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45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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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나 버렸다. 네브래스카/버지니아 출신 작가 윌라 캐더의 <나의 안토니아>를 읽던 중에 주문한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도착했고, 도중에 갈아타 버렸다. 아직 <나의 안토니아>도 읽지 못했는데. 책을 주문하기 전에 이미 나는 미리보기로 30 몇쪽을 읽었다. 책은 너무 재밌었다. 자다가도 일어나 읽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싶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은 1848년의 뉴멕시코다. 이제 미국 땅이 얼마 되지 않은 올드 멕시코 시절의 향수를 지닌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안토니아>의 배경이 프레리독과 방울뱀이 노니는 광활한 평원이라고 한다면,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뉴멕시코 땅의 사막이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 뉴멕시코 땅에 대해 생각해 보았겠는가. 이 한 가지 점에서라도 나에게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책이었다. 모래사막은 나에게 이십대에 이루지 못한 로망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두 명의 신부들이다. 한 명은 주교 신부인 장 마리 라투르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주교 대리 요셉 바일랑 신부다.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 퓌드돔 출신이라고 했던가. 아니 구대륙의 프랑스 신부들이 새롭게 미국령이 된 뉴멕시코에 어떻게 오게 되었단 말인가. 로마의 바티칸에서 페랑 신부와 몇 명의 추기경들이 선교를 위해 선택한 개척자들이 바로 라투르와 바일랑이었다. 이미 오하이오에서 선교 중이던 그들은 목적지를 바꾸어 산타페로 이동하게 된다.

 

라투르 신부는 주교답게 진중하면서 사려가 깊은 그런 구시대에 어울리는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반면, 못생기고 작달막하며 허약 체질의 바일랑 신부는 쾌활하면서도 눙치는 데 선수며, 질 좋은 포도주에 탐닉한 그런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예상을 깨고 이 콤비들은 미신을 믿는 인디언들로 넘실거리는 이국땅에 성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임지인 산타페로 가는 길도 쉽지 않았으며, 현지의 멕시코 사제들은 바티칸에서 파견한 그들의 주교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라투르 신부는 정식으로 인가를 받기 위해 엄청난 길을 다시 떠나야 했다. 그리고 친화력과 추진력에 있어 누구보다 탁월한 바일랑 신부의 조력으로 적폐를 타파하고,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개혁에 나선다.

 

예나지금이나 적폐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는데 전력을 다하기 마련이다. , 사제 콤비는 그전에 시리얼 킬러 같은 작가에게 살해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던가. 그의 부인이었던 막달레나 발데즈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말만 뉴멕시코이지 올드 멕시코에 가까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상상을 초월했다. 현지 멕시코 사제들은 인디언들의 노동력을 아낌없이 착취했고, 심지어 사제로서 지켜야 하는 순결 서약 대신 부인을 두기도 했다. 반란에 나선 인디언들을 살려 준다고 꼬셔서 그들의 토지를 빼앗는 건 양반이었다. 사제들은 지주계급 못지 않은 기득권층으로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선교 의지에 불타는 라투르와 바일랑의 눈앞에 그런 이들이야말로 척결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신대륙에 구대륙에서 갈고 닦은 신앙을 수호하는 사제들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파하겠노라고 마음먹은 사제 콤비에게 온갖 사이비 신앙인들이 어떻게 보였을지 상상이 가는가. 복음의 전파는 단숨에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 쯤은 노련한 수도자들은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들은 절대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개혁을 시도한다. 서두른다고 해서 적폐들이 단박에 바로 잡히지 않는다는 것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현지인들에게 무시로 적응해 가는 두 사제들의 모습을 윌라 캐더 작가는 마치 바로 옆에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중계하듯 그렇게 놀라운 솜씨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마 작가가 요즘 살았더라면, 현장에서 뛰어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 젖기도 했을 정도다.

 

라투르와 바일랑은 때때로 자신이 원주민 선교에 있어 원하는 바가 달라서 갈등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지로서 사반세기를 함께 한 그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사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인디언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기 위해 허약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선교여행에 나서는 바일랑 신부를 라투르는 마뜩치 않은 눈길로 쳐다본다. 뉴멕시코 교구가 대교구로 확대 편성되면서 자질구레한 행정업무부터 시작해서, 법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니 종교가 해결해야 하는 부분들이 엄청 늘어났는데 말라리아에 걸려 해롱대면서도 어린 양들을 돌보겠다고 나서는 바일랑 신부가 라투르로서는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신앙인들에게 신에게 봉사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른 법이다. 인디언 천막과 산타페의 주교 관저에서 라투르 신부는 과거를 회상하며 바일랑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동지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소설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를 읽으면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만난 2020년의 최고의 책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노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외에도 소설을 아름답고 빛나는 만드는 이야기들은 차고 넘친다. 자신의 나이를 어떻게 해서라도 감추려는 부유한 미망인 도나 이사벨라는 올리바레스 씨가 남긴 막대한 재산(당시 돈으로 20만 달러)을 그놈의 허영심에 날리 위기에 처한다. 이 때 등장한 바일랑 신부가 미래의 성당 건립을 위한 종잣돈을 그렇게 허공에 날리고 싶냐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물질주의자 신부는 선교여행을 위해 꼭 필요한 노새 두 마리인 콘텐토와 안젤리카를 확보하기 위해 그 녀석들을 내놓지 않으려는 불쌍한 농장주 협박을 마다하지 않는다. 바일랑 신부의 이런 행동은 물론 신부라기 보다 악당에 가까운 마티네즈(타오스의 늙은 망나니라고 표현된다)나 구두쇠 루체로 신부의 축재(2만 달러를 남겼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윌라 캐더 작가는 신대륙의 가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신랄하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신, 개혁적인 두 명의 사제를 대리인으로 삼아 서서히 고쳐 나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종교와 사제들을 핍박하는 악당들이 처벌받는 방식도 아무래도 구식이다. 사제들을 죽이고 그들의 물건을 강탈하려던 노상강도 버크 스케일스는 살인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라투르 주교의 징계에 불복하고 독립한 마티네즈 신부와 루체로 신부의 말로를 보라. 좀 빤했지만 이런 결말이 난 좋더라. 현실에서 그러지 못하니, 소설에서라도 못된 놈들은 벌을 받아야지.


대주교가 된 라투르 신부에게 죽음이 다가오는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눈물샘을 자극하는 갬성은 폭발한다. 나이가 드니 주책없게도 눈물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금광에 미친 죄인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산타페 교구를 떠나는 클레르몽 신학교 시절 이래 동지이자 친구였던 바일랑 신부를 콜로라도 체리크리크로 떠나보내며 서로의 앞날을 위해 축복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우리의 바일랑 신부는 콜로라도의 주님의 집인 성당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악당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빚에 허덕이다가 바티칸의 소환을 당하기도 했다. 노다지를 얻은 부유한 이들은 바일랑 신부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지만, 가난한 멕시코 사람들은 바일랑 신부의 절절한 구걸에 가까운 읍소에 자신의 장화 속에 감춰둔 돈을 서슴지 않고 꺼냈다. 가난한 자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 선교여행에 나섰다가 절름발이가 된 신부를 후원했다.

 

그랬던 죽음을 야유하는 자라는 별명을 가진 흰둥이 바일랑 신부가 결국 세상에서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난다. 그를 기리기 위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산 밑으로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는 바일랑 신부의 인품을 설명해 주는 장면이었다. 바일랑 신부의 동지였던 르바르디 신부는 프랑스에 파견되었다가 자신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상사에게 보고 하고 나서 죽기 위해 콜로라도로 달려간다. 빈사의 상태로 장례식에 도착해서 선종하신 바일랑 신부에 관에 머리를 맞대는 장면... 감정이 벅차서 더 이상 쓰지 못하겠다. 먹먹하구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뉴멕시코의 오지에서 빛도 없이, 영광도 없이 선교에 전념하던 사제들의 이야기에 이렇게 몰입했을까. 자신의 신념에 따라 누에바 메히코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의 삶을 읽으면서 그들에게 내 자신의 삶을 투영했기 때문이 아닐까. 더디지만 내 존재에 대한 깨달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문학을 읽는 진짜 이유다. 별점 천 개를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그런 작품이었다.


오늘 어느 신문을 보니 <힐링팔이 스님>이란 제목의 칼럼이 다 등장했더라. 이제 더 이상 종교가 그리고 종교인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이 마음의 힐링이 되지 못하게 되어 버린 시절에,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에서 만난 라투르와 바일랑 사제의 잔잔한 이야기들은 누구에게도 물질적 보상을 바라지 않는 참 힐링의 전범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 생각해 봐도, 보기에 참으로 아름다웠다.

 

[뱀다리] 소설의 제목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한스 홀바인의 판화 그림에서 따왔다고 한다. 홀바인의 판화는 살벌해서 패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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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1-23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힐링팔이 스님 ㅋㅋ최상위 01% 캐더작품은 셜리작품 만큼 미국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질리도록 읽혀요. 학교 밖에서는 텍스트에 숨겨진 동성애를 찾는걸로 장난치기도 ㅎㅎ 레삭매냐님 율리체에서 캐더로 열정이 옮겨졌어요. ^.^

레삭매냐 2020-11-23 21:09   좋아요 1 | URL
동성애 코드를 언급해 주시니...
문득 영화 <카사블랑카>를 동성애
영화의 클래식으로 본다는 글이
생각나네요.

역시나 고전은 고전인가 봅니다.

chika 2020-11-23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겠습니다. 천주교신자라 더 관심이 갑니다요 ^^
홀바인의 판화가 얼마나 살벌하길래?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레삭매냐 2020-11-24 09:25   좋아요 1 | URL
소설은 정말 후반으로 갈수록
감동의 도가니탕이었습니다...

지인들에게 꼭 한 번 추천해
주고픈 그런 책이네요.

han22598 2020-11-24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소설이라고까지 지칭하시다니...! 나바호 원주민을 만나러 뉴멕시코에 두번 간적이 있어요. 쉽게 잊혀지지 않은 그 땅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뉴멕시코 땅을 배경으로 한다니...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겠네요. ㅠ

레삭매냐 2020-11-24 09:26   좋아요 1 | URL
정말 별점을 천 개를 주어도
모자랄 만한 그런 책이었습니다.

인생책으로 꼽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네요.

저라도 책을 읽고 나면 벌떡
일어나서 나바호 인디언들을
만나러 가지 않을까 싶네요.

blanca 2021-01-10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저 지금 <나의 안토니아> 아껴 읽는 중인데... 당장 주문해야겠네요.

레삭매냐 2021-01-10 12:31   좋아요 2 | URL
<나의 안토니아>도 좋지만,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가 훨씬 더 좋았습니다.
<안토니아>가 마음에 드신다면
이 책 역시 후회하시지 않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