윌라 캐더의 선택은 아마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열심히 읽고 있는 두 권 모두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어서 빨리 <나의 안토니아>를 읽고 난 뒤,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중 하나>에 도전할 계획이다. 한 작가에 대해 세 권 정도의 책을 읽으면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윌라 캐더의 다른 책들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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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1-19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탁월한 선택입니다. ^^

레삭매냐 2020-11-20 08:27   좋아요 0 | URL
늦바람이 무섭다고...
뒤늦게 알게 되어 열심입니다.

han22598 2020-11-20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믿고 보는 레샥메냐님의 추천작가! 윌라님의 책들도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었습니다.^^

레삭매냐 2020-11-20 08:28   좋아요 2 | URL
<나의 안토니아> 너무 재밌어서
다른 걸 못하겠네요 그래...
지금 절반 정도 돌파했습니다.

신간에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도 배송 출발했다고 하니 이번 주말
에는 느긋하게 즐겨 보렵니다.

감사합니다. 고정 코너로 하나... 쿨럭

han22598 2020-11-21 07:05   좋아요 1 | URL
그정인가요? 옴마야....ㅎㅎ

고정코너! 저는 적극 찬성입니다!!!

2020-11-20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1-23 17:40   좋아요 0 | URL
<나의 안토니아> 읽다가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도착해서
후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나의 안토
니아> 못지 않게 좋네요.

가히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