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침묵
돈 드릴로 지음, 송은주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우리는 이제 완벽하게 디지털 네트워크에 종속되었다. 인별그램에 들어가 보면, 회사에서 구입한 커블 체어 광고가 뜬다. 아니 나는 주로 책에 대한 콘텐츠를 인별그램에 올리는데 왜 회사에서 산 커블 체어 광고가 나의 인별그램에 침입한단 말인가. 어디 그 뿐이랴. 커블 체어는 단적인 하나의 예일 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모바일폰에서 빠져 나간 정보들이, 아니 허상의 무언가가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의 실존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걸까. 내가 아닌 내가 검색한 정보로 이루어진 것이 나를 역으로 규정하는 건 아닐까.
돈 드릴로의 신작 <침묵>에서 다루고 있는 디지털 네트워크 블랙아웃에 대한 단상을 생각하다 또 엄한 데까지 사유가 흘러간 모양이다. 앞으로 2년 뒤인 2022년 2월의 첫 번째 주, 일요일이 시간적 배경이다. 파리에서 떠나 뉴어크로 향하는 짐 크립스와 테사 베런스가 탄 비행기 속에서 <침묵>은 시작한다.
거의 미국인들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볼 선데이다. 일 년에 달랑 16번만 하는 정규시즌의 미식축구가 끝나고, 플레이오프를 거쳐 AFC와 NFC 리그에서 각각 올라온 두 팀이 맞붙는 슈퍼볼 경기의 희귀성만큼이나 세계 광고회사들의 각축이 벌어지는 디지털 공간이기도 하다.
예의 슈퍼볼 경기를 보기 위해 맨해튼 어느 아파트에 5명의 지인들이 모이기로 했다. 짐과 테사는 추락하는 비행기에 타고 있고, 나머지 3명인 맥스와 다이앤 그리고 마틴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짧은 분량만큼이나 돈 드릴로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역시 심플하다. 거대한 세계적(아니 어쩌면 미국인들만의) 이벤트를 앞두고 디지털 네트워크가 먹통이 된다. 어쩔 것인가?
게다가 한 팀은 지금 이런 소동 속에서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 갇혀 있다. 화끈한 설정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심정적으로 추락하는 비행기보다 먹거리며 판돈까지 모든 걸 준비한 상태에서 킥오프를 앞두고 대형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대기하던 수천만명의 허탈함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슈퍼볼이라는 이벤트는 전기로 바뀐 신호를 타고 위성이나 케이블을 타고 전 미국의 가정으로 배달된다. 아, 슈퍼볼은 공중파에서 방송을 했던가? 어쨌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의 관심이 없는, 잘쳐 줘봐야 고작 땅따먹기 게임에 불과한 단판승부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홀리는 건 연구의 대상이 아닐까. 오랜 세월을 거쳐 쌓아온 업셋과 치명적 실수들 그리고 명승부들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었고, 예의 관심은 곧 돈으로 연결되었다.
하긴 그런 신나는 경기를 앞두고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혹은 괴델 같은 이들이 등장해서 상대성 이론에 대해 운운하는 건 아무래도 쌩뚱 맞지 않았을까. 이런 거에 비하면, 셀시우스나 패런하이트는 양반이지 싶다.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살아 남은 짐과 테사는 자신들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부상 치료도 미룬 채 화장실에서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놀랍군. 그리고 이어지는 타인을 배려하는 핀잔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런 위기상황은 그런 일탈의 발생에도 관대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처음에 맨해튼이 배경이라는 점에서 20년 전, 미국을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9-11 테러사건이 떠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공간적 배경이 같은 맨해튼이 아니던가. 다만 시간은 계절적으로 가을과 겨울이라는 점이 달랐지만. 예상하지 못한 가공할만한 테러는 물리적으로 쌍둥이 빌딩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거대한 심리적 타격을 가했었다. 그 때와 달리 소설 <침묵>에서는 모든 통신이 두절되고, 정보의 교류가 차단된 상황에서도 기이하게 침착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차단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인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가 먹통이 되더라도 곧바로 일상을 되찾는다. 추락한 비행기에서 생존하는데 성공한 짐과 테사는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걸어서 도착한다. 슈퍼볼 홈파티의 호스트인 맥스는 오크통에서 십년 동안 숙성시킨 버번을 들이킨다. 그리고 맥스가 꺼진 텔레비전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소설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점점 좀비가 되어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신문이나 뉴스 혹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정보를 취합해서 나만의 고유한 사고를 형성했다. 하지만 너튜브라는 동영상 매체가 모든 것을 잡아 삼키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는 선동으로 점철된 포스트트루스(post-truth)만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이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아니 이제 진실이 갖는 의미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도서관에서 막 빌린 따끈따끈한 책을 읽긴 했으나, 번잡스러운 속에서 과연 내가 읽은 게 맞는지 그리고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만.